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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메의 서재입니다.

흑룡이 나르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무협

왕잼
작품등록일 :
2021.03.28 11:18
최근연재일 :
2021.05.18 18:00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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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4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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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77,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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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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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야심심조(夜深心躁): 밤은 깊어 가고 마음은 바빠진다네

DUMMY

-데엥······


멀리서 초경(初更: 저녁7시부터 9시)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목멱의 아들이라···.’


도방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목멱신사에서 명상에 잠겨있던 것은 말 그대로 촌각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의 몸 안에 또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이무기와 화령, 그리고 도방이 보았다고 묘사한 또 하나의 얼굴은 분명 자신이 명상 중에 만난 목멱대왕의 얼굴이었으니까.


‘내 몸에 생긴 반탄막 때문에 도방이 튕겨 나갔다? 목멱대왕이 남긴 흔적인가?’


오백년 간 목멱산의 터주로 암종가의 역사를 지켜봤을 목멱대왕이 왜 자신의 일부를 나에게 남겨뒀을까. 명류장으로 돌아온 이후 이단은 혼란스러웠다.


대왕을 통해 흑백양선에 관한 몇 가지를 알게 된 건 소득이었다. 그분들이 근래 이 땅에 현현(顯現)하지 않았던 이유는, 신계로 넘어가는 와중이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는 것인데··· 흑선은 이단 자신이 등장할 것을 예견했다고 했다.


-자신이 안배한 길에서 벗어나는 존재가 생길 것이며 그로써 자신의 역사가 끝날 것이다. 그 존재는 장차 오계(五界)의 질서에 큰 파동을 일으킬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인가? 내가 하려는 일로 인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암종가의 사명을 내팽개치고 도모하려는 일도 결국 선인(仙人)들의 설계일 뿐이란 말인가? 이단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의 몸 안에 똬리를 틀고 있던 역심이 고개를 치켜세웠다.


가문의 사명과 왕실에 대한 것을 넘어 이 모든 걸 안배하고 이제는 신계(神界)로 영전할 날만 기다리는 두 신선, 더 나아가 예정된 운명에 대한 반동적(反動的) 발작이었다.


“끄으억!”


역심이 솟구칠 때마다 속을 훑고 올라오는 구토감에 신음을 토했다. 옛날 암종 수업을 받던 시절, 처음 이무기가 들어선 걸 느낀 날은 한나절 내내 건곽란(乾霍亂)에 시달려야 했다. 배가 뒤틀리듯 아프고 가슴이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무기를 완전히 다스리게 된 지금도 그런 증상이 나온다는 건 결국···


‘이무기 탓이 아니다.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것이지.’


이단은 크게 숨을 들이켜며 구토감을 진정시켰다. 일렁이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졌다. 그 순간 연록의 기운이 그의 몸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것을 그는 의식하지 못했다. 허나, 누군가의 문기척 소리에 그 기운은 곧 사라져버렸다.


이단이 눈을 떴다. 흑결주 마달과 도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인정(人定: 밤 9시경 통금을 알리는 종소리)이 울리기 전에 귀가하려는 사람들이 분주히 성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야간 통행금지를 어겼다가 순라꾼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곤장을 맞기 십상이니까.


그 발길 중에 마루한과 박광도 있었는데 방금 전 우림위장 집에서의 심각한 고민을 달고 가는 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하루 묵고 가라는 이중원의 청을 뿌리치고 두루의 점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사부님!”


뒤따르던 박광이 입을 열었고 성큼성큼 걷던 마루한은 고개만 돌렸다.


“이무기가 한번 나타나고는 너무 조용하지 않습니까?”

“······?”

“임금님이 오늘내일 하신다는데, 역심을 품은 자들이 잔뜩 웅크리고 있는 게 수상해서요.”

“쉿!”


지나던 행인들이 행여나 들을까, 마루한이 박광의 입을 막았다.


“숙소에 가서 얘기하자. 그리고 광이 너, 명일(明日:내일)부터는 궐로 복귀해야겠다.”

“네에. 가야죠. 긴 휴가 다녀왔으니 저하 곁에서 눈 부릅뜨고 지켜보겠습니다.”


