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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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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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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8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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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화

DUMMY

트럭은 인근의 야트막한 야산 근처까지 달렸다. 천 지부장은 산기슭에 풀이 길게 자란 곳을 보고 적절한 위치에 왔다고 판단하여 창문을 두들겨 세우라는 신호를 보낸다.


트럭이 정차하자, 대석이 명수의 도움을 받으며 아오야기를 잡아올려 어깨에 걸친다. 그러고는 거친 일본말로 한 차례 면박을 준다.


“아, 거! 좀 가만히 있으쇼!”


아오야기는 결박당한 지 꽤 되었는데도 여전히 펄떡펄떡 몸부림치고 있었다. 대석은 짜증스럽다는 얼굴을 하였다. 트럭 아래로 풀쩍 뛰어내린 그는 마구 몸을 흔드는 아오야기를 풀숲에 내던지듯이 내려놓고 손을 탁탁 털었다.


“누가 와서 도와주면 그건 당신 운이고, 아무도 모르면 그것도 당신 운이고. 잘 있으쇼.”


대석이 그렇게 내뱉고는 트럭에 타려고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날카로운 고함이 뒤에서 터져 나왔다.


“네 이놈들! 네놈들은 누구냐!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모두가 화들짝 놀라 트럭에서 뛰어내린다. 대석이 기겁해서 아오야기를 확 쳐다본다. 그의 입에 재갈 대용으로 묶여 있던 천조각이 턱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필사적으로 턱을 움직여서 재갈을 헐겁게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대석은 뭘 해야 하는지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의 큼지막한 손이 아오야기의 목을 거세게 움켜잡는다.


“입 안 닥치면 모가지 꺾어 버릴 줄 알아!”


중위의 입에서 컥컥 소리가 나온다. 종팔이 아오야기 중위가 말을 못하는 동안 다시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다가간다. 아오야기 테츠오는 목을 졸리면서도, 겨우 입을 열어 한 마디를 한다.


“어째······ 서냐? 어째서······ 이건······ 동아세아 전체를 위한······.”


종팔은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입에 재갈을 물린다. 그런데 “잠깐.”하고 제지하는 목소리가 있다. 천 지부장이다.


“이 중위 나리가 꽤 얘기하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이다. 조용조용히 말해 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정우는 그 말에 천 지부장이 무슨 생각인지 바로 알았다. 그는 거칠게 결박당한 와중에도 여전히 기세좋게 날뛰는 중위의 정신까지 모두 꺾어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지부장은 중위 앞에 성큼성큼 다가와 그를 내려다본다. 대석은 무서운 표정을 한 채 그의 목에서 손을 땐다. 중위가 컥컥 거리며 기침해 산소를 들이마신다.


“어째서라고 했나, 중위 나리? 왜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아오야기 중위는 천 지부장의 추궁에 우선 자기 말을 한다


“당신들······ 조선 사람들인가? 불령선인인가?”


중위는 눈이 가려진 상황에서도 그들이 조선말로 몇 마디 주고받는 것을 놓치지 않고 들었었다.


천 지부장은 그 말에 냉소한다.


“당신네들은 그렇게도 말하지. 그쪽에서 뭐라고 규정하든 상관하지 않네.”


“그렇다면 어째서, 어째서 우리를 막으려 하는가!”


아오야기 중위가 절규하듯 소리친다. 청년들은 누가 들을까봐 주변을 날카롭게 경계하고, 대석이 다시 목에 손을 가져다대고 힘을 주어 위협한다. 중위는 강한 힘이 목을 조여오자 결국 목소리를 낮춘 채로 말해야 했다.


“너희들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내가 맡은 임무는 전체 동아세아를 위한 일이다! 동양의 왕도가 서양의 패도를 무너뜨리고, 전 세계가 영구적이고 항구적인 평화를 맞이하기 위한 첫걸음이란 말이다!”


그 말에 청년들은, 진지하게 얼굴이 굳은 정우를 제외하면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천 지부장은 재밌으니 계속해 보라는 표정으로 계속 내려다본다.


