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월혹인(半月惑人): 반월이 사람을 혹하게 하는구나
집 문제는 해결됐으나 먹고 사는 생계문제가 당장 걱정이었다. 딸린 입이 많은지라 며칠 지나자 수중에 가진 돈푼마저 떨어졌다.
다들 널따란 한양 땅에서 제대로 아는 사람 하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나마 일 년 남짓 한양살이를 하다 온 박광을 쳐다봤으나 주변머리 없는 박광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은 한종로 뿐이다.
“에이, 지금 그 입 가벼운 선배 만나러 가면 세제 저하 귀에 바로 들어갈 거고, 그럼 바로 궐로 끌려 들어가요. 안돼요 안돼.”
“아니, 이놈아. 너 궐에 들어가서 동정을 살피겠다 했잖아? 가서 우림위장에게 연통도 넣고 해야 할 거 아녀?”
“아버지, 광이 오라비 아직 몸도 덜 회복됐는데 어딜 들여보내요? 아버지 정말 그리 야박한 분이셨어요? 흑흑”
결국, 외동딸 미리내의 읍소에 마루한은 두 손 들어버리고 입맛만 쯔읍 다셨다.
“고마워, 미리내야. 너밖에 없다···.”
박광이 미리내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엄살을 떨었지만, 사실 지금 그의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백호의 기운이 전신의 탁기를 몰아냈을 뿐 아니라, 기가 통하는 십이경락을 깨끗이 벌모세수(伐毛洗髓)해준 덕분이었다.
마루한의 눈에도 그게 느껴졌지만, 딸이 한 말이 있으니 꾸욱 참을 뿐이다. 눈치를 보던 조생원이 나섰다.
“험험, 다들 재주가 힘쓰는 거 밖에 없어 보이니, 언제 몸 쓰는 일자리를 구하겠소. 그나마 소생이 팔아먹을 만한 알량한 지식이 있으니 당장 판을 벌여보리다.”
마침 거하는 곳이 두루의 점집이었으니, 이곳에서 자신의 특기를 발휘해 보겠다고 손을 든 것이다. 그러자 외출 준비를 하던 공대가 한마디 했다.
“오행점(五行占)으로 우릴 먹여 살리시게? 흐흐. 한양 사람들 눈치 빤해서 우리처럼 어수룩하지 않으니 대충대충 했다간 큰 코 다칠 거요.”
“거, 조장은 쓸데없는 걱정일랑 전당(錢堂)에 맡겨두고 볼 일이나 잘 보고 오슈.”
한양에 오자마자 공대는 솜씨 좋은 대장간을 알아보고 다녔다. 육두의 유품인 육도와 불가사리의 쇠똥을 녹여 쓸만한 칼을 하나 만들려는 참이었다. 마루한은 조생원에게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얘기하고는 몇몇 계원들과 출타해 버렸다.
일이 이리 되어, 두루 점집의 대문에는 휴업중이라는 종이쪽 대신 새로운 방문이 나붙게 되었다.
<단양 오행생원 출사, 개점 기념 복채 할인>
지나던 사람들은 흘깃 쳐다보고 관심을 꺼버렸으나, 한 여인네가 관심을 보이더니 대문을 활짝 열고 들어왔다. 여인은 마당에 앉아 환담을 나누던 환단계원들을 보고는 놀라 물었다.
“당신들 누구?”
박광은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방물점 영반월의 주인 반월이었다.
*****
그 시각, 이단과 도방은 남산 명류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조판서 김일경은 확실하게 포섭한 듯싶었다.
-이것은 실로···, 적통혁명(嫡統革命)이옵니다.
적통과 혁명이라는 어휘를 붙여가며 감동에 몸을 떠는 노대감의 모습에, 이단은 코웃음이 났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 가문, 제 당파의 보신을 위한 몸부림 아닌가.’
하긴 그게 연기든 위선이든 상관없었다. 자신이 용상에 오르게 될 명분만 얻어내면 충분했다. 역천(易天)의 당일에 어쩌면 그들의 손이 필요할 거라고 마달이 얘기했으니, 여러모로 쓸 만한 조각이 될 것이다.
병든 용은 잠룡을 이용해 제거하고, 잠룡은 소론을 이용해 제거한다. 그리고 용상에 오르면, 소론이건 노론이건 당파 다툼으로 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사대부들을 모두 청산할 것이다.
