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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메의 서재입니다.

흑룡이 나르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무협

왕잼
작품등록일 :
2021.03.28 11:18
최근연재일 :
2021.05.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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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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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77,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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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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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풍전왕실(風前王室): 바람 앞에 왕실이어라

DUMMY

“주군, 괜찮으십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도방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목멱신사로 가자는 주군 이단을 수행해 와서 호위를 서고 있는데, 갑자기 이단의 몸에서 특이한 향들이 진하게 퍼져 나왔다. 이단은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하듯 평온한 표정이었으나, 도방은 이상함을 느꼈다.


변산 선계안(仙界岸)에서 화령이라는 요물을 만난 이후 주군의 몸에서 화향이 풍겨 나오는 걸 여러 차례 경험했지만, 이번엔 느낌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마치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꽃의 향기가 뒤섞이고 거기에 비릿한 물비린내와 오래 묵어 퀴퀴해진 흙의 향내가 범벅된 냄새였다.


아무리 좋은 향이라도 과하면 머리가 아플진대, 이처럼 두서없이 버무려진 냄새 덩이는 견디기 힘들었다.


‘차라리 마물을 상대하는 게 편할 것이다.’


도방은 호흡을 멈추고 주군을 불러봤으나 이단은 깨어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은 채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실로 난감했다. 만약 자신은 상상조차 못 할 경지로 나아가는 각성중이라면 절대 방해해선 안 되겠지만, 이전에 한번 경험한 입마(入魔)중인 것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깨워야 했다.


도방이 고민하던 차에, 이단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도방은 무언가 잘못돼 가는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가 한발 다가서려는데, 이단의 얼굴이 갑자기 검은 이무기의 얼굴로 변했다. 도방의 얼굴이 사색이 됐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화령의 얼굴, 즉 화사한 꽃의 형상이 되었다. 그러다 갑자기 처음 보는 녹색 머리칼의 노인이 나타났다.


마음이 다급해진 도방이 이단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보이지 않는 강력한 반탄막(反彈膜)에 의해 튕겨 나갔다. 도방이 사당의 구석에 처박히고, 제 얼굴로 돌아온 이단이 서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 잠시 연록빛 광채가 반짝이다 사라졌다.


“도방, 자네 거기서 뭐 하고 있는가?”


도방은 자신의 우스운 꼴에도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창경궁 환취정(環翠亭).


희정당에서 이어(移御)한 임금은 며칠째 자리에 누워 정사를 돌보지 못했다. 임금의 옆에서 어의(御醫)가 진맥을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왕대비 김씨(인원왕후)와 중전(선의왕후)이 초조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사실 대비와 중전의 사이는 각별하지 못했다. 대비 김씨는 연잉군의 모친인 숙빈 최씨와 친분이 두터워, 연잉군이 세제로 책봉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그를 양자로 입적시켜 든든한 후견인 노릇을 했으니, 정치적으로 따지자면 현 임금 내외와는 다른 이해를 가진 것이다.


하지만 성상의 건강은 나라의 큰일이었으니 어의의 긍정적인 소견을 기다리는 마음은 매한가지일 것이다.


“대비마마, 중전마마,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어의의 첫마디에 두 여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제 하늘의 아량에 기대는 수밖에 없을 듯하옵니다.”

“뭐라? 어의가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대비가 노성(怒聲)을 터뜨렸다. 고개를 푹 숙인 어의는 다음 할 말을 찾고 있었다. 임금은 진기가 서서히 고갈돼 이제는 음식을 떠넘기지도 못하고 있었다. 탕약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이대로는 용상을 호전시킬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옥체에 부담될까 저어되어 탕약의 농도를 점점 낮추어 가고 있사온데, 두 분 마마의 명이 계신다면··· 조금 더 농도를 높여볼까 하옵니다.”


대비와 중전의 시선이 교차했다. 대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중전이 어의에게 물었다.


“어의의 판단은 어떠하오? 전하의 기운을 되살릴 방도가 된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그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오.”

“소신(小臣)의 판단은··· 시도할 가치는 있어 보이나이다.”

“알겠소. 그럼 그리하도록 하시오.”

“네, 마마.”


어의가 떨리는 걸음으로 침전을 떠나고, 왕대비가 중전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나라만신(國巫)을 불러 치병의례(治病儀禮)라도 치르게 해야 할 듯싶네. 마음 단단히 드시게. 중전.”


중전 어씨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환취정 밖에서도 어의를 기다리는 자들이 있었다. 대소신료들이었다. 임금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는 함부로 퍼뜨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지만, 정치적인 풍랑을 대비하려는 신료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일 수밖에 없었다.


곧 침전에서 물러 나오는 어의를 소론의 중신들이 둘러싸고는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맨 앞에는 김일경이 서 있었다. 어의는 김일경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중신들 사이에서 무거운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김일경은 하늘을 보며 한숨을 짓다가 동궁전 쪽을 바라보며 옹골찬 눈빛을 빛냈다.


‘이제는 정말 결단을 내려야겠구나.’


