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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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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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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7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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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187화

DUMMY

주리는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샤오바오가 운전하는 차는 인천의 중국인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조선이 개항한 후,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어 중국인들이 모여살게 된 이 구역은 실로 조선 속의 중국이었다.


기다란 중국 옷을 걸친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경성에서는 코가네마치에서 잠깐잠깐 볼 수 있었던 중국식 기와를 지붕에 올리고 적색 바탕에 금색 글자를 쓴 간판을 내걸며 중국에서 건너온 각종 희한한 물품들을 진열한 가게들이 즐비하였다. 대백루에서 자주 맡을 수 있었던 코를 찌르는 향신료 냄새가 거리에 진동하였다. 정말로 사진첩 속에서만 본 중국의 한 거리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이 일대는 거의 우리 옥룡회의 영역입니다요. 이곳 상인들은 우리에게 자릿세를 내는 대신 보호를 받고 있습죠. 장사가 잘 되는 곳인 만큼 이곳을 노리는 다른 놈들, 특히 구이쯔 야쿠자들이 많은데, 우리에겐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샤오바오가 운전석에서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주리는 이 샤오바오가 일본 야쿠자들과의 충돌 시 앞장서서 싸우기 보다는 후다닥 도망치는 장면이 더 연상되어서 몰래 킥킥 웃는다. 그의 수다스럽고 경박한 태도에서 강호인의 풍모를 느끼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이 이국적인 거리에서, 여러 눈에 띄는 것들이 있었다. 가게 중 여러 곳이 검게 그을린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아예 인부들이 달려들어 새로 짓고 있는 곳도 있었다. 심지어 완전히 불타 없어졌는지 새까만 공터만 남은 곳도 있었다.


“여기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그 물음에 정우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작년에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


“그렇습죠. 정말 난리도 아니었습죠.”


그 말에는 샤오바오의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둘의 태도에 주리도 얼핏 보거나 들은 기억이 난다. 작년 7월에 만주의 만보산에서 조선 농민들이 중국 농민들에게 죽고 다쳤다는 기사가 난 이후, 분노한 군중들이 조선 곳곳의 중국인 거리를 습격했다고.


활발한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무참한 흔적들은 여전히 남아 있는 그 때의 잔향이었다. 오라버니들의 대화에서 얼핏 들은 게 기억이 다시 난다. 작년의 참상 때문에 조선인과 중국인의 사이가 멀어지고 옥룡회에서 조선인과 독립운동을 질시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말이다.


“난리도 아니었습죠. 되놈 죽여라, 짱꼴라 죽여라 하고 눈깔 뒤집힌 놈들에, 그놈들 부추긴 조직들이 몰려와서는 불 지르고 사람 끌어다 패고. 하도 몰려오는 놈들이 많다 보니 우리도 다 막지 못해서 저렇게 피해 본 가게가 여럿 생기게 되었습니다.”


웨이샤오바오의 말에는 조선인을 힐난하려는 의도가 없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때의 상처를 감출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주리는 이국적인 거리에 눈을 빼앗기면서도 안타까움이 올라온다. 일본제국이라는 거악이 있는데 그것에 맞서 뭉치기는커녕, 약한 사람들끼리 서로 죽일 듯이 싸우다니.


이때 조수석의 량궈가, 주리가 채 입으로 꺼내지 않은 질문에 알아서 대답한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억압을 받은 울분을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풀려 하는 경향이 있지. 난 강호 생활을 하며 그런 자들을 여럿 보았소. 그건 조선인만의 문제가 아니지.”


그 말에 분위기가 빠르게 어두워지려는 찰나, 샤오바오가 다시 가벼운 목소리로 말한다.


“아, 오해는 마세요. 이 샤오바오는 장 대인을 직접 모시는 만큼 조선 사람들 편이라고요. 그래서 욕 좀 먹었습죠.”


그러며 샤오바오는 나름대로 호탕하게 웃으려고 하지만, 아무래도 주리의 마음에 불편함을 불어넣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이 맴도는 가운데, 차는 중국인 거리를 지나 남쪽으로 계속 달린다. 차창 밖으로 조금씩 인가가 드문드문 보이더니, 어느 새 빽빽한 소나무 숲 속에 들어와 있었다. 주리는 이런 숲 속을 드라이브하는 경험은 처음이라, 잠깐 생긴 울적한 마음도 잊어버리고 눈을 빼앗긴다.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깥을 바라보다가, 어느 새 확 하고 푸른색이 눈에 들어왔다. 바다였다.


