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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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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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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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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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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197화

DUMMY

정우는 거센 대련으로 지쳐 널브러져 있던 형제들이 터덜터덜 다 들어오자마자 인천 송금 건에 대하여 상세히 보고하였다. CC단의 샤오정과 루춘팡 중화민국 총영사가 레코드 녹음 내용을 모두 들었으며, 그들에게 강한 감사 인사를 표했다는 사실은 천 지부장을 만족스럽게 하였다.


주리는 정우가 보고하는 와중에 한눈팔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대웅전에 들어오자마자 구석에서 뒹굴뒹굴하던 고양이 호두가 쪼르르 달려왔다. 그러고는 예의 바르게 앉은 주리의 무릎 위에 휙 올라와 쓰다듬어 달라고 벌러덩 드러누워 몸을 비비 꼬아대는 것이었다. 주리는 당장 호두의 부드러운 털을 만지작거리고는 껴안고 같이 뒹굴거리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천 지부장의 엄격한 얼굴 때문에 “나중에 놀아 줄게.”라고 하고 참고 또 참아야 했다.


“수고 많았다. 이 건으로 중화민국 정부가 우리를 더 신뢰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장제스 위원장에게 우리의 가치를 보여준 셈이지.”


“이걸로 중국 쪽에서 지원 좀 팍팍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까지 너무 쪼들리게 살았어요.”


명수의 말이다. 몇 년간 바닥을 여러 차례 쳤던 장부를 보고 한숨만 푹푹 쉬었던 그였기에, 지원주체가 어느 쪽이든 간에 자금지원은 가뭄의 단비 같은 일이었다. 그러다가도 “그렇다고 아무 돈이나 받아먹을 순 없지만요.”라고 덧붙인다. 극한의 자금난에 시달리던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나 운동가들이 조직보존이나 개인숭배를 위해 투쟁의 수위를 낮추거나 자치론으로 타협하며 일본 쪽 자금을 받다가 결국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거나, 또는 적에게 넘어간 경우를 그들도 잘 알고 있는 터다.


“하지만 이걸로, 장 위원장이 일본과의 결전을 결심하진 않겠죠?”


재호의 말이다. 이에 종팔이 “그래도 딴 사람도 아닌 처남을 살해하겠다고 하는 놈들 상대로 화 한번 안 낼 것 같진 않고······.”라고 하지만 천 지부장이 고개를 젓는다.


“아직 중화민국의 힘은 일본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도 알다시피, 이건 이누카이 내각과 무관하게 또 관동군이 독단적으로 저지르는 일이야. 지금은 상하이의 일본군 철수를 두고 협정이 진행되고 있어. 아직 중국은 함부로 일본에 싸움을 걸 처지가 못 된다. 우리 입장에서도 지금 문제가 터지면 곤란하고.”


정우 등은 중국 국민들의 강력한 배일감정이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 중화민국이 일본과 전면전이라도 벌이기에는 아직 그 힘이 약함도 잘 알고 있었다. 중국인의 국민감정이 일본에 적대감을 보이는 것은 좋다. 그럴수록 독립운동의 대의명분이 중국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얻을 터이니.


그렇다고 당장 일본군이 중국 전토를 휩쓸고 난징 정부청사에 일장기를 휘날리는 사태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중화민국이 충분히 강력해지길, 최소한 전쟁 발발 시 중화민국군이 만주를 수복하고 한반도로 진격하진 못하더라도 일본을 수렁에 빠뜨릴 정도로 강해지길 기다려야만 했다. 그래서 만주사변과 상하이사변 이후 일본과의 대화와 협상은 매국 행위라며 당장 항일전쟁을 일으키자고 들끓는 중국 내 여론에 비교적 냉철하게 식은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장 위원장은 아마 요인들 경호를 강화하고 놈들의 돈을 받은 조직을 색출하는 걸 우선할 것이다. 그편이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일 게고.”


“국민당 사람들도 답답할 겁니다. 이런 도발 행위에 속 시원한 대처 하나 못하니 말입니다.”


민호의 말이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이 났는지 이런 말을 한다.


“그나저나 혹시 백범 선생님이, 그 윤봉길이라는 동지를 통해 중국 사람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 주려는 건 아닐까요? 거기까진 의도하지 않더라도 뭔가 큰일을 터트린다면 그렇게 될 것 같은데요.”


