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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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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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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9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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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201화

DUMMY

후지무라 중위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서둘러서 확인해야 했다. 저 엄청난 위압감을 주는 자가, 헌병사령부 조사실 소속을 자처하면서도 이름 하나 밝히지 않는 저자가 정말 사령부 소속인지, 정말 군인인지 확인해야 했다. 느낌이 이상했다. 흥신소에서 의뢰했던 그날, 생각치도 못하게 느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감각이 여전히 생생하다. 아주 잠깐 마주쳤음에도 오금이 저려오던 그 눈빛. 그래서 감히 그 눈빛을 사장실 안에서 쏘아보낸 자가 누구인지 알아볼 생각도 못하였다.


그런데 저 자칭 헌병대좌와 마주치자마자 그 감각을 다시 느끼고 말았다. 분명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때 자신을 그렇게 졸아들게 만든 그 맹수와 같은 눈빛의 소유자가, 바로 저자라는 예감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정말 헌병 조사실 소속 대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확실히 헌병사령부에 확인해 보는 것이 올바른 절차였다. 잘못했다가는 자신 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피해를 볼 것이 불보듯 뻔하였다.


철도헌병 분견대의 사무실이자 휴게실 겸 통신실은 열차의 맨 끝 차량이었다. 후지무라 중위는 2등칸을 거쳐 3등객차로 들어간다. 아침나절임에도 3등칸은 꽉 차 있었다. 꾀죄죄하고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이 들어찬 3등객차는 들어가자마자 공기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땀에 절은 퀴퀴한 냄새가 풍겨왔다. 피곤에 지치고 삶에 지친 사람들의 눈이 갑자기 들어선 웬 양복장이를 보다가 만다.


후지무라 중위는 그 눈빛을 신경쓰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어느 순간, 위화감이 느껴졌다. 철도 헌병대는 1등객차와 2등객차를 사용할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 타는 앞 칸보다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막론하건 하층계급이 주로 타는 3등객차에서 집중적으로 순찰을 돈다. 그들이 문제를 더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벌써 3칸을 지나왔는데, 헌병을 한 명도 마주치지 못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헌병이 보이지 않는가? 평소라면 헌병 완장을 찬 2인1조나 4인1조 병력이 열차 내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허리춤의 군도와 권총집을 딸각거리며 힘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괜한 시비를 걸며 위세를 부리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3등객차의 4번째 칸에 들어서도 헌병은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위화감에 이상할 정도의 긴장감을 느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예감이 스멀거리며 기분나쁘게 올라왔다.


그 기분나쁜 감각은 열차 마지막 칸 앞에 다달아서 황당함과 기막힘으로 바뀌었다.

헌병 분견대가 주둔하는 마지막 칸 바로 앞에서 경비근무를 서고 있는 상등병 둘이, 벽에 등을 기댄 채 선 채로 자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도 코까지 골면서.


군기가 빠져도 정도가 있지! 후지무라 중위는 어이가 없다. 대체 어느 부대의 어느 경비가 근무를 이딴 식으로 한단 말인가?


후지무라 중위는 이 한심한 병사들을 깨우려고 “기상! 기상!”이라고 호통을 쳤다. 그런데 이 병사들은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호통에도 반응을 하지 아니한다. 하도 기가 막혀서 얼굴을 툭툭 치며 깨우려 들었다. 그런데 이것도 이상했다. 아무리 이 병사들의 뺨을 찰싹찰싹 쳐도 계속 잠만 자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피곤함을 느낀다 해도, 이 정도면 일어나야 하는게 정상 아니던가? 소지 중인 권총과 군도를 누가 절도한다면 어쩌려고 이러는가? 대체 분견대장은 뭐하고 있기에 이런 군기문란을 방치한단 말인가?


그때였다. 갑자기 한 가지 불길한 가정이 떠올랐다. 육체의 피곤함 때문에 자연스럽게 수면상태에 이르면 깊은 잠에 들었더라도 누가 깨우면 일어난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소리를 지르고 뺨을 때려도 계속 수면을 취하고 있다. 지극히 부자연스럽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마치 마취제라도 투입한 것처럼.


그렇다면 정말로, 이렇게 깊은 잠에 빠져들게 하는 어떠한 것이 작용했다면? 자연스러운 수면이 아닌 부자연스러운 요소가 개입했다면? 그리고 누군가가, 이들을 잠들게 만든 것이라면?


후지무라 중위는 그 가정에 이르자마자, 마지막 칸으로 뛰어들다시피 들어갔다. 그 직후, 불길한 예감이 실제가 되었음을 보고야 말았다.


“이런 제기랄.”


후지무라 중위는 평소에 쓰지도 않는 비속어를 입에 담고 말았다. 철도헌병 분견대가 쓰는 칸막이로 분리된 통신실에서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무선전신기 앞에서 당직근무를 서야 할 통신하사관들과 통신병들은, 하나같이 그 자리에 쥐죽은 듯 미동조차 안하며 엎드려 있었다.