주리는 가슴이 탁 트이는 청량감을 느꼈다. 초록빛 소나무 숲을 지나 펼쳐진 넘실거리는 바다 빛에 벌써부터 시원해졌다. 푸르른 바다와 고운 모래사장, 그리고 그 뒤의 소나무 숲은 실로 절경이었다. 여름이었다면 대번에 바다로 뛰어들었겠지만, 아직은 그러기엔 쌀쌀하였다. 정우와 같이 손잡고 해변을 걷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지만,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얼굴에 화색이 돌만 하였다.


그런 상상에 열중하던 중, 앞 창문으로 4층짜리 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옥룡회의 본부 양산빈관임을 바로 알아챘다. 양산빈관은 경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호텔이 아닌, 벽재를 대리석으로 쓴 것처럼 하얀 건물이었다. 직선이 쭉쭉 뻗어 있으면서도 네모반듯하지만 않고 각이 여러 군데 져 있었으며 창틀은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되어 있었다. 주변 환경에 비해 어색하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차에서 내려 들어가니 조선철도호텔 로비는 저리가라 할 정도의 화려한 로비가 펼쳐졌다. 얼마나 반질반질하게 닦았는지 흙 묻은 구둣발로 들어가기가 미안할 정도의 대리석 바닥이 샹들리에 조명에 비추어져 번쩍이고 있었다. 양복과 중국 옷차림의 여러 손님과 직원들이 오가고 있있다. 이들 중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량궈와 웨이샤오바오에게 깍듯이 인사하는 게 보인다. 웨이샤오바오는 그 상황을 즐기는지 거들먹거리는 티를 낸다. 량궈가 그 잘생긴 얼굴에 약간이나마 입술을 움직여 미소를 띠니, 여직원 몇이 좋아라 하는 게 보인다.


이들을 로비에서 바로 맞이해 준 사람은, 누가 봐도 “남자답게 생겼다.”라고 바로 생각할 정도의 선이 굵은 사내였다. 짙은 눈썹에 거친 얼굴, 부리부리한 눈매에 당당한 체구를 갖춘 이 사내는 정우를 보자마하 “하하하!”하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정우 형제! 온다고 들어 알고 있었네! 오느라 수고했네! 형제들도 수고 많았고!”


“감사합니다, 차오 형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둘은 친애의 표시로 악수를 나누고 서로 가볍게 포옹하기까지 한다. 차오 형님이라 불린 이 사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아하! 한주리 소저로군! 대인께 말씀 들은 바 있네! 양산빈관에 온 걸 환영하네!”


이 중국인도 우호적이다 못해 열렬히 환영하는 태도였다. 주리도 예를 갖추어 감사하다고 말하며 통성명을 나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차오펑(喬峰)이라 하였다. 웨이샤오바오나 량궈와 마찬가지로 옥룡회의 단원이자 장 대인을 직접 모시는 사람으로 서열상 그들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자! 대인께서 기다리시네! 올라가도록 하세나!”


차오라는 중국 사람이 그 큰 손을 휙 하고 휘둘러 엘리베이터로 그들을 안내하였다. 량궈와 웨이샤오바오는 더 일이 있는지 1층에 남고 나중에 다시 보자고 한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틈으로 웨이샤오바오가 로비 “주방에 월병하고 차 더 올리라고 전해.”라고 지시하는 게 얼핏 보인다.


차오펑의 안내로 4층에 있는 사장실 문이 열렸을 때, “와하하하하! 정우 조카! 그리고 우리 조카며느리!”라고 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환영해 주었다. 쾅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이 발을 구르다시피 하며 그들에게 오는 거구의 중국인, 옥룡회 분타주 장카이셴 대인이었다.


장 대인은 둘이 포권을 올리며 인사하니, “예의 차릴 거 없네! 우리가 남인가?”하고 손사래를 치고는, 손수 테이블의 자리로 안내한다. 테이블에는 이미 두 사내가 와 있었다. 둘 다 양복 차림이었는데 왼쪽에 앉은 사람은 학자풍의 인상에 로이드 안경을 낀 중년에 접어든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인상이 두드러보이지는 않고 그저 온화하게만 생긴 관리처럼 보였다.


“자! 인사 올리시게! 이쪽은 CC단에서 온 샤오정(蕭錚) 선생, 또 이쪽은 루춘팡(盧春方) 총영사님.”


익히 들었던 CC단의 간부와 경성 주재 중화민국 총영사였다. 원래부터 협조관계인 CC단은 물론이거니와, 중화민국 정부를 대표해 조선에서 거주하는 모든 중국 국적 사람들을 관리하는 경성 주재 중화민국 총영사까지 이 방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장 대인이 조선 화교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증표라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임시정부 사람이자 한인애국단 단원이라고 소개받은 정우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데, 특히 CC단의 샤오정이 보다 더 덕담을 보낸다.


