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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메의 서재입니다.

흑룡이 나르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무협

왕잼
작품등록일 :
2021.03.28 11:18
최근연재일 :
2021.05.18 18:00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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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77,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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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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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쌍룡대면(雙龍對面): 두마리 용이 마주하다

DUMMY

그믐달마저 구름에 가려 어두컴컴한 밤.


모두가 잠든 자정 무렵, 검은 물체가 칠흑의 하늘을 가르고 있다. 이무기화(化)한 이단이었다. 목멱산 명류장의 이단의 본신(本身)은 숙면에 들었지만, 그의 분체(分體)는 어둠속을 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향하는 곳은 조선에서 가장 경계가 엄중한 곳, 동궐 창덕궁이었다.


모두가 잠들 시간이지만 궐내에는 눈뜬 자들이 밤의 장막 안에서 눈빛을 빛내고 있다.


조선에서 날고 긴다는 무인들이 집결한 곳에 특별한 변고가 있을 리 없겠지만, 임금의 용태가 최악인 지금 금군(禁軍) 무관들은 갑호 경계 근무 중이다. 왕실은 항상 내란자(內亂者)들의 도전을 받아왔고, 그러면서 금군의 질적, 양적 확대를 도모해왔다.


독사 같은 눈매의 장광기도 그런 연유로 궐에 특채된 자였다. 변방에서 오랑캐와 토적을 토벌하며 얻은 명성으로 호위청 군관이 된 이후 실력과 충성심으로 앞날이 보장돼 있던 터였다. 그날 개망신을 당하기 전까지는.


‘그놈만 아니었다면···’


그날 어전시합에서 우림위의 무명소졸이었던 박광에게 패한 이후, 그의 자존감은 완전히 바닥으로 추락했다. 다행히 박광이 우승까지 해버리면서 면피는 됐지만 떨어진 평판은 쉬이 끌어올리기 어려웠다. 평판을 끌어올리려면 큰 공을 세우거나 아니면···


‘다시는 실수 같은 건 없을 것이다.’


그는 눈매에 독기를 잔뜩 주입하고 임금의 처소인 환취정 앞을 지키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이상한 것은 없었다. 다만 코를 통해 이상한 향이 느껴졌다. 처음엔 달콤한 꽃향기여서 벌름거렸는데 점점 독해지더니 그의 신경이 마비돼 갔다. 주위에 도움을 청하려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 몸이 왜? 저건 뭐야. 거··· 검은 용?’


정신을 잃기 직전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기다란 검은 물체였다.


*****


애초엔 궐내로 잠입할 생각까진 아니었다. 동궐 결계의 맥점을 틀어막았다는 마달의 보고를 받고 조용히 궐 상공을 돌아볼 계획이었다. 물론 수하들에게는 얘기하지 않고 나왔다. 본체는 명류장에서 곱게 잠들어 있으니 누가 알아차리겠는가.


하지만 이단은 궐에 당도해 마음이 바뀌었다. 무기력하게 권신들에게 휘둘리며 사화의 피바람을 방조한 임금의 병색 완연한 용안을 보고 싶어졌다. 임금은 지금 창덕궁 동편에 붙어있는 창경궁 환취정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들었다.


솔직히 수연(중전)을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대계를 목전에 두고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임금이 병상에 누운 탓에 궐내 경계는 엄중해 보였지만 그에겐 별 문제가 아니었다. 예전 흑선기(黑仙氣)를 운용하지 못하고 홍문관에 잠입했던 때와는 모든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게다가 그는 지금 이무기로 현신해 있다. 영물은 물질과 비물질의 성질을 겸비한 터라 마음만 먹으면 벽이든 문이든 투과(透過)할 수 있지 않은가.


‘그래도 만사 확실히 해둬야겠지.’


혹시나 침전에 잠입했다가 놀란 소리라도 새나가면 귀찮아질 것이다. 흔적 없이 조용히 다녀가고 싶었다.


‘화령의 능력을 사용해 볼까?’