후지무라 중위는 재빨리 가장 가까운 자리의 상등병을 잡아서 호흡을 확인했다. 다행이도 호흡도, 맥박도 정상적이었다. 그러나 앞의 두 경계병처럼 바로 옆에서 고함을 질러도 깨어나지 않을 깊은 수면상태인 건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더 기가 막힌 것은, 무선전신기의 상태였다. 모스부호를 송출하는 무선전신기는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배터리들이 그를 약올리듯 죄다 사라지고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 상태로는 어떤 곳에도 연락할 수 없음이 자명하였다.


후지무라 중위는 칸막이 사이의 문을 열고 헌병 분견대 휴게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상황은 똑같았다. 헌병대 병력은 하나같이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코를 골고 있었다. 칸막이로 분리된 분견대장실에서도, 분견대장으로 추정되는 헌병소위가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푹 떨군 상태였다.


중위는 이 사태가 무슨 상황인지 빠르게 인식했다. 그는 여기까지 오며 합계 25명 정도의 헌병을 확인했다. 1개 헌병 분견대가 분견대장 포함 20명 내외의 병력으로 구성됨을 생각했을 때, 사실상 이 열차의 헌병 전체가 무력화된 것이었다. 그 말인즉슨, 현재 이 열차는 무법지대라는 것이다. 곳에서 누가 난동을 부려도, 누가 살인을 저질러, 누가 맨 앞의 기관실로 쳐들어가 열차를 장악해도 손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대체 누가, 어떻게 이들을 잠재울 수 있었는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걸을 따지고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지금 후지무라 중위와 그의 친구들은, 그 양이 얼마나 될지도 모르는 막대한 자금을 가진 그들은 심각한 위협에 처한 것이다.


제길! 중위는 왜 자신이 군도도, 권총도 소지하지 않고 왔는지 너무나도 후회스러웠다. 민간인으로 변장하느라고 군도와 권총은 여행가방 속에 넣고 온 차였다. 지금 그는 적수공권이었다.


그러나 재빠르게 대처할 수는 있었다. 중위는 헌병소위의 칼집에서 재빨리 군도를 빼냈다.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날을 잘 갈아둔 군도가 뽑혀져 나왔다. 평소 쓰던 군도가 아니라 손에 익지 않은 느낌이었지만, 그걸 따질 시간이 없었다.


중위는 권총집을 열고 권총을 챙기기 전에 우선 바깥으로 고개를 뺐다. 상황을 재차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때, 눈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야 말았다.


휴게실 바닥에 엉망으로 누워 있거나 벽에 등을 대고 있는 사람 형체 중, 방금 전까지 없던 게 있었다. 허리를 꽂꽂히 세우고 일어서 있는 형체였다. 희고 긴 조선옷 차림에, 긴장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해학적인 느낌의 가면을 쓰고, 오른손에 봉 같은 걸 든 자가 후지무라 중위가 들어온 문 앞에 떡 하니 서 있었다. 그가 든 봉이 열차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빛나 번쩍이며 금속제임을 드러내 보인다.


이 정체불명의 괴인은, 후지무라 중위가 권총을 뽑아낼 시간을 주지 않았다.


휙!


가면 쓴 괴인이 쏜살같이 그를 향해 도약한다. 그의 손에 단단히 잡힌 봉이 위에서 아래로 거세게 내리쳐진다.


후지무라 중위는 이 불시의 공격에 반사적으로, 하지만 침착하게 대응했다.


쨍!


휘둘러진 봉을 막 뽑혀진 군도가 막아낸다. 거센 소리와 함께 불똥이 튄다. 후지무라 중위는 한 차례 공격을 막아내자마자 삽시간에 자세를 잡는다.


“정체를 밝혀라!”


고함과 함께 군도가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온다. 후지무라 중위는 분명 저 가면 쓴 괴인이 이 사태와 절대적인 연관이 있음이 분명하다고 판단한다. 그 헌병대좌를 자처하는 정체불명의 사내와도. 저자를 잡아서 추궁해야 했다. 저자의 정체, 헌병분견대가 다 잠에 빠져든 이유, 이를 통해 저자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알아내야 했다.


그러나 가면 쓴 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단지 침묵을 유지하며 오른손에 잡은 쇠봉을 웅웅 휘두를 뿐이다. 그 자세와 속도, 그리고 전개되는 동작이 거센 동시에 날렵하다. 휙휙 휘둘러진 봉이 수십 갈래로 나눠지는듯 화려하게 날아들며 후지무라 중위의 급소 곳곳을 노려온다.


그러나 중위는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는다. 그의 군도가 챙챙 불꽃을 튕기며 날아드는 봉의 공격을 죄다 쳐내고 바로 반격으로 들어간다. 왼쪽으로 휘두르고 오른쪽으로 베고 정면으로 찌르고 들어간다.