정우의 형제들은 쇼와 천황의 생일에 백범 선생이 대단한 선물을 보내준다고 암시한 것이 뭔지 계속 궁금해하던 차였다. 엄항섭의 편지도 그 선물이 무엇인지는 너무 깜깜한 암시만 하고 있던 차라 궁금증을 도무지 해소할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럴 것 같긴 하다만, 뭐가 나올지는 일단 기다려 볼 수 밖에.”


천 지부장은 그러고 화제를 돌린다.


“그나저나 경찰의 수사 말이다만······.”


그 말에 시선이 일제히 집중된다. 그들 모두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아직 놈들이 우리가 누군지,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과 미쓰이 사토시 사장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고 있다. 사이온지 긴모치 공작이 한번 압력을 넣은 이상, 수사를 지속한다 해도 덮어놓고 체포해 고문을 하거나 조서 조작 같은 것을 할 수는 없을 게다. 그랬다가는 공작이 말로만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니. 그래서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놈들이 진실에 도달했을 때, 이미 우리는 상하이에 도착해 있을 게다.”


“그렇다면 다행이긴 합니다만······.”


형제들은 그러고는 모두 스님을 쳐다본다. 한 참의의 집에 계속 들락거린 혜월 스님이 경성에 계속 머물다가는 경찰의 수사망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스님께서는 경성을 떠나시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극히 행동을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흐음. 아무래도 빈승이 견성암을 떠나는 게 안전하겠군요.”


그 말에 대석이 걱정되는 얼굴로 묻는다.


“근데 떠나시면, 가실 데가 있으십니까?”


그 질문에 스님은 대범하게도 허허 웃는다.


“나는 괜찮느니라. 수행자에게 하늘이 곧 지붕이고, 땅이 곧 방바닥이거늘, 어디 머물 곳이 따로 있겠느냐?”


“그래도 스님 나이가 있는데, 풍찬노숙을 하시기에는······.”


재호가 말하는데 스님이 딴죽을 강하게 건다.


“예끼! 너희들은 나이도 젊은 녀석들이 이 늙은 땡중에게 헉헉대면서도 그런 말이 나오더냐?”


그 말에 다들 무안한 웃음이 터진다. 이들은 4년 전에 처음 견성암에 왔을 때, 천 지부장이 스님을 보자마자 크게 놀라며 절을 하며 공경을 표하는 것을 보고 웅성거렸었다. 어릴 때부터 천하무적으로 알아 왔던 사부가 이렇게 절까지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천 지부장은 한때 제자들에게 말한 적이 있던 이야기, 한 스님이 베이징에서 무공만 믿고 무뢰배 노릇을 하던 자신을 깨우쳐 주었다고 했는데 그 스님이 이 사람이라고 밝혔었다. 실로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엇다.


천 지부장은 이후 여러 차례의 대련으로 스님과 맞먹는 무공을 보여주며 그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아직 사부의 무공에 미치지 못하는 형제들이 스님에게 대련에서 압도당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주리가 때를 놓치지 않고 “오라버니들은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고 깔깔댄다. 물론 천 지부장의 표정은 진지하다.


“부끄러워 할 것은 없다. 스님이 이제까지 쌓아온 무공의 심후함은 너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니. 더욱 정진들 하거라.”


지부장은 제자들에게 충고하고는 진정 하고자 하는 말로 돌아간다.


“갑자기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만, 우리를 추적하고 있는 오재두 경부보는 정말인지 끈질긴 놈이다. 내가 비록 놈이 진실에 다다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고 말하긴 했다만, 놈에게 좋은 행운이 굴러들어오거나 아니면 우리가 예상 못 한 불운에 부닥칠 수 있음이야. 그러니······.”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무거운 한마디를 한다.


“놈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한 마디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주리 무릎 위에서 장난치려 안달이었던 고양이 호두조차도 털을 곤두세우고 흡사 둥근 빵처럼 몸을 움츠러트린다. 그들은 익히 상하이에서 백범 선생이 밀정으로 지목하거나 그들의 추적으로 밀정임이 드러난 자들을 제거해 왔다.


