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PKKA 님의 서재입니다.

경성활극록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로맨스

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최근연재일 :
2023.08.15 19:04
연재수 :
332 회
조회수 :
107,936
추천수 :
3,801
글자수 :
2,778,318

작성
20.09.03 23:17
조회
264
추천
10
글자
20쪽

194화

DUMMY

청년들은 사부가 이미 다 대책을 세워놓았다고 하자 다들 놀랐다. 아무리 사부가 뛰어난 인물이라도, 위기상황이라고 보고받자마자 바로 해결책을 내놓은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부의 답변에, 그들은 일시적이나마 몸이 축 처졌다.


“당장 사무실 비운다. 나갈 때는 절대 맨 얼굴로 다니지 말고.”


지부장은 그 말을 한 뒤 제자들을 돌아보았다.


“꼭 내가 대단히 복잡한 대책이라도 세웠을 거로 생각했던 모양이구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민호가 대표격으로 말했다.


”놈들이 수사를 시작했다면 필경 이 회사부터 조사하고 나섰을 겁니다. 오재두 놈은 정우 얼굴 뿐만 아니라 제 얼굴도 알고 있을 거고요. 제 가짜 신원도 말이죠. 총독부 상공과에 수사협조요청 하면 관련 서류가 얼마 안 가 전달될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면 분명 정우하고 민호 얼굴이 배포되고 공개수배가 걸릴 겁니다.“


재호도 거든다.


”그런 상황에서 사무실만 배우고 변장하고 돌아다닌다는 게 대책이라기에는 조금······.“


그러나 천 지부장은 흔들리지 않는 태도로 논지를 전개했다.


”생각해 보거라. 경찰이 공개수배를 하겠느냐?“


그의 눈빛이 번뜩 빛났다.


”오 경부보가 한 참의의 외조카인데도?“


”저,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명수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말하다가, 갑자가 ”아!“하고 놀라 손뼉을 쳤다. 그 한 마디에 청년들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여전히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는 대석만 빼고.


”한 참의가 당장 손실한 것은 20만 이상의 회삿돈이지만, 그것이 공개적으로 알려질 시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한 참의의 경영능력은 극도로 의심받게 되겠지. 투자자들은 투자금괴 채권을 회수하고, 기업자산과 주가는 급락할 것이 뻔하다. 회사와 한 참의 개인의 신용도는 하락하고 은행은 추가대출을 거부하겠지. 이사회와 주주총회의 의결로 사장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도 예정될 게다. 그런 상황에서 한 참의가, 오 경부보의 뒷배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자가 공개적으로 사기당했음을 드러낼 일을 만들고 싶겠느냐?“


”그리고 오 경부보도 외숙부가 당장 망하는 걸 바라진 않을 거고요.“


종팔은 그렇게 말하고 안심했다는 듯 정우가 부탁한 삽화로 눈을 돌린다.


”그렇다. 그 말인즉슨, 예정보다 일찍 사무실을 비우는 정도로 위기를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 놈들이 이 회사의 정체를 파악하진 못한 것 같다. 그렇다면 진작 들이닥쳤을 것이니. 그러니 당장 사무실을 비우고 다시는 오지 않는다.“


이때 명수가 손을 든다.


”지부장님! 그럼 당장 관리인 만나서 게약 종료하고 보증금 돌려받을까요?“


”아, 그래. 그리해야겠구나.“


천 지부장이 그러려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바로 결정을 번복한다.


”아니. 그러면 안 된다.“


”예?“


”방금 계획이 하나 떠올랐다.“


갑자기 무슨 계획인가? 그런데 그때, 이들은 순간 얼어붙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누가 불쑥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삽시간의 차가운 긴장은 바로 안도로 풀어졌다.


”아니, 무슨 일 있습니까?“


들어온 사람은 시주받아 온 혜월 스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갑자기 청년들의 얼굴이 급격히 긴장된 모습을 보고 사뭇 놀란 표정을 지었다.


”스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천 지부장은 스님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경찰이 사이온지 공작의 외압에도 정우에 대한 수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는 것, 그 대응으로 사무실을 바로 비우겠다는 것을 말이다.


”허어, 그런 일이! 나카하라 경무국장은 실로 강직한 사람이군요!“


”실로 그렇습니다. 그런 적인 만큼 매우 신경쓰이는 자입니다. 그와 별개로, 저는 수사에 혼동을 줄 계획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리고 한 참의를 당분간 더 속일 계획도 말이지요.“


천 지부장을 그러고 제자들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월세 계약을 종료하지 않은 걸로 간다. 보증금은 회수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 회사에 사람만 없을 뿐 여전히 운영 중인 것처럼 가장해야 한다.“


”아하! 그렇게 하면 놈들이 우릴 사기 혐의로 잡을지 말지 결정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군요!“


민호가 바로 그 뜻을 알아챘다.


