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우금적(昨友今敵): 어제의 벗이 오늘의 적이라
호랑이가 사냥꾼들의 포위에 갇히게 되면 본능적으로 가장 약한 쪽을 찾아 뚫는다. 박광의 생각도 그랬다. 포위를 당하더라도 어차피 빈틈은 있다.
‘가장 약해보이는 쪽을 찾아 뚫고 전속력으로 달린다.’
미리내를 들쳐 업고 칼을 쥔 손에 힘을 몰아주고 큰 호흡을 들이킨 다음, 가장 약해 보이는 쪽으로 뛰쳐나갔다.
생각보다 미리내의 무게가 꽤 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차게 도약해 칼을 내리쳤다. 그 약해 보이던 놈의 팔목이 싹둑 잘려나간다. 놈의 머리를 디딤돌 삼아 한번 더 도약했다.
‘뚫었다’
이제 달리면 된다. 당황한 흑의인들이 따라붙는다. 앞쪽에서 쉭,쉭 소리가 들리면서 따라오던 놈들이 하나 둘 고꾸라졌다. 공대의 멋진 활솜씨였다.
하지만 저쪽 편도 궁수가 있었는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의 기운이 느껴졌다. 혹시나 미리내가 다칠까 염려돼 박광은 온 신경을 집중해 화살을 피해 달렸다.
이제 숲으로 진입해야 한다. 저 앞에 조생원과 두루가 숨어있는 곳이 보였다. 어차피 불똥이는 포기해야할 듯싶다. 그놈에게 정이 들 줄은 몰랐지만, 어차피 소멸되든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숲과 가까워져가는 그 순간,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맹렬하게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언제가 느껴본 익숙한 기운이었다.
‘언제였더라?’
궐내에서 마주쳤던 흑의복면인들이 퍼뜩 떠올랐다. 속도를 늦추면 안 되는 상황이지만 결국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순간 박광의 속도가 주춤거렸다. 따라오는 자의 얼굴은··· 잊을 수 없는 왕도사, 왕단이었다.
‘아! 저 친구가 왜? 설마···?’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져 멈춰선 박광이 몸을 돌려 달려오는 이단을 향해 물었다.
“아니 왕도사, 이게 어떻게 된 거요?”
미리내를 쫒던 이단도, 고개를 돌린 사내의 얼굴을 보게 됐다. 역시··· 그였다. 설마 했던 생각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박광과 눈이 마주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벗을 만났으니 술이라도 한잔 나눠야할까?’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거짓으로 알려줬다. 어둠의 왕이 될 신세를 한탄하며 왕단이라고 둘러댔다. 그는 아직도 자신을 그렇게 알고 있는 거다.
박광의 등에 업혀있는 미리내와도 눈이 마주쳤다. 동그란 사슴 눈이었다. 저 맑은 눈에 꼭 보여주고 싶었다. 세상을 바꾸고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꼭 보여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이 정당성이 떳떳해질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그의 여자였다니···
이단이 이를 갈며 외쳤다.
“내 이름은 이단이다. 제 십구대 암종이자, 흑조선의 왕이 될 사람이니라.”
박광이 눈살을 찌푸리며 으르렁거리듯 대꾸했다.
“자네가··· 암종이셨나? 애초부터 벗이 될 수는 없었던 거였군. 그런 존귀한 분이 힘없는 아녀자를 이렇게 핍박해도 되는 것인가?”
박광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이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큰 숨을 내쉬었다.
“후우! 자네와는 이렇게 되기 싫었네. 진심이네.”
“흥, 그럼 정말 벗이라도 되고 싶었던 건가?”
이단과 박광, 두 남자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억지로 만들려 해도 짓기 힘든 표정일 것이다. 벗인지 적인지 확실하게 규정되어 버린 순간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자들의 표정이었다.
“자네가 환단계 사람만 아니었다면···, 그저 왕실의 무관이었다면 우리의 관계는 더 좋아질 수 있었을지도.”
“하지만, 이렇게 적으로 보게 됐으니 곱게 보내주진 않을 것 같군.”
“유감이지만··· 그렇다네.”