그러나 경성에 들어온 뒤로는 손에 피를 묻힐 일은 없었다. 처음에는 정보수집, 나중에는 자금확보를 목표로 삼은 이상, 적 경찰과 헌병의 주의를 한 번에 끌 일은 피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살해 충돌을 강하게 일으킨 부일배나 변절자들, 예컨대 박중양이나 윤치호 같은 자들은 22구경 권총탄에 머리가 관통당하는 사태를 면하였다.


그런데 천 지부장은 오재두 경부보를 사살할 것을 제자들의 면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웅전에서 말하기에는 좋지 않은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혜월 스님이 뒤에 있는 불상들을 흘깃 돌아보고 한 말이었다. 정우 또한 같은 느낌이었다. 연화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수인을 한 채 앉아있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양옆의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짓고 있는 미소가 순간 사라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세존께서 이해하시길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천 지부장이 딱 잘라 대답하고 제자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사이온지 공작조차도 놈을 막지 못했다. 정확히는 경무국장이 놈을 비호해 준 결과긴 하지만, 이는 계속 놈이 당분간 고등계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임박한 위협은 아니더라도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협이야. 내버려 두기 곤란한 놈이다.”


“하지만, 이게 당장 해야 할 일인지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명수가 신중론을 전개한다.


“괜히 놈을 제거했다가 적의 더 거센 추격을 받는 건 아닐지 걱정입니다. 굳이 위험부담을 질 필요까진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천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생각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놈을 제거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위협이 돼서만은 아니다. 우리가 상하이로 떠난 후에 후발 인력이 경성에 파견될 것이다. 정보수집과 자금모집은 계속되어야 하니. 오 경부보는 분명 이들에게도 위협이 될 게다. 우리 쪽 사람들 말고도 독립에 뜻을 둔 많은 지사에게도 놈의 마수가 뻗쳐올 거고. 그 놈을 제거하는 것은 우리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게다. 놈을 제거하는 즉시, 경성을 탈출한다면 위험이 덜해질 게다.”


그 확신에 찬 말에, 명수가 얼굴에 드러난 불안감을 바로 거둔다. 위험부담만 없다면 그 오 경부보를 제거하고 싶은 마음은 그도 같았으니까.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민호가 바로 나서서 찬동을 표한다.


“그 망할 자식은 너무 오래 설쳤습니다! 놈의 손에 죽어가고 고통받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닌 걸로 압니다. 경성을 떠나기 전에 놈을 없애버린다면,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번 작업을 끝마치는 대로 놈을 제거해 버린 뒤 바로 인천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석이 주먹을 불끈 쥐고 목소리를 높인다.


“훌륭한 부모님을 팔아 넘긴 그놈 대갈통을 으스러트려서 후세에 경고로 남겨야 합니다!”


재호 또한 “위험하지 않는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지요.”라고 하고, 종팔은 잠깐 딴데 보다가 “없애버려야죠, 그놈.”이라고 한 마디 덧붙인다.


이때 눈을 반쯤 감고 생각에 잠겨 있던 스님이 입을 연다.


“빈승은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늘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혹시 스님은 살생을 반대한다는 것인가? 그러나 바로 다음 한 마디에 모두 스님의 본뜻을 한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겠습니까? 누군가 그자를 제거하고 악업을 쌓기보다는, 우리가 그 악업을 대신 져 주는 게 낫겠습니다.”


“좋습니다, 스님. 좋습니다.”


이때 천 지부장이 정우에게 시선을 보낸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정우는 신중한 목소리였지만, 태도는 단호하다.


“제가 오 경부보를 종로서에서 대면했을 때, 이 사람에게도 정말 불성이 있는지 강한 의심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자는 남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성과만 달성하면 된다는 인간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에 조용히, 그러나 엄중한 분노가 서서히 서린다.


“그자는 집요하고 끈질기며 한번 범인으로 특정한 사람은 누구든 범인으로 만들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자입니다. 사이온지 공작을 통해 놈을 조용히 제거할 수 없게 된 이상, 목숨을······.”


정우는 순간 그 다음 말을 망설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부드러운 눈매가 그를 준엄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머리를 차갑게 한다.


“앗아가는 방법으로라도 제거해야만 우리도 안전해질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놈에게 고통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좋다.”


천 지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에는 시선을 주리에게 향한다.


“네 생각은 어떠하더냐?”


그 물음에 주리는, 망설임 하나 없이 시원하게 대답한다.


“제가 반대할 이유가 있나요?”