”그렇다. 그리고 여기서 난 코지마 히데오를 재등장시킬 것이다.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과 미쓰이 사토시 상무가 뒷세계 기업사냥꾼에게 납치된 것처럼 가장하여, 경찰의 주의를 분산시킬 것이다.“


천 지부장은 그러고는 명수에게 편지지 한 장을 가져오게 하였다. 지부장이 코지마 히데오를 가장하여 납치를 암시하는 편지를 쓸 동안, 청년들은 빠르게 증거가 될 만할 서류들은 다 찾아서 서류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천 지부장은 편지를 쓰며 혜월 스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였다.


”아마 경찰은 우리를 사기 혐의로 의심하고 한 참의에게 알렸거나, 또는 알리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스님도 의심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둘을 한 참의에게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빈승이니.“


”경찰은 분명 스님과 정우, 민호를 체포하기 위할 법적 근거를 위해 한 참의가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하며 그가 고발장을 쓰도록 유도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이나 또 고발장 제출 후에, 스님께서 한 참의를 안심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한 참의가 고발장 제출을 거부하거나, 또는 고발의 취소를 요구할 것입니다.“


”아미타불! 이걸로 수사를 다시 혼선에 빠트릴 수 있겠군요.“


스님이 허허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좋습니다. 빈승이 비록 지혜제일 사리불이나 논설제일 가전연은 아닐지언정, 이 세 치 혀로 한 참의를 움직여 보겠나이다.“


이후 그들은 사무실에 중요한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싹싹 비운 뒤 대백루로 돌아왔다. 명수는 보증금 500원이 날아갔다고 투덜대었으나, 경찰을 혼란시키기 위한 비용으로 장부에 기입하였다. 천 지부장은 최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경찰이 아무래도 냄새를 맡은 것 같다, 사장도 조사를 받게 될 수 있으니 만약 경찰이 연락하거든 미리 알려달라고 하였다. 최 사장은 놀랐으나 당장 깊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오 경부보가 방문조사를 하겠다고 연락하자, 최 사장이 급히 연락하여 천 지부장이 먼저 찾아와 사장실 캐비넷 안에 숨어서 대화를 엿들은 것이었다.


”허어! 그렇게 된 것이군요.“


최 사장이 비서가 타온 커피를 홀짝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럼 스님은 한 참의를 설득하셨습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잘 되었소.


천 지부장은 혜월 스님과 함께 한 참의를 다시 속일 논변을 의논하였다. 혜월 스님은 오후 늦은 시간에 완성된 논리를 숙지하고 한 참의의 혜화동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에서는 성 여사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아미타불. 주리는 어디 나갔습니까?“


스님은 주리가 이미 임무를 빙자한 신혼여행을 간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전혀 모르는 척 물어본다.


”오늘은 친구 집에서 밤새워 놀고 오겠다네요. 얘가 허락해 주니까 맨날 노는 것만 생각해요.“


성 여사는 아무래도 주리를 너무 풀어주었다고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스님은 주리가 학교를 빠지거나 늦게 돌아올 때 항상 친구와 놀러 간다고 가장하는 것을 눈치챘다. 스님은 하녀가 내온 차를 음미하며 성 여사의 수다를 들었다.


”물론 그런 사돈어른을 모실 것이니 시집살이 고되게 하기 전에 자유롭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허락하긴 했지만, 그러면 신부수업은 언제 한데요? 게다가 학교 빠지는 날도 많고 계속 놀러만 다니니, 아무래도 우리가 실수한 것 같기도 하고······.“


”허허. 아직 주리가 혼사를 치르려면 시간이 아직 많이 남지 않았습니까? 주리도 마냥 놀지만은 않을 터이니 너무 우려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스님은 사실 주리가 식도, 혼인신고도 안 했지만, 사실상 부부의 연을 맺었음을 잘 안다.


”걔가 생각 없는 애가 아닌 건 저도 잘 압니다만, 그래도 괜히 걱정되네요. 걔가 어울리는 애들에게 꾀여서 혹시 남자 만나고 다니는 건 아닌지······.“


”허어. 그런 조신하고 얌전한 아이가 설마 그러겠습니까?“


스님은 사실 주리가 조신하게 보이려 하지만 전혀 조신하지 않음을 잘 안다. 그리고 이미 남자를 잘 만나고 있음도 잘 알고 있으니 속으로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정작 만나야 할 한 참의는 저녁까지 대접받은 후에도 오지 않았다.


