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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메의 서재입니다.

흑룡이 나르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무협

왕잼
작품등록일 :
2021.03.28 11:18
최근연재일 :
2021.05.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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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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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지자(木覓之子): 목멱의 아들아

DUMMY

목멱산(남산) 정상에는 목멱신사(木覓神祠)가 있다. 목멱대왕(木覓大王)에게 제사를 지내던 국사당(國祠堂)이었다. 나라의 큰 제사가 열리는 날에는 임금을 위시한 왕족들이 친히 납시어 안정과 번영을 빌곤 했다.


어린 시절부터 남산 명류장에 살던 이단은 종종 왕실의 행차를 보곤 했는데, 그때부터 선친에게 곤란한 질문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아버님, 왜 소자는 저 행차에 초대받지 못하나요?

-아버님, 왕실의 저 사람들은 제 이름을 알고 있나요?

-아버님, 저기 형님 같은 분들과 잠깐 놀다 오면 안 되나요?


그때마다 그의 아비 이죽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목멱신사 안에 두 사내가 있었다. 이단은 좌정한 채 눈을 감고 있고, 도방은 호위를 서고 있었다.


‘그때 여기서 숨어 봤던 형님들이 어쩌면 이제 내가 제거해야 할 자들이겠구나···,’


북악 응봉의 맥점을 짚어주고 돌아온 이단은, 잠시 스쳐간 회상 속 얼굴들을 떨쳐버렸다. 역천대계의 거사를 앞두고 이유 없이 흔들리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아주 어린 시절, 이곳에 몰래 들어와 정신을 집중하면 목멱대왕이 감응해 주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마 몸 안에 이무기의 기운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였을 것이다. 목멱대왕은 자신을 만나주지 않았다.


‘애초의 신령을 져버리고 나만의 신령을 만든 셈인가.’


후회는 아니지만 아쉬움은 살짝 있었다. 목멱대왕을 맞이할 때 느꼈던 아늑한 생명의 느낌이 좋았으니까.


‘목멱대왕이여! 여기 계시긴 한 겁니까?’


그 순간, 그의 몸을 타고 묵중한 진동이 올라왔다. 감겨있던 그의 눈이 저절로 떠졌다. 하지만 보이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마땅히 눈앞에 있어야 할 도방도, 사당 안의 제의도구들도 사라졌다. 암흑은 아니었다. 연록(軟綠)의 기운이 짙은 안개처럼 시야를 꽉 채워 버렸다.


연록의 안개 한 쪽이 휘장처럼 걷히고 처음 보는 노인이 걸어나왔다. 연록의 머리칼과 수염, 황토빛 피부를 가진 우람한 체격의 노인이었다.


[[목멱의 아들아! 날 불렀느냐.]]

-아! 목멱대왕이신가요?

[[그래, 네가 버리고 잊은 노인네지. 껄껄]]

-제가 버리다니요. 대왕께서 사라져버리셨지요.

[[그럴 리가. 난 여기서 한시도 떠나본 적이 없단다. 다만, 네가 나를 부르지 않았을 뿐이지.]]

-아아!


그랬다. 이무기가 들어선 순간부터 목멱신사를 멀리 하고 대왕을 찾지 않는 건 자신이었다. 애써 감췄던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다.


[[목멱의 아들아, 왜 날 떠나갔느냐.]]

-아마도··· 그것을 보이기 싫었나 봅니다.

[[네 몸 안에 역심(逆心)의 영물, 이무기가 들어선 이후부터였구나. 짐작은 했다만 실로 흑선께서 예언하신대로 될 줄이야.]]

-흑선께서 무슨 예언을 남기셨습니까?


목멱대왕이 잠시 고민하듯 멈칫거렸다.


[[그래, 이미 너는 생계의 특별한 존재이니 말해주마. 흑선께서 이르시길, 자신이 안배한 길에서 벗어나는 존재가 생길 것이며 그로써 자신의 역사가 끝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 존재는 장차 오계(五界)의 질서에 큰 파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말씀까지···, 남겼지.]]


