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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메의 서재입니다.

흑룡이 나르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무협

왕잼
작품등록일 :
2021.03.28 11:18
최근연재일 :
2021.05.18 18:00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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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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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77,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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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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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귀궐애사(歸闕哀事): 궐로 복귀하니 슬픈 일이 생겼구나

DUMMY

박광은 서둘러 연잉군을 찾았다. 한종로의 말대로 세제는 동궁전 성정각에 머물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소란함에 눈을 뜬 연잉군은 내시 변일로부터 창경궁 환취정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다.


참담한 심정에 창경궁으로 건너가려던 연잉군의 귓가에 반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세제 저하, 소관 우시직 박광 복귀했나이다.”


연잉군은 오랜만에 보는 친족을 맞이하듯 반갑게 박광을 불러들였다.


세제에게 큰 절을 올린 박광은 다짜고짜 독대(獨對)를 청했다. 의외의 청이었지만 박광에 대한 신뢰와 기다림이 컸던 연잉군은 변일을 내보냈고, 마지못해 물러나는 변일의 얼굴엔 불쾌함과 불안감이 떠올랐다.


“그래, 어디서 뭘 하다 온 것이야? 도성에서 그대를 봤다는 얘기들이 있었네.”

“송구하옵니다. 저하. 진즉에 기별이라도 올렸어야 했지만 상황이 급박했나이다. 한양 도성에는 며칠 전에 당도했고 망원정 일대를 수색한 것도 제가 맞사옵니다.”

“광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헌데 무슨 상황이기에 그리 급박했다는 것이냐?”


박광은 잠시 숨을 고르고 심각한 표정으로 답을 이었다.


“저하, 지금부터 올리는 말씀은 열에 열 모두 사실이오니 믿고 들어주시옵소서.”


박광의 진지한 말투에 연잉군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박광은 모든 일의 배경부터 얘기해나갔다. 흑백양선과 흑결, 환단계의 존재 그리고 조선암종가(朝鮮暗宗家)의 내력까지 설명하자 연잉군의 눈이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최근에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들, 이상한 날씨라든가 마물들의 출현, 최근 한강에서 목격된 이무기의 이야기에 이르자 연잉군은 박광의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자네 이야기를 다 믿기로 했지만 그 많은 기사(奇事)들을 다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구나. 그 모든 게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어느 안전(案前)이라고 소인이 감히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받아들이기 벅찬 이야기였는지 연잉군이 긴 한숨을 쉬었다. 박광은 이제 연잉군에게 부탁할 문제를 꺼내들었다.


“그 암종이란 자와 내통하는 고위 관료가 있는 것 같사옵니다.”

“뭐야? 누가 감히 역모자와 내통을 꾀한단 말인가?”

“그래서 드리는 청이온데···”


박광은 모일(某日) 낮에 궐에 없었던 당상관들의 명단을 알아야 한다고 청을 올렸다. 이무기가 한강에 출현한 날이었다. 궐 출입 명단을 확보하려면 연잉군의 힘을 빌려야 했다.


“그러니까, 그날 궐에 없었던 자가 내통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얘기로군. 알겠네. 내 당장 알아봐 주겠네.”

“그리고··· 세제 저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연잉군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광은 마음에 걸리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다.


“저하께서는 혹, 이단이라는 자를 알고 계시옵니까?”


간밤에 한종로에게 들은 것 중 가장 믿기 힘든 얘기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연잉군의 눈빛이 순간 흔들린 것을 박광은 놓치지 않았다.


“소관이 사실만을 아뢰었듯이 저하께서도 사실대로 말씀해주셔야 일을 제대로 대처할 수 있사옵니다.”


연잉군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떼었다.


“종친이라고 해서 두 번인가 찾아왔다네. 여러모로 교류하면 좋을 인사 같아서 받아줬지만, 최근엔 연락해온 적이 없네. 그런데 그자를 알고 있는가?”

“이단, 그자가 바로 암종입니다.”

