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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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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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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3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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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203화

DUMMY

아오야기 중위는 평소 피지도 않는 궐련을 입에 물었다. 그만큼 초조함이 계속되고 있었다. 쿠스노기 중위가 조사받으러 간 뒤, 후지무라 중위는 저 헌병대좌의 신원을 확인해겠다며 헌병 분견대 주둔칸으로 갔다가 감감무소식이다. 우에스기 중위는 방금 그 헌병대좌에게 끌려다가시피 조사받으러 갔다. 쿠스노기가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는데도.


친구들은 모두 온데간데 없고 혼자만 엄청난 액수의 현금이 든 가방들을 지키고 있는 상황이다. 저 맹수같은 눈빛의 헌병대좌가 진짜 헌병사령부 조사실의 대좌인지 확인이 안된 상황에서. 입술이 계속해서 말라왔지만 식당칸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감감무소식인 동료들을 찾으러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지금 돈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그 혼자였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그저 후지무라 중위가 돌아와 저 대좌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정말 헌병대좌인지 아닌지 말해주길 기다리거나, 아니면 저 대좌가 조사하겠다고 부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의 선택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차라리 수레에 음료와 가벼운 음식을 가지고 들고가는 판매상이 오기라도 한 다면 목이라도 축이건만, 사람 하나 돌아다니지 않는다.


그렇게 담배에 불만 붙이고 초조하게 앉아 있을 그때, 밖에서 굵은 목소리 하나가 들린다.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검표가 있겠습니다.”


검표원이 온 모양이었다. 차양을 걷어주니, 모자를 푹 눌러쓴 철도원 제복 차림의 검표원이 들어온다. 그런데 아오야기 중위는 검표원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검표원이 수염을 덮수룩하게 기르고 있던 것이었다. 기차를 탈 때마다 본 검표원들은 대게 면도를 말끔하게 하고 다니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검표원만 유독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손님?”


“아, 예. 죄송합니다.”


검표원의 이례적인 생김새에 신경이 쓰여 표를 내줄 생각을 미처 못했었다. 중위는 표를 넘겨주고, 검표원이 표에 구멍을 뚫어주는 것을 지켜본다.


그때 중위의 머릿속에 생각이 갑작스럽게 스쳐 지나갔다.


“저, 실례합니다. 혹시 열차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이 짐을 맡아주신다던가, 그런 것도 해주십니까?”


“물론입니다. 그것도 우리 일입니다.”


아오야기 중위는 아주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지금 제가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짐만 두고 가기에는 영 불안해서요. 짐을 맡겨도 괜찮겠습니까?”


“아, 물론이지요. 책임지고 맡아 드리겠습니다.”


짐을 맡길 사람이 나타났으니 실로 안심이었다. 아오야기는 돌아오지 않는 후지무라 중위를 찾으러 나설 생각이었다. 계속된 초조함 때문에, 저 헌병대좌가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합니다!”하고 객실을 나가려던 그 순간, 검표원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온 몸을 흩고 지나갔다.


“저, 실례합니다만···...”


“무엇인가요?”


아오야기 중위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연다.


“우리 오늘 초면 맞죠?”


그 물음에 이 수염기른 검표원은 “물론이지요. 오늘 손님을 처음 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 예. 물론 그렇겠죠. 실례했습니다.”


아오야기 중위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객실을 나갔다. 느낌이 이상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아주 처음은 아닐지도 모른다, 경성에서 봉천으로 가는 열차를 몇번 타면서 우연히 마주쳤을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이상하였다. 저 검표원의 눈을 분명 어디서 본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을 어디서 봤더라?


아오야기는 철도헌병 분견대가 주둔하고 있는 마지막 객차로 가며 계속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도무지 짚이는 데가 없었다.


그런데 3등객차를 3개 쯤 지나갔을 때, 갑자기 위화감이 들었다. 철도 안을 헌병이 계속 순찰을 돌며 차내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 정상인데, 중간에 순찰 도는 헌병 병력을 단 한명도 만나지 못한 것이었다. 이 분견대가 평소 근무를 제대로 하지 않는건가 하고 생각하며 분견대 객차 앞에 도달했을 때, 어이가 없어서 분통이 터졌다.


“기상!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객차 앞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상등병 두 명이 벽에 기대어 자고 있는 게 아닌가. 근무기강이 헤이해도 정도가 있지!