”이상하네요. 야근한다고 전화한 적도 없는데.“


성 여사가 남편이 어째서 이렇게 늦는지 몰라 한다. 늦으면 늦는다고 비서를 시켜서라도 꼬박꼬박 연락하던 한 참의였기에 이런 일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스님도 한 참의가 왜 늦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현재 경찰 조사를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스님.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시는 건 어떨까요?“


성 여사가 걱정하며 하는 권유에도, 스님은 ”오늘은 참의님을 만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온 것입니다.“라며 계속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성 여사는 영험한 스님에게 폐를 끼친다며 계속 죄송스러워 했지만, 스님은 개의치 않는다. 최대한 빨리 한 참의와 접촉하는 것이 좋았으니까.


그렇게 1시간 후, 한 참의가 문을 열고 터덜터덜 들어왔다.


”아니, 늦으면 늦는다고 말을 해야죠. 저녁은 잡수셨어요?“


”안 먹었어. 생각 없고.“


한 참의는 기운이 다 빠진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때, ”아미타불.“이라며 합장하고 나타난 혜월 스님을 본 순간, 그의 얼굴에 힘이 들어갔다.


”이······. 이!“


그는 당황과 분노와 혼란이 뒤범벅이 된 얼굴로 스님을 쳐다보았다. 성 여사는 ”아니, 왜 그러세요?“라며 당혹스러워 하지만, 스님은 그저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오늘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잠깐 조용한 곳에서 말씀 나눌 수 있겠습니까?“


한 참의는 붉어진 얼굴로 스님을 잠시 쳐다보다가, ”서재로 가시죠.“라고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성 여사가 조심스럽게 ”커피라도 안에 들일까요?“라고 하지만, 한 참의는 매몰차게도 ”필요 없어!“한 마디만 하고 안으로 휙 들어갔다.


한 참의는 스님이 들어오자 문을 쾅 닫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방금 경찰서에서 오는 길입니다! 경찰에서는 카라스마 백작님과 미쓰이 사장님이 불령선인 사기꾼이라고 하고 있더군요! 그 사람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고 코지마 히데오란 놈의 협박장만 있었어요! 그리고 경찰은 코지마 히데오가 불령선인 천남건이라고 하고! 이 사람들이 다 짜고 나를 속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스님도요!“


한 참의가 그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기를 속이는 데 한 몫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눈 앞에 있으니 분기를 참으려야 참을 수 없다.


”그 두 사람은 스님이 소개하셨습니다! 믿을 만하며 유망한 실업가라고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사람 뒷통수를 칩니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때 스님은, 역시 다져진 연기력을 발휘하였다.


”예? 참의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스님은 그런 말을 완전히 처음 듣는 사람을 완벽히 가장한다.


”제가 사기꾼이고, 카라스마 백작과 미쓰이 사장도 사기꾼이라뇨? 전 이게 당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한 참의는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니 무슨 말이냐뇨? 그럼 왜 그때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습니까? 왜 전화해도 받질 않았던 겁니까? 이거 딱 투자금만 떼먹고 나르려는 전형적인 사기 아닙니까?“


스님은 펄펄 뛰기 직전인 한 참의를, 한 마디로 진정시켰다.


”빈승이 사기꾼이라면, 제가 이 자리에 왔겠습니까?“


그 순간 한 참의는 말문이 막혔다. 그 말대로였다. 스님이 사기꾼이라면 집에 나타나지 않는 게 정상이 아닐까? 만약 사기로 투자금을 받아내려 한 것이었다면, 잠적해 버리면 그만이지 왜 체포될 위험까지 감수하고 여기로 왔겠는가?


”빈승은 참의님께서 오늘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상황에 오해를 하실까 봐 방문한 것입니다. 그러니 화를 내시더라도, 빈승의 말을 듣고 나서 그러셔도 늦진 않으실 것 같습니다.“


한 참의는 잠시 끙끙대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좋습니다. 한번 들어 봅시다.“


”알겠습니다. 일단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현재 카라스마 백작과 미쓰이 사장은 사무실을 떠나 잠적 중입니다.“


”뭐, 뭐라고요?“


한 참의는 처음 듣는 말에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래진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잠적 중이라고?