목호룡이 알아본바, 자신에게 권능을 보인 암종이라는 자에게서 이상한 점은 드러나지 않았다. 차라리 무엇이라도 한 줄 나왔으면 좋으련만, 이상하리만치 정보가 없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다. 하지만 그에겐 고민할 시간이 별로 없어 보였다.


*****


담 너머 동궁전 성정각에도 무거운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연잉군은 노심초사 금상(今上)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환취정의 동정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세제로서 마땅히 문안을 드리러 찾아봬야 했지만, 중전의 마뜩찮은 시선이 부담스러워, 스스로 행한 죄로 찔리는 바가 있어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가 음식에 섞어 제공한 탁기(濁氣)는 아직 효력을 발하지도 않았지만, 연잉군으로서는 지레 찔려서 연결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의에게 알아보았느냐?”


방금 들어온 환관 변일에게 연잉군이 채근하듯 물었다.


“저하, 워낙 위중한 상황인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어의 영감은 본인의 입장도 있어 함부로 입을 열진 않았지만 근래 보기 드문 어두운 표정이었고, 환취정 앞에 모인 소론 중신들의 낯빛도 상당히 무거워 보였습니다. 아울러···”

“아울러?”

“대비전 나인들에 따르면, 왕대비마마께서 국무당(國巫堂)을 불러들인다 하십니다.”

“대비께서? 흠··· 곧 대비전으로 가야겠네. 기별을 넣게나.”

“네, 저하.”


지금 궐내에서 연잉군에게 정확한 이야기를 해줄 사람은 왕대비 외엔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지지해 준 은인이자 양모(養母)였다. 소론의 감시가 엄중해 대비에게 부담될까 근래에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앞날을 상의하려면 찾아뵈어야할 듯싶었다.


변일이 물러간 뒤, 익위사 우익위 김동찬이 들어왔다. 전국을 뒤져서라도 박광을 찾으라고 하명했던 터였다.


“저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그래, 전령들은 띄웠는가?”

“그게··· 익위사의 전령들을 각 수령 방백에 띄우려던 차에 좌포청 종사관으로부터 의외의 얘기를 들었나이다.”

“무슨 얘기를?”

“우시직의 목패를 든 자가, 한강 망원정 일대를 탐문하고 다니고 있다 합니다.”

“뭐라? 그럼 광이, 아니 우시직이 한양에 있었단 말인가?”

“지금 확인중인데, 그와 마주친 포도청 군사가 진술한 용모파기에 따르면 우시직이 확실해 보입니다.”

“그래?”


연잉군의 얼굴에 실낱같은 기대감이 퍼져 올랐다.


“그런데 망원정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 그게, 좀 황당한 이야기여서 보고를 올리기 외람되오나, 엊그제 그 일대 한강에서 이무기가 출현했다는 풍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뭐라, 이무기? 일단 알겠네. 그럼 우익위는 전 인력을 도성에 집중해 하루빨리 우시직을 찾도록 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저하.”


연잉군은 잇따른 기사(奇事)들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신이 눈으로 이미 목령을 목격한 바 있었고, 박광으로부터 그와 같은 이물(異物)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단이라고 하는 정체가 묘연한 사내에게서도 신비감을 느낀 바 있었다.


‘이 녀석, 설마 그동안 도성에 있었단 말인가? 대체 도성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야.’


*****


익위사의 무관들이 박광을 찾아 도성 일대를 탐문하기 시작한 그날 저녁, 박광은 흥인지문 남쪽 광희문(남소문) 근처 이중원의 집에 있었다.


성상의 기운이 날로 쇠하며 궐내 분위기가 뒤숭숭했지만, 우림위장 이중원은 낮에 받은 특별한 연통(連通)에 퇴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십여 년 지기인 환단계주 마루한이 보낸 기별이었기 때문이다.


“여어, 계주 그동안 무탈하셨소?”

“허허, 높은 분이 되더니 신수가 더 훤해지셨구만? 오랜만이오. 풍당.”


풍당(風堂)은 이중원의 아호(兒號)로 친우들이 부르는 별명이었다. 오랜만의 해후에 두 중년 사내는 가릴 것 없는 인사와 덕담을 나눴다. 그런 모습을 보며 박광은 사내들의 묵은 우정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는데, 순간 이단의 얼굴이 떠오르자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왜 하필 그 자가 떠오르는 거야?’


어쩌면 그와 자신도 이십년쯤 후 저런 모습으로 만나게 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아쉬운 마음이 커졌다. 비록 미리내를 납치했지만 털끝 하나 손상 없이 귀히 대해줬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역심을 품고 마물을 끌어들인 것은 도저히 타협이 되지 않았다.


‘그가 암종만 아니었더라도, 이리 되진 않았을 건데.’


무슨 이런 운명의 장난이 있을까 싶어 점점 심란해지고 있는데, 이중원이 잡념을 끊어 버렸다.


“그래, 우시직은 세제 저하께 얼마나 총애를 받았기에 달포간의 휴가를 받아낸 건가? 이런 사례는··· 내 관직 생활 중에 듣도 보도 못한 특혜일세.”