“왜 그대 불령선인들은 조선독립이라는 허황된 주장을 내세워 더 큰 것을 보지 못하는가! 이른바 자주독립을 이룬 뒤에 차지할 권력 때문인가? 그런건 사소한 것이다! 세계최종전쟁 후의 영구적 평화! 왕도정치가 실현된 팔굉일우의 시대의 도래에 비하면 너무나도 사소한 것이다! 전체 동아세아가 뭉쳐 서양의 패도에 맞서 세계최종전쟁에서 승리해야 하는데, 왜 너희들은 분열을 추구하는 것이냐! 이러지 말지어다! 다 같이 팔굉일우의 시대, 모두가 다 다툼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시대를 만들 수 있다! 썩어빠진 예토를 아름다운 정토로 바꿀 수 있단 말이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웃음이 곳곳에서 푸하하 터져나온다. 이들은 웃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저 불쌍한 중위 나리는 이 상황에 와서도 세계최종전쟁을 위해 동아세아 전체가 뭉쳐야 한다는 말을 진지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진심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그들에게 있어서 이건 웬만한 광대극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정우만은 그걸 보며 차마 비웃지 못하였다. 자기 목소리를 아오야기 중위가 알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공자, 맹자, 주자와 세존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열심으로 따르듯, 아오야기 중위도 니치렌과 다나카 지카쿠와 이시와라 간지의 가르침을 열심으로 따르고 있다. 비록 그 가르침이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 할 지라도, 그것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바꾸리라고, 이른바 오족협화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그의 진지함을 함부로 비웃을 수가 없었다. 사리사욕을 감추기 위해 신념을 꾸며내는 것이 아닌, 그 신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이니까.


혜월 스님 또한 정우와 같은 생각인지, 웃음기를 입에 띄우지 않은 채 사뭇 침통한 얼굴로 “아미타불.”하면서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천 지부장도 웃지 않는다. 그저 매서운 눈으로 중위를 노려보며, 서늘한 말을 던질 뿐이다.


“팔굉일우라. 재밌군. 그게 무엇인가?”


“전 세계의 화합이다!”


아오야기 중위가 부르짖는다.


“여덟 갈래의 줄기가 하나로 뭉치듯, 세상 전체가 천황 폐하의 이름 아래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현인신이신 폐하의 통치, 그리고 본화상행보살로 내려오실 니치렌 대성인과 세존의 유일경전인 묘법연화경의 가르침 아래 세상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세상에는 전쟁을 비롯한 어떠한 다툼도 없으며, 모두가 평화를 누릴 것이다! 그대 조선 사람들도 이 평화를 누릴······.”


천 지부장은 더 이상 들어주지 않고 말을 끊는다.


“자. 자. 중위. 그대의 말 잘 들었네. 천년왕국이 조만간 도래한다는 미국인 선교사에게 비슷한 말을 들어서 그런지 더 흥미롭군. 거의 1000여년 전에 화장되어 육신이 온데간데 없어진 니치렌 씨가 본화 어쩌고 보살로 내려온다는 말은 더욱 흥미롭군. 죽어서 장사 지낸지 3일 만에 부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일세,”


그 말에 아오야기 중위가 얼굴이 시뻘개진다.


“감히 니치렌 대성인을 모독하지 말······.”


물론 대석이 바로 목을 조인다.


“거 시끄럽게 하지 말랬잖수.”


대석이 나직히 속삭인다. 천 지부장은 아오야기 중위가 목을 조이는 고통에 켁켁대게 잠깐 놔두었다가, 풀라는 손짓을 한다.


“좋네. 팔굉일우. 좋은 말이야. 예토를 정토로 바꾸자는 말도 좋은 말이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하나가 되어 부르주아 착취체제를 전복하자는 말 만큼이나 가슴떨리는 말이아.”


그 말에 아오야기는 목이 다시금 졸리는 상태에서도, “대성인의 가르침을 공산주의 따위에 비견하지 말라!”라고 항변한다.


천 지부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 마디 묻는다.


“그런데 말일세. 그 모두가 다툼 없이 어울리는 세상을 만드는데, 세계최종전쟁이 대체 왜 필요한 건가?”

“서방 세력이 팔굉일우의 시대를 막으려 하기 때문이다!”


중위가 자신만만하게 소리친다.


“패도로 서세동점을 해온 서방은 근본적으로 평화를 애호하지 않는다! 우리 일본이 더 발전하지 못하게 제약하고 족쇄를 묶어놓아서 그들의 지배체제를 영구화하려 한다! 그러니 서양의 패도가 동양의 왕도에 맞서 세계최종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민호는 그 말에 정우 어깨를 잡고 팡팡 치면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애를 쓴다. 처음 그를 조선철도호텔 예식장에서 봤을 때는 지극히 경악스러워 심각한 심사가 마음 속에 맨돌았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포로 신세가 되어서도 그의 괴상망측한 신념을 보란 듯이 떠들어대는 것을 보니 웃겨서 참을 수가 없다. 정우는 그런 민호보고 웃지 말라고도 할 수가 없어서 난처하다.


천 지부장은 웃음 하나 짓지 않고, 진지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래. 서양이 패도적이라 치자. 그래서 월남도, 인도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도 먹어치운 거겠지. 그런데 그렇게 치면······.”