이단은 그가 알고 있는 많은 꽃 중에 노란 복수초를 떠올렸다. 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이름과 예쁜 생김새와 달리 강한 독성을 갖고 있는 꽃. 집중을 깊게 할수록 향과 독성의 효과가 강해진다는 화령의 말을 따랐다.


그렇게 이단은 환취정 주변을 지키는 무관들과 실내에 있던 궁녀들을 하나하나 실신시켜 나갔다.


주변을 정리한 이단은 임금이 잠들어 있는 침소로 스며들었다. 병석에 누워 가쁜 숨을 쉬고 있는 자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


‘그때 본 순하게 생긴 형님이 맞구나.’


어린 시절 목멱산에서 보고 기억에 담아둔 얼굴 중 하나, 목멱대제를 지내러 온 왕실 사람들 틈에서 본 얼굴이었다. 그때도 하얀 얼굴이 인상적이었는데 지금은 하얗다 못해 파르스름한 낯빛이다.


‘생명의 기운이 얼마 남지 않았군.’


이 허약한 임금에게 소중한 사람 둘을 빼앗겼다. 수연과 아버지··· 이 자의 목숨과 자리를 빼앗는다 해도 돌려받을 수 없는 것이다. 흔적 없이 다녀가려던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이무기 상태인 이단은 눈을 감고 집중했다. 순간 이무기의 모습이 서서히 녹듯이 사라지고 인간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이단의 모습이었다.


목멱신사에서 도방이 목격했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자신에게서 네 개의 얼굴이 보였다고 했다. 어쩌면 영물 상태에서 모습을 바꾸는 게 가능할까 싶어 시도해본 것인데, 실제로 이뤄지니 이단 스스로도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점점 이상한 능력을 갖게 되는구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순간 두려운 생각까지 들었지만, 지금은 더 고민할 때가 아니다.


이단은 정신을 집중해 임금의 몸 안에 깃든 탁기(濁氣)를 움직였다. 원래는 임금의 숨통을 막기 위해 연잉군을 통해 투입했던 것이지만, 지금은 병자의 몸을 돌며 양기를 북돋고 있었다.


기력이 전해졌는지, 임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눈을 떠 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자넨··· 누구인가?”


죽음을 앞둔 자에게선 두려운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단은 말없이 손을 뻗어 임금의 이마 위 상성혈(上星穴)을 짚었다. 이마 정중앙 머리칼 일촌 위에 자리한 혈로 신당(神堂)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이단의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임금에게 투영됐다. 임금의 눈은 놀람을 거쳐 분노를 담더니 종내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 삶을 살았구먼···”


이단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그의 입이 다시 힘겹게 열렸다.


“미안하네. 내 잘못이지. 내 숨을 거둬가시게.”


이단은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기분이 착잡해졌다. 자신 못지않게 가엾어 보이는 인간 앞에서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이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제···”


형제라니? 이 인간은 대체···


“혹, 자네 뜻대로 되더라도··· 연잉군은 살게 해주시게.”


이단이 짧은 한숨을 토하더니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편히 가시오.”


이단이 목멱산으로 돌아오는 새벽하늘에 유성이 하나 떨어지고 있었다.


*****


이른 아침, 동이 트자마자 박광은 점집을 나섰다. 미리내가 출근하는 서방 배웅하듯 나와 손을 흔들어줬다. 박광은 잠시 상상에 빠진다. 언젠가 미리내와 살림을 차리고 그녀가 해주는 밥을 맛있게···


‘미리내가 요리를 할 줄 알던가?’


일 년여 전, 태백산을 내려올 때까지도 미리내가 해준 음식을 먹어본 기억이 없었다.


‘에이, 설마. 한해 사이에 실력 좀 늘었겠지···. 아무렴, 사모님 손맛의 반만 닮았어도 뭐···’


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그가 자진해서 궐로 들어가는 것은, 흑결과 접선한 고위 신료를 찾아내기 위함이요, 연잉군에게 그간의 일들을 설명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북촌에서 종적이 끊어진 고위 관료, 대체 어떤 자가 암종과 손을 잡았을까?’


