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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메의 서재입니다.

흑룡이 나르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무협

왕잼
작품등록일 :
2021.03.28 11:18
최근연재일 :
2021.05.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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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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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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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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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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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용망동주(龍蟒同舟): 용과 이무기가 한 배를 타다

DUMMY

“그럼, 이번엔 어떤 향인지 말해보게나.”


이단은 마음속으로 명류장에 많이 피어있던 치자나무 꽃을 떠올렸다. 꽃향기는 엇비슷한 게 많으니 도방이 잘 알아챌 수 있는 꽃으로 고른 것이다.


“음···, 맑고 풍부한 향기로군요. 마치 명류장에 온 것 같습니다. 치자 향이 납니다.”


이렇게 말하며 도방은 울컥했다. 분하고 억울한 일이 떠올랐으리라. 이단은 놀라움을 숨길 수 없었다.


‘이것이었나? 화령의 능력이란 게?’


순간, 백회혈에서 울림이 전해져왔다.


-키키키···, 알아차렸군. 역시 비범해. 네가 생각한 화초류의 향을 주위에 퍼뜨릴 수 있지. 이 화령님의 작은 능력중 하나일 뿐이지만 때때로 유용할거야. 어떻게 써먹을지는 차차 고민해 보도록.

=그런데, 왜 나는 정작 그 향을 맡지 못하는 거지?

-어이! 생각해 봐. 세상엔 별의 별 향이 다 있지. 생각할 때마다 모든 향기가 질퍽하게 느껴진다면 아마 감각이 마비되고 미쳐버릴걸? 게다가 독향이라도 맡으면 어찌하려고? 근데··· 저 놈이 네 호위였던가? 아! 저놈을 보니까 치가 떨리네. 날 이렇게 만든 놈···


갑자기 화령이 사라져버렸다. 자신을 베어 소멸시킨 도방을 보니 두렵거나 불쾌한 모양이었다. 조용해진 가운데 이단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이걸 잘 써먹을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그때···


“거기, 이공(李公)이십니까?”


그가 기다리던 자가 나타났다. 변일이었다.


*****


동궐로 향하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있다. 동궁전의 변일과 한종로,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이단과 도방이었다.


사실 도방과 한종로는 이미 마주친 적이 있었다. 홍문관 앞에서 박광에게 발각돼 도주했을 때, 박광 옆에서 벌벌 떨고 있던 무관 한종로의 얼굴을 도방은 바로 알아보았다. 하지만 당시 이단과 도방은 복면을 했던 터라, 한종로는 그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도방은 당시 자신과 칼을 맞대고도 손해를 입지 않았던 박광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칫 자신의 주군과 벗이 될 뻔했던 젊은 무관, 나이가 믿기지 않는 실력과 침착함을 미뤄볼 때 곧 자신을 능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벗이 되지 못하고 적으로 마주치게 된다면···


‘반드시 베어야한다.’


그들은 성균관 후원과 연결된 집춘문(集春門)을 통과해 동궐 후원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집춘문은 가장 규모가 작은 문이라 경비도 적었는데, 이미 변일이 손을 써놓았는지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이단은 변일이 당부한대로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고 앞만 보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지난 잠행 때도 확실히 느꼈지만, 궐내에 들어오니 흑선기 운용이 쉽지 않았다. 어떤 금제가 걸린 것처럼 영적인 능력이 차단된 느낌이 들었다. 억지로 이무기를 꺼낼 수는 있겠지만, 제 능력을 발휘하긴 힘들 것이다.


궐 까마귀의 정보에 따르면, 궐 내외 수비병과 금군(禁軍)의 수효가 꽤 많게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자신들의 장기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면···


‘필패(必敗)다. 반드시 맥을 찾아 깨야 한다.’


신비로운 분위기의 후원을 가로지르다 보니 인공으로 조성한 작은 못과 건물들이 아기자기해 보였다. 궐 안에 들어온 게 이제 두 번째인데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수연, 행복한가? 이제 곧 다시 볼 수도 있을 거다.’


