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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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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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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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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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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209화

DUMMY

정우와 주리가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핀 공터에서 알몸이 된 채 서로를 꼭 껴안고, 천 지부장이 이트킨 소련 총영사에게 붉은기 훈장을 수여받던 그 시간, 나카하라 가즈오 경무국장은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분노를 삭히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심화 때문에 피가 머리로 몰리는 지끈거리는 느낌이 시간이 갈 수록 강해진다. 누가 터트리지 않는다면 그의 머리가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뜨겁게 몸이 달아오르는 통에 누가 들어왔다가는 그 더운 기운에 놀랄 것 같았다.


그의 책상 앞에는 무라타 경부보가 가져온 전문이 있었다. 그 전문을 본 순간, 국장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다는 게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전문은 내무성에서 왔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금일부로 나카하라 가즈오 경시감은 치바(千葉)현 경찰본부장으로 발령되었음. 5월 19일까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직무를 마무리하고 인수인계 준비에 착수할 것.-


이 짤막한 전문에 국장은 1시간 동안 곳곳에 전화를 걸었다. 내무대신실, 내무부대신실, 경시총감실, 안면이 있는 중의원 의웓들. 그러나 내무대신은 부재중이라며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무 부대신은 자신도 처음 듣는 소리라며 자세한 사항을 알면 알려주겠다고만 하였다. 경시총감은 내무성에서 내린 결정이고 어디까지나 2/4분기 정기인사일 뿐인데 왜 그렇게 흥분하냐고 물었다. 중의원 의원들이야 자기들도 모른다고 한다. 하기야 경찰 외부 인사에게 하소연을 해봤자 유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국장은 확신했다. 이건 음모다. 자신이 조선에서 맡은 수사를 완전히 무산시키려는 음모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리 갑작스럽게 인사이동 통보를 내린단 말인가? 절차상 본인에게 먼저 의견을 물어본 뒤 유예기간을 거쳐서 이동되어야 하는 게 순리가 아닌가?


국장은 처음에는 이 사태의 배후로 원로대신 사이온지 긴모치 공작을 떠올렸다. 공작 측근이라는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 연쇄강도 사건의 주범으로 극히 의심되는 자를 계속 수사한 대가를 이런 식으로 치르게 만든 것인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아니었다.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대신이 중재를 하여 공작이 수사 자체는 납득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직 수사결과도 나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보복을 한다고 생각하기에는 이상했다.


그렇다면 누구의 짓인가? 국장은 사이온지 공작의 개인감정보다 더 큰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는 일을 떠올린다.


닷새 전, 전라북도 군산에서 밀수 범죄자들을 체포해 경성으로 오던 호송차량이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습격당했다는 긴급 보고를 받았을 때, 국장은 직감적으로 봉천 특무기관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격노했다. 그를 가지고 논 불령선인 천남건이 제공한 정보로 이들을 붙잡았다는 언짢음도 합쳐졌다. 감히 이것들이 한번 해 보자는 건가? 경찰의 정당한 법집행을 방해하겠다는 건가? 조선 전체의 경찰병력을 모두 동원해서라도 놈들을 죄다 체포하고 말겠다!


간부들을 불러놓고 활화산같이 격노를 토해내던 국장은, 아직 그자들이 관동군의 특무대원이란 직접증거가 없다며 고정하라는 부하들 덕에 겨우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관동군이 이 사태의 배후라는 점은 아무리 봐도 명약관화했다. 대관절 조선 관내의 어느 범죄조직이 경찰 호송차를 습격하고 용의자들을 빼갈 수 있을 만큼의 대담성과 무모함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전라북도경찰부발 보고서는 용의자들의 특성을 상세히 전달하고 있었다. 도로상에 장애물을 설치해 차량의 이동을 방해한 뒤, 총기를 사격해 타이어를 터트려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차량으로 다가와 총을 들이대 경찰들을 제압하고는 용의자들을 빼갔다. 이 모든 것이 매우 신속하고 물 흐르듯 전개되었다고 보고서는 전하였다. 용의자들이 속한 밀수조직의 행보라기에는 지나치게 전문적이었다.