“뭐··· 뭐라?”


연잉군의 목소리가 밖에 있는 궁인들에게 들릴 정도로 커졌다. 놀라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은밀한 거래를 한 자가 역모를 꾀하는 무리의 우두머리인 암종이라니 말이다.


“그게 사실··· 그래, 사실이란 말이지?”

“제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


박광이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바쳤다. 이단이 태백산 환단계 본거지를 침입했을 때 남긴 서찰이었다. 서찰을 읽는 연잉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정말 이런 무리들이 있었단 말인가? 암종이란 자가 왕실의 또 다른 핏줄이고 역모를 꾸며왔단 말인가?”


울컥하며 불신을 토하는 연잉군의 눈에 그자의 필적이 들어왔다. 눈에 익은 필체였다. 자신과 필담(筆談)을 나누던 자의 글씨가 확실했다. 연잉군이 서찰을 구겨버리고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여러 생각이 혼잡하게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계획을 포기하려는 자신과의 연락을 끊고 사라진 순간부터 수상했다. 하물며, 그자와의 거래는 분명 금상(今上)을 제거하는 것이었는데··· 박광의 말에 따르면 그게 끝이 아니지 않은가. 다른 신료들과 접촉을 하면서 역모를 꿈꾸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온전히 이용만 당한 게 아닌가? 이런 어리석은···’


연잉군은 순간, 박광에게 어디까지 얘기를 해줘야 할지 갈등했다. 탁기환과 동궐도형을 주고받은 얘기는 아무리 믿는 수하라도 얘기해줄 수 없었다. 자신과 변내관만이 아는 비밀로 묻어두고 싶었다.


“그래, 이제 무엇을 어떻게 대비하면 되겠는가?”


박광이 생각한 바를 얘기하려는데, 밖에서 구슬픈 곡(哭)소리가 들려왔다.


-상위복(上位復), 상위복, 상위복······


환취정 지붕 처마 위, 한 내시가 임금의 웃옷을 들고 북향을 향해 흔들며 상위복을 세 번 외쳤다. 임금의 영혼을 부르는 의식인 상위복이 행해지면서 한 임금의 시대가 끝났음이 공표되었다. 어미인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은 창경궁에서 그 아들도 숨이 끊어진 것이다.


연잉군은 착잡한 표정으로 창경궁으로 내달렸고 박광이 그 뒤를 따랐다.


*****


동이 튼 목멱산 명류장에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흑결주 마달은 이단의 처소로 급히 향했다. 방금 궐 까마귀로부터 받은 급보를 전하기 위함이었다. 이단의 방으로 들어가던 마달은 흠칫했다.


늘 입고 다니던 흑색 도복 대신 새하얀 백의를 걸친 이단이 그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주군! 혹··· 알고 계셨습니까?”


본인도 방금 접한 급보인지라 설마 알고 있을 리 없을 텐데, 이단이 의외의 복색(服色)을 하고 있으니 궁금했던 것이다. 주군의 표정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글쎄··· 국상(國喪)을 물은 거라면, 이미 알게 되었소.”

“허허! 주군께선 예지력까지 갖게 되셨습니까? 소신도 이제 막 알게 된 것인데···”

“예지력이라··· 그런 능력이 있다면 좋겠구려. 내 앞날이 궁금하니 말이오.”

“앞날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주군께서 써놓으신 계획표대로 착오 없이 가고 있으니까요. 정해진 앞날을 누리시면 될 겁니다.”


마달이 호언장담을 했다. 주군의 가라앉은 기분을 띄워보고 싶은 마음에서였지만 그리 말하면서 스스로 감회에 젖었다. 역천대계를 수립하고 숨 가쁘게 달려온 길의 목표점이 이제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단은 여전히 기쁘거나 들뜬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용상(龍床)의 죽음이 달갑지 않으십니까?”


주군에게 심경의 변화가 있는지 살피며 던진 질문이었다.


