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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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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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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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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0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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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188화

DUMMY

“오빠! 나하고 밤 안 샐 거예요?”


주리가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졌던 에이프런 드레스를 다듬으며 칭얼댄다. 벗어놓은 장옷을 주섬주섬 걸치는 정우는 “왜 그런 말이니?”하고 피식 웃는다.


“너무 격렬했잖아요. 오늘 할 거 한 번에 다 할 것처럼. 그래서야 밤에 쓸 힘 없으면 어떡해요?”


주리는 그러며 입술을 장난스럽게 삐죽 내미는 것이었다. 말은 그랬지만 얼굴은 만족감으로 가득하였다. 정우는 그 입에 쪽 하고 입을 맞추고는, “그럼, 네가 자꾸만 더 세게, 더 세게 해달라고 보채는데 어떡하니?”라고 웃고 만다. 주리는 조금 전까지 잔뜩 빨개졌던 얼굴을 다시 살짝 붉히고는 무안하다는 낯빛을 보이면서도 히히 웃어 버린다.


그런데 호텔 방을 나서서 만찬장으로 내려갈 때, 좋아졌던 기분이 한 번에 상할 일이 생겼다. 로비에 일련의 중국 사람들이 모여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정우는 그들과 안면이 있는지 포권을 취하며 인사하려 했다. 그런데 이들은 정우를 보자마자 못 볼 거라도 본 것인 양 일제히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몇몇이 나지막히 내뱉는 “빵즈 놈.”이란 멸칭과 함께. 이들이 순간적으로 풍기는 적대감에, 포권을 취하려 인사를 하려 했던 정우만 무안하게 되어 버렸다.


그들은 얼굴에 불쾌하단 인상을 가득 띄우고 다른 데로 휙 가버렸다. 주리는 어이가 없어서 화를 낸다.


“뭐에요, 저 사람들? 인사를 했으면 받아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정우는 착잡한 표정이 되었다.


“평양채 사람들이야. 저기 사람들은 우리 조선 사람들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아.”


“대체 왜요?”


정우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작년 7월 만보산의 일을 계기로 벌어진 폭동에서, 평양채가 관리하는 가게들이 크나큰 피해를 보았다고. 폭도들에게 기습당한 평양채 사람들도 적지 않게 죽고 다치는 바람에, 평양채주 바오징쿠이를 비롯한 평양채 소속 단원들은 조선인을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나쁜 건 그 사람들인데, 왜 오빠가 무안을 당해야 해요?”


주리는 기분이 나빠져서 칭얼대었다. 그 말에 정우는 “사람은 무엇이든 뭉뚱그려 보려는 습관이 있으니까. 우리가 일본 사람을 볼 때도 그렇고.”라고 하며 한숨을 쉬었다. 주리도 생각해 보니 총독부의 통치와 이를 믿고 악행을 저지르는 일본 사람들 때문에, 그저 평범하게만 살던 일본 사람도 조선 사람의 증오를 받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니 기분이 우울해졌다.


다행이도 만찬장에 내려갔을 때, 주리는 우울감을 한 번에 씻어버릴 수 있었다. 정우가 피곤하다고 침대에 누워 버리고, 자기는 아쉬움 가득하여 투덜대면서 등 돌리고 자버릴 일은 없을 거라고 속으로 환호했다. 장 대인의 만찬 자리에 나온 음식 중 주요리는, 자라탕과 광둥식 장어 요리였던 것이었다.


주리는 아버지가 집에서 손님맞이를 했을 때, 자라와 장어가 남자의 양기를 북돋아 주는 데 아주 좋은 것이라고 얼핏 들은 바가 있었기에 참으로 환호작약할 일이었다.


“조카! 오늘 조카에게 정말 필요한 음식일 걸세! 사양 말고 들게나!”


상석의 장 대인이 유쾌하게 껄껄 웃고 자리에 초대된 다른 인사들도 따라 웃는다. 정우는 없잖아 무안함을 느끼면서도, “대인의 배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라고 공손히 포권한다. 주리야 말할 것도 없이, “대인! 정말 복 받으실 거예요!”라고 앞장서서 나서니 다들 그게 귀엽다고 웃는다. 이걸로 정우를 정말 잠 안 재울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이미 그녀의 머릿속은 벌써 화촉을 밝힌 호텔방에 가 있었다.