오계라 하면, 화령에게 들은 바 있는 다섯 개의 차원계를 이르는 것이리라. 다른 계의 일까지 궁금하진 않았다. 다만···


-흑선께선 어디에 계십니까?

[[그분은 이제 이곳에 올 수 없을 것이다. 흑백양선께선 선계에서의 소임을 다 하시고 이제 다음 계(界)로 넘어가실 테니까.]]

-다음 계라 하면, 신계(神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잘 알고 있구나. 역시 특별한 아이로다. 이제 새로운 선인이 동북(東北)방면을 맡으시게 되겠지.]]

-대왕께서도 돌아가십니까?

[[허허, 나같은 선졸(仙卒)은 비록 선계의 일원이지만 생계의 볼모일 뿐이니, 아직 여기서 벗어날 수 없구나.]]

-혹, 제 선친의 영이 어디로 가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건··· 내 관할 밖의 영역이니 알 수가 없구나. 네 아비의 일은 잘 알고 있다만, 그의 운명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신계에서나 알 수 있을까···]]


겸양일 수도 있지만, 목멱대왕 스스로 선졸이라 칭했으니 선계에선 하위의 지위인 듯 보였다. 선친의 영은 분명 어딘가 존재할 것이다. 자신의 영이 분리된 상태에서 흑학을 마주했으니 어느 곳이 됐든 가계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아낼 방법이 요원했다.


[[아이야, 돌아오너라. 네 아비의 일도, 너의 분노와 슬픔도 헤아릴 수 있단다. 하지만 목멱의 품에서 본 대왕과 함께 운명의 길을 걸어갈 기회가 아직 남아있으니···]]

=키키키, 시끄럽네 정말. 근데 여긴 어디야? 에··· 선계의 영감탱인가 보네?


갑자기 목멱대왕의 말을 끊고 화령이 튀어나왔다.


~아, 뭐야? 이 빌어먹을 주인 놈아, 내 몸 빨리 돌려줘. 갑갑해 죽겠다구.


설상가상, 삽살이마저 튀어나왔다. 삼령(三靈)이 깃들어 있는 이단을 보며, 목멱대왕의 인상이 구겨졌다.


[[목멱의 아들아, 대체 어찌 된 거냐? 이무기의 영에다, 영계의 이물까지? 이것들이 다 뭐란 말이냐?]]

=어허! 보아하니 하선(下仙) 주제에 감히 상령(上靈)에게 ‘이것들’이라니? 아무리 계가 다르다지만 예의가 아주 형편없네? 내 영계로 돌아간다면 정식으로 따질 것이다.

~어이, 꽃송이! 그 꼬라지로 예의는 무슨? 그만 좀 쫑알대라. 근데 이 영감은 누구지? 어이 힘 좀 쓰게 생긴 영감! 나 좀 꺼내줘. 이상한데 끼어서 꼼짝도 못해. 뭐든 다 해줄게. 응?

=꽃송이? 이런 미꾸라지 새끼가··· 무식한 하급 미물들한테 이게 무슨 봉변이야? 정말 미쳐버리겠네에에!!!


목멱대왕은 황당한 표정이다. 생계에 파견돼 목멱에 터를 잡은 지 오백여 년, 이런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부스러기들, 조용히 좀 하자. 대왕님, 제가 지금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다시 대왕님 품으로 돌아가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어허···, 나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괴물, 아니 존재가 되어버렸구나. 하지만 아이야, 이건 알아두거라. 너의 모습이 문제가 아니란다. 네가 어찌되는가는 네 심지(心地)에 달려 있는 법이다. 수천(數千)의 괴물이 네 그릇에 담길지라도 너의 심지만 오염되지 않는다면 두려울 것이 없느니라. 저것들은, 너의 표피에 머물다 사라질 것이다.]]


목멱이 갑자기 손을 뻗어 이단의 정수리에 얹었다. 이단은 순간 움찔했지만 거부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아늑한 생명의 기운이 백회혈을 통해 밀려들어왔다. 백회혈에 끼어 조잘거리던 화령과 삽살이도 이내 조용해졌다.


이단은 이 기운이 자신에게 좋은 것인지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로운 안식을 만끽하고 싶었다. 소중한 이들을 잃은 상실감, 사명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기 전, 그 어린 시절의 달콤한 꿈을 꾸었다.