“천(陳) 단장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큰일을 하고 있다고 들어 알고 있소. 지난번 왜황 폭살 시도는 참으로 아쉬웠소. 중국 국민 중 이를 아쉽지 않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샤오정이 말한 천 단장은 CC단의 수장 천궈푸(陳果夫)를 말한다. 천궈푸는 그의 동생이자 국민당 조사부장인 천리푸(陳立夫)와 함께 CC단을 조직해 이끄는 자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우리 정부 또한 CC단의 협조와 원조에 언제나 크나큰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정우가 겸손하게 답한다. 샤오 선생과 루 총영사는 주리를 보고 중국어로 무어라 인사를 하지만, 당연히 주리는 알아듣지를 못하니 답답하다. 정우는 주리를 위해 통역해 준다.


“네가 이번에 가져온 정보가 큰 가치가 있다고 들었다고 하셔. 중화민국 정부와 중국국민당을 대표해 감사하다고 하시네.”


“어머, 정말요?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주리는 자신의 정보가 마음속이나 실제 거리나 멀리 느껴지는 소련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보다는 임시정부를 도와준다는 중화민국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더 기쁘다.


“자, 조카. 그럼 사업 얘기를 먼저 해 볼까?”


장 대인이 수염을 쓰다듬는다. 정우를 매우 아낀다는 표정 속에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챙길 것은 챙겨야 한다는 투였다. 정우는 주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가방을 올리고, 자신 있게 펼쳤다. 그 안에 현금 다발이 가득하다.


“4만원 송금을 보내고 수수료로 대인께 4,000원을 드립니다. 그리고 이건 별도로······.”


그러며 정우는 패물이 여럿 담긴 주머니를 꺼낸다.


“한인애국단 경성지부가 대인의 계속되는 호의에 드리는 작은 성의입니다.”


장 대인의 얼굴에 흐뭇한 만족감이 흐른다. 뒤에 조용히 서 있는 비서에게 손짓해서 주머니를 가져오게 한 장 대인은, 큼지막한 입술에 웃음을 띄운다.


“우리 현제는 항상 이 형을 생각해 준단 말이지. 이러니까 내가 작년 7월에 계속 관계 끊으라는 소리 들어도 다 안 들은 거로 했단 말일세.”


비서가 현금다발과 주머니를 챙겨 나간 뒤, “자, 이제 먼길 오신 분들게 들려줘야 하지 않겠나?”라는 말에 레코드가 튀어나와 유성기에 꽃힌다.


샤오 선생과 루 총영사는 모두 일본어를 잘 아는지, 통역을 대동하지 않고도 녹음된 대화를 알아듣는 것 같았다. 마침 올라온 차와 월병을 곁들이며, 침묵 속에서 유성기 속 대화에 다들 집중한다.


두 중국인 관리의 부드러운 인상은 관동군 장교들의 대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굳어지더니, 중화민국의 대표적인 반일 인사들에 대한 암살을 논할 때는 완전히 험악해져 버렸다.


루 총영사가 얼굴을 붉히며 격양된 목소리로 중국말을 내뱉는다. 주리는 이 중 일본인을 욕하는 말인 ‘구이쯔’만은 정확히 알아들었다. 샤오 선생은 보다 더 차분한 낯빛이었지만 그래도 이를 악무는 것은 똑같았다. 장 대인 또한 중간에 무언가 험악한 중국말 욕설을 내뱉는 것 같았다.


레코드가 유성기에서 다 돌아가자, 세 중국 사람은 흥분한 말투로 말을 주고받는다. 정우는 궁금해하는 주리를 위해 하나하나 다 알려 주었다.


루 총영사는 중화민국 외교관으로서 외교부의 수장인 쑹쯔원을 살해하겠다는 음모는 곧 중화민국에 대한 전쟁선포나 다름없다고 가장 격분하였다. 이와 함께 관동군이 꾸민 음모가 이누카이 내각이 배후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번에도 관동군의 독단행동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샤 두 가능성 모두 열어둬야겠지만, 지금 만주국 문제에 대해 국제여론을 유리하게 만들려고 애를 쓰는 이누카이 내각이 이런 위험한 일을 벌이지는 못할 것이므로 또 관동군이 독단적 행동을 했다는 쪽에 무게를 두었다. 장 대인은 자기 산하조직 중에 그런 놈이 있다면 바로 달려가 목을 쳐버렸을 거라고 으르렁댔다.