“특별한 느낌이 없네요. 우리가 손을 쓴 바도 없고, 스스로 가버린 것이니.”


이단은 임금의 마지막 말이 남긴 묘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혹, 자네 뜻대로 되더라도··· 연잉군은 살게 해주시게.


분명 그는 연잉군이 한 짓을 보았을 것이다. 그에게 자신의 지난 생을 보여줬고 그 안엔 연잉군과의 밀담 장면도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아우 연잉군을 걱정했다.


‘그런 나약한 심성이니··· 늘 권신들에게 휘둘린 것 아니더냐.’


세상을 하직한 자에게 조소를 날려봤자 별무소용이다. 허한 제 마음 한 구석만 더 휑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단은 고개를 저으며 감상에서 빠져나왔다.


“김일경 쪽은 어떻습니까. 차질 없이 준비하고 있을까요?”

“당장 큰 변고를 맞았으니 경황이 없을 겁니다. 주군께서 지시한 대로 시행토록 연통을 주고받도록 하겠습니다.”


이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계에 미진한 부분은 없어 보였다. 계획한 대로 준비를 마친 상황에서 시의 적절하게 임금도 생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개운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환단계 소식은 없었나요?”

“네, 특별한 건 없습니다. 태백산 침투 이후 그자들의 움직임이 둔해지긴 했습니다. 그들의 본거지로 많은 인원을 집결시켰더군요. 나머지 인원이 얼마나 될지, 이곳 도성에 몇이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거사 당일 큰 변수는 되지 못할 겁니다.”


이단은 박광을 떠올렸다. 대계를 수행하면서 두 번의 낭패가 있었는데 모두 박광이 주도한 상황이었다. 궐에서도 쌍선봉에서도··· 예기치 못한 조우(遭遇)로 인해 마음에 풍파를 겪었다.


‘설마, 이번에도 나타날 것이냐.’


아마 그 자의 강인한 활력으로 볼 때, 이무기의 독한 탁기도 극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거사를 앞두고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점이었다.


*****


궐내 모든 이들이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분주하고 경황없어 보였다. 연잉군과 종친, 신하들은 관(冠)을 벗어 피발(被髮: 머리를 풀어헤침)을 하고 소복을 입은 채로 애통함을 곡으로 토해냈다.


궐을 들썩이는 곡소리는 박광의 마음까지 파고들었다. 곡성(哭聲)의 묘한 운율은 내재된 슬픔의 인자(因子)를 건드리고 끌어올리는 마력이 있다는 걸 실감했다. 별다른 감정도 없고 오히려 원망만 해오던 임금의 죽음이 그의 마음을 울컥하게 한다는 게 당혹스러웠다.


‘내 부모가 떠났을 때··· 이런 곡을 해준 사람이 있었던가?’


아무도 없었다. 어린 시절의 자신조차 곡을 한 기억이 없었다. 박광은 거북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리를 벗어났다. 높은 이들이 국상 절차를 따르는 곳에서 자신이 따로 할 일은 없었다. 왕세제를 노린다면 이 순간은 분명 아닐 것이다.


멀리서 한종로가 뛰어오고 있었다.


“독사 만나고 왔소? 뭐라고 합디까.”


한종로가 습관처럼 주위를 둘러보더니 박광의 귓가에 말을 흘렸다.


“내 정교한 눈썰미로 보건대, 그자는 분명 제정신이었네. 다들 못 믿어하는데 내가 슬쩍 믿어주는 척 하니까 술술 불더군.”

“그래, 뭐라고 하던가요?”


박광이 귀를 더 가까이 대주었다.


“몸이 마비되면서 입도 못 벌리고 정신을 잃어가는 중에 하늘에서 검은 물체가 내려오더니 환취정 안으로 들어갔다는 게야. 난생 처음 보는 물체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용 같았다는 거지. 앞발이 나오고 뿔이 돋았으니 분명 구렁이는 아닐 것이고 검은 비늘에 윤기가 좌르르 흘렀다고 하더군.”