그 호통에 상등병 하나가 눈을 꿈쩍대며 뜬다. 아직 잠이 덜 깬 상등병은 몽롱한 눈빛으로 아오야기 중위를 바라보더니만, 갑자기 팍 짜증을 내며 눈을 부라린다.


“너 뭐하는 놈이야? 어따 대고 반말짓거리야? 죽을래?”


이 무례한 말에 아오야기 중위의 이마빡에 힘줄이 불끈 솓는다. 그가 사복 차림인 관계로 이 상등병은 자신이 장교를 상대하고 있음을 전혀 모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평소 황갈색 군복과 헌병 완장만 보면 움츠러드는 민간인을 대하듯 아무한테나 이놈저놈 하는 것이다.


중위는 거두절미하고 주머니 속의 신분증명서를 꺼내 상등병 눈 앞에 내놓는다. 눈을 껌뻑이며 그걸 확인한 상등병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부동자세를 취하고 손을 파르르 떨며 경례한다.


“시······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아오야기 중위는 이 근무태만 행위를 봐줄 이유가 없다.


“관등성명하고 군번을 대라!”


상등병은 울상이 되어 그걸 말해주고는 동료를 깨운다. 막 깨어난 다른 상등병도 몽롱한 정신에서 벗어나 상황을 겨우 파악하고 덜덜 떤다.


“중위님! 정말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딱 잠깐만 눈 붙인 겁니다.”


한 상등병이 변명이랍시고 말하는데, 다른 상등병이 손목시계를 보고 표정이 굳어진다. 보아하니 여러 시간을 세상 모르게 잔 모양이었다.


아오야기 중위는 이 얼빠진 헌병 병사들에게 1시간 이상 설교를 늘어놓고 싶었으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 일단은 참는다.


“내 동료가 30분 전에 너희 분견대장을 보겠다고 찾아갔는데 여태 소식이 없다. 못 보았는가?”


그 말에 둘은 선뜻 대답을 못한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니 후지무라 중위가 자는 이들을 내버려 두고 들어간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못봤다고 하면 30분 이상 자버렸음을 자인하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결국 “봤나, 못 봤나!”라고 다그치자, 이구동성으로 “못 보았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중위는 그 대답에 더더욱 화가 난다.


“경계근무를 그렇게 서고도 봐달라는 말이 나오나? 모두 군법회의감이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근무시간에 조는 정도가 아니라 자고 있었는지 경위를 소상히 말하라!”


그리하여 상등병들은 어찌 된 일인지 털어놓았다. 그들이 경계근무를 서러 나가기 전, 갑자기 웬 양복 입은 사람이 큼지막한 보따리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그 사람은 누구냐고 묻는 분견대장에게 자신이 군인 신분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보여주며 자신이 육군성 군무국 소속인데 관동군 사령부와 비밀리에 논의할 것이 있어 사복을 입고 가던 중 철도헌병 분견대가 고생하니 격려차 왔다고 하였다.


보따리 속에서는 초밥 한 무더기와 정종 몇 병이 나와서 다들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먹고 순찰중이던 병력도 잠시 불러와 맛보게 하였다. 근무중 음주를 해도 되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다들 초밥과 술을 즐겼다.


그런데 이후 경계를 서는데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잠깐 눈좀 붙이려고 눈을 감았다가 떠 보니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렸다는 것이었다.


아오야기 중위는 황당한 느낌이 치밀어올랐다. 간혹 상부에서 좀 놀기 좋아하고 유쾌한 인물이 내려와서 근무고 뭐고 술이나 하자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깊은 잠에 빠져들 정도로 독한 술을 주는 사람이 육군성에 있단 말인가?


중위는 그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능성에 소름이 끼쳤다.


설마!


“그 육군성에서 왔다는 사람, 어떻게 생겼었나?”


“에 그것이······ 수염이 참 덥수룩했습니다.”


수염이 덥수룩했다고? 아오야기 중위는 식은땀이 몸에서 흐르는 걸 느낀다.


“나이는 어떻게 되는 것 같았나? 중년 이상이었나?”


그러나 그 질문에는 “아닙니다. 분명 수염을 길렀는데 목소리가 그 정도로 나이들진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라는 답변이 온다.