그의 목소리에 날이 선다.


“너희 일본이야말로 패도적이지 아니하던가?”


“무슨 말이냐!”


아오야기 중위가 바로 버럭하다가 다시 목이 조인다. 그러면서도 끝내 말을 이어가려 애를 쓴다.


“우리는······. 현인신이신 폐하의 이름으로······ 왕도정치를 시행하려······..”


“왕도? 그래. 참 왕도적이군. 통상과 수교를 요구하며 강화도 앞에 군함을 보내 포를 쏜 것은 대단히 왕도적이지. 우리 조정과 동학과의 협정을 파탄내려고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것도 참 왕도적이야. 식량을 구하겠다고 허울 좋은 군표 쪼가리 주고 총칼을 내세워 다 가져간 것도 왕도적이고, 철도에 흠집 좀 냈다고 그 자리에서 사람을 쏘아 죽이는 것도 왕도적이었지. 궁궐에 너희 병력을 주둔시킨 채 차례 차례 외교권과, 군사권과, 그리고 주권 전체를 태황제에게서 빼앗아간 것도 왕도적이었지. 그래. 참 왕도적이야. 대단한 왕도정치에 축복 있으라!”


아오야기는 천 지부장이 이죽거리는 소리에, 지지 않고 “오해다! 어디까지나 네놈들의 배일선전에 불과하지 않는가!”라고 말하려 하지만, 천 지부장의 엄중한 목소리에 막힌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왕도정치를 말씀하신 맹자께서, 내가 앞서 한 말을 해 주실 것 같은가? 너희 일본이 참 왕도적이라고? 천만에!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너희 일본은 계속 사람 고기를 먹어 왔다고. 죽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거라고 말이다.”


군자가 인정을 행하지 않으면서 부유해지는 것은 모두가 공자로부터 버림을 받고 말았으니, 하물며 억지로 그런 지도자를 위해 전쟁을 벌여 사람을 죽여 들에 가득하게 하고, 성을 다투어 전쟁을 벌여 사람을 죽여 시체가 성 안에 가득하게 함에 있어서랴? 이것이 이른바 영토를 따라다니며 인육을 먹게 한다는 것이니, 그 죄는 죽음으로도 용서받을 수가 없다.(由此觀之,君不行仁政而富之,皆棄於孔子者也。.況於爲之強戰 爭地以戰,殺人盈野;爭城以戰,殺人盈城. 此所謂率土地而食人肉,罪不容於死。)


정우는 천 지부장이 맹자 이루(離婁)편의 한 대목을 변용하며 말하였음을 바로 안다. 아오야기 중위는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무슨 말인가! 우리 일본인이 식인종이라도 된다는 건가! 이 무슨 모독인가!”라는 소리를 한다. 그 말에 명수가 “맹자도 안 읽은 놈이 왕도 운운이라니. 한심하다!”라고 코웃음을 친다.


“좋네, 중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니 말해봤자 소용이 없겠군. 이건 그만 말하지. 그럼 다른 얘기로 돌아감세. 자네가 그렇게 부르짖는 세계최종전쟁 이야기로 말일세.”


천 지부장은 잠깐 침묵하다 묻는다.


“세계최종전쟁을 통해 팔굉일우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네. 내가 이해한 게 맞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세나. 최종전쟁이 종결되어 동양의 왕도가 전 세계를 지배한다고 가정해 봄세. 그런데 말일세, 그럼 서양인들이 패했다지만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나? 그들은 수천년 동안 동아시아와는 완전히 다른 기반에서 터전을 일구어 왔네. 예컨대 그리스도교를 들도록 하지. 그들의 유일신 체계에서 천황을 현인신이라고 섬기는 건 어마어마한 죄악일세.”


“그럴지도 모른다!”


아오야기 중위는 그 질문에도 전혀 물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폐하께서 덕을 보이셔서 그들을 받아들이시면······.”


그때 천 지부장이 말을 끊는다.


“자네 나라는 우리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그건 사사로운 이익과 권력을 위해 일본과 조선의 분열을 부추기는 자들의 음모 때문이 아닌가!”


이때 천 지부장이 한방 치고 들어간다.


“그럼 왜 그 음모가 진행되는 건가? 그런 권력욕에 가득하다는 자들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왜 있는가? 그리괴 왜 우리는 그 음모가들을 따르고 있는 건가?”