샤오 선생은 뒤이어 봉천 특무기관에 포섭된 중국 내 조직 중에는 정부 돈을 받고 일하는 조직도 있다는 점에서 기가 찬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그러나 이 정보가 그들에게 넘어온 이상, 전부 무사하진 못할 것이라며 서늘한 눈빛을 드러냈다. 장 대인은 본타인 오룡회에 알려 구이쯔 놈들에게 붙어먹은 자라 새끼들을 죄다 박살 내 버리는 데 한몫하겠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야. 그 나쁜 놈들이 진작 다 없어지면, 우리 정부는 무사하겠네요.”


이 대화를 알려주니 주리가 월병을 오물거리다 말고 좋아라 웃는다. 주리 말 대로 중화민국 정부가 위험을 사전에 제거해 준다면 사전경고를 받아 긴장한 정부 사람들은 한 동안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이었다.


이후 심각하게 논의된 것은 대화 속에 언급된 왕징웨이 행정원장 문제였다. 그들은 왕징웨이가 한간은 분명 아니라고 한목소리로 말하긴 했지만, 루 총영사는 그의 대일 온건 자세가 동북을 상실하고 상하이가 점령당한 지금에는 중국에서나 일본에서나 한간으로 오해받기에 십상이라고 말했다. CC단의 샤오 선생은 왕징웨이가 일본과 뒤에서 거래를 하는 등의 정황은 일제 없었지만, 저 대화에서 암시하듯이 장차 일본이 가장 포섭하려고 노력할 대상임은 분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장 대인은 왕징웨이가 일본에 보이는 온건한 태도가 일본이 강하고 중국이 약한 지금에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이해하지만, 그 때문에 더 짜증이 난다고 내뱉었다.


이때 주리가 말한다.


“차암. 그 왕징웨이란 분, 백암 선생님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추천사를 써주신 분이잖아요. 그걸 보고 우리 독립운동을 열렬히 응원하는 분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일본에 무른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 같네요.”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는 주리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길로 뛰어들게 해 준 이정표와 같은 책이었기에, 그 책의 구절 하나하나를 마음에 깊이 새긴 터였다. 그래서 추천사를 써준 왕정위(왕징웨이)란 중국 사람은 분명 우리 독립을 응원하는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들어보니 일본에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실망감이 드는 터였다.


“그 사람은 한때 쑨원 선생을 돕는 열렬한 투사였으니까. 하지만 높은 위치에 서게 되며, 투사였던 시절보다 고려하고 따져야 할 것이 너무 많아진 것 같아.”


정우가 씁쓸한 감정을 드러내었다. 지금의 왕징웨이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의 일본이 강하고 조선이 약하고 개화되며 계몽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완전한 독립이 비현실적이며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하거나, 아니면 일본을 상대로 자치와 참정권을 얻어내는 “현실적” 목표를 추구하자는 사람들이 여럿 등장했었다. 지금의 아일랜드가 영국에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본제국 하에서의 자치를 말하고 참정권을 말하며 개화와 계몽을 말하던 사람들에게는 총독부의 자금이 은행 융자의 형태로 흘러 들어갔으며, 중추원 참의나 각종 기관의 고문이니 촉탁이니 하는 자리가 내려졌다. 아일랜드 친구 패트릭 오브라이언은 조선 자치론에 대해 듣고 그런 놈들이 가장 역겨운 놈들이라고 여러 차례 격분한 바가 있었다.


지금의 왕징웨이는 그런 사람은 분명 아닌 것 같았다. 그저 당장 일본제국과 중화민국이 충돌하면 중화민국이 이길 수 없다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라를 위해 더 필요한 것을 추구하려는 사람이라고 보는 쪽이 더 맞아 보였다. 하지만 계속해서 현실에 타협하기만 했을 때, 결국 을사년과 정미년과 경술년에 굴종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던 자들처럼, 그리고 지금 조선에서 자치론을 말하는 사람들처럼 적에게 넘어가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정우는 몇 년 후 그 불안감이 실제로 되었음을 확인하게 되나 이는 후일의 일이다.


자신들의 대화를 끝낸 중국 사람들은 이제 주리에게 흥미를 보인다. 루 총영사가 호기심을 가득 담아 물어본다. 어떻게 이 작은 소저가 이리도 귀중한 정보들을 가져올 수 있었던 건가? 아직 고등여학교 학생이라고 들었는데도 말이다.


정우가 차분히 사정을 설명하니, 루 총영사가 허허 웃으며 손뼉을 딱 친다.