“위장님이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그렇지요. 저야 뭐 특별한 재능도, 존재감도 없는 말단무관 아니겠습니까.”

“허허! 갑돌, 아니 마루한 자네, 제자 하난 똑 부러지게 두었어. 재기(才氣)가 넘쳐흐르니 탐이 날 지경일세. 그나저나··· 자네가 도성까진 어쩐 일인가?”


갑돌이란 이름이 나오자 짐짓 눈을 부라리던 마루한이 곧 진지한 표정으로 그간의 일들을 오랜 지기에게 털어놓았다. 곧 이중원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마루한이라는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입장에서 그의 말 하나하나 귀담아 들으며 믿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게 사실인가? 아니 자네가 그렇다면 사실이겠지. 허!! 어찌 그런 일이 벌어질 수가?”


이중원이 놀란 것은, 잇따른 마물들의 출현이 아니었다. 그 역시 한때 환단계 제자로 수련을 받은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를 경악하게 한 것은 ‘역모’이야기였다. 암종이라는 존재가 실재해왔고, 환단계와 비슷한 역할을 하던 흑결 조직이 암종과 함께 조선 왕실을 뒤엎으려 한다는 얘기는 놀람을 넘어 두렵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얼마 전에 한강에 나타난 이무기가 암종이 부리는 영물이었다는 말인가?”

“네, 위장님. 제가 그 이무기를 눈앞에서 목격하고 호되게 당하기도 했습죠. 모두 사실입니다. 그런데 혹시, 근래 왕실에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까?”

“흠··· 기밀사항이긴 하나 자네들이니 얘기하겠네. 사실 근래 주상 전하의 용태가 매우 좋지 못하다네.”


마루한과 박광의 입에서 동시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상께선 워낙 병약하셨으니··· 쯧쯧”

“세제 저하는 무탈하십니까?”


마루한은 임금 걱정을, 박광은 세제 연잉군 걱정을 하고 있었다. 밝게 웃으며 해후했던 세 남자의 저녁은 왕실 걱정으로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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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3 21.05.18 39 2 12쪽
53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2 21.05.17 31 2 11쪽
52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1 21.05.16 31 2 12쪽
51 자아독대(自我獨對): 자아와 마주하다 21.05.15 40 2 11쪽
50 흑룡비상(黑龍飛上): 흑룡이 나르샤 21.05.14 32 2 12쪽
49 오오낙락(烏烏樂樂): 까마귀들이 좋아 죽는구나 21.05.13 30 2 11쪽
48 귀궐애사(歸闕哀事): 궐로 복귀하니 슬픈 일이 생겼구나 21.05.12 31 2 11쪽
47 쌍룡대면(雙龍對面): 두마리 용이 마주하다 21.05.11 61 2 12쪽
46 야심심조(夜深心躁): 밤은 깊어 가고 마음은 바빠진다네 21.05.10 33 3 12쪽
» 풍전왕실(風前王室): 바람 앞에 왕실이어라 21.05.09 46 2 12쪽
44 목멱지자(木覓之子): 목멱의 아들아 21.05.08 48 2 12쪽
43 탐색망흔(探索蟒痕): 이무기의 흔적을 찾아서 21.05.07 43 2 12쪽
42 해오집맥(解誤執脈): 오해를 풀고, 맥을 잡노라 21.05.06 51 2 11쪽
41 반월혹인(半月惑人): 반월이 사람을 혹하게 하는구나 21.05.05 42 2 11쪽
40 기린휘능(起鱗揮能): 비늘을 세워 권능을 휘두르다 21.05.04 49 2 12쪽
39 백호각성(白虎覺醒): 백호의 능력을 각성하니 21.05.03 58 2 11쪽
38 복수불수(覆水不收):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지 못하오 21.05.02 41 2 12쪽
37 생사기로(生死岐路): 생사의 갈림길에 서다 21.05.01 40 2 11쪽
36 작우금적(昨友今敵): 어제의 벗이 오늘의 적이라 21.04.30 41 2 11쪽
35 상호취원(相互取願): 서로 원하는 바를 취하노라 21.04.29 60 2 11쪽
34 이인심란(二人心亂): 두 사람의 마음이 어지럽더라 21.04.28 76 2 11쪽
33 흑침백노(黑侵白怒): 흑이 침범하니 백이 노하다 2 21.04.27 44 2 11쪽
32 흑침백노(黑侵白怒): 흑이 침범하니 백이 노하다 1 21.04.26 99 2 11쪽
31 취명사암(取明捨暗): 어둠을 버리고 빛을 누릴 것이다 21.04.25 66 2 12쪽
30 괴수대전(怪獸大戰): 괴수끼리 크게 한판 붙다 21.04.24 68 2 11쪽
29 사탐유육(蛇耽油肉): 뱀은 기름진 고기를 좋아한다 21.04.23 54 2 13쪽
28 용망동주(龍蟒同舟): 용과 이무기가 한 배를 타다 21.04.22 45 2 12쪽
27 화령계망(花靈啓蟒): 화령이 이무기를 깨우쳐 주는구나 21.04.21 9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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