묵묵히 가다보니, 앞에 아담한 팔작(八作)지붕 건물이 보였다. 잠룡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영화당(暎花堂)이었다.


중전 어씨는 나인 둘을 데리고 후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후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은 산책이었다. 조선에서 제일 넓은 집이라고는 하지만, 세상과 격리된 이곳의 생활은 한순간도 즐겁지 않았다.


지아비인 임금과는 부부의 정이 잘 붙지 않았다. 열일곱의 나이차를 떠나 남편의 내성적이고 어두운 성향 때문인지 단 한번도 살가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거니와 합방 횟수도 양손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주상은 세자 시절부터 늘 위축돼 보였고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병약한 몸 때문에 선친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했고, 모친인 희빈 장씨가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걸 목격하면서 늘 생명의 위협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


가까스로 왕이 됐지만, 노론의 위협과 아우인 연잉군의 존재가 늘 거슬렸을 것이니 만성 소화불량을 달고 사는 게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몰랐다.


‘그도 참 딱한 사람이다. 나 못지않게···’


하루에 한번 궐내를 산책하는 시간마저 없었다면, 그녀의 생활은 감옥과도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이제 산책을 마치고 침소인 대조전으로 향하려는데, 영화당 앞에 서있는 일단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익은 하나는 동궁전 내관이 분명했지만 나머지는 궐인(闕人)이 아니었다.


흰색 도포를 차려입은 한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얼굴이 보였다. 순간, 중전의 발길이 우뚝 멈췄다. 그녀의 눈이 커지고, 몸은 가볍게 떨려왔다. 뒤따르던 나인들이 당황해하며 중전마마의 심기를 살폈다.


“지금··· 영화당 안에 누가 있느냐?”

“······. 이 시간이면 주로 세제 저하가 계시는 걸로 아옵니다. 마마.”


하긴 근래에 주상은 선정전과 침소를 벗어나는 적이 없었으니, 연잉군이 아니면 누가 저길 차지하고 있겠는가.


‘그분이 맞아. 확실해···. 그런데 왜, 그가 왜 연잉군을?’


대조전으로 돌아간 중전 어씨는 호위를 담당하는 호위청 부장을 조용히 불렀다.


*****


영화당은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에 팔작지붕을 멋스럽게 얹은 아담한 건물로, 부용지(芙蓉池) 동편에 붙어있었다.


평소에는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하거나 활을 쏘기도 하고 가끔은 과거 시험장으로 쓰기도 하지만, 현 임금이 연회나 활쏘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지라 사람들의 발길이나 이목이 적은 편이었다. 부용정에 앉아 부용지를 바라보는 것을 일과처럼 즐기는 연잉군에게는 아주 친숙한 장소였다.


수하들은 밖에서 시립하고 연잉군과 이단이 독대했다.


“세제 저하를 이제야 뵙습니다.”


이단이 큰절을 하려하자 연잉군이 주춤 잡으며 말렸다.


“격식은 생략해도 되겠소. 앉지요.”


연잉군의 첫인상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이십대 후반의 나이지만, 항상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살아와서인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 보이는 걸 철저히 경계하는 습성이 몸에 밴 듯했다. 가는 선의 얼굴은 예리해 보이면서도 깊은 심계(心計)를 갖고 있다는 것을 추측케 했다.


연잉군도 이단을 천천히 살폈다. 이 사내의 내력에 대해 변내관으로부터 미리 들은 바가 있었다. 선친이 노론에 속하거나 관직을 도모한 적도 없는데, 몇몇 노론 대신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사약을 받았다고 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두 사람이 같은 적을 갖게 된 것이다. 소론, 더 나아가 임금까지.


이제 약관을 갓 넘어보이는 나이지만 설익은 느낌은 들지 않았고, 거느려 본 사람만이 풍길 수 있는 의젓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거기에,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은은한 향기까지도.