”말씀하신 기업사냥꾼 코지마 히데오가 그 둘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들과 연이 닿아 있는 코지마의 부하가 사전에 알려주었지요. 코지마 히데오는 점찍은 기업을 가지기 위해서라면 폭력적이고 잔인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르는 부하들도 적지 않고요. 그래서 이들은 사무실을 습격해 두 공동대표분을 납치, 협박하여 회사 인수를 강요할 의도였습니다. 다행이 그걸 안 두 사람이 미리 몸을 피하고, 사원들에게도 다 연락해 출근하지 말라고 한 것이었죠.“


”아니, 잠깐만요!“


한 참의는 상당히 혼란스러워진 얼굴이었다.


”그, 그럼 협박장은 뭡니까? 코지마 히데오의 협박장은 대체 뭡니까? 코지마는 자신이 두 사람을 납치했다는 암시를 남긴 편지를 두고 갔단 말입니다!“


그 말에 스님은 고개를 까닥했다.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서.


”글쎄요. 저도 코지마 히데오가 왜 그런 편지를 썼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제가 오늘 잠적한 두 사람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코지마가 거짓말을 하는 겝니다.“


한 참의는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외조카 오재두 경부보는 다 자신을 속이기 위한 한패라고 하는데, 여기 스님은 그 사람들이 그저 위험을 피해 잠적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대체 누구 말이 맞는다는 건가?


”으음. 생각해 보니, 코지마 히데오 그자는 자존심이 매우 강한 자입니다. 그리고 이득이 있건 없건 간에 상대를 겁박하고 졸아들게 하는 것을 즐기는 자지요. 사무실을 들이쳤지만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자, 자신의 무서움을 과시하는 편지를 써서라도 분을 풀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스님의 말이 워낙 그럴싸해서, 한 참의는 말없이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 코지마 히데오는 늘 자기가 가지고 싶은 기업은 어떻게든 가졌다고 여러 차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던가?


”두 사람은 코지마의 공격으로부터 회사를 방어할 사람들을 고용하기 전에는 계속 잠적하고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 증거로, 현재 건물주와 사무실 임대 계약을 종료하지 않고 있지요. 내일 한번 관리인이나 건물주에게 물어 보십시오. 계약이 종료되지 않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한 참의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임대계약을 종료하지 않고 도주했다면 건물주가 경찰에 신고할 것이었다. 그러면 경찰에 쫓기게 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정교한 사기꾼들이라면 그런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도주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미쓰이 사장이 제게 전하길, 한 사나흘 후에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일단 코지마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여 연락하지 못하여 정말 죄송하다고 전해 달라는군요. 오죽 급하면 참의님께 전해드릴 편지도 못 썼겠습니까?“


한 참의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얼굴에서 조금씩 분기가 가라앉고 있었다. 혜월 스님은 한 참의의 눈에 의심이 옅어지고 있음을 눈치채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 그럼 경찰의 추적은 뭡니까? 경찰 말로는 백작님과 사장님 모두 신원이 불분명한 사람들이고, 불령선인일 가능성이 크다는데요?“


그 말에 스님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참의님. 경찰이란 조직은 자존심과 체면을 중시합니다. 그들이 한번 찍으면 죄가 있든 없든 범죄자가 되어야 하죠. 만약 그가 무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번 잡은 사람을 절대 놔주는 일이 없습니다. 만약 그리 한다면, 경찰의 위신에 흠이 가기 때문이죠. 경찰이 잘못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까요.“


”그······. 그렇긴 합니다만······.“


한 참의도 경찰 간부들과 뇌물로 다져진 사이가 있기에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경찰은 죄가 있든 없든 그들이 죄가 있다고 생각하면 다 죄인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그렇지 못한다면 체면이 깎인다고.


”이를 위해서는 경찰도 무슨 짓이든 다 하지요. 증거조작이 되었든, 거짓 증언을 얻어내든 해서 말이지요. 그들이 잡으면 그가 누구던 간에 범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때 스님은 눈살을 찌푸렸다.


”게다가, 카라스마 백작은 이미 경찰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어요.“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한 참의는 처음 듣는 소리라 놀란다.


”그래요. 종로서의 오재두 경부보가 백작을 직접 조사했습니다. 오 경부보는 백작이 실은 조선인이고, 불령선인이라고 의심해 조사했다는데, 연이 닿은 다른 화족 분의 압력으로 백작을 풀어 줄 수밖에 없었지요. 이리하여 경찰 조직의 자존심에 강한 흠이 생겼는데, 이를 메꾸려면 어찌해야겠습니까?“


”스, 스님 말씀이 맞습니다! 게다가 재두 녀석은 솔직히 외숙부인 제가 봐도······.“


한 참의는 외조카에게 사람다운 구석이 있다면, 그것은 자존심임을 잘 알고 있었다. 카라스마 백작을 풀어줬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을 것이었다. 그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백작을 범인으로 만들려 한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한 참의가 충분히 흔들렸음을 파악한 스님은, 그의 마음을 다시금 사로잡을 논변을 전개한다.


