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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메의 서재입니다.

흑룡이 나르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무협

왕잼
작품등록일 :
2021.03.28 11:18
최근연재일 :
2021.05.18 18:00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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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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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글자수 :
277,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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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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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오오낙락(烏烏樂樂): 까마귀들이 좋아 죽는구나

DUMMY

국상(國喪)이 발표되고 한양 도성의 백성들이 큰 슬픔에 빠졌다. 이제 애도의 물결이 전국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만 그리 보일 수도 있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괴이한 날씨로 민생이 도탄이었고 괴기스러운 풍문까지 돌면서 민심이 최악이었다. 밑바닥 사람들 사이에선, 새로운 임금이 오시면 병든 나라가 다시 강건해질 거라는 믿음도 퍼져나가고 있었다.


목멱의 명류장에도 오랜만에 검은 옷이 자취를 감췄다. 이단을 비롯해 모든 흑결원들이 흑의를 벗어던지고 흰 상복을 걸쳐 입었다. 국상기간, 차기 왕의 즉위식 때까지 굳이 남의 눈에 띌 필요가 없었다.


“허허, 이렇게들 입고 있으니, 다들 평범한 백성 같구먼.”


흑결주 마달이 본인도 어색한지 짐짓 농을 띄웠다. 하긴, 흑결에서는 암종의 장례를 치를지라도 흑의를 벗지 않았다. 옆에 있던 무방이 자연스럽게 농을 받았다.


“흰 깃털을 꽂는다고 까마귀가 백로 행세를 할 수 있을까요?”

“지금이야 백로나 수리매가 까마귀를 업신여겨도 까마귀 세상이 되면 다들 검은 깃털을 구하러 다닐 겁니다. 흐흐.”


오주(烏主: 까마귀 주인)의 우두머리로 자존감이 강한 오방의 말에 좌중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조정의 문무백관을 상징하는 백로와 수리매가 평소 깔아보던 까마귀를 추종하고 흉내 낸다는 상상을 하자 모두 통쾌했던 모양이다.


흑결의 수뇌들이 명류장 큰 사랑채에 모여 희희낙락하는 가운데 누군가 들어오며 한마디 던졌다.


“나는 어지간하면 흑룡포로 준비해 주시오. 차마 흑오포(黑烏袍)는 입기 힘들겠소.”

“허허, 주군 오셨습니까? 당연히 멋진 흑룡포로 해 입으셔야죠.”


수뇌부 회의의 주재자 이단이 들어선 것이다. 곤룡포 대신 까마귀가 수놓아진 오포를 상상하자 다들 입가에 미소가 사그라들지 않았다.


나라 전체에 웃음이 사라졌지만 이곳만은 웃음이 만발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이제 세상을, 아니 하늘을 바꿀 사람들이었으니.


“자, 이제 조금만 더 집중해야겠소. 즉위식 일정은 잡혔답니까?”

“네, 김일경이 마침 국장도감(國葬都監: 국장을 집행하는 임시기구)의 제조(提調)를 맡았답니다. 승하 엿새째 날 오시(午時: 오전11시부터 낮1시)에 거행한답니다.”


이조판서 김일경이 국장도감의 실무책임자인 제조를 맡았다니 잘된 일이다.


“거사 당일에 적잖은 도움을 받을 수 있겠군요.”

“그렇사옵니다. 이판 그 양반, 제 무덤이 될 줄도 모르고 열심히 파고 있을 겁니다. 하하”


임금의 죽음에는 큰 감흥이 없던 이단이지만, 김일경 일파에게는 받을 빚이 많았다.


“사화를 주도한 소론의 강경파 대신들 모두 합장(合葬)시키려면, 아주 깊게 파둬야 할 거요.”


이단이 싸늘하게 뿜는 기운에, 사랑채에 만개했던 웃음꽃이 갑자기 시들어버렸다.


*****


같은 시간, 이단의 처소. 한 사내가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사랑채에 있던 이단과 똑같이 생긴 자다. 바로 이단의 본신(本身)이었으며, 사랑채 회의에 참석중인 이단은 이무기가 변신한 분체였다.