“발이 달렸다고요?”


박광은 자신이 봤던 이단의 이무기와 비교해봤다. 이단의 이무기에겐 발이 없었다. 뿔이 돋긴 했으나 그림이나 이야기에서 묘사된 용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독사라는 자가 봤다고 하는 물체의 모양새도 전형적인 용과는 달라 보였다.


“아무래도 독사 그 양반, 자기 별명이 싫었나 보네요.”

“뭐?”

“흑룡 같은 별명을 달고 싶어서 헛소리하는 거 같다고요. 아니, 아무리 이무기가 설치는 세상이라지만 용까지 돌아다니겠어요?”


입으로는 부정했지만, 그의 머릿속엔 다른 생각이 피어나고 있었다.


‘설마, 그놈이 용으로 진화하고 있는 건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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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3 21.05.18 39 2 12쪽
53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2 21.05.17 31 2 11쪽
52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1 21.05.16 31 2 12쪽
51 자아독대(自我獨對): 자아와 마주하다 21.05.15 40 2 11쪽
50 흑룡비상(黑龍飛上): 흑룡이 나르샤 21.05.14 33 2 12쪽
49 오오낙락(烏烏樂樂): 까마귀들이 좋아 죽는구나 21.05.13 30 2 11쪽
» 귀궐애사(歸闕哀事): 궐로 복귀하니 슬픈 일이 생겼구나 21.05.12 32 2 11쪽
47 쌍룡대면(雙龍對面): 두마리 용이 마주하다 21.05.11 61 2 12쪽
46 야심심조(夜深心躁): 밤은 깊어 가고 마음은 바빠진다네 21.05.10 33 3 12쪽
45 풍전왕실(風前王室): 바람 앞에 왕실이어라 21.05.09 46 2 12쪽
44 목멱지자(木覓之子): 목멱의 아들아 21.05.08 48 2 12쪽
43 탐색망흔(探索蟒痕): 이무기의 흔적을 찾아서 21.05.07 43 2 12쪽
42 해오집맥(解誤執脈): 오해를 풀고, 맥을 잡노라 21.05.06 51 2 11쪽
41 반월혹인(半月惑人): 반월이 사람을 혹하게 하는구나 21.05.05 42 2 11쪽
40 기린휘능(起鱗揮能): 비늘을 세워 권능을 휘두르다 21.05.04 49 2 12쪽
39 백호각성(白虎覺醒): 백호의 능력을 각성하니 21.05.03 58 2 11쪽
38 복수불수(覆水不收):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지 못하오 21.05.02 41 2 12쪽
37 생사기로(生死岐路): 생사의 갈림길에 서다 21.05.01 40 2 11쪽
36 작우금적(昨友今敵): 어제의 벗이 오늘의 적이라 21.04.30 41 2 11쪽
35 상호취원(相互取願): 서로 원하는 바를 취하노라 21.04.29 60 2 11쪽
34 이인심란(二人心亂): 두 사람의 마음이 어지럽더라 21.04.28 76 2 11쪽
33 흑침백노(黑侵白怒): 흑이 침범하니 백이 노하다 2 21.04.27 44 2 11쪽
32 흑침백노(黑侵白怒): 흑이 침범하니 백이 노하다 1 21.04.26 99 2 11쪽
31 취명사암(取明捨暗): 어둠을 버리고 빛을 누릴 것이다 21.04.25 66 2 12쪽
30 괴수대전(怪獸大戰): 괴수끼리 크게 한판 붙다 21.04.24 68 2 11쪽
29 사탐유육(蛇耽油肉): 뱀은 기름진 고기를 좋아한다 21.04.23 54 2 13쪽
28 용망동주(龍蟒同舟): 용과 이무기가 한 배를 타다 21.04.22 45 2 12쪽
27 화령계망(花靈啓蟒): 화령이 이무기를 깨우쳐 주는구나 21.04.21 9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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