주리는 그리하여 정우의 접시에 장어와 부추와 여타 양기에 좋다는 것들을 계속 집어다 얹어주는 것이었다. 정우는 주리의 태도에 곤란해하면서도, 만찬장에 모인 여러 초대손님과 인사를 나누고 덕담을 주고받으며 임무의 연장을 수행하려 하였다.


만찬에 참석한 사람은 CC단의 샤오정과 루춘팡 중화민국 총영사 뿐만 아니라 그를 따라온 영사관의 외교관들, 청나라가 있던 시절부터 인천에 정착한 장로격 인사들이나 유력한 실업가 등의 지도적인 인사들과 그들의 부인들, 그리고 본타인 오룡회에서 온 간부들도 있었다. 장카이셴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들은 정우가 장카이셴의 의형제 천남건의 제자라는 것에 호기심을 보였다.


주로 나온 대화는 이봉창의 천황 폭살 시도가 아깝게 실패했다는 것과, 일본이 상하이를 무단으로 점령한 현실에 대한 분노였다. 정우는 이봉창 동지의 의거가 작년까지만 해도 극히 험악했던 분위기를 바꿔놓는 데 일조했다고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작년 7월의 사건 이후 일 때문에 이 양산빈관에 들를 때마다 그에게 쏟아진 적대적인 시선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정우는 그때마다 우리 민족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 정부 사람으로서 그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사과의 말을 계속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의 여러 중국 사람들은, 그들은 잃을 것이 많아서 일본을 상대로 제대로 된 기개를 보여주지 못하는데, 조선 사람들이 자기들이 못한 것을 해 주었다며 찬사를 바치고 있었다. 이봉창의 의거에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는 분위기였다. 감개무량했지만, 씁쓸한 일이었다. 사람의 태도가 이렇게 빨리 바뀔 수 있는 거였단 말인가?


그럼에도 정우는 이들과의 우호적 대화에 집중하며, 지금 당장 한 명의 아군이라도 더 만들어 두는 것이 급선무라는 판단하에 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한다. 중국이 당장 대일항전을 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잘 알지만, 언젠가는 중국 땅에서 일본을 완전히 몰아내고 대한의 독립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이다. 또 과거 명나라와 조선이 그리하였듯이, 독립된 대한민국은 중화민국과 절대로 뗄 수 없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하며, 자부심이 강한 중국인들을 만족시켜 주려 하였다.


그 와중에도 바쁜 것은, 주리에게 계속 말을 걸어대는 중국 부인들의 말을 동시에 통역해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중국말 좀 배워두는 건데.”


주리는 정우가 다른 중국 사람들과 말하다가 자기 말을 통역해주느라 아주 정신이 없다 보니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정우는 “괜찮아. 괜찮아.”하며 전혀 지치거나 힘들다는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중국 귀부인들이 주리에게 보이는 우호적 태도와 칭찬을 옮겨 주며 주리가 기뻐하기 때문에, 피곤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이 부인들은 주리가 그들 기준으로 한간의 딸이면서도 독립운동을 돕고 있다는 것에 대견함을 보이고, 또 그녀의 에이프런 드레스 차림이 ‘크어아이’하다며 호호 웃고 있었다.


그러며 만찬이 화기애애하게 끝나 갔을 때, 장 대인은 정우에게 한 마디 당부를 한다.


“조카. 댄스홀에서는 언행을 주의해 주게. 거기 구이쯔 손님들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돈 받아먹은 구이쯔 세관관리나 경찰도 여럿 올 걸세. 조선 사람임을 드러내면 곤란해질 것이야.”


장 대인은 일본인을 대게 구이쯔라고 경멸하면서도, 합법과 비합법 양쪽에서 동시에 사업을 하는 이상 일본 관리들과 관계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천부 청사건물과 인천 세관과 경찰서에서 “선물”을 주고받으며 중국식 관계를 구축한 일본인이 한 둘이 아니었다. 정우는 이 점을 고려해 마땅히 그리 하겠으니 안심하라는 말씀을 올렸다.