박광이 창덕궁 앞에 당도한 순간, 한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에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직감이 들었다. 평소에 수문(守門)하던 숫자보다 훨씬 많은 수문 위사들이 배치돼 있었고 경비가 삼엄해져 있었다.


‘주상께서 편찮으시다더니 한선배 말대로 분위기가 썩 좋지 않구나.’


궐내 분위기가 무겁다보니 수문병들의 눈빛도 매서워 보였다. 수문병에게 익위사 목패를 보여주고 통과해 동궁전으로 향하는데, 이른 아침부터 문무 대신들이 입궐해 있고 궁인들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고 불길한 예감까지 들었다.


‘설마···’


박광이 익위사 숙위소(宿衛所)로 들어갔을 때 이미 한종로는 나와 있었다. 지난밤에, 늦었으니 묵고 가라 했지만 굳이 점집을 빠져나간 그였다. 아마, 노발대발한 마루한을 피해 달아났을 것이다.


“어, 한형! 벌써 나오셨군요? 다들 벌써 동궁전으로 나갔나요?”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웬일로 한종로의 표정도 평소답지 않게 진지했다.


“비상상황일세. 아마 곧 국상(國喪)이 공포될 것 같네.”

“네? 그럼, 주상 전하께서?”


한종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광은 갑자기 이단의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사인(死因)은요?”

“그런 것까지 말단인 우리가 어찌 알겠어. 지금 창경궁에는 높은 분들만 드나들고 계시다네.”


임금에게 평소 불만을 품고 있던 박광이었지만, 이순간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쥐고 있는 임금이 결국 평범한 백성들보다 일찍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말이 떠돌고 있어.”

“이상한 말이요?”


한종로가 아무도 없는 숙위소를 짐짓 두리번거렸다.


“듣는 귀 없어요. 뭔데요?”

“흠, 그게 말이지. 간밤에 환취정 주위를 지키던 무관들과 실내에 있던 궁녀들이 모두 무언가에 취한 듯 실신했었다는 거야.”

“네에? 그게 무슨 소립니까?”


박광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한종로가 잠깐 움찔했다가 다가와서는 박광의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퉤퉤! 뭐해요? 징그럽게.”

“네 목소리 너무 크잖아. 조용히 듣기만 해봐. 장광기라고 자네한테 개망신 당했던 그치 있지?”

“아! 그 호위청 독사라는 자요? 당연히 알죠.”

“그자도 환취정 앞에서 야간 근무였는데, 아무래도 실성한 모양이야.”

“미쳐버렸어요?”

“아무래도···, 그자가 이상한 얘길 하고 다닌다네. 간밤에 환취정 안으로 검은 용이 들어가는 걸 봤다고 말야.”

“네에? 검은 용?”


박광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놈이다’


자신에게 지독한 탁기를 중독시켜 사경을 헤매게 하고, 한강에서 강상의 사람들을 해쳤다는 검은 이무기, 이단이 분명했다. 밤엔 이무기나 용이나 비슷해 보일 것이니.


‘헌데··· 어찌 동궐 안에서 영물을 부릴 수가 있었지?’


박광은 마음이 급해졌다. 간밤에 그자가 궐내를 휘젓고 다녔다면, 그래서 임금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라면···


“세제 저하는 어디 계시오?”

“어? 세제 저하는 요새 동궁전에서 두문불출하신다니까. 어쩌면 창경궁으로 넘어 가셨을지도···”

“내 당장 뵈어야겠소. 그리고 한형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한종로는 박광의 부탁을 듣고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박광이 부탁한 것은 장광기를 직접 만나 그의 목격담을 자세히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제가 직접 물어보고 싶지만, 그 자가 절 꺼리잖습니까. 형님이야 워낙 원만하시니···”

“흐흐. 그렇지. 이 한모(某)가 궐내 인간관계 하나는 누구 못지않지. 내 알아봐 주겠네.”


박광의 띄워주는 언사에 한종로는 흔쾌히 부탁을 수락했다.