“선친의 일은 참 안됐소. 억울함을 꼭 풀어드리고 싶소.”

“말씀만으로도 망극할 따름입니다. 저하.”

“이공의 이름이 외자를 쓰던데, 혹시···, 전주 이씨요?”


갑작스런 질문에 살짝 놀랐지만 이단은 최대한 사실대로 얘기하기로 했다. 큰 거짓을 숨기기 위해 사소한 거짓은 삼가야했다.


“그러하옵니다. 소생의 가문에도 미미하나마 태조대왕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연잉군이 짐짓 놀란 시늉을 했다. 이씨 왕조가 삼백년 넘게 흘러오면서 그동안 가지치기가 수없이 이뤄졌다. 그만큼 알지 못하는 왕실 종친(宗親)이나 유사 종친도 꽤나 많을 것이다.


실제 종친이라면 종친록에 올라 있을테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니 오래전에 갈린 핏줄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오히려 머나먼 핏줄 관계가 연잉군에겐 마음에 들었다. 왕좌를 경쟁하지 않는 관계이니 말이다.


“이거 알고보니 한 집안이었구만. 가문 내력을 따져보고 싶으나 시간이 아쉽네그려. 허허”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는 연잉군이었다. 이단은 친밀감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왕위를 이을 차기 일인자였지만, 천한 태생으로 정통성에 결함을 가진 잠룡과, 혈통의 정통성으로 역천을 꿈꾸는 이무기가 서로에 대한 탐색을 마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널따란 다상(茶床) 위에 지필묵이 있었다. 주위에 듣는 귀는 수하들뿐이지만, 연잉군은 신중에 신중을 더하는 인물이었다. 익위사가 세제를 보위하는 사람들이고 변내관도 그렇지만, 정세에 따라 언제든 감시자나 고발자가 될 수도 있었다.


필담(筆談)으로 문답을 나누기 시작했다.


-어떻게 날 도울 것인가?

-이공은 무엇을 원하는가?

-일을 도모함에 있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일이 진행되는 것은 언제쯤인가?


연잉군의 물음에 이단은 계획한 바를 또박또박 적어나갔다. 이단이 답변을 써내려갈 때마다 연잉군의 얼굴에는 놀람과 감탄, 의문 등 여러 가지 표정이 스쳐갔다. 세제의 얼굴에 의문의 표정이 생길 때마다 이단은 부가적인 설명을 적었다.


연잉군이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공을 만난 건, 하늘의 뜻인가 보네. 그 뜻을 받들도록 하지.”


협상이 끝난 것이다. 연잉군이 필담을 나눈 종이를 접어 화로에 던져 넣었다.


*****


간단한 인사를 뒤로 하고, 이단 일행은 변내관을 따라 나섰다. 이단은 연잉군에게 어떤 책자 하나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태종대왕때 지어진 이 동궐의 설계도면이 필요합니다.


전란 중에 소실됐을 수도 있지만, 왕궁 장서각 어딘가에 남아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설계도면을 볼 수만 있다면 동궐의 풍수를 파괴할 맥점(脈点)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리된다면 이런 번거로운 과정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흑결의 힘을 총동원해 한번에 쓸어버릴 수 있을테니까.


‘연잉군···, 잠룡다운 신중함과 노련함은 높이 사드리겠소. 하지만 당신은 거기까지요. 결코, 용좌(龍座)에 오를 수는 없을 것이외다.’


연잉군과의 협력관계는 현 임금을 제거하는 것까지였다. 일차 목표가 달성되면 연잉군도 반드시 제거해야할 대상이었다. 나라 민심을 뒤집고 명분을 내세워 왕위에 오르게 되면 새로운 조선이 시작될 것이다.


‘반드시, 흑조선(黑朝鮮)의 역사를 열 것이다.’