장 대인은 이때 주리에게도 다소 걱정스럽단 시선을 보였다.


“조카며느리. 자네의 그 서양 복장도 어쩔 수 없이 눈에 띈다네. 적의 경찰 간부도 올 것이니 주목받지 않는 게 좋을 것이야.”


“어라? 그럼 어떡한다죠?”


주리는 난감했다. 갈아입은 옷은 속옷 말고 준비해오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장 대인은 바로 해법을 제시해준다.


“우리 여직원들이 입는 옷을 빌려줄 터이니, 댄스홀에는 그걸 입고 가는 게 좋을 걸세.”


“앗! 정말요?”


주리는 바로 신났다. 중국 부인들이나 호텔 여직원들이 입고 있는, 몸에 착 달라붙어 몸매를 우아하게 과시하는 중국 여성복인 기포(旗袍)를 본 순간 입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던 까닭이었다.


정우 또한 장 대인의 권유로 변장용으로 입은 빛바랜 장포에서 말쑥한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빌려준 사람은 량궈였다.


“난 입을 일이 통 없어서 말일세. 춤출 일도 없고.”


량궈가 애써 웃었지만, 그의 얼굴에서 나오는 씁쓸함은 감출 수 없었다. 정우는 옥룡회 사람들과 처음 만날 때부터 량궈와 교분을 나눠온 터였다. 그 때문에 량 형님이 어떤 고충을 겪고 있는 지 잘 알고 있는 바다.


량궈는 현재 고치기 어려운 병이 걸린 부인과 사실상 생이별 상태였다. 그녀가 완쾌되려면, 16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로 한다고 들었었다. 정우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반쪽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그의 번뇌가 상상조차 되지 않아 아득하였던 적이 있었다.


“잘 어울리는군, 형제. 잘 어울려.”


정우가 양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량궈가 씩 웃는다. 어느새인가 튀어나온 장 대인의 심부름꾼 웨이샤오바오는 “형님! 단연 미공자이십니다요! 그 옛날 삼국지에 나오는 미염공 같습니다요!”라고 아부를 떨려 하다가 량궈에게 “미주랑이겠지. 미염공은 관우고.”라고 딴죽을 받는다. 게다가 차오펑이 호탕하게 웃으며 “미주랑 주유는 서른 남짓하여 요절했는데, 자네는 정우 형제가 요절하라고 하는 겐가?”라고 하나, 웨이샤오바오는 기겁하여 자기 입을 치며 “아이고야, 이놈의 입이 방정입니다요!”라고 하니 웃음이 터진다.


그런데 이때, 정우는 한 곳에 시선이 못 박혔다.


“헤헤. 저 어때요?”


정우 앞에 나타난 주리는 평소의 귀여움 속에 가려 있던 성숙미와 우아함을 뽐내고 있었다. 아리땁게 땋았던 댕기머리를 풀고 머리를 뒤로 비끄러매어 묶었다. 여기에 에이프런 드레스와 비슷한 색의 푸른 기포를 입고 있었다. 전신에 착 달라붙어서, 굴곡진 몸매를 과감하게 드러내는 그런 옷이었다.


“어때요? 어때요? 저도 이런 거 제법 잘 어울리지 않아요?”


주리가 몸을 빙그르르 돌려 보았다. 그 말 대로였다. 정우는 자기 말고 다른 남자가 주리에게 시선이 돌아가진 않을까 경계감까지 들 정도였다. 몸에 완전히 밀착하여 가슴의 곡선이, 그리고 둔부의 곡선이 절묘하게 부각되는 것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허리 아래에서 호리병처럼 매끄럽게 좁혀든 치마가 하반신에 착 달라붙어 더욱 돋보였다. 그리고 정우를 더 곤란하게 만든 곳은 역시······.


“히히히. 오빤 여기면 사족을 못 쓰죠?”