가긴 싫지만 가야했다. 어차피 암종과 흑결의 목표는 왕실이니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알아서 찾아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미리내와 더 붙어있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운 것인지 박광의 발걸음이 갑자기 무거워보였다.


고민 많은 스승과 제자가 두루의 점집으로 들어갈 때, 은밀히 뒤따르는 발걸음이 있었다. 미행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점집을 노려보았다.


*****


일을 함에 있어 낮밤을 가리지 않는 흑결이지만,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야심해지는 시각에 주군의 휴식을 방해하진 않는다. 마달이 찾아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주군, 동궐 결계를 파훼했습니다.”

“정말이오? 생각보다 빠르군요.”


조금 전까지 가슴이 답답했던 이단에겐 속이 뻥 뚫릴만한 보고였다.


“흐흐, 주군께서 응봉(鷹峯)의 맥점을 찾아주신 덕분입니다.”

“내가 아니었어도 무일이 금방 찾아냈을 거요. 아무튼 고생들 많았소.”


응봉의 맥점을 빨리 찾은 덕분에 일이 술술 풀렸다고 한다. 응봉의 기운을 차단하고, 종묘에서 연결되는 지점은 굵은 철침으로 끊어버렸다 했다.


“이제 금천(錦川)의 물만 마르게 되면 모든 게 완벽합니다. 지금도 이미 결계는 기능을 상실했지만요.”

“용상(龍床)의 상태는요?”

“오늘 김일경 쪽 까마귀가 전해온 바에 따르면, 수일을··· 넘기기 힘들겠답니다.”


흑결주 마달은 슬쩍 이단의 눈치를 살폈다. 선대 암종의 복수로 시작한 역천대계였다. 복수의 대상은 명확히 임금인데, 자연사를 용납할 것인가 의중을 묻는 거였다.


“계획대로라면, 그리고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탁기를 발동시켜 내 손으로 그의 목숨을 거둬야겠죠. 하지만···”


며칠 전 자리에 누운 임금은 정사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아마 식음(食飮)도 전폐중일 것이다.


‘가느다란 목숨을 끊어버린다고 과연 후련해질까?’


어차피 허수아비 같은 임금이었다. 병약한 임금이 사화의 희생자들을 낳았지만, 직접 관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연, 그녀를 생각해서라도 직접 손을 쓰는 게 내키지 않았다.


“기다리겠소. 그자가 더 고통을 느끼다 가길 바라오.”


순간, 마달의 표정에는 안도감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이단이 어떤 결정을 내렸든 찜찜한 마음이 남았겠지만 그래도 이편이 낫다 싶었다.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주군, 이제 편히 쉬면서 병든 용의 최후를 지켜보시지요.”

“결주와 도방은 작업에 고생한 결원들 충분히 위무해 주세요.”

“허허, 이미 명류장 곳간의 술독을 다 비우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두 사람, 정말 고생 많았소. 내 평생 잊지 않으리다.”


역천대계의 구부능선에 올라선 세 남자는 밤보다 짙은 웃음을 주고받았다. 그 순간, 인정을 알리는 스물여덟번의 종소리가 도성 곳곳에 울려 퍼졌다.


*****


인정의 종소리가 열댓 번쯤 울릴 무렵, 환단계의 임시본부인 소의문 점집 담을 한 사내가 넘고 있었다. 마루한과 박광의 뒤를 밟던 자였다.


야간 통행금지가 시작됐지만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것이 참 대담해 보이는데···, 이윽고 월담에 성공한 그가 마당을 가로질러 불이 켜져 있는 방을 향해 소리 없이 접근했다.


그가 툇마루 위로 한발을 올려놓는 순간,


-삐거덕


관절 성치 않은 노인의 뼈마디 부딪히는 소리가 마룻바닥에서 울리자, 네 칸 방문이 활짝 열렸다. 방안에서 빠져나온 호롱불빛이 침입자를 향해 이글거렸다.


“도둑괭이는 아니로구나. 웬 놈이냐?”


공대가 으름장을 놓았다. 놀란 그자가 뒷걸음질을 치다 마루 아래로 떨어지고 공대가 던진 그물에 포획되었다.