눈을 뜨자, 목멱대왕은 사라지고 연록의 안개도 걷혀 있었다.


‘꿈이었나?’


도방이 자신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지만 들리지 않았다. 몸속 어딘가에서 울림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일부를 너에게 심어두었다. 때때로 쓸모가 있을 것이다. 나는 흑선의 뜻을 거스르고 싶구나.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겠다. 목멱의 아들아.]]


자신의 몸 안에 또 하나의 존재가 끼어든 것이다.


*****


“이무기의 영흔(靈痕: 영의 흔적)일세.”


공대가 망원정의 난간을 가리켰다. 한강 쪽으로 열린 공간이었다.


“이 난간을 타 넘어 드나든 흔적이 있고, 여기 이 자리···”


그가 망원정 내 중앙부 한 곳을 가리켰지만, 박광과 조생원의 눈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공대의 손만 따라 움직일 뿐.


“분명 여기에 머물렀던 영흔이 있네. 그리고 이 안에는 최소 세 사람이 있었네. 둘은 여기와 여기에 마주보고 앉아 있었고, 하난 이쯤에 서있었군.”


공대의 설명을 들으며 박광은 머리에 그림을 그려갔다.


“그럼, 하나는 분명 이무기를 부리는 암종이겠고, 서있던 건 그의 호위쯤 되겠는데···, 앞에 앉아있던 건 누구요?”


조생원이 물음과 동시에 공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흠, 앞에 앉은 사람은, 체중은 많이 나가지 않고 나이가 있어 보이네. 근데 이 나이든 자가 앞에 있던 자에게 절을 한 듯하네.”

“그게 다 눈에 보인단 말인가? 어허, 조츠라비들은 희안한 능력을 익혔구만.”

“흐흐. 조생원에게는 오행으로 점치고 봉인하는 능력이 있고, 광 아우에게는 마물을 굴복시키고 파괴하는 능력이 있잖은가. 나도 이런 밑천쯤은 있어야지.”


공대의 설명으로는, 조츠라비의 추령안(追靈眼)을 통해서 보면 영물들은 영기가 강할수록 진한 흔적을 남긴다. 사람도 영을 갖고 있으니 당연히 그 흔적이 남는데, 다만 워낙 미세하기도 하고 시간이 오래 지나면 사라지거나 뒤섞여 찾아내기 어렵다 했다.


다행히 통제가 돼 있던 덕분인지 간신히 포착할 수 있었는데, 나이가 있어 보이는 자가 앞에 있던 자에게 절을 한 흔적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아, 그리고 이 계단 아래에 특이한 자국이 보이지?”


계단 아래 흙바닥에 분명히 바퀴 같은 게 굴러간 자국이 보였다.


“그런데 왜 바퀴 자국이 한 줄이죠?”


바퀴자국은 보통 두 줄로 나있어야 정상이니, 박광이 물은 것이다.


“흐, 이자는 초헌(軺軒)을 타고 왔다네.”

“아! 초헌을··· 그렇다면?”


초헌은 종이품 이상 당상관만 탈 수 있는 외바퀴 수레였다. 그렇다면 분명 조정의 고위 관리라는 얘긴데, 누가 감히 역모를 꾸미는 암종과 버젓이 만나고 다닌단 말인가. 만약 사실이라면 암종의 행적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


일행은 추적이 용이한 외바퀴의 흔적을 따라가기로 했다. 누군지 알 수 있다면 음모를 막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니까.


바퀴의 흔적은 멀리까지 이어져 북촌(北村)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사라졌다. 북촌은 고위 권신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고, 도로가 잘 포장돼있어 더 이상 흔적을 쫒기가 어려웠다. 으리으리한 저택들이 즐비한 이곳의 누가 암종을 만난 것인가.


“쩝! 아쉽군. 여기 사는 관료들이라면 모두 초헌을 갖고 있을 터, 들어가서 일일이 뒤져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공대가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돌아서려는데, 박광이 조생원에게 부탁했다.


“생원 형님, 점 좀 쳐주세요.”