주리가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치맛자락 왼쪽에 있는 옆트임으로 훤히 드러난 허벅지를 곁눈질하였다. 기장이 주리가 평소 입고 다니는 것보다 무릎 아래로 내려가 있는데도, 저 트임 때문에 한눈에 다리가 다 드러났다. 게다가 더 정우의 가슴을 흔들어 놓은 곳은, 무릎 위까지 오는 검은 스타킹이었다. 그 뜨거웠던 첫 경험에서,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블루머에 무릎 위까지 오는 양말을 신었던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자태였다.


차오펑은 “하하하!”하고 호쾌하게 웃으며 정우의 어깨를 한 대 팡 치고 “자네는 실로 행운아일세! 이런 귀여운 소저를 배필로 삼다니. 내 부인도 만만찮게 귀엽지만 말이야!”라고 해 준다. 량궈는 “상하이에서도 이런 선남선녀는 보기 드물지. 소저에게 감사를 표하오. 정우 형제는 항상 너무 진지하기만 해서 걱정이 없진 않았는데, 이렇게 짝이 되어 주셨으니 말이오.”라며 웃음짓는다.


주리는 “헤헤헤. 뭘요.”라고 살짝 부끄러워하는 와중에, 웨이샤오바오가 또 아부를 떨려 한다.


“과연 형수님은 한 떨기 수선화요 연꽃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셨으니, 이는 실로 뭇 사내들의 애간장을 바싹 타들어 가게 하실······.”


“자. 이제 내려가자.”


“예.”


둘은 웨이샤오바오의 아부 따윈 상큼하게 무시하고 팔짱을 낀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직 한 여자만 바라보는 유형인 차오펑과 량궈와 달리, 웨이샤오바오는 빈말로도 잘생겼다고 할 수 없는 얼굴로도 최소 7명의 여자를 후린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자였다. 정우는 웨이샤오바오가 허구한 날 아부나 떨고 경박한 언행을 해도 그가 실은 의리가 매우 강하고 또 재밌는 사람이라 느껴서 가까이해 왔다. 하지만 둘이 같이 있는 한 이 아부꾼에게 경계감을 느끼지 않으면 이상했다.


어스름한 조명이 비추는 댄스홀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인천에서 힘 좀 있다는 인사들과 놀러 다니길 좋아하는 모던보이, 모던걸은 다 광고 전단이라도 보고 달려왔는지 실로 문전성시였다. 분명 우가키 총독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비상시국에 그런 걸 허용할 수 없다.”라며 댄스홀 영업을 금지한다는 포고령을 발포한 바 있었다. 하지만 장 대인의 입김이 닿는 관리들에겐 별반 소용이 없는 모양이었다.


양산빈관은 인천의 대표적인 위락구역인 월미도가 포화 상태에 이르자 주목받기 시작한 송도 해안가에 떡하니 자리잡은 관계로,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의 시선을 있는 대로 끌게 된지 몇 년이 된 바였다. 그런 양산빈관 지하에 댄스홀이 개장했다고 옥룡회의 합법적 회사들이 열심히 선전을 해대었으니 뭇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었다.


무대에는 악단이 늘어서서 상하이에서 유행하는 최신 재즈곡을 연주할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중앙에 놓인 재즈 피아노가 눈에 띈다. 그러나 정우는 그 와중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이 중에는 분명 인천경찰서 소속 경찰들도 있을 터였다. 여러 차례 경찰을 상대해 온 정우는 그들이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를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차암. 긴장 좀 풀어요.”


주리가 정우의 잠깐 굳어진 표정을 보고 입맞춤 한 번으로 풀어주려 한다.


“오늘 우리가 여기 있는 걸 경찰에서 누가 안다고요?”


“그렇긴 하겠네.”


오늘만큼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즐기자는 주리의 눈빛에, 정우도 그만 풀어지고 말았다.


빈 테이블 하나를 찾아 들어가 앉은 직후, 장 대인이 무대 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오는 게 보인다. 꽤 장문의 연설문을 담은 것 같은 종이 뭉치를 뒤적이더니 그의 육중한 체구만큼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진다.