이것은 분명 대일본제국 경찰에 대한, 폐하의 경찰에 대한 도전이었다. 조선 경찰의 총책임자로서 도무지 묵과할 수 없다.


그렇게 분기에 찬 일장연설을 하며 제압당한 경찰의 증언을 토대로 용의자들의 몽타주를 작성해 전국에 배포하라고 지시했던 그때, 우가키 총독이 그를 찾는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흥분을 진정하고 총독 집무실에 들어간 국장은, 전혀 믿을 수 없는 말을 듣고 말았다.


“그 관동군 특무대 장교가 얽힌 아편밀수 수사건 말이오.”


총독이 잠깐 별 중요하지 않은 얘기로 잡담을 하다, 적잖이 망설이는 눈치로 운을 떼었다.


“그 수사는 전부 헌병대로 이첩하는 게 좋겠소.”


나카하라 국장은 어딘가 세게 얻어맞은 표정이 되었었다.


“제가 잘못 들은 것입니까?”


국장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진다. 무어라 항변하려 들 시간도 없이, 총독이 빠르게 입을 연다.


“내가 보기에 이 일은 경찰이 관여할 일이 아닌 것 같소. 국장 말대로 이건 경찰 관할구역 내에서 벌어진 일이기는 하나, 근본적으로 관동군 내부에서 터진 일이오. 군의 일은 헌병이 수사하는 것이 맞소. 그렇게 결정하였으니 지금까지의 수사 정보를 모두 조선헌병사령부에 보내도록 하시오.”


나카하라 가즈오 경무국장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하고 싶은 말들이 우르르 튀어나온다. 그러나 그 말들이 서로 충돌해대는 통해 입이 제대로 열리지 않는다. 잠시 총독을 노려보듯이 침묵을 유지하던 국장은, 결국 참았던 분통을 터트리고 만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일전에는 헌병대와 공조해 수사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지금 그러라고 하시는 겁니까? 소관은 전혀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총독은 눈썹을 까닥이고 국장의 매서운 눈을 순간 피하면서도, 지시를 물릴 생각이 없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사건은 제국육군의 체면이 걸린 일이기도 하오. 황군의 장교가 아편밀수에 가담했다는 것이 밖으로 드러났다가는, 지난 사변으로 높아진 군의 명예가 크게 실추될 것이오. 이건 폐하와 국민이 황군에 바치는 신뢰의 문제 정도가 아니오. 이 건이 경찰 공개수사를 통해 대중에 공개되고 언론에 보도된다면, 소련과 지나 같은 적성국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소? 그놈들의 선전기관이 이 문제를 가지고 우리 제국과 제국육군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해 떠들어댈 것이 분명하지 않소? 최소 몇 달은 이걸 가지고 우릴 조롱할 것이오. 그러니 이 문제는 보안이 더 확실히 보장되는 헌병대가 처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오.”


국장은 그 논리에 즉시 반박을 제시했다.


“각하! 분명 소련과 지나가 그렇게 나설 것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도리어 우리 제국의 투명성을 만 천하에 알릴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의 문제를 감추지 않고 바깥으로 드러내어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고 있음을 만천하에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제국의 우월성을 드러낼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사법처리를 하는지도 모르는 헌병대에게 사건을 맡긴다는 것은, 만약 적이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위상을 더 크게 실추시키려고 날뛰게 만들 수 있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총독은 이 문제로 경무국장과 합리적인 토론을 할 의사가 없는 모양이었다.


“결정권자는 본관임을 국장도 잘 알지 않소? 몇날 며칠을 심사숙고하고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오. 국장 말도 일리가 있으나, 내가 보기에는 헌병대가 모든 수사를 맡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하오. 내 결정을 따라 주시오.”