-빠드득


사랑채의 이단이 냉랭하게 말하는 순간, 이곳의 이단도 이를 갈았다. 임금의 숨을 직접 거두지 않고 돌아온 이후, 허해진 복수심을 퍼부을 곳이 필요했다. 그 대상이 소론 대신들로 향한 것이다.


이단은 집중을 유지한 채, 사랑채의 회의내용을 공유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을 봐왔던 흑결주 마달조차 분신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변신에 성공한 셈이다.


‘이건 뭐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됐구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졌는지 이해할 수도, 알아낼 수도 없었다. 그때···


=키키키, 알면 알수록 우둔하단 말이지. 어찌 이런 우둔한 존재에게 먹힐 수 있지?


-화령(花靈), 마침 잘 나왔다. 그동안 너도 삽살이도 조용하기에 완전히 소멸한 줄···


=키키, 이 꼴로 존재하느니 완전 소멸되는 게 낫겠지. 아, 또 열이 솟구치네.


-이봐, 진정하고··· 내 분신 그러니까 이무기의 모습을 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 거 말이지. 그것도 화령 네 능력인가?


=아니! 본좌(本座)는 분신이 없어서 그런 잔재주는 못 부린다네. 내 모습을 바꿀 수는 있지만 말야. 최근에 네 몸에 끼어 들어온 영감탱이 있잖아? 목멱인가 뭔가 하는 하급 신선 나부랭이, 그 영감이 장난친 거라구.


-목멱대왕이? 장난이나 치실 분이 아닌데··· 자세히 설명을 해봐.


=키키키, 선계의 능력을 다 알진 못하지만 그 영감탱이가 네 그릇을 넓혀준 것 같아.


-그릇이라고?


=이 영계의 고귀한 존재가 이치를 따져보자면 말이지. 네 그릇은 원래 날 제대로 담기에도 부족했단 말야. 심성도 모가 나있고 도량도 넓지 못하고. 뭐 그렇게 측정되는 네가 날 담게 된 것은 정말 이 오계(五界) 전체에서도 보기 드문 대형 사고였단 말이다.


-그야, 합령의 술을 펼치다가 생긴 우연한 사고이긴 했지.


=그래! 되돌릴 수 없는 사고. 젠장! 아무튼 그 사고로 넌 내 능력 일부를 가져갔어. 화향(花香) 말이야. 그런데, 그 영감탱이가 네 그릇을 넓혀주고 나서 내 능력 전부를 흡수한 모양이라구.


-아! 그럼 변신술도 너의 능력이었다?


=본좌 뿐 아니라, 흉측한 이무기의 능력도 섞였겠지. 그놈도 용으로 변신을 꿈꾸는 영물이니 말야. 한마디로 지금 네 상태는··· 나도 모르겠다. 뒤죽박죽이라 무슨 능력이 더 생겨날지.


-그럼, 네 변신 능력에 한계나 부작용 같은 건 없는 건가?


=쳇, 남의 능력 훔쳐가서는 사용법까지 내놓으라니. 영계(靈界)에서 널 만났으면 바로 체포해서 천년감옥에 가뒀을 것이야. 나머진 네가 알아서 궁리해 보거라. 이 도둑놈아!


화령이 사라지고 이단은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 목멱대왕이 자신의 일부를 몸 안에 남겨준 이후의 변화에 대해 고민해봤다. 그릇이 커져 더 많은 능력을 흡수하게 된 것은 이해하겠는데 혹시···


‘임금을 보고도 분노가 타오르지 않았고, 그의 목숨을 거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아무래도, 자신의 심성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


북촌 김일경의 집에는 풍취 있게 지어놓은 정자가 있다. <한담정>이라는 편액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까마귀는 곧 부리에 물고 있던 무언가를 뱉더니만, 힘차게 울어댔다.


-까악 까악


그리고는 원래 그 자리에 놓여있던 다른 것을 물고는 날아가 버렸다.