마루한을 위시한 계원들이 모두 나와 보니 그물 안에 웬 흑의인이 꼼지락대고 있었다. 마루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염을 비비 꼬았다.


“생긴 건 흑결 까마귀 같은데, 어찌 이리 어수룩하지?”


포획된 침입자는 얼마나 놀랐는지, 눈알을 데룩거리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환단계원들을 경계했다.


“다, 당신들은 뉘시오?”

“누가 물을 소릴 지껄이는가. 대체 넌 뭐야? 흑결이냐, 좀도둑이냐?”


이때, 방안에서 미리내와 노닥거리다 뒤늦게 나온 박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엥? 한선배? 여긴 어떻게··· 이 꼴은 대체 뭐요?”


공대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불쌍한 사냥감은, 흑결의 까마귀도 좀도둑도 아닌 익위사 좌시직 한종로였다.


“우시직!!! 나 좀 꺼내줘!”


*****


“그러니까, 저자거리에서 날 보고 쭈욱 미행했다고요? 왜? 아는 척을 하시지.”


방안에는 박광과 마루한, 그리고 포획자 공대가 한종로와 앉아있었다.


“난··· 자네가 무슨 비밀 임무를 수행중인가 해서 살펴보았지. 그런데 저 어르신이 자넬 이상한 점집으로 끌고 가기에, 우리 우시직이 무슨 봉변이라도 당할까 싶어 담까지 타넘게 된 거고.”

“하필이면 시커먼 옷을 입고 담을 타넘으니 영락없는 밤손님처럼 보이지 않았겠소.”

“자고로 사내의 색은 검정이라 했다. 요즘, 도성 무인들 사이에 유행하는데 몰랐느냐?”

“흐흐흐. 한형의 실없는 농도 유행인가 보네요. 그나저나, 세제 저하가 절 찾아오라고 수배까지 하셨다고요?”

“그렇지. 이유는 모르겠다만 자네가 빨리 복귀하지 않는다고 요즘 끙끙 앓으셨다네.”


익위사 전원을 내보내 자신을 찾게 했다는 얘긴데···


“세제 저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있기는 개뿔. 아무래도 내가 줄을 잘못 선 거 같아. 왕위에 오를 분이 맨날 두문불출 동궁전에만 처박혀 계신다네. 찾아오는 이도 없고··· 아! 그래. 그 분위기 묘한 사내가 다녀간 다음부터 좀 이상해지셨다네.”

“분위기 묘한 누구요?”

“그··· 나 같은 말번은 정체도 모르겠고, 여튼 좀 싸늘하게 잘생긴 젊은 서생이 두 번 궐에 와서 저하를 뵙고 갔는데 말야···”


한종로의 묘사를 잘 듣다보니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박광과 공대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 머릿속에 이단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마루한은 실제 이단과 마주친 적이 없었으니 전혀 감이 없었고, 공대는 비록 쌍선봉 먼발치에서 한번 봤을 뿐이지만 눈썰미가 좋아 기억에 담아둔 모양이었다.


“한형! 혹시 그 자 옆에 살벌한 분위기에 검은 방갓을 쓴 자는 없었소?”

“어··· 네가 그걸 어찌 아누? 있었지. 살벌해서 말도 못 걸어볼 작자가. 그들이 대체 누군데?”

“그들이 정말 세제 저하를 두 번이나 뵙고 갔단 말이오?”


박광이 다그치듯 물어보자 한종로가 순간 발끈했다.


“아니, 이 녀석이! 옆에 사부님하고 동문들 있다고 이 선배를 또 무시하느냐?”


맘먹고 후배 기 좀 꺾어보려다가 박광이 눈을 부라리자 다시 움찔하는 한종로.


“아··· 뭐, 내가 없는 얘길 하겠느냐. 변내관이 이 얘긴 절대 발설하지 말라 했다만, 너니까 특별히 얘기해 준 것이란 말이지.”