”빈승은 참의님의 안목을 잘 알기에 카라스마 백작과 미쓰이 사장을 소개해드린 것입니다. 참의님이 이 좁은 조선반도는 물론이고 내지를 넘어 동아세아, 아니 세계 전체에 이름을 떨칠 재목으로 보아 희대의 거물이 되실 기대를 품은 것이지요. 그런 안목을 가지시고 과감한 투자를 결정하셨는데, 그 판단이 잘못되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런 참의님을 알아본 제가 잘못 보았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 말이 한 참의의 늘어진 어깨에 힘을 불어넣고, 쳐진 등을 뻣뻣히 곧추세우게 하였다. 한 참의는 그 말이 듣고 싶었다. 자신이 틀렸을 리가 없다고, 자신이 속았을 리가 없다고, 세계적인 거물 기업가가 될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을 리가 없다고 말이다.


자신은 최적의 선택을 한 것이다. 아니 최적의 선택을 한 것이어야 했다.


”스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경황이 없어서 큰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한 참의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아미타불. 오해를 살 만했지요. 빈승이 비록 실업가는 아니지만, 사업 상대가 갑자기 이런 식으로 잠적하면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요행이 저를 통해 연락이 닿아서 다행이지요.“


”그렇습니다. 정말 하늘이 도운 겝니다!“


한 참의는 이제 더 이상 사기를 당했다고 전전긍긍하지도 않았다. 그는 강한 자기확신을 되찾고 다시 의기양양해졌다.


”이 한 아무개가 사람 하나는 잘 보았죠! 갑자기 버럭 화부터 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재두 녀석에서 속아서 그분들 고발장이나 썼으니! 부끄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당장 내일 가서 취소해야겠어요!“


스님은 이미 한 참의가 경찰서에서 소장까지 썼다는 것에 내심 놀랐으나, 바로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허허.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양측의 신뢰 관계가 회복될 것이니, 저 또한 마음을 놓을 수 있겠군요.“


”하하하! 모두가 다 스님 덕입니다! 사업이 크게 성공하면, 스님 절에 큰 시주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미타불! 삼천대천세계의 불보살님들이 참의님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스님은 그렇게 말하고 한 참의와 같이 웃는다. 그러고 속으로는, 발설지옥에서 예정된 형량이 더 늘어나게 되었다고 자조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고 있으니 말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경성활극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14 214화 +8 20.10.18 269 8 17쪽
213 213화 +10 20.10.17 271 10 14쪽
212 212화 +4 20.10.14 264 10 15쪽
211 211화 +10 20.10.11 266 11 17쪽
210 210화 +4 20.10.10 268 10 13쪽
209 209화 +2 20.10.09 262 8 20쪽
208 208화 +6 20.10.07 262 9 16쪽
207 207화 +4 20.10.04 263 9 15쪽
206 206화 +6 20.10.02 265 9 17쪽
205 205화 +7 20.09.28 264 10 17쪽
204 204화 +8 20.09.26 265 9 16쪽
203 203화 +8 20.09.23 274 9 13쪽
202 202화 +8 20.09.20 278 11 12쪽
201 201화 +14 20.09.19 266 10 13쪽
200 200화 +8 20.09.16 272 10 16쪽
199 199화 +8 20.09.13 279 10 17쪽
198 198화 +6 20.09.12 269 10 16쪽
197 197화 +8 20.09.11 265 11 17쪽
196 196화 +6 20.09.07 285 9 16쪽
195 195화 +10 20.09.04 267 10 15쪽
» 194화 +10 20.09.03 265 10 20쪽
193 193화 +10 20.09.01 271 9 15쪽
192 192화 +10 20.08.31 278 10 22쪽
191 191화 +8 20.08.30 270 13 20쪽
190 190화 +12 20.08.27 281 10 17쪽
189 189화 +8 20.08.23 275 12 18쪽
188 188화 +8 20.08.20 271 9 19쪽
187 187화 +12 20.08.17 276 11 21쪽
186 186화 +8 20.08.16 289 10 15쪽
185 185화 +10 20.08.15 285 10 1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