잠시 후 안채에서 한 사내가 나와 까마귀가 놓고 간 것을 찾아들고는 집을 나섰다. 까마귀가 남긴 것은 기름종이로 싸서 말아놓은 작은 서신이었는데, 집사인 양씨는 품안에 잘 갈무리한 채 빠른 걸음으로 궐에 있는 주인에게 향했다.


왕실의 큰 어른인 왕대비와 삼정승이 논의한대로 국장도감이 설치되고 인선이 마무리됐다. 도제조는 영의정 이광삼이 제조는 이조판서 김일경 등 삼인이 맡아 국장을 총괄할 것이다.


김일경은 가장 바쁜 닷새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암종으로부터의 연통이 수시로 날아왔으며 거기 적힌 요구사항을 국장 절차에 반영시켜야 했다. 특별히 어려울 것은 없었지만, 최고의 권력자인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심부름꾼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자존감을 크게 상하게 했다. 하지만 따를 수밖에···


‘그는 이 세상 존재가 아니다.’


두려움은 종종 모든 감정을 지배한다.


즉위식이 오기 전에, 그는 병부 쪽 소론 인사들을 만나 단단히 단속해 두고자 했다. 권력이 이동하면 분명 줄을 갈아타려는 이탈자들이 생길 수 있다. 문신들이야 몰라도 특히 병권(兵權)이 흔들리는 건 막아야 한다.


*****


두루의 점집은 고즈넉했다. 거리도 마찬가지였다. 국상이 발표되고 나서 생업에 꼭 필요한 몇 가지를 빼고는 상점 거리도 문을 닫고 애도에 동참했다.


영반월 주인 반월도 가게 문을 닫고는 점집에 눌러앉았다. 박광이 사갔던 패물들이 마루한의 딸 미리내를 위한 것임을 알고, 반월은 박광에게 반 바가지를 씌웠던 돈을 돌려주었다.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들여온 분첩이니 화장 도구를 가져와서는 미리내에게 안겨주기까지 했으니, 미리내의 입이 함지박만해진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반월 아주머니, 이거 정말 비싼 거 아니어요? 감사합니다.”

“어허, 아주머니라니? 나 혼례도 안 올려본 여자야. 언니라고 해줘. 응? 이리 고운 처자에게 선물하는 건 하나도 안 아깝네. 호호호”

“헤헤, 네 반월 언니.”


마침 외출에서 돌아온 공대가 한마디 끼어들었다.


“어이 방물점 아주머니! 오늘도 계주님 보러 왔소? 거 따님한테 공들여봐야 허사일건데···”

“어머머, 저 아재 말본새 좀 봐, 아주머니라니요? 아직 시집도 못간 처녀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아이구야! 처녀셨구려? 내 몰라 봬서 죄송하게 됐소. 그나저나 광 아우는 이제 퇴궐도 못하겠구먼.”


박광 얘기가 나오자 미리내가 즉각 반응했다.


“오라버니가 왜 퇴궐을 못해요?”

“아, 국상이 났는데 궐인이, 그것도 왕위를 이을 왕세제를 지키는 호위가 어찌 퇴궐을 하겠어? 아마 국상 기간 동안 얼굴 보기 힘들 것인데 우리 미리내 아씨 어쩌나?”


임금의 승하 소식에도 무덤덤했던 미리내의 얼굴이 갑자기 울상이 돼버렸다.


*****


미리내가 울상을 짓던 그때, 박광은 연잉군 옆에서 호위를 서고 있었다.


닷새 후면 왕위를 이을 후계자인지라 호위청과 금군청에서 근접 수행을 맡겠다고 했지만 연잉군은 익위사 호위를 고집했다. 그중 박광은 당연하게도 상시수행 호위로 낙점되었고 말이다.


소론계 영향권에 들어있을 게 뻔한 금군 조직에 신변 안전을 의탁할 수 있겠냐는 게 연잉군 측근들의 조언이었을 것이다. 적절한 조치였다고 박광은 생각했지만, 당분간 퇴궐도 못하고 혼자 궐에 동떨어져 있어야 하는 게 염려되었다.


‘사부님과 연락은 어찌 해야 하나···’


박광이 연잉군에게 그 사정을 소상히 아뢰었다.