한편으로는, 명분을 만들기 위한 작업도 분주히 준비하고 있었다. 소론 강경파의 영수이며, 신임사화를 연출해 노론 숙청의 선봉 역할을 했던 이조판서 김일경 쪽과도 줄을 만들고 있다. 정작 부친의 죽음에 직결된 장본인이지만, 임금이 죽게 되면 잠시 한편이 돼 연잉군을 제거하는데 써먹어야 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궐 밖에 다다랐고, 변내관은 다시 궐로 돌아갔으며 도방과 함께 흑문 개방을 위해 수하들이 대기하는 곳으로 향했다.


어디론가 향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중전 어씨의 명을 받은 호위청 부장이 붙인 꼬리였다. 꼬리가 두 사람의 뒤를 조심스레 밟아갔다.


궐 안에 우뚝 자란 회화나무 위에 앉은 까마귀 한 마리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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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3 21.05.18 39 2 12쪽
53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2 21.05.17 31 2 11쪽
52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1 21.05.16 31 2 12쪽
51 자아독대(自我獨對): 자아와 마주하다 21.05.15 40 2 11쪽
50 흑룡비상(黑龍飛上): 흑룡이 나르샤 21.05.14 33 2 12쪽
49 오오낙락(烏烏樂樂): 까마귀들이 좋아 죽는구나 21.05.13 30 2 11쪽
48 귀궐애사(歸闕哀事): 궐로 복귀하니 슬픈 일이 생겼구나 21.05.12 32 2 11쪽
47 쌍룡대면(雙龍對面): 두마리 용이 마주하다 21.05.11 62 2 12쪽
46 야심심조(夜深心躁): 밤은 깊어 가고 마음은 바빠진다네 21.05.10 33 3 12쪽
45 풍전왕실(風前王室): 바람 앞에 왕실이어라 21.05.09 46 2 12쪽
44 목멱지자(木覓之子): 목멱의 아들아 21.05.08 48 2 12쪽
43 탐색망흔(探索蟒痕): 이무기의 흔적을 찾아서 21.05.07 43 2 12쪽
42 해오집맥(解誤執脈): 오해를 풀고, 맥을 잡노라 21.05.06 51 2 11쪽
41 반월혹인(半月惑人): 반월이 사람을 혹하게 하는구나 21.05.05 43 2 11쪽
40 기린휘능(起鱗揮能): 비늘을 세워 권능을 휘두르다 21.05.04 50 2 12쪽
39 백호각성(白虎覺醒): 백호의 능력을 각성하니 21.05.03 59 2 11쪽
38 복수불수(覆水不收):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지 못하오 21.05.02 42 2 12쪽
37 생사기로(生死岐路): 생사의 갈림길에 서다 21.05.01 40 2 11쪽
36 작우금적(昨友今敵): 어제의 벗이 오늘의 적이라 21.04.30 42 2 11쪽
35 상호취원(相互取願): 서로 원하는 바를 취하노라 21.04.29 60 2 11쪽
34 이인심란(二人心亂): 두 사람의 마음이 어지럽더라 21.04.28 77 2 11쪽
33 흑침백노(黑侵白怒): 흑이 침범하니 백이 노하다 2 21.04.27 44 2 11쪽
32 흑침백노(黑侵白怒): 흑이 침범하니 백이 노하다 1 21.04.26 99 2 11쪽
31 취명사암(取明捨暗): 어둠을 버리고 빛을 누릴 것이다 21.04.25 67 2 12쪽
30 괴수대전(怪獸大戰): 괴수끼리 크게 한판 붙다 21.04.24 69 2 11쪽
29 사탐유육(蛇耽油肉): 뱀은 기름진 고기를 좋아한다 21.04.23 55 2 13쪽
» 용망동주(龍蟒同舟): 용과 이무기가 한 배를 타다 21.04.22 46 2 12쪽
27 화령계망(花靈啓蟒): 화령이 이무기를 깨우쳐 주는구나 21.04.21 9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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