“점? 아니, 내가 아무리 길흉화복을 점치는데 탁월하긴 하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어찌 점으로 알아내겠는가? 아우님, 그건 무리일세.”

“아뇨, 제가 어디로 가야 귀인(貴人)을 만날 수 있는지 봐주실 수 있잖아요.”


박광이 씨익 웃었다. 별 황당한 소리에 손사래 치던 조생원이 마지못해 산통을 꺼내들고 박광의 생년월일과 생시를 물었다. 산통을 흔들던 조생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또다시 시도해보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너, 너 뭐냐? 왜 아무 것도 안보여?”


주역에 통달했다고 자부하던 조생원에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생년월시 정보가 있는데 사주팔자가 전혀 보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의 지식 안에서는 말이다.


백선의 수호령 백호가 깃든 박광의 운명은, 이제 인간이 측량할 수 없게 된 것일까. 운명이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박광을 바라보는 조생원은 할 말을 잃었고, 그런 조생원을 바라보는 박광과 공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역시··· 이 형님, 돌팔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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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3 21.05.18 40 2 12쪽
53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2 21.05.17 31 2 11쪽
52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1 21.05.16 31 2 12쪽
51 자아독대(自我獨對): 자아와 마주하다 21.05.15 40 2 11쪽
50 흑룡비상(黑龍飛上): 흑룡이 나르샤 21.05.14 33 2 12쪽
49 오오낙락(烏烏樂樂): 까마귀들이 좋아 죽는구나 21.05.13 30 2 11쪽
48 귀궐애사(歸闕哀事): 궐로 복귀하니 슬픈 일이 생겼구나 21.05.12 32 2 11쪽
47 쌍룡대면(雙龍對面): 두마리 용이 마주하다 21.05.11 62 2 12쪽
46 야심심조(夜深心躁): 밤은 깊어 가고 마음은 바빠진다네 21.05.10 34 3 12쪽
45 풍전왕실(風前王室): 바람 앞에 왕실이어라 21.05.09 46 2 12쪽
» 목멱지자(木覓之子): 목멱의 아들아 21.05.08 49 2 12쪽
43 탐색망흔(探索蟒痕): 이무기의 흔적을 찾아서 21.05.07 44 2 12쪽
42 해오집맥(解誤執脈): 오해를 풀고, 맥을 잡노라 21.05.06 51 2 11쪽
41 반월혹인(半月惑人): 반월이 사람을 혹하게 하는구나 21.05.05 43 2 11쪽
40 기린휘능(起鱗揮能): 비늘을 세워 권능을 휘두르다 21.05.04 50 2 12쪽
39 백호각성(白虎覺醒): 백호의 능력을 각성하니 21.05.03 59 2 11쪽
38 복수불수(覆水不收):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지 못하오 21.05.02 42 2 12쪽
37 생사기로(生死岐路): 생사의 갈림길에 서다 21.05.01 40 2 11쪽
36 작우금적(昨友今敵): 어제의 벗이 오늘의 적이라 21.04.30 42 2 11쪽
35 상호취원(相互取願): 서로 원하는 바를 취하노라 21.04.29 60 2 11쪽
34 이인심란(二人心亂): 두 사람의 마음이 어지럽더라 21.04.28 77 2 11쪽
33 흑침백노(黑侵白怒): 흑이 침범하니 백이 노하다 2 21.04.27 44 2 11쪽
32 흑침백노(黑侵白怒): 흑이 침범하니 백이 노하다 1 21.04.26 99 2 11쪽
31 취명사암(取明捨暗): 어둠을 버리고 빛을 누릴 것이다 21.04.25 67 2 12쪽
30 괴수대전(怪獸大戰): 괴수끼리 크게 한판 붙다 21.04.24 69 2 11쪽
29 사탐유육(蛇耽油肉): 뱀은 기름진 고기를 좋아한다 21.04.23 55 2 13쪽
28 용망동주(龍蟒同舟): 용과 이무기가 한 배를 타다 21.04.22 46 2 12쪽
27 화령계망(花靈啓蟒): 화령이 이무기를 깨우쳐 주는구나 21.04.21 9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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