경무국장은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뜨거워지다 못해 김이 피어오르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한때 방 안에서 고등문관시험 합격을 목표로 죽어라 공부하던 히로요시의 뒷모습에서처럼.


대체 왜 총독이 저런 지시를 내리는가? 총독이 육군대장 출신이고 지금도 여전히 육군의 주요 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이상했다. 보고를 했을때만 해도 관동군 특무기관이 조선에서 아편장사를 한다며 화를 내던 그가 아니었던가? 총독이 헌병대와의 수사 공조를 지시하긴 했지만, 그것은 사건이 군의 일이기도 하니 필요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 왜? 왜 이제와서 마음을 바꾸고 그런 결정을?


그때 한 가지 사실이 기억났다. 우가키 총독은 며칠 전인 4월 20일에, 용산의 제20사단 사령부에서 열리는 관동군과 조선군 소속 참전 군인들의 위문행사에 참석했었다. 경무국은 늘 총독의 경호를 위해 그의 일정과 이동동선을 비서실에서 전달받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사안이었다. 그때 관동군 사령관인 혼조 시게루 대장도 참석했다고 보고를 받았다. 그렇다면 그게?


“각하 소관이 한 말씀 묻겠습니다.”


우가키 총독은 국장이 방에서 나가주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잠시 망설이다 “말하시오.”라고 한마디 한다.


“지난번 사변에 참전했던 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열린 행사에 참석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관동군사령관을 만났던 것이 이 결정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 순간, 나카하라 국장의 눈은 놓치지 않았다. 우가키 총독의 눈동자에 순간 동요하는 기색이 서린 것이.


“말씀해 주십시오, 각하!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국장은 다시 물었다. 그가 경어를 쓰며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면, 취조실에서 용의자나 중요참고인을 대하는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가키 총독은 그의 강한 시선을 외면한다.


“본관은 그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가 없소. 국장도 공사가 다망할 터이니 이만 일을 보러 가는 게 좋을 것 같소.”


총독은 그 말을 하고 뒷짐을 진 채 창 밖을 내다보는 것이었다. 나카하라 경무국장은 부르르 떨면서도, “실례 많았습니다.”라며 집무실을 나오고 말았다.


국장은 그날, 오랜만에 집에서 홧술을 잔뜩 들이켰다. 정종이 목으로 쉴새 없이 넘어갔다.


“아유! 그만좀 드시우! 내일 출근은 어떡하려고 이러오!”


병이 네 잔째 사라지자, 결국 부인 코즈에가 잔소리를 하며 병을 치우지만, 국장은 “왜 가져가고 난리야!”라고 역정을 내며 병을 빼앗는다. 국장은 취한 나머지 “남편이 마시고 싶다는데 왜 참견이야! 참견이!”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쳐버렸다. 결국 코즈에는 “하이고! 잘나셨수! 맘대로 하시구려!”라고 성을 내고는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국장은 차오르는 취기 속에서 이를 갈았다. 그도 30년 가까운 경찰 생활 동안 무수한 외압과 위협을 받아 왔다. 사건을 덮으라고, 더 파고들지 말라는 경고와 압력이 위에서 내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조직과 신념이 부딛치면 항상 후자를 택했다. 그는 미친 놈이라는,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는 건 아랑곳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힐난을 여러 차례 샀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멸하면서 더 큰 공의를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경찰의 정수라 여긴 그였다. 그것이 현인신이신 폐하가 다스리는 제국을 위한 길이라고, 그것이 폐하께 진정한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가 경시감 자리에 올라온 것은 그런 면에서 대단한 행운이 작용하지 않으면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외압은 정도가 달랐다. 총독은 분명 관동군사령관과 모종의 거래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를 수사에서 배제하고, 사건의 전모를 암흑속에 묻어버리기에 충분한 체제를 갖춘 헌병대에 수사권을 넘기려는 것이었다. 그런 확신이 계속되자 울화통을 술로 잠재워야 했다. 그러나 취기에 겹쳐 오기가 솟아올랐다. 관동군이 무슨 짓을 하건 수사는 계속될 것이다. 감히 그의 수사를 방해할 수 없었다. 앞에서는 일단 헌병대에 수사자료를 넘기겠지만, 뒤에서는 총독에게 보고 없이,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며 수사를 독자적으로 진행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두고 봐라! 네놈들의 검은 거래를 낱낱히 파헤쳐 한바탕 터트리고 말겠다!