“그러니까, 흑결이라는 역모 세력을 막기 위해 자네 사문이 도성에 집결해 있다는 건데, 금군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는 이곳에 과연 그들이 침입할 수 있겠는가?”

“네,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그들은 평범한 비적의 무리와 다르기에 염려가 되는 것이옵니다. 헤아려주시옵소서, 저하.”

“하긴, 요상한 마물들을 소환하고 날씨를 부린다니 일반 군사들로는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겠군. 그러면···, 사문 사람들 모두 궐 안으로 들여오는 게 어떻겠는가?”


박광은 연잉군의 제안에 잠시 고민했다.


“저하, 그럴 필요까진 없겠습니다. 도성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을 흑결 세력도 감시해야 하고, 다들 자유로운 생활에 익숙한지라 입궐하게 되면 답답해서 견디지 못할 것이옵니다. 다만···”


박광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몇 가지를 연잉군에게 부탁했다.


“그런 청이라면 들어줘야겠지. 내 그리 일러두겠노라.”

“망극하옵니다. 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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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3 21.05.18 40 2 12쪽
53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2 21.05.17 32 2 11쪽
52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1 21.05.16 32 2 12쪽
51 자아독대(自我獨對): 자아와 마주하다 21.05.15 41 2 11쪽
50 흑룡비상(黑龍飛上): 흑룡이 나르샤 21.05.14 33 2 12쪽
» 오오낙락(烏烏樂樂): 까마귀들이 좋아 죽는구나 21.05.13 31 2 11쪽
48 귀궐애사(歸闕哀事): 궐로 복귀하니 슬픈 일이 생겼구나 21.05.12 32 2 11쪽
47 쌍룡대면(雙龍對面): 두마리 용이 마주하다 21.05.11 62 2 12쪽
46 야심심조(夜深心躁): 밤은 깊어 가고 마음은 바빠진다네 21.05.10 34 3 12쪽
45 풍전왕실(風前王室): 바람 앞에 왕실이어라 21.05.09 46 2 12쪽
44 목멱지자(木覓之子): 목멱의 아들아 21.05.08 49 2 12쪽
43 탐색망흔(探索蟒痕): 이무기의 흔적을 찾아서 21.05.07 44 2 12쪽
42 해오집맥(解誤執脈): 오해를 풀고, 맥을 잡노라 21.05.06 51 2 11쪽
41 반월혹인(半月惑人): 반월이 사람을 혹하게 하는구나 21.05.05 43 2 11쪽
40 기린휘능(起鱗揮能): 비늘을 세워 권능을 휘두르다 21.05.04 50 2 12쪽
39 백호각성(白虎覺醒): 백호의 능력을 각성하니 21.05.03 59 2 11쪽
38 복수불수(覆水不收):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지 못하오 21.05.02 42 2 12쪽
37 생사기로(生死岐路): 생사의 갈림길에 서다 21.05.01 41 2 11쪽
36 작우금적(昨友今敵): 어제의 벗이 오늘의 적이라 21.04.30 42 2 11쪽
35 상호취원(相互取願): 서로 원하는 바를 취하노라 21.04.29 60 2 11쪽
34 이인심란(二人心亂): 두 사람의 마음이 어지럽더라 21.04.28 77 2 11쪽
33 흑침백노(黑侵白怒): 흑이 침범하니 백이 노하다 2 21.04.27 45 2 11쪽
32 흑침백노(黑侵白怒): 흑이 침범하니 백이 노하다 1 21.04.26 100 2 11쪽
31 취명사암(取明捨暗): 어둠을 버리고 빛을 누릴 것이다 21.04.25 67 2 12쪽
30 괴수대전(怪獸大戰): 괴수끼리 크게 한판 붙다 21.04.24 69 2 11쪽
29 사탐유육(蛇耽油肉): 뱀은 기름진 고기를 좋아한다 21.04.23 55 2 13쪽
28 용망동주(龍蟒同舟): 용과 이무기가 한 배를 타다 21.04.22 46 2 12쪽
27 화령계망(花靈啓蟒): 화령이 이무기를 깨우쳐 주는구나 21.04.21 9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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