“신사숙녀 여러분! 인천 거리에서 명망 높으신 분들! 이 초라한 양산빈관까지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알던 분들도 계시고, 처음 뵙는 분들도 많으시군요! 옛 청조 시절에 인천에 우리 조계지가 생긴 이후로, 우리 중국의 동포들이 이 인천 땅에 와서 터전을 잡고······.”


그러나 장 대인은 “에잉! 뭐 이렇게 쓸데없이 길게 썼어!”라고 투덜거리고는 연설문 뭉치를 뒤로 확 돌려버린다. 그 동작에 좌중에서 웃음이 터진다.


“여러분들이 기다리는 건, 상하이의 최신유행 재즈와 춤판, 그리고 좋은 술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긴말할 것 없이, 이 순간을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고 “야! 음악 시작해라!”라고 호령하니 악단이 일제히 재즈 가락을 연주하고, 조명이 천장에서 번쩍 빛을 발한다. 상하이에서 이름이 높다는 여가수의 입에서, 청아한 가락이 흘러나온다.


“춤춰본 적 있어요?”


주리가 가장 중요한 걸 물었다.


“조금은. 백작님께서 가르쳐 주셨어. 화족 행세를 하려면 사교댄스도 알아야 한다고. 근데 그때 이후 연습해 본 적이 없네.”


정우는 어째 춤추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춤까지 추어갈 정도로 깊은 사교활동 없이도 작업을 해 왔기 때문에 춤을 처음 배운 이후 춰본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내심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못내 걱정이 들던 차였다.


“저도 별로 없어요. 친구들 따라 댄스홀 가본 적은 있는데, 전 영 상대해 주는 남자가 없더라고요. 내가 너무 애처럼 생겼다나 뭐라나.”


그러며 툴툴대던 주리였지만, “지금은 아니죠?”하고 정우 몸에 착 달라붙는다. 정우는 말 없이 주리의 허리를 껴안고 일으켜 세웠다.


둘은 재즈 연주에 맞춰 손잡고 춤추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간다. 정우는 왼발을 뒤로 빼고 허리를 살짝 굽히며 오른손을 내밀며 “한 곡 허락해 주시겠습니까?”라고 청한다. 주리는 정우가 간만에 화족 흉내를 내자 킥킥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도, 짐짓 점잔을 빼며 “그래 주신다며 영광이겠습니다.”라고 하고는 내민 손을 살포시 잡아 주었다.


그리하여 둘은 본격적으로 가락에 몸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춤을 누가 봤다가는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에······. 이렇게 하는 거였던가?”


“그, 글쎄요? 하하하······.”


둘의 춤은 매우 어색하게 시작했다. 전문적인 춤꾼은 물론이고 사교댄스를 약간이나마 배운 적도 없는 사람이 보더라도 혀를 끌끌 찼을 것이리라.


어찌어찌 옆에서 춤추는 남의 자세를 따라 하긴 했지만, 스텝을 밟다가 서로 발을 잘못 밟을까 봐 신경이 쓰여서 발을 과감히 놀리지 못하였다. 서로 손을 잡은 채 그저 우로 좌로 왔다갔다 하는 모양새였다. 그저 누가 보고 웃을까 봐 걱정되어 나오는 멋쩍고 수줍은 미소만 흐를 뿐이었다.


하지만 음악 소리에, 박자에 맞춰서 서로 호흡을 맞춰보고 남의 자세를 곁눈질하며 한 박자 늦게나마 따라가다 보니, 여전히 어색하더라도 마냥 뻣뻣하게 움직이지만은 않게 되었다. 굳어진 동작이나마 제법 커지며, 조금씩 조금씩 몸에 열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둘은 한동안 눈을 마주친 채, 아무 말 없이 춤에 열중하였다. 쏟아지는 조명 속에서, 분명 사방에 춤추는 사람으로 둘러싸인 가운데에서도, 오직 이곳에 둘만 있는 느낌이었다.


어느덧 뻣뻣하게 삐걱대던 몸에 윤활제라도 뿌려진 듯 동작은 한층 더 부드러워지고, 한층 더 과감해진다. 춤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주리는 발을 쭉 뻗어 옆트임을 통해 훤히 드러난 허벅다리를 과시하기까지 하며 정우를 자극해 온다.