그 각오는 다음날 몰려오는 거센 숙취에 머리가 지끈거리면서도 똑똑히 기억하는 바였다. 그래서 국장은 할 일을 하였다. 하야시 센쥬로 조선군사령관과 그 밑의 헌병사령관을 만나 수사의 이첩을 해 주겠다고 하여 그들을 기쁘게 한 동시에, 자료들의 복사와 수사의 지속을 비밀리에 수행하라고 이 수사를 맡은 경무국 사법계에 지시하였다. 사법계장은 두려워하는 기색이었지만, 국장의 무거운 시선에 고개를 숙였다. 각 도의 경찰부에는 전라북도경찰부에서 공유한 용의자들의 인상착의를 공유하면서도 공개수배는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를 통해 헌병대 몰래 독자수사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 후인 지금 날아온 이 전문은, 그때의 각오를 모두 무너뜨릴 지경으로 만들었다.


총독 각하에게 가서 분노를 터트릴까? 치바로 발령되게 하라고 내무성에 부탁했냐고? 대체 뭘 숨기고 싶어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내가 불령선인 테러리스트의 암살모의를 막아 각하의 목숨을 구하는 데 역할을 한 것을 잊었냐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참지 못할 지경이 되었을 때, 희한하게도 머릿속에서 차가운 느낌이 퍼져나간다. 분노가 극한에 이르렀을 때 오히려 냉정한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이걸 가지고 굳이 총독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 아직 내지로 가기 전에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기한 내에 사건을 해결하고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나라를 지키고 폐하께 충성해야 하는 관동군이 사욕을 채운 것을 밝혀내고 말 것이다. 후임자는 자신만큼 열성적이지 않을 터이니 지금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이 냉정을 되찾고 있을 때, 무라타 겨웁보가 서류 하나를 들고왔다. 종로경찰서에서 제출한 정기보고서였다. 천남건을 두목으로 하는 불령선인 강도들의 수사경과가 기록된.


국장은 얼굴이 시뻘개진 자신을 보고 무슨 일 있냐고 걱정하는 무라타 경부보에게 태연한 척을 하고는, 보고서를 들여다본다.


진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천남건의 수하로 추정되는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은 보성전문학교의 조교수 오궁섭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건을 수사하기 위해 보성전문학교를 방문하였으나, 학교장 김병로는 계속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사장 김성수는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상황을 잘 모르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또한 무언가 숨기려 하는 기색이 있다. 보성전문학교 전체에 대한 압수수색으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나카하라 국장은 김병로와 김성수 모두 수상한 자로 여기는 고등계의 분석에 동의하고 있는 바라 보성전문학교에 대한 전면적 압수수색은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동의한다.


또한 이들이 미쓰이-카라스마 자원개발회사라는 위장회사를 차리고 운영하고 있었음이 수사로 드러났다. 이들의 목적은 중추원 참의이자 방직회사 사장인 한덕만에게 만주에서 석유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기를 쳐서 투자금을 받아내려는 속셈이라고 보고서는 명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해자임이 유력한 한덕만 참의 본인은 사기 피해자임을 급구 부정하고 있어서 경찰의 고발 종용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한 참의의 의사와 별개로 공개수배를 할 수 있도록 요청드린다는 것이 내용이었다.


국장이 보기에, 사기 피해자들은 꼭 자신이 사기당했음을 처음에는 부정한다.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할 리가 없다고 믿음으로서 심리적 타격을 최소화하려는 본능 때문이었다. 국장은 한 참의가 뭐라 하건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을 사기죄로 수배하려 마음먹는다.


