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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메의 서재입니다.

흑룡이 나르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무협

왕잼
작품등록일 :
2021.03.28 11:18
최근연재일 :
2021.05.18 18:00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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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6
추천수 :
140
글자수 :
277,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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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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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상호취원(相互取願): 서로 원하는 바를 취하노라

DUMMY

병든 용을 잡는데 쓸 탁기환만 전하는 것이라면, 굳이 이단 본인이 나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까마귀를 통해 변내관에게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을 받아와야했다.


연잉군에게 부탁했던 것. 그가 제대로 구했다면 그것은 대계(大計)의 완결판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또 하나, 마음에 이상한 기운이 스며드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인질로 잡아온 미리내를 마주할 때마다 칠흑으로 다져온 마음이 요동치며 탈색되는 기분이었다. 옆에 있으면 또 언제 발길이 향할지도 모를 일, 무조건 거리를 두기로 했다.


지난번 연잉군과의 첫 번째 만남은 후원 쪽에서였지만 이번엔 동궁전으로 오라 했단다.


‘신중하기로 유명한 잠룡에게도 이런 대담한 면이 있었나?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


동궁전인 성정각 바로 좌측에는 임금의 처소인 희정당이 있고 그 뒤편에 왕비가 머무는 내전, 대조전이 배치돼 있었다. 당연히 가장 경비가 삼엄한 곳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니 약간은 긴장감이 들기도 했지만 변내관과 익위사 무관들과 동행하니 아무도 가로막는 자는 없었다.


동궁전을 향하면서 이단은 혹시나 주위를 살폈다. 지난번엔 몰랐지만 수연(중전 어씨)이 자신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처소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도 자신을 봤다면, 이번에도 어쩌면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기대반 우려반의 마음이었다.


수연이 향기로운 배꽃을 닮았다면 인질로 잡아온 미리내는 청초한 수선화같은 느낌이었다. 순간, 이단은 두 여인을 비교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에 깜짝 놀랐다. 쓸데없는 마음을 눌러주고 앞서가는 변내관의 발걸음에 집중했다.


“또 뵙습니다. 저하”

“허허, 어서오시오. 이공”


잠룡과 형식적인 안부 인사를 나누고 지난번과 같이 필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먼저, 자신이 준비해온 탁기환을 연잉군에게 건넸다.


“환약 같은데···, 아주 향기로운 화향(花香)이 나는군. 아주 좋은 향일세.”


필담중임에도 연잉군이 말을 꺼낸 것은, 그만큼 신기한 물건을 봐서 놀랐다는 뜻일 것이다. 화향이라···, 아마 화령을 삼킨 이후, 자신의 내공에도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허나,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향이니 나쁠 것은 없다고 이단은 생각했다.


이단이 종이 위에 적어가는 용법과 효능을 보면서 연잉군의 눈이 점점 커져갔다.


탁기환은 이단이 자신의 체내에서 탁기의 정수를 뽑아내 환약처럼 만든 것이다. 이무기 삽살이가 특히 좋아했는데, 탁기를 먹고사는 마물들에겐 약이 될 수 있지만, 평범한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


일반적인 독약이 즉시 몸에 퍼져 사망에 이르게 한다면, 이것은 서서히 몸속에 퍼져 당장은 이상증세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주문을 통해 탁기가 활동하기 시작하면 몸의 기혈이 막혀 생명이 꺼지게 할 수 있었다.


독약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단은 그중 하나를 먹어보였다. 자신의 몸에서 뽑아낸 탁기로 만든 것이니 이단에겐 보약과 다름없었다. 연잉군의 입에서 놀랍다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세제 저하는 절대 드시면 아니 되옵니다.

-걱정 마시게. 금단의 환약이로군.

-물에 잘 녹기 때문에 음식이나 음료에 넣어 올리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습니다.

-그래? 누구도 의심할 수 없겠구만···.


연잉군의 표정은 상당히 상기돼 있었다. 표정 변화에 신중한 왕세제였지만, 이단 앞에서는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왕위계승 일순위였지만 사면초가 신세인 연잉군에게 이단의 존재는 평범한 지푸라기가 아닌 굵은 동아줄로 보였을 것이다.


탁기환이 든 자기병을 받아든 연잉군이 답례하듯이 화첩(畫帖) 하나를 건넨다.


“이공이 부탁했던 걸세.”


필담은 끝났다. 조심스레 화첩을 받아드는 이단의 얼굴에도 표정 변화가 나타났다. 기대감이 잔뜩 차오른 표정이었다.


<동궐도형(東闕圖形)>. 창덕궁의 설계도면이었다.


대충 내용을 훑어보니, 자세한 치수와 함께 풍수의 내력까지 자세히 기록돼 있었다. 이단은 화첩을 조심스레 갈무리하고 일어선다. 연잉군에게 고별인사를 올리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저하, 사냥 준비가 끝나시면, 변내관을 통해 기별 주십시오.”