‘미리내라고 했던가? 그녀가 옆에 없는 게 아쉽구나.’
그녀의 순수한 눈망울에 새롭게 변모할 나라의 모습을 새겨주고 싶었다. 사대부를 걷어내고 백성과 직접 소통하는 왕이 될 것이다. 미리내에게 자극받은 이후 고민 끝에 그려낸 왕의 모습이었다.
혈통을 강조해 왕좌에 올라 신분을 타파하는 왕이 된다는 것, 참 모순적인 이야기였지만 이단에겐 거리낄 것이 전혀 없었다. 기존의 모든 것이 뒤바뀌고 새롭게 재편되는 강한 나라, 흑조선의 시조가 되기로 결심했으니까.
“주군, 잘 보고 오셨습니까?”
언제나 든든한 마달이 맞이해주면서 그의 몽상이 끊어졌다.
“네, 능구렁이 같은 속마음은 다 모르겠지만, 일단 겁은 확실히 먹여준 것 같네요.”
“흐흐, 그럼 됐습니다. 나뒹구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처지일거니 확실한 동아줄로 보였을 겁니다.”
“그 동아줄에 자신의 목을 매달게 될 건 짐작 못할까요?”
노련한 정객이고 현 조정의 실세 권력자이니, 온갖 곳에 사람을 풀어 자신에 대해 알아볼 것이 자명했다. 혹시나 자신의 손으로 죽게 한 사람 중에 이단의 선친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첩보를 수집하는 능력이야 우릴 따라올 수 있겠습니까? 궐 까마귀를 제외한 모든 까마귀를 붙여놓을 겁니다. 그리고 이미 그의 측근에게도 약을 좀 먹여뒀습니다.”
“측근이라면? 그 목모(睦某) 인가요?”
“네, 그렇습죠. 일개 지관에서 출세해 나라의 녹만 축내고 있는 그자입니다.”
종이품 동지중추부사 목호룡. 마달의 말대로 일개 지관(地官)이 벼락출세한 경우였다. 나라의 기틀을 뒤흔든 신임사화의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게 그의 거짓 고변이었으니 현 실세들에게 더없이 융숭한 대접을 받을 만했다.
게다가 역모를 잡아낸 공으로 동성군(東城君)에 봉해지고, 하릴없이 소일하는 당상관들의 기관인 중추부의 동지사로 녹을 먹고 있는 것이다.
“노론에 있다가 소론으로 붙었다가, 지금은 우리 쪽인가요?”
“흐흐, 우리 쪽에 붙길 원하고 있을 겁니다. 쇳가루 맛을 좀 봤으니 말이죠.”
“그따위 인간에게 우리 자금을 축내는 게 아깝긴 하군요.”
“걱정마십시오. 투자금 이상을 빼먹을 것이니까요.”
하긴, 흑결주 마달은 지략가이자 용사였지만 빼어난 상인 기질도 갖고 있었다. 결코 밑지는 장사는 아니 할 것이다. 그런 마달을 이단은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결주에게 믿고 맡기겠습니다.”
*****
흑결의 금고를 축내는 자, 목호룡은 지금 돈독이 잔뜩 올라 있었다. 양반가의 서얼 출신으로 지관이 돼 명성을 얻었으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제대로 행세하려면 당상관쯤은 되어야 했고 그는 양심을 팔아 그것을 성취했다. 품계석에 서서 아래쪽을 돌아보는 순간 그는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그 앞의 품계석은 더 이상 꿈꾸기 힘들 것이다. 동지들을 팔아 여기까지 왔지만, 더 이상 팔 것이 없었으니까. 소론 내에서도 그를 업신여기는 자들이 많았다. 대놓고 소리 내진 못하지만, 저희들끼리 있을 때 무슨 얘기들을 하는지 뻔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두 가지에 집착했다.
‘이판 대감과 돈, 그 둘만 꽉 쥐고 있으면 더 높은 품계석도 헛꿈은 아닐 것이야.’
지금 그가 급히 향하는 곳은 그의 출세를 좌우할 이조판서 김일경의 집, 갑작스런 호출이 있어 궐에서 뛰쳐나온 길이었다.
*****
마당에 반월이 들어섰을 때, 툇마루에서 미리내와 알콩달콩한 잡담을 나누고 있던 박광이 벌떡 일어섰다.