궐내 분위기는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 공식적인 발표가 나오지 않으니 더욱 초조한 표정들이다. 야근을 했던 하급 위사들은, 퇴궐도 못하게 됐음을 투덜대거나 새 임금이 즉위하면 녹봉이 좀 오를까 하는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낮은 이들이 끼리끼리 모여 숙덕거리고 있을 때, 높은 이들도 머릴 맞대고 있다.


대비전에서는 대비와 삼정승이 모여 국장(國葬)과 사위(嗣位: 왕권 승계) 절차를 논의하고 있었고 이조판서의 집무실에는 소론의 여럿이 모여 권력의 향배에 대한 우려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판 김일경은 때가 닥치자 마음이 분주해졌다. 관례상 닷새째에 입관을 하게 되면 다음 날엔 연잉군의 왕위 승계가 가능해진다. 그 전에 훈련대장 등 소론계 무신들을 극비리에 소집해야 했다.


김일경은 암종이 그에게 지시했던 것들을 되뇌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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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연재 공지 21.03.28 132 0 -
54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3 21.05.18 39 2 12쪽
53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2 21.05.17 31 2 11쪽
52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1 21.05.16 31 2 12쪽
51 자아독대(自我獨對): 자아와 마주하다 21.05.15 40 2 11쪽
50 흑룡비상(黑龍飛上): 흑룡이 나르샤 21.05.14 33 2 12쪽
49 오오낙락(烏烏樂樂): 까마귀들이 좋아 죽는구나 21.05.13 30 2 11쪽
48 귀궐애사(歸闕哀事): 궐로 복귀하니 슬픈 일이 생겼구나 21.05.12 32 2 11쪽
» 쌍룡대면(雙龍對面): 두마리 용이 마주하다 21.05.11 62 2 12쪽
46 야심심조(夜深心躁): 밤은 깊어 가고 마음은 바빠진다네 21.05.10 33 3 12쪽
45 풍전왕실(風前王室): 바람 앞에 왕실이어라 21.05.09 46 2 12쪽
44 목멱지자(木覓之子): 목멱의 아들아 21.05.08 48 2 12쪽
43 탐색망흔(探索蟒痕): 이무기의 흔적을 찾아서 21.05.07 43 2 12쪽
42 해오집맥(解誤執脈): 오해를 풀고, 맥을 잡노라 21.05.06 51 2 11쪽
41 반월혹인(半月惑人): 반월이 사람을 혹하게 하는구나 21.05.05 42 2 11쪽
40 기린휘능(起鱗揮能): 비늘을 세워 권능을 휘두르다 21.05.04 49 2 12쪽
39 백호각성(白虎覺醒): 백호의 능력을 각성하니 21.05.03 58 2 11쪽
38 복수불수(覆水不收):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지 못하오 21.05.02 41 2 12쪽
37 생사기로(生死岐路): 생사의 갈림길에 서다 21.05.01 40 2 11쪽
36 작우금적(昨友今敵): 어제의 벗이 오늘의 적이라 21.04.30 41 2 11쪽
35 상호취원(相互取願): 서로 원하는 바를 취하노라 21.04.29 60 2 11쪽
34 이인심란(二人心亂): 두 사람의 마음이 어지럽더라 21.04.28 76 2 11쪽
33 흑침백노(黑侵白怒): 흑이 침범하니 백이 노하다 2 21.04.27 44 2 11쪽
32 흑침백노(黑侵白怒): 흑이 침범하니 백이 노하다 1 21.04.26 99 2 11쪽
31 취명사암(取明捨暗): 어둠을 버리고 빛을 누릴 것이다 21.04.25 67 2 12쪽
30 괴수대전(怪獸大戰): 괴수끼리 크게 한판 붙다 21.04.24 68 2 11쪽
29 사탐유육(蛇耽油肉): 뱀은 기름진 고기를 좋아한다 21.04.23 54 2 13쪽
28 용망동주(龍蟒同舟): 용과 이무기가 한 배를 타다 21.04.22 45 2 12쪽
27 화령계망(花靈啓蟒): 화령이 이무기를 깨우쳐 주는구나 21.04.21 9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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