*****


쌍선봉 침투작전이 짜여졌다. 사람 다섯보다 강한 전력(戰力)인 괴수 하나를 먼저 풀어서 혼란을 일으킨 다음, 그 사이에 미리내를 빼온다는 아주 단순한 작전이었다.


상대의 전력을 정확히 모른 상황에서 어떤 변수가 튀어나올지 모르지만 그런 것까지 고려할 상황은 아니었다.


“불똥이 풀고, 미리내를 빼온다. 더 이상 명료할 수 있을까요?”


박광이 조원들의 의견을 물었을 때, 신중하기 그지없는 조생원이 지형지물과 오행설을 들먹이며 세밀하고 복잡한 전략을 제시하려다가 박광이 째려보는 바람에 입을 꾸욱 다물어 버렸다.


불똥이가 돌진해 적의 본진을 휘저어버리면 육두와 박광이 보초 둘을 처리하고 미리내를 구출할 것이다. 공대는 원거리에서 활로 이들을 지원하고, 조생원과 두루는 퇴로를 마련하기로 했다.


지금 때가 신시(申時:오후3~5시)말쯤이니, 해 저물기 전에 끝내야 하고 해 저물 때 도주를 해야 했다. 올 때처럼 불가사리를 타고 도망가면 아무도 쫒지 못할 것이다.


한편, 목옥에 갇힌 미리내는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무기를 품고 있는 암종이라는 사내는, 생각만큼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악(惡)해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나쁜 일을 많이 겪어서 탁한 기운이 많이 쌓였을 거라고 추측했다.


아직 어려서 남녀관계의 감정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박광 오라비를 대할 때와는 다른 감정이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광 오라비는 가장 믿음직한 존재였다. 떨어져 있게 되면서 그립다는 감정이 생겨났고 당연히 신랑각시가 될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반면에 암종에 대해서는 연민 같은 감정이 생겨난다. 상처를 치료해 주고 싶고 밝은 기운을 되찾게 해주고 싶다. 두 남자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이 시끄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가로 달려갔더니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괴물이 날뛰고 있었다. 미리내의 큰 눈이 더 커져버렸다.


*****


불가사리가 신나게 설치고 있다. 주위에 번쩍거리는 쇳덩이가 지천(至賤)이었다. 맛난 식사감인 쇠붙이를 들고 휘두르는 자들을 해치워야 맛있게 빼앗아 먹을 수가 있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계곡을 후벼 파고, 인간들의 비명소리가 메아리쳤다. 불똥이가 땅에 떨어진 무기들을 아그작거리며 씹어 먹는 소리는 흑결 무인들을 소름 돋게 했다.


목옥 안에서 더 많은 흑의 무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선술을 익히지 않았다면 아무리 무예가 고강해도 마물을 상대할 수는 없다. 게다가 오랜만에 쇳덩이를 포식하게 된 욕구충족 때문인지 불똥이의 몸은 후끈 달아올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객기로 덤볐다가 밟혀 죽거나 타죽은 자가 벌써 대여섯이다. 흑선기를 연마한 도객들만이 거무스름한 묵기(墨氣)를 칼에 두르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소란을 틈타 박광과 육두가 목옥을 지키는 보초들에게 접근했다. 둘이 보초 하나씩을 처치하고 문을 부수려는 찰나, 옆의 큰 목옥에서 튀어나온 누군가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흑결주 마달이었다.


“이런 육시랄 것들! 니네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순간, 마달과 육두의 눈이 맞았다. 생긴 모양이나 들고 있는 칼이나 자신과 흡사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서로 강하게 끌린 것 같다. 육두가 박광에게 소리쳤다.


“육시랄, 빨랑 델꾸가!”


그러고는 자신을 닮은 자, 마달을 막아섰다.


영매들을 이끄는 무방은 불똥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소환했던 불가사리였다. 언젠가부터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감응이 없더니만 왜 여기까지 와서 설쳐댄단 말인가? 통제의 끈을 잡기 위해 주문을 외워보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무방이 영매들을 모으더니 새로운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러자 계곡 폭포수에 큼지막한 결계의 구멍이 생기더니 그 안에서 무언가 기어나오고 있다.


거대한 거북처럼 생긴 괴수였는데, 보통 거북과는 달리 새의 목에 뱀의 긴 꼬리를 가진 특이한 괴물로 산해경(山海經:중국의 고대 백과서)에 기록된 바 있는 선귀(旋龜)라는 영물이었다.


-끼루루


마치 새울음 같은 소리를 낸 선귀가 긴 목과 꼬리를 채찍처럼 휘돌리더니 빙글빙글 회전하며 불가사리를 향해 부딪혀갔다.


-쾅!!


목옥의 문을 격하게 부순 박광이 안에 들어섰을 때, 누군가가 맹렬하게 덮쳐왔다. 박광은 피하지 않고 팔을 벌려 안아주었다. 미리내였다. 둘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광 오라비! 올 줄 알았어. 정말로 올 줄 알았어. 엉엉”


미리내가 목에 꼭 안겨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 탈출만 하면 된다. 육두가 마음에 걸리지만, 워낙 싸움을 잘하는 양반이니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어서 나가자.”