그러나 중위는 급소를 노리진 않는다. 이 괴인의 무력화시킨 후 가면을 벗기고 추궁해야 했다. 그의 군도는 매섭게 휘둘러지지만 살기는 없었다. 그 때문에 중위가 전개하는 초식은 행동이 제약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억!”


후지무라 중위는 눈을 질끈 감는다. 괴인이 쓰지 않고 있던 왼손을 갑자기 앞으로 확 내밀었었다. 그 손에서 갑자기 흰 가루 같은 것이 확 뿌려진 것이었다. 갑자기 시야를 상실하며 당황함이 밀려온다.


후지무라 중위는 검을 반사적으로 마구 휘두르면서도,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는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라는 점을 찰나의 순간에 기억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휘두른 군도에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 중위가 급하게 눈을 비벼 겨우 시야를 흐릿하게나마 회복했을 때, 방금 전까지 눈 앞에 있었던 괴인은 휴게실 문을 열어젖히고 등을 보인 채 질주하고 있다.


놓칠까 보냐! 후지무라 중위는 재차 눈을 거세게 비비고 바로 추격에 나섰다. 저 망할 자식을 사로잡아 모든 것을 다 캐내고 말겠다!


괴인이 삽시간에 통신실을 지나 열차 문을 열어젖히는 게 보인다. 후지무라 중위는 오른발과 오른손을 뒤로 빼고 왼손에 도신을 올리는 자세를 삽시간에 잡고는, 양 다리에 힘을 있는 대로 주었다가 확 하고 앞으로 뛰어든다. 신선조에 있었던 그의 조부가 가르쳐주었으며 수도 없이 연습했던 수평찌르기 자세였다. 그의 몸이앞으로 거세게 돌진한다. 눌렸던 용수철이 튀어오르는 것처럼.


오른손에 잡힌 군도가 그자의 어깨죽지를 노리고 힘껏 내질러진다.


그러나 후지무라 중위의 손에는 사람 육체를 찌르고 드는 느낌이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괴인이 좁은 문 왼쪽으로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었다. 객차 문까지 뛰어 나간 중위는, 바로 앞의 3등객차 안으로 괴인이 들어가지 않은 이상 간 곳은 하나밖에 없음을 바로 알았다. 객차 위였다. 사람 그림자가 위로 휙 사라지는 것이 다 보였다.


중위는 저놈이 무슨 속셈으로 위로 올라갔는지는 몰라도, 그곳이라면 숨을 곳도 없으니 잘 되었다고 판단한다. 중위는 군도를 입에 문 채 문 왼쪽의 사다리를 잡고 재빨리 위로 올라갔다. 열차가 느릿느릿하게 움직인 덕택에 생각보다 안정감 있게 올라설 수 있었다.


예상한 대로 괴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어오는 봄바람에 옷자락을 휘날리면서.


그런데 그 순간, 후지무라 중위는 이를 악물었다.


“저건 또 뭐야?”


괴인은 한 명만 있는 게 아니었다. 방금까지 상대한 괴인보다 더 눈에 띄는 자가 있었다.


그자는 승려였다. 삿갓을 눌러쓰고 잿빛 장삼과 갈색 가사를 휘날리고 오른손에 석장을 잡은 전형적인 조선 승려였다. 그러나 그 또한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가면을 쓰고 있었다. 검은 바탕의 가면에 붙은 길다란 눈썹과 수염이 기묘한 부조화를 이루어 언뜻 보기에는 웃음이 터질 법하였으나,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승려 복장을 한 정체불명의 괴인은 저만치에서 그를 향해 합장을 한다. 후지무라 중위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중위는 저 승복 차림의 괴인이 짐짓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자 기가 차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시 몰려오는 불길함에 얼굴이 굳어진다.


방금 전까지 맞붙은 괴인은 눈에 가루를 뿌려 시야를 차단해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등을 보이고 도주하는 쪽을 택했다. 흡사 그를 이곳으로 유인하려는 것처럼.


저들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가? 나 후지무라 토비자루를 다른 친구들과 동떨어지게 두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러나 그걸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찰나의 여유조차도 없었다. 저만치 있던 승복 차림의 괴인이 석장을 양손으로 잡고 붕붕 휘두르다 싶더니만, 눈 깜짝할 새에 그의 눈 앞으로 도약해 온 것이었다.


째앵!


금속과 금속이 서로를 강타하는 소리가 울려펴진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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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210화 +4 20.10.10 268 1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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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202화 +8 20.09.20 279 11 12쪽
» 201화 +14 20.09.19 267 10 13쪽
200 200화 +8 20.09.16 272 10 16쪽
199 199화 +8 20.09.13 280 10 17쪽
198 198화 +6 20.09.12 269 10 16쪽
197 197화 +8 20.09.11 266 11 17쪽
196 196화 +6 20.09.07 285 9 16쪽
195 195화 +10 20.09.04 267 10 15쪽
194 194화 +10 20.09.03 265 1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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