아오야기 중위는 더 자세한 것을 확인하려고 가장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던 헌병 분견대장을 찾으려 헌병 객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본 것은, 기가 막힌 광경이었다.


“이게 뭐야!”


가장 먼저 들어가게 되는 통신실에서는, 그 누구도 제대로 근무하지 않고 책상 위에 엎드려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던 것이었다. 통신실 뒤의 휴게공간에서도. 열차 내 분견대 병력 전체가 최소 1시간은 무력화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때, 아오야기 중위의 머릿속에서 소름끼치는 퍼즐이 맞춰진다. 헌병대좌를 자처하며 고압적으로 굴던 정체불명의 험상궂은 사람, 그리고 육군성 군무국에서 왔다며 술과 음식을 나눠준 마찬가지로 정체불명의 사람, 그리고 그 술을 나눠먹고 깊은 잠에 빠진 헌병 병력.


이 모든 것이 어떤 음험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음을 명백히 말해주고 있었다.


중위는 등을 돌려 뛰다시피 걸음을 옮긴다.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했다. 역무원에게 가방을 맡기고 여기까지 온 것이 실수라는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 쿠스노기나 우에스기가 객실에 돌아왔을 것 같긴 하지만, 현금가방이 제 자리에 있는 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안심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서둘러서 객실에 돌아온 순간이었다.


“어억!”


설마 설마 하며 떨리는 가슴이, 일순간 마비되는 느낌이 확 끼쳐 올라온다.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없었다. 총 4개의 돈가방이, 그 자리에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잘못 본게 아닌가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떠 봐도, 네 가방은 그곳에 원래 없었다는 듯 아예 보이지를 않았다.


중위는 다리의 힘이 쭉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하다가 벽을 잡고 겨우 버텼다. 현기증이 몰려와 눈 앞이 핑핑 도는 느낌이었다. 구역질까지 나는 것 같았다.


그 돈이 전부 없어졌다. 세계최종전쟁의 예비단계를 위한 착수금이. 해군 예산까지 빼돌려가며 마련한 공작금이.


임무 실패.


이 네 글자가 머릿속을 맴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경애해 마지않는 이시와라 간지 중좌가 신신당부하며 맡긴 거금이었다. 반드시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저 봉천까지 가지고만 가면 다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두 없어졌다. 다 사라져 버렸다. 횡하니 사라져 버렸다. 흔적조차 온데간데 없다.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지난 사변에서 적의 포화를 뚫고 적진에 육박했던 나이거늘, 이런 간단한 임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단 말인가? 중좌님을 어떻게 뵌단 말인가?


충격과 죄책감으로 이렇게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에서도, 몸이 비척거리면서도 움직인다. 가방을 맡아달라고 부탁한 검표원을 당장 찾아야 한다. 그 작자를 찾아 추궁해야 한다. 그 가방들이 다 어디 갔냐고. 수염 덥수룩한 그 무서운 헌병대좌와는 무슨 관계냐고. 또 우리가 돈가방을 옮기는 걸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다 알아내야 한다. 분명 놈은 열차 안에 있다.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다.


아오야기 중위는 그 검표원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채 일단 걸음부터 무작정 옮겼다. 그렇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때 중위는 보았다. 자신들을 조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그 헌병대좌가, 저만치 앞에 있는 것을. 2등객차칸 문을 여는 것을.


중위는 그를 보고 무작정 뛰었다. 저놈은 가짜가 틀림없다. 돈을 노리고 모략을 꾸민 자가 틀림없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당장!


그는 2등객차칸 복도를 전력질주로 달렸다. 삽시간에 거리가 좁혀든다. 그 자칭 헌병대좌는 아오야기 중위가 맹렬히 달려오는 것을 눈치챘는지 뒤를 돌아 흘깃 본다. 그러나 당황하거나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열린 문으로 휙하고 나가 버린다.


“놓칠줄 아느냐!”


중위가 고함을 지르며 닫히는 문을 붙잡는다. 그 순간, 중위는 기가 막힌 광경 하나를 보고 말았다.


자칭 헌병대좌는 앞의 다른 열차칸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중위의 눈 앞에서 왼쪽으로 도약하며 사라졌다. 열차와 나란히, 동일한 속도로 달리는 트럭 한대를 향해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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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198화 +6 20.09.12 268 10 16쪽
197 197화 +8 20.09.11 265 1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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