이단이 이무기를 끌어냈다. 순간 박광의 눈에는 이단의 몸이 쭈욱 늘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곧 이무기의 실체를 알아본 박광은 하마터면 업고 있던 미리내를 떨어뜨릴 뻔했다.
‘세상에··· 저런 경우는 못 들어봤는데?’
꽤 여러 번, 마물들과 상대를 해왔지만 이렇게 위압감을 주는 놈은 처음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저 괴물이 사람 몸속에서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이단, 저자는 저런 걸 몸 안에 봉인하고 다녔다는 말인가.
오히려 투지가 타오르면서 놀람의 충격이 가라앉았다. 박광의 몸에서 힘찬 기운이 솟구친다. 마치 이무기를 향해 덤벼들려는 사나운 기운이었다. 하지만 곧, 자신에게 매달린 미리내가 떠올랐다.
‘젠장, 일단 몸을 빼는 게 우선이다.’
자신이 시간을 지체하면 모두가 위험해진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헤헤! 몸속에 엄청난 흉기를 숨기고 있었네? 왕도사, 아니 암종 전하의 용안(龍顏)에 너무 안 어울리지 않소?”
이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라고 대꾸를 하려는데, 갑자기 박광이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박광의 행동은 생각의 속도만큼 빨랐다. 솔직히 정상적으로 붙어도 자신이 없는데, 무거운 짐까지 딸린 상태에서 괴물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무조건 이 곳을 벗어나야 한다. 일행이 숨어있는 숲을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뒤에서 흉폭한 기운이 날아오는 게 느껴졌다. 미리내가 다칠까 걱정됐다. 몸을 비틀어 방향을 바꾸면서 단전에 고여 있는 힘을 다 끌어 모아 도약했다.
공대와 조원들이 다급한 숨을 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추격해 오는 흑망(黑蟒:검은 이무기)을 완전히 따돌리긴 힘들어 보였다. 자칫 미리내가 위험하다.
이무기의 불쾌한 기운이 등 뒤에서 느껴지자마자 바로 공중에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우수(右手)에 쥔 환도를 휘둘렀다. 참자결을 발동했지만 공중에서 불안정한 자세로 시전했으니 위력이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공대도 돕기 위해 나섰다. 활에 선기를 불어넣고 이무기를 향해 편전을 쏘아댔다. 하지만 이무기는 날아오는 화살을 꼬리로 가볍게 튕겨냈고 박광이 휘두른 환도 역시 빗겨 피하며 거리를 없앴다. 공중에 뜬 박광의 눈에 이무기의 모습이 꽉 차게 들어왔다.
순간 이무기가 입을 벌리고 사람의 말을 했다.
“내 땅에 들어왔으니, 내 허락 없이는 가지 못한다.”
이단의 음성이었다. 박광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 괴물은 뭐야? 이놈이 이단인거야?’
박광의 눈에 이무기와 이단의 모습이 원근(遠近)으로 겹쳐졌다. 그 때, 이무기의 입에서 길쭉한 무언가가 튀어나와 박광의 쇄골 아래에 틀어박혔다. 억 하는 비명을 토하며 박광이 뒤로 날아갔다.
두루는 바위 뒤에서 박광이 미리내를 업고 뛰어오는 걸 보고 있었다. 둘의 관계를 잘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질투심이 일었다. 차라리 저기서 잡혀버렸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젓는다. 여자애는 몰라도 박광은 꼭 살아야한다.
처음으로 자신을 여자로 느끼게 해준 남자였다. 산신령 때문에 평생 남자는 멀리하고 살아야할 팔자라고 여겼는데 그걸 깨준 첫 남자였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그래서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박광이 이무기의 공격을 받아 피를 흘리며 뒤로 날아가는 순간, 반사적으로 두루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녀가 머리채에서 비녀를 뽑아내더니 주문을 외고는 이무기를 향해 힘껏 던졌다. 봉인이 풀리자 거대한 황구렁이가 이무기를 향해 입을 쫙 벌리고 덤벼들었다.
박광에게 매달린 채 떨어지고 있는 미리내와 찰나의 순간 눈이 마주쳤다. 미리내의 놀란 눈에 두루의 미소가 각인됐다.