미리내를 들쳐 업은 박광이 목옥을 빠져 나왔는데, 시퍼런 칼을 든 흑의인 십 수 명이 목옥을 에워싸고 있었다. 불똥이를 보니, 웬 거대한 거북괴물과 엉겨 붙어있고, 육두는 자기랑 똑닮은 장년 사내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포위를 당했다면 빠져나가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찾아내. 제발!’


박광의 눈과 뇌가 태어나 가장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


‘이제 팔부능선을 넘어섰구나.’


감회에 젖은 이단이었다. 참 오래 걸릴 줄 알았던 역천대계가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병든 용을 없앨 수단을 잠룡에게 건네고, 그토록 원하던 도면을 손에 넣었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궐의 많은 장서가 불탔던지라 이게 남아있을 것이라고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남아있다 해도 어디에 보관돼 있는지 알 길이 없었으니까.


지난번 직접 몸을 움직여 궐에 잠입했지만 박광에게 걸려 실패한 이후 반쯤 포기하고 있었던 터라 기쁨이 더 컸다. 하지만, 이단이 기분 좋게 흑문을 통해 쌍선봉으로 돌아온 순간 보게 된 것은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순간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한 기분이 됐다. 한쪽에선 거대한 괴물 둘이 얽혀 싸우고 있었고, 흑결주 마달은 어떤 멧돼지같은 놈에게 백정칼을 휘두르며 욕짓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아차 싶어서 목옥 쪽을 보니, 미리내가 어떤 사내의 등에 업혀있고 자신의 수하들이 그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묘하게 기분 나쁜 생각이 들면서 이단은 바로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 뒤를 도방이 신속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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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연재 공지 21.03.28 132 0 -
54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3 21.05.18 40 2 12쪽
53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2 21.05.17 32 2 11쪽
52 용쟁호투(龍爭虎鬪): 용과 범이 맹렬히 싸우다 1 21.05.16 32 2 12쪽
51 자아독대(自我獨對): 자아와 마주하다 21.05.15 41 2 11쪽
50 흑룡비상(黑龍飛上): 흑룡이 나르샤 21.05.14 33 2 12쪽
49 오오낙락(烏烏樂樂): 까마귀들이 좋아 죽는구나 21.05.13 31 2 11쪽
48 귀궐애사(歸闕哀事): 궐로 복귀하니 슬픈 일이 생겼구나 21.05.12 32 2 11쪽
47 쌍룡대면(雙龍對面): 두마리 용이 마주하다 21.05.11 62 2 12쪽
46 야심심조(夜深心躁): 밤은 깊어 가고 마음은 바빠진다네 21.05.10 34 3 12쪽
45 풍전왕실(風前王室): 바람 앞에 왕실이어라 21.05.09 46 2 12쪽
44 목멱지자(木覓之子): 목멱의 아들아 21.05.08 49 2 12쪽
43 탐색망흔(探索蟒痕): 이무기의 흔적을 찾아서 21.05.07 44 2 12쪽
42 해오집맥(解誤執脈): 오해를 풀고, 맥을 잡노라 21.05.06 52 2 11쪽
41 반월혹인(半月惑人): 반월이 사람을 혹하게 하는구나 21.05.05 43 2 11쪽
40 기린휘능(起鱗揮能): 비늘을 세워 권능을 휘두르다 21.05.04 50 2 12쪽
39 백호각성(白虎覺醒): 백호의 능력을 각성하니 21.05.03 59 2 11쪽
38 복수불수(覆水不收):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지 못하오 21.05.02 42 2 12쪽
37 생사기로(生死岐路): 생사의 갈림길에 서다 21.05.01 41 2 11쪽
36 작우금적(昨友今敵): 어제의 벗이 오늘의 적이라 21.04.30 42 2 11쪽
» 상호취원(相互取願): 서로 원하는 바를 취하노라 21.04.29 61 2 11쪽
34 이인심란(二人心亂): 두 사람의 마음이 어지럽더라 21.04.28 77 2 11쪽
33 흑침백노(黑侵白怒): 흑이 침범하니 백이 노하다 2 21.04.27 45 2 11쪽
32 흑침백노(黑侵白怒): 흑이 침범하니 백이 노하다 1 21.04.26 100 2 11쪽
31 취명사암(取明捨暗): 어둠을 버리고 빛을 누릴 것이다 21.04.25 67 2 12쪽
30 괴수대전(怪獸大戰): 괴수끼리 크게 한판 붙다 21.04.24 69 2 11쪽
29 사탐유육(蛇耽油肉): 뱀은 기름진 고기를 좋아한다 21.04.23 55 2 13쪽
28 용망동주(龍蟒同舟): 용과 이무기가 한 배를 타다 21.04.22 46 2 12쪽
27 화령계망(花靈啓蟒): 화령이 이무기를 깨우쳐 주는구나 21.04.21 99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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