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序章)
고려말
젊은 이성계가 변산 선계안(仙界岸)에서
두 신선을 만나다.
배움을 얻고 훗날 나라를 세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이 시작되다.
그로부터 330년 후,
우리가 알지 못했던 조선의 이야기
*****
어느 야산 중턱.
인근 마을에서 나온 아낙들이 산나물을 캐고 있다.
“쇠돌네야. 오늘 아침 그 댁 서방님 일 나갈 때 코피를 질질 흘리던데 너무 괴롭히는 거 아닌가?”
“어머머머! 그 꺽정이처럼 실한 사내가 웬 코피랴? 오호호”
“남사스러워라.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잖아여. 울 서방, 맨날 어디다 용을 쓰고 오는지 달포째 털끝 하나 못 건드렸슈. 어라? 인제 보니···여기 여편네 중에 범인이 있는 거 아니여? 엉?”
“어머나 숭해라. 쇠돌네가 생사람 잡겠네요. 성님.”
“깔깔깔···”
이웃 여편네의 끈적한 농을 쇠돌네라 불린 여인은 더 질퍽하게 맞받아쳤다.
맑은 햇살이 가볍게 나무 사이로 쏟아져 땅을 뚫고 나온 나물 이파리를 어루만지듯 반짝이고, 아낙들의 농지거리가 사뿐하게 퍼져가는 평화로운 산골 풍경인데···
갑자기 여인들 근처에서 거무스름하고 탁한 기운이 일렁거린다. 탁기는 소용돌이처럼 주위의 밝은 기운을 잡아먹으며 점점 커져갔다.
어느새 사람 키보다 커진 탁한 소용돌이에서 불길한 기운이 풍겨 나온다. 이윽고, 그 소용돌이 안에서 무언가가 꾸역꾸역 기어 나온다. 칠흑(漆黑)의 괴생물체였다.
뱀같은 얼굴에 몸은 사람 같은 요사한 것이 네 발로 기어 나오고 있다. 시커먼 뱀인간이 뒤룩뒤룩 눈을 굴리며 아낙들에게 접근한다. 맛난 먹잇감을 발견한 듯 혀를 날름거리면서.
쇠돌네에게 짓궂은 농을 던졌던 안골댁이 가장 먼저 <그것>을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 저게 뭐시여?”
동시에 고개를 돌린 아낙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엉덩방아를 찧는데, 요물을 등지고 앉아있던 쇠돌네의 반응은 한 박자 느렸다.
“아니, 뭘 보고 그리? 어휴, 또 날 놀리는 게지들?”
허나, 아낙들의 표정이 워낙 진지했기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쇠돌네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뱀인간이 그녀를 덮쳐갔다.
엉금엉금 도마뱀처럼 기어오던 놈이 아낙을 덮칠 때는 마치 개구리가 도약하듯 민첩했다. 뱀인간에게 목을 물려버린 쇠돌네가 꺼억거리며 발버둥을 친다. 들고 있던 호미를 휘저어보지만, 요물의 몸에는 얕은 상처도 주지 못했다.
소리도 못 지르고 사지를 바들바들 떨고 있는 쇠돌네의 모습에 아낙들은 놀라서 자빠졌다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며 다시 비명을 지른다. 쇠돌네가 손을 뻗어 도움을 청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두세 걸음 뒷걸음질만 치다가 결국 마을 쪽으로 나 살려라 달려간다.
아낙들의 비명소리가 점점 멀어져가고 파르르 떨던 쇠돌네의 사지는 경련마저 사라져 간다.
죽음의 신호였다.
축 늘어진 여인의 목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빼낸 뱀인간이 혀를 날름거린다. 입가에 묻은 피의 맛을 음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제대로 식사를 하려는 건지, 쇠돌네의 몸을 킁킁거린다. 내장을 먼저 맛보려는 듯 뱃가죽을 한 움큼 물어뜯어 오물거리는 찰나, 뒤에서 거칠게 가라앉은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한발 늦었군요.”
사람의 음성에 흠칫 놀란 뱀인간이 뒤를 돌아보니, 검은 방갓을 쓴 흑의인(黑衣人)이 누군가의 명을 기다리는 듯 칼자루에 손을 얹고 발도(拔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검은 방갓과 새까만 도포에서 흘러내린 듯 자연스럽게 연결된 새까만 칼집으로부터 꾸역꾸역 묵기(墨氣)가 흘러나왔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뱀인간이 오물거리던 살점을 내뱉더니 흑방갓을 향해 그릉거린다.
“멸(滅)하라.”
흑방갓의 뒤에 있던 누군가의 명이 묵직하게 떨어진 순간, 뱀인간이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며 흑방갓을 향해 도약한다. 흑방갓은 코웃음을 흘리고 그 소리만큼 빠르게 마주 달려가며 시커먼 칼을 뽑아든다.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서로를 훑고 지나가고, 하나의 그림자가 둘로 갈라졌다. 흑방갓의 검은 칼에는, 붉은 피가 아닌 거무스름한 진액이 잔뜩 묻어 있었다.
몸통이 갈라진 뱀인간 앞에, 명을 내린 자, 이단(李丹)이 서있다.
그는 흑방갓과 마찬가지로 검은 무복이었지만, 머리엔 검은 초립을 쓰고 있었다. 방갓에 가려진 인물과는 달리 얼굴이 훤히 드러나 있는데, 실로 선이 단아하고 준수한 외모였다.
이단은, 잔떨림이 남아있는 뱀인간의 흉체에 손을 뻗으며 알아듣기 힘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뱀인간의 형체가 검은 기류로 흩날리며 이단의 손으로 흡수되기 시작한다. 이어 그는 뱀인간이 튀어나온 검은 소용돌이로 손을 뻗쳐 마치 구멍을 메꾸듯 검은 공간을 지워나간다.
손으로 흡수된 탁한 흑기(黑氣)가 그의 팔을 타고 얼굴로 올라간다. 미간 사이로 검은 기운이 맺혔다. 일을 마친 이단의 준수한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쓰러진 여인의 상태를 살피던 흑방갓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돌아왔다.
‘이젠 대낮에도 출몰하는가. 세상이 왜 이리 어둑해지는가···’
생각에 잠겼던 이단이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맑은 햇살을 뿌리던 태양은 어느새 먹구름에 가려지고 있었다.
정체 오묘한 두 사람이 그곳을 떠나고 얼마 뒤, 마을 장정들이 죽창이며 쇠스랑을 들고 달려왔다. 죽은 쇠돌네의 서방으로 보이는 사내가 여인을 안고 통곡을 한다.
“쇠돌 엄마! 여보 이 여편네야. 이게 무슨 변이란가?”
호랑이 짓이다, 곰의 짓이다, 마을 사내들이 흉수(凶獸)를 짐작하는 웅성거림이 쇠돌네의 시신 곁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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