변내관이 입막음을 하려 했다면 분명 은밀한 접촉이었다. 대관절 무슨 용무로 이단 그자가 세제의 처소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세제 저하는 그자의 정체를 알고 있기나 할까. 왕위를 이을 세제와 왕위를 찬탈하려는 암종, 둘 사이에 어떤 이해관계가 맞아 만나게 된 것인지 박광은 도저히 헤아려지지 않았다.


“내일 동트는 대로 입궐하겠소.”


차일피일 미루던 입궐을 더 이상 미루지 못할 이유가 또 생겼다. 한종로가 잠시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광 아우, 이왕이면 나한테 잡혀서 끌려가는 모양새가 어떨까? 내 특진하면 춘심관에서 한턱 쏘겠네.”


마루한의 자애롭던 눈매에 갑자기 쌍심지가 돋아났다.


“아하! 어디서 봤나 했더니, 그때 기방에서 광이랑 어울리던 자였구만? 이놈이 어딜 내 순진한 제자 꼬드겨서 타락시키려고 해?”


한종로는 태어나 처음으로 뼈와 근육이 분리되는 분근착골(分筋錯骨)의 고통을 맛보았고, 박광은 당해도 싸다는 심정으로 한종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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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3 21.05.18 40 2 12쪽
53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2 21.05.17 31 2 11쪽
52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1 21.05.16 31 2 12쪽
51 자아독대(自我獨對): 자아와 마주하다 21.05.15 40 2 11쪽
50 흑룡비상(黑龍飛上): 흑룡이 나르샤 21.05.14 33 2 12쪽
49 오오낙락(烏烏樂樂): 까마귀들이 좋아 죽는구나 21.05.13 30 2 11쪽
48 귀궐애사(歸闕哀事): 궐로 복귀하니 슬픈 일이 생겼구나 21.05.12 32 2 11쪽
47 쌍룡대면(雙龍對面): 두마리 용이 마주하다 21.05.11 62 2 12쪽
» 야심심조(夜深心躁): 밤은 깊어 가고 마음은 바빠진다네 21.05.10 34 3 12쪽
45 풍전왕실(風前王室): 바람 앞에 왕실이어라 21.05.09 46 2 12쪽
44 목멱지자(木覓之子): 목멱의 아들아 21.05.08 48 2 12쪽
43 탐색망흔(探索蟒痕): 이무기의 흔적을 찾아서 21.05.07 44 2 12쪽
42 해오집맥(解誤執脈): 오해를 풀고, 맥을 잡노라 21.05.06 51 2 11쪽
41 반월혹인(半月惑人): 반월이 사람을 혹하게 하는구나 21.05.05 43 2 11쪽
40 기린휘능(起鱗揮能): 비늘을 세워 권능을 휘두르다 21.05.04 50 2 12쪽
39 백호각성(白虎覺醒): 백호의 능력을 각성하니 21.05.03 59 2 11쪽
38 복수불수(覆水不收):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지 못하오 21.05.02 42 2 12쪽
37 생사기로(生死岐路): 생사의 갈림길에 서다 21.05.01 40 2 11쪽
36 작우금적(昨友今敵): 어제의 벗이 오늘의 적이라 21.04.30 42 2 11쪽
35 상호취원(相互取願): 서로 원하는 바를 취하노라 21.04.29 60 2 11쪽
34 이인심란(二人心亂): 두 사람의 마음이 어지럽더라 21.04.28 77 2 11쪽
33 흑침백노(黑侵白怒): 흑이 침범하니 백이 노하다 2 21.04.27 44 2 11쪽
32 흑침백노(黑侵白怒): 흑이 침범하니 백이 노하다 1 21.04.26 99 2 11쪽
31 취명사암(取明捨暗): 어둠을 버리고 빛을 누릴 것이다 21.04.25 67 2 12쪽
30 괴수대전(怪獸大戰): 괴수끼리 크게 한판 붙다 21.04.24 69 2 11쪽
29 사탐유육(蛇耽油肉): 뱀은 기름진 고기를 좋아한다 21.04.23 55 2 13쪽
28 용망동주(龍蟒同舟): 용과 이무기가 한 배를 타다 21.04.22 46 2 12쪽
27 화령계망(花靈啓蟒): 화령이 이무기를 깨우쳐 주는구나 21.04.21 9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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