턱! 하고 떨어지며 미리내는 정신을 잃었다. 공대와 조생원이 땅에 떨어진 두 남녀를 부축했다.
‘이제 됐네. 오래오래 잘들 살아라.’
두루가 마음의 인사를 띄우고 앞을 보니 이무기의 주인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고, 황구렁이는 이무기와 얽혀있었다. 황구렁이도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다.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다.
“두루, 어서 빠져!”
공대가 소리쳤다. 짧은 기간이지만, 참 믿음직한 아재였다. 두루가 고개를 저으며 어서들 가라고 손짓을 했다.
“휴! 영감, 좀 도와줘야겠어.”
말 끝나기 무섭게 두루의 눈동자가 사라져갔다.
*****
육두는 십년 후의 자신과 싸우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이만 더 많을 뿐, 생김새나 체격이나 힘이나 자신과 흡사한 자였다. 게다가 입에서 튀어나오는 욕설마저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에겐 마치 쌍욕 대결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육시랄 놈!”
“개 쌍, 육시럴 것이”
“이런 육시랄 자식을 봤나”
“그 육시럴 주둥이 안 다무냐”
“니는 애미 애비, 아니 삼촌도 없냐? 이 육시랄 호로자식 놈아”
“이 육시랄 같은 영감탱아! 그래, 나 고아다.”
칼이 맞부딪칠 때마다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게 무서워서인지 더러워선지 그 주변엔 아무도 다가서지 못했다. 육두도 마달도 온통 땀범벅이 돼 지쳐보였지만, 입만은 생생히 살아있었다.
둘이 숨을 고르다가 한 합을 더 부딪치는 순간, 육두의 뒤에서 검은 칼날이 몸을 관통했다. 육두가 입을 쩍 벌린 채 무릎을 꿇었고, 냉랭한 표정의 도방이 칼을 회수했다.
“야! 육시랄 도방 놈아, 너 뭐하는 짓이냐?”
자신의 싸움에 끼어든 도방에게 마달이 씩씩거리자, 도방은 이단이 달려간 쪽을 가리켰다. 암종께서 도주자들을 쫓고 있는데 여기서 뭐하고 있냐는 질타처럼 들렸다. 마달이 인상을 팍 구기며, 가슴에 구멍이 뚫려 쓰러진 육두에게 물었다.
“우라지게 미안하구나. 이름이 뭐냐. 잘 묻어주마.”
쓰러진 육두는 박광이 도망간 쪽을 보고 있었다. 박광과 미리내의 모습은 사라지고 두루가 두 팔을 벌린 채 적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육두는 씨익 웃으며 한마디를 토하고 숨을 거뒀다.
“육시랄!”
******
검은 이무기와 황구렁이가 서로의 몸을 비비 꼬아버리고 서로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황구렁이가 힘을 쓸 때마다 이단은 갑갑한 압박감을 느꼈다. 자신의 분신인 이무기가 받는 충격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애초에 이런 미물에게 발목을 잡히면 안 될 일이지만, 갑작스런 출현과 선제공격을 받자 대응이 꼬여버렸다.
검은 비늘을 일제히 세워버리니 황구렁이가 고통스러워하며 조임이 느슨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빼낸 이무기가 아가리를 크게 벌리더니 황구렁이의 대가리를 물어 끊어버렸다. 생령을 잃은 구렁이의 몸뚱아리가 땅에 떨어지며 소멸하기 시작했다.
박광과 미리내가 도망간 숲으로 쫒으려고 하는데, 황구렁이를 쏘아 보낸 여인의 기세가 확 바뀌어 있었다. 눈을 까뒤집고 양팔을 벌리면서 중얼중얼 주문을 외는데, 왠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여인의 입에서 웬 노인네의 음성이 흘러 나왔기 때문이다.
땅거죽이 들썩이더니 근방의 돌과 바위들이 모두 공중으로 떠올랐다. 주변으로 몰려온 흑결 무사들이 이 광경에 놀라 우두커니 멈춰버렸다. 이단이 다급하게 외쳤다.
“모두 피하라!”
순간 이무기가 이단의 몸을 감싸버렸고, 공중에 뜬 바윗돌들이 일제히 흑결 무리를 향해 쏘아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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