주리에겐 유감스럽게도 정우는 이미 익숙해진 자극에 쩔쩔매지 않고 빙긋이 웃으며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였다. 장난에 안 걸리자 주리가 삐진 척 하며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미니, 그 위로 정우의 입술이 기습적으로 날아온다. 이에 치사하다고 툴툴대며 뻣팅기면서도, 금세 히히 웃으며 자기가 기습할 기회를 엿본다.


그렇게 얼마나 댄스에 몰두했을까? 정우는 주리의 동작이 조금씩 단조로워지며 자기에게 기대 오는 걸 느꼈다. 슬슬 피곤해지는 모양이었다.


“나 오늘 잠 안 재운다고 하지 않았니?”


장난스럽게 물어보니, “그럴 건데요.”하고 혀가 쏙 나온다. 그렇지만 정우는 주리의 뺨에 땀 한 줄기가 또르르 떨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나갈까? 난 좀 더워지는 것 같네.”


주리는 마침 더워지기 시작해서 시원한 바람 한번 쐬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주리는 활짝 웃고는 “그럼 우리 바닷가 가요!”라고 정우 팔을 잡아끌기 시작하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 작성자
    Lv.47 나래로
    작성일
    20.08.21 17:16
    No. 1

    선작만 해 놨다가 이제야 읽게 됐습니다. 이 정도 장편에 양질의 글을 찾기가 힘든데 너무 감사해요. 문체가 조금 옛날 느낌이 나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래서 소설 특색과도 어울리고, 최근 난립하는 경박한 문체보다 진중함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0.08.21 17:22
    No. 2

    호평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당시 분위기를 내려고 그때의 작품들을 많이 읽었던 흔적이 많이 남았어요 ㅎㅎ

    앞으로도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5 고단풍
    작성일
    20.09.03 20:53
    No. 3

    잠깐만요?
    16년 전에 불치의 병에 걸린 아내를 둔 량궈라니...
    설마설마...
    제가 좋아하는 그 소설의 여주인공인 건가요?
    저 그 여주인공 진짜 좋아했어요.^^
    무튼 치파오 입은 주리 모습이 상상되네요.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0.09.03 20:57
    No. 4

    맞아요 ㅋㅋㅋ 신조협려의 패러디랍니다. 역개루 카페에 가면 치파오 입은 주리 그림을 볼 수 있어요 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7 PnPd
    작성일
    20.09.16 06:13
    No. 5

    선생님 치파오는 아오자이만큼이나 위대하단 말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0.09.16 09:59
    No. 6

    ㅋㅋㅋ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 영락태왕
    작성일
    21.06.19 20:42
    No. 7

    괜히 이러다가 일본놈들한테 걸릴까봐 조마조마 하네요 ㅋㅋ 그래도 둘이 연애하는 모습보면 좋긴하네요 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1.06.20 12:31
    No. 8

    달달하게~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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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203화 +8 20.09.23 274 9 13쪽
202 202화 +8 20.09.20 278 11 12쪽
201 201화 +14 20.09.19 266 10 13쪽
200 200화 +8 20.09.16 272 10 16쪽
199 199화 +8 20.09.13 279 10 17쪽
198 198화 +6 20.09.12 269 10 16쪽
197 197화 +8 20.09.11 265 11 17쪽
196 196화 +6 20.09.07 285 9 16쪽
195 195화 +10 20.09.04 267 10 15쪽
194 194화 +10 20.09.03 265 10 20쪽
193 193화 +10 20.09.01 271 9 15쪽
192 192화 +10 20.08.31 278 10 22쪽
191 191화 +8 20.08.30 270 13 20쪽
190 190화 +12 20.08.27 281 10 17쪽
189 189화 +8 20.08.23 275 12 18쪽
» 188화 +8 20.08.20 272 9 19쪽
187 187화 +12 20.08.17 276 11 21쪽
186 186화 +8 20.08.16 289 10 15쪽
185 185화 +10 20.08.15 285 1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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