주리도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꺼림칙할 수 밖에 없었다. 흡사 부처님이 “우바새여. 어찌 좋지 아니한 생각을 내 앞에서 품느냐?”라고 꾸짖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 또래 여자아이를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고문하고 질질 끌고 가던 사촌오라비의 사람 같지 않은 인상을 생각한 순간, 마음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그놈은 고모부님과 고모님의 수치입니다. 훌륭하신 두 분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넣은 놈이에요. 놈의 죽어 널브러진 시체를 보고 통쾌해할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거로 생각합니다. 저도 거기 포함되고요.”


주리의 입에서 나오는 표현이 이례적으로 거세서, 형제 중에는 제법 놀랐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다.


“이제는 우리 일을 잘 이해하는구나.”


천 지부장이 짐짓 칭찬의 말을 건넨다. 주리는 이 칭찬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그래도 사람을 저승으로 보내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자신이 참 많이 변했다고 자조해야 할지 잠깐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래서 말인데, 그놈이 숙식하는 곳은 어디냐?”


천 지부장이 날카롭게 물어본다. 분명 오 경부보가 가장 방심할 시간에 방에 들이닥쳐 처리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리는 원하는 답변을 하지 못하여 지극히 아쉽다.


“죄송합니다. 그자가 어디 사는지는 전혀 말을 하지 않았어요.”


“한 참의 앞에서도 말이냐?”


천 지부장이 짐짓 놀란 얼굴이 된다.


“예. 그자가 아버지에게 어차피 계속해서 거주지를 바꿀 거니 사적인 연락이라도 경찰서로만 해 달라고 한 걸 들었어요.”


“흥. 오밤중에 자다가 모가지 날아가는 건 무서운 모양이지?”


민호가 코웃음을 친다. 한두 사람에게 원한을 산 게 아닌 오 경부보가 계속해서 숙식 장소를 바꾸며 혹시라도 자기 목숨을 노리는 자들을 피해 다니는 건 필수적인 일일 것이리라.


“그렇다면 놈을 어디론가 꾀어낸 다음에 처리해야겠습니다.”


재호의 말에 “그래야지.”라고 고개를 끄덕인 천 지부장은, 다시 주리를 바라본다.


“넌 일단 하산하고 추후 지시를 기다려라. 산은 금방 어두워지니 빨리 내려가는 것이 좋아. 언제든 빠져나올 수 있게 짐 챙겨두는 거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럼······.”


주리는 무릎 위에 앉아있는 호두를 살며시 들어 내려놓고 일어선다. 호두가 심각한 분위기는 끝났다고 여기는지 또 쓰다듬어 달라고 가르랑거리지만, 주리는 그럴 시간이 없는 게 안타까웠다.


기슭까지 바래다 주기 위해 정우도 일어섰다. 사촌오라비의 죽음을 결의하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던 주리는, 다시 명랑해져서 산을 내려가는 내내 재잘거렸다. 그러나 그 대화 속에서도 오재두를 죽일 계획은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느낌이 들어, 정우는 내심 걱정스러운 기분이 든다. 심각한 얘기는 피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혐오스러운 오재두라도, 그자의 피가 정우 손에 묻는 것은 보기 꺼려질 광경일 것이니.


그래도 주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헤어지기 전 정우 입술에 아쉬움을 담은 입맞춤을 한 채 사라졌다.


정우는 어둑해지기 전 바로 올라와 오 경부보를 어떻게 유인할지 논의하는 계획에 참여했다. 워낙 다양한 안들이 나오고 검토하느라 저녁 시간을 다 보냈다. 결론이 나오지 않자 내일 논의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어갔다.


그런데 다음 날 이른 아침, 생각지도 못한 일이 터졌다.


히로요시가 난데없이 암자에 나타난 것이었다.


“어라? 이 시간에 웬일이야?”


계곡에서 세수하고 돌아오던 형제들은 갑자기 등장한 히로요시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양복 차림인 히로요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연신 땀을 훔치고 있었다. 날이 채 트기도 전에 산을 올라온 모양이었다. 그것도 최대한 걸음을 빠르게 하느라 숨을 헉헉대면서.


“긴급히······. 급히 보고할 게 있어.”


“뭔데?”


히로요시는 숨을 한번 몰아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매우 심각한 얼굴을 한 채.


“경찰이 내 몽타주를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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