“누구냐고요? 저 알아보시겠어요? 근데 여긴 어쩐 일로···?”
영반월에서 봤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녀의 외출 복장은 여타 여인네들의 치장을 무색케 할 만큼 요란스러웠다. 진한 다홍 저고리와 푸르디푸른 치마에는 고운 수가 금실로 수놓아져 있었고, 붉은 물감을 들인 전모(氈帽:여성 외출용 모자)에도 화려한 매화가 피어있었다.
한마디로 거리의 사람들에게 ‘나 좀 봐 주세요’ 라고 호소하는 차림새였으니, 그녀가 들어선 순간 모든 이의 눈길이 따라 움직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전모 아래에 감춰진 얼굴이 드러나자 박혀있던 눈길들이 우수수 떨어져나갔다.
박광과 미리내의 눈길은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박광이야 구면이니 놀라서 그렇고 미리내는 박광이 아는 척을 하니 관심을 남겨둔 것이다.
“오라버니, 아는 여인?”
“여인? 아! 이분이 누구냐면···”
설마 미리내가 이런 아주머니에게 질투심을 느끼리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혹시나 이상하게 여길까 걱정됐다. 반월이 복색이 워낙 대담해 화류계 여인으로 보일 수도 있었으니.
“소첩은 반월이라 해요. 황진이의 후예이자 한때 평양 화류계의 샛별이었지요. 근데, 그때 그 헌헌장부 아니시와요? 제게 전낭 속 모든 돈을 털어주고 가신?”
“예? 돈을 다 털어줘요?”
반월이 박광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고, 미리내의 눈빛이 갑자기 사나와졌다.
“오라버니, 저분 말이 사실인가요?”
말투도 딱딱해졌다. 더 이상 놔뒀다간 괜히 오해가 사실처럼 될까 겁이 난 박광이 두 손을 훠이훠이 저어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영반월 점주(店主)님! 설명을 그런 식으로 하니, 여기 순박한 처자가 오해하잖소. 미리내야! 저 반월이란 분이 어떤 분이냐면···”
“호호호, 아리따운 처자의 손가락에 나한테서 가져간 옥가락지가 걸려있네?”
“예? 이 옥가락지···, 설마?”
미리내가 옥가락지를 만지작거렸다. 표정은 완전히 울상이 됐는데, 이건 딱 오해가 중첩돼 꼬여버린 상황이었다. 마치 박광 자신이 기루에 모든 돈을 탕진하고 기녀에게 뺏은 정표를 다른 정인에게 갖다 바친 파렴치한이 된 꼴이었으니.
“아, 제발 둘 다 그만!! 미리내야, 이 오라비 설명 잘 들어봐.”
하지만, 박광이 설명할 기회는 마루한의 등장과 함께 날아갔다. 몇몇과 함께 바깥 동정을 살피고 돌아온 마루한이 집안에 들어섰다.
“대체 무슨 소란인고? 밖에서 다 들리니 조용히 좀 하지···, 근데, 이 여인은 누구?”
반월이 뒤를 돌아 마루한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루한은 순간 멈칫했다. 아는 얼굴 같아서였다.
“갑돌 낭군님?”
“어? 어···, 어!”
“갑돌 낭군님 맞죠? 세상에 이런 운명적인 해후를 하게 될 줄이야. 이를 어째, 낭군님, 소첩을 기억 못하시와요? 평양 매죽루 반월이야요.”
“바···,반월, 자네가···, 허! 어찌 여기서···,”
당황하는 마루한을 보며, 울상이었던 미리내의 표정이 다시 사나와졌다. 갑돌이란 이름은 아비 마루한의 총각 때 이름이라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기에 반월과 아버지 사이에 모종의 과거사가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반월이란 여인과 아버지와 광 오라비, 세 사람의 삼각관계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대체, 세 분 뭐에요? 무슨 이런 관계가 있어요? 이잉 몰라.”
미리내가 울먹이며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박광은 황당한 표정으로 미리내를 따라 들어갔으며, 마루한은 멍한 얼굴로 그런 둘을 바라보았고, 반월은 황홀한 얼굴로 마루한을 보고 있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영문이야?”
환단계 창설 이래 최대 염문설이 될 수도 있는 이 소동에, 갑돌 낭군 아니 환단계주 마루한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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