그런데 그 다음 단락에서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다.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이 오궁섭 교수로 행세한다고 제보한 밀정이, 그가 총독부 관리로 추정되는 자와 같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 관리의 인상착의가 나카하라 히로요시 철도국 사무관과 극히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빙성 없는 제보로 파악하고 구태여 수사에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이 보고서 작성자의 견해였다.


그럴 거면 뭣하러 보고하냐는 것이 국장의 생각이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제보를 보고서에 반영하는 건 타자기 잉크를 낭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히로요시가 왜 불령선인들과 한패란 말인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총독의 전라북도 순방일정은 분명 철도국을 통해 노출되었을 것이다. 총독의 철도 이동 동선과 시간표 전부를 아는 쪽은 그곳이니. 그래서 철도국의 우정식 서기가 체포되어 강도높은 조사를 받고 범행을 시인했는데, 근래 들어와서 갑자기 자백한 것을 모두 번복하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우정식 서기가 체포되는 데는, 다름아닌 히로요시의 제보가 결정적이었다. 히로요시가 제보를 했기에 그를 체포할 수 있었다. 히로요시는 우정식 서기의 약혼 축하잔치에 참석해, 그의 방에서 불온문서들을 발견했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 방에서는 실제 위험천만한 불온문서들이 발견되었다. 망측하기 짝이없는 음란한 화보들도 함께.


그런데 그렇다면, 히로요시가 구태여 그의 방 안으로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걸까?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그 전에, 히로요시가 우정식과 친한 사이는 맞았는가? 동료 직원이라 할지라도 남의 사적인 공간에 멋대로 들어가는 것은 예의가 아님을 히로요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 히로요시가 개인공간에 들어가 불온문서들을 발견했다?


국장은 그러다가 쓴웃음을 짓는다. 내 의심이 과한 거겠지. 요 며칠 간에 정신이 메마를 일만 있어서 엉뚱한 생각이 나는 것이리라. 히로요시가 의도적으로 남에게 누명을 씌우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때, 무라타 경부보가 노크하고 다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국장님. 진해요항부 사령관이 전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진해요항부? 요나이 제독이?”


나카하라 국장은 해군 진해요항부 사령관 요나이 미쓰마사(米内光政) 해군중장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경상남도 진해에 있는 해군요항부의 사령관인 요나이 제독은 업무의 특성상 총독부에서 열리는 신년축하 행사 정도에나 경성에 오는 사람이었다. 가르마를 탄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단정히 빗어넘긴, 예의바른 인상을 주는 초로의 신사였다.


“연걸하게.”


국장은 수화기를 받아들고, 요나이 중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 국장님이십니까? 그간 격조하셨습니다. 신년 행사 이후로 처음이지요?


“예. 사령관께서도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의례적인 인삿말이 오고간 뒤, 수화기 너머의 요나이 제독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갑자기 이렇게 통화를 부탁드린 이유는, 경찰에 수사협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예? 수사요?”


해군의 수사요청? 원래 해군기지나 해군육전대 주둔지를 비롯한 해군 관련 구역의 해군 치안도 육군 헌병대가 관할하게 되어 있었다. 해군에도 수사 업무를 주관하는 특수경찰대가 있지만 치안유지는 임무가 아니다. 그런데 왜 경찰에 수사협조를 요청하는 것일까?


“어떤 사건이길레 그렇습니까? 헌병대가 관여하면 곤란한 사항입니까?”


- 그렇습니다. 헌병도 결국 육군이니까 말이죠.


요나이 제독의 말투에 불신감이 강하게 묻어났다. 육군 헌병대를 불신하는 것은 지금의 국장도 마찬가지라, 다소간이나마 동질감이 느껴진다.


“육군이 연루된 사안입니까?”


-그렇습니다. 우선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요나이 중장이 잠깐 숨을 고르고 말한다.


-우리 쪽에서 큰 예산횡령 사건이 있었는데, 횡령된 금액이 조선을 거쳐 만주로 이동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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