“절묘하구려! 흡사 오왕 부차(夫差)의 정신을 빼놓아 월나라의 승리에 공헌한 서시 같소!”


정우는 그 말이 언짢았다. 루 총영사는 칭찬하려고 한 말이었겠지만, 그에게 있어서 주리는 그저 미인계의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우는 그 말은 주리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샤오 선생의 찬사만 전달한다.


“주리 소저의 큰 활약으로 우리 중화민국의 요인들이 안전해질 수 있게 되었소. 이는 지난번 일본 천황 폭살 미수로 더욱 공고해진 중한 양국의 우의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오. 이 일은 장 군사위원장님을 비롯한 우리 정부의 여러 사람들이 다 알고 찬사를 보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오.”


주리는 이 찬사에 뛸 듯이 기쁘면서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름대로의 외교적 수사법을 쓴다.


“샤오 선생님의 배려 넘치는 말씀 감사합니다. 저의 작은 행동이 큰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저 또한 양국의 우의 아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화민국의 과업인 국민혁명에 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정우가 주리의 말을 전해 주니, 샤오 선생과 루 총영사 모두 “하오. 하오.”라고 한다.


이때 장 대인이 정우와 주리를 돌아보며 호탕하게 웃음짓는다.


“조카. 내가 주리 양까지 같이 오라고 한 이유는, 이렇게 두 분께 칭찬을 받게 하기 위하기도 했지만, 형제들의 맏이인 정우 조카가 이번에 좀 쉬었으면 하는 바람에 부른 거라네. 그간 조카가 현제를 모시고 형제들을 데리고 고군분투하며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가?”


정우는 장 대인이 이런 호의를 베풀기 위해 불렀음을 짐작하고 있었던지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재차 표할 수 밖에 없었다. 주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장 대인은 이 정도 호의만 보낼 생각은 아니다.


“게다가 특별히 오늘 부른 것은, 바로 우리 양산빈관 지하층에서 댄스홀을 개장하기 때문이라네. 여기 총영사님이 오신 것도 댄스홀 개장식에 내가 와 주십사 하고 초청장을 올려서 고맙게도 여기 발걸음을 하신 게고. 자네들이 함께 개장식에 와서 자리를 빛내 주면 고맙겠네.”


주리는 장 대인의 한량없는 호의에 기쁜 나머지, “대인의 은혜를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야 말았다. 장 대인은 만족스럽게 웃고 중국 관리들도 웃는다.


“자. 자. 이 나이 든 아저씨들과 같이 있으면 젊은이들이 영 불편할 걸세! 우리는 여기서 차나 더 마시며 일들 볼 테니, 청년들은 청년들의 일을 하시게나! 자네들 방은 로비에 가서 열쇠를 받아오면 알 걸세. 양산빈관을 쭉 둘러보아도 좋고, 아니면......”


장 대인의 표정이 장난기가 가득해졌다.


“방에서 같이 애정을 폭발시켜도 좋다네! 으하하하!”


“아이, 참! 대인!”


주리는 그 한 마디에 얼굴이 새침아게 발그래해지고 말았다. 정우도 얼굴이 다소 상기되어 멋쩍게 웃어버린다.


그렇게 인사를 올리고, 개장식 전 만찬은 7시라고 들은 뒤 나와 방 열쇠를 찾아 들어갔다. 깔끔하고 정갈하게 정리된 객실에서 정우 눈에 들어온 것은, 중국 혼례식에서 신방에 쓰는 붉은 초였다. 분명 누군가가 특별히 배려하기 위해 가져온 것임이 딱 보였다.


주리는 방문을 딱 걸어 잠그자마자, 정우에게 살포시 다가온다.


“만찬까진 아직 시간 있죠? 1시간 넘게.”


그러며 히히 웃는 얼굴에, 정우는 구태여 입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행동으로 하였다. 그는 주리를 살며시 잡고, 침대 위로 살짝 밀었다. 놀람 반 기쁨 반이 섞인 “어맛!”소리를 들으며.


정우는 침대 위에 무방비하게 쓰러져 까르르 웃는 그녀 위로 싱긋 웃으며 올라갔다. 그의 몸이 그녀의 몸 위에, 그의 입이 그녀의 작은 입술 위에 포개어졌다. 이등객차 객실 안에서 어쩔 수 없이 끝맺지 못했던 걸, 그도 이미 뜨겁도록 갈망하고 있었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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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188화 +8 20.08.20 271 9 19쪽
» 187화 +12 20.08.17 276 11 21쪽
186 186화 +8 20.08.16 289 10 15쪽
185 185화 +10 20.08.15 285 1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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