그때 아오야기는, 처음으로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눈이 가려진 채여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입을 통해 당혹감이 스쳐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중위. 자네 나라 전통에서는 패자가 승자에게 무조건적으로 굴복하는게 맞는 것일지는 몰라도, 전 세계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아. 특히 우리에겐 더더욱 그렇지. 우리는 옛날 청나라에게 임금이 무릎끓었을지라도, 우리가 새로운 중화임을 새기고 북벌을 꿈꾸며 저들에게 진심으로 굴복하지 않았네. 그래서 우리는 유목민 제국의 일부가 되지 않았지. 짓밟힌 자들은 항상 저항을 꿈꾸고, 복수를 꿈꾸네. 그것도 전쟁이라는 최악의 수단으로 무너진 자들은, 억눌린 만큼 떨쳐일어나길 원하지. 세계최종전쟁에서 일본이 동아세아의 맹주로서 승리한다 치더라도, 그리고 맹자께서 말한 왕도를 진정으로 실천한다 하더라도, 팔굉일우의 세상은 오지 않아. 사랑하는 이를, 소중한 이를 잃은 자들이, 집과 터전이 송두리째 파괴당한 자들이 자네들의 왕도에 고개를 조아린다는 것은 너무나도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나?”


중위는 대답이 없다. 그가 한번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패자는 승자의 강함을 인정하고 배우며, 승자는 패자에게 아량을 베푼다. 그것이 일본 군인으로서 육성된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관념이었다. 그런데 그 관념에 천 지부장이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천황이 모든 걸 조화롭게 다스리는 팔굉일우의 세상이 오려면, 저항하는 서양인 자체를 전부 쓸어버려야만 가능할 것인데, 그것을 왕도라고 할수 있겠나? 그게 묘법연화경에서 가르치는 바인가? 묘법연화경의 어느 구절에 그러라고 써 있는가?”


중위는 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게 보인다.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로 세계최종전쟁 후 팔굉일우의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세계최종전쟁에서 승리한 후, 정말 저항하는 서양인들이 얼마나 나타날까? 팔굉일우의 시대에 그런 자들이 모두 현인신이신 폐하와 니치렌 대성인의 가르침에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혼란과 분노와 굴욕감이 그의 머리 속에서 쾅쾅 충돌한다.


천 지부장은 이제 할 말은 다 했다고 느낀다.


“답을 내리는 건 자네 몫이야. 거기서 머리 좀 식히게.”


그러며 천 지부장의 손짓에 종팔이 다시 재갈을 물리려던 그때였다.


“차라리 날 죽여다오!”


중위의 절규가 귀청을 때린다.


“내게 이런 굴욕을! 불명예를 안겨주고 가려는 거냐! 차라리 깨끗하게 끝내다오! 군인의 명예라도 지킬 수 있게 해다오!”


그러나 천 지부장은 냉혹하다.


“명예 없는 것들이 명예를 더 따지지. 교회당에 사람들을 가둬놓은 뒤 출입문을 봉쇄한 채 불을 지르고 총질을 해댄 군대가 자네 군대일세. 내가 사라지고 없는 명예까지 되찾아줘야 할 정도로 배려해 주어야 하는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재갈이 물린다. 아오야기 중위는 더 저항하지 못한 채, 그저 풀숲 속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을 뿐이다. 고개를 처량하게 떨구고.


그를 남겨둔 채 모두 트럭에 오르자, 재호가 다시 악셀을 밟는다.


“평소 사부님 말씀 치고는 독기가 많이 빠지셨습니다.”


민호가 킥킥 웃으며 농을 던진다. 그러며 하는 말이 “예전 같았으면 한심한 것, 어리석은 것, 애처로운 것이라고 마구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라고 하며 사부의 말투를 흉내 내니 형제들이 다 웃는다. 생각해 보니 천 지부장은 비록 여러 차례 냉소하고 이죽거리긴 했지만, 밀정 의심자나 입단 희망자를 심문할 때보다 훨씬 부드러웠던 것이다. 처음에는 중위를

완전히 굴복시키려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가르치려는 태도였다.


천 지부장은 농담에 진지하게 답한다.


“저 불쌍한 중위가 그래도 인품이 떨어지는 자는 아니라고 보고하지 않았더냐? 그러니 한번 새길을 걸어가 보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더구나.”


“그렇긴 합죠. 군바리만 아니었으면, 그리고 정우 연적만 아니었으면 건드리면 미안할 정도긴 합니다. 근데 사상이 이상하니 정신 좀 차리게 하는 건 맞는 것 같습니다.”


민호의 그 말에 종팔이 “연적이라 할 것도 있냐? 승부는 다 끝났는데.”라고 하니 다시 유쾌한 웃음이 터져나온다. 정우는 그 말에 괜스레 쑥스러워서 “그자가 이제 더는 삿된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으면 합니다.”라고 넘길 뿐이다.


“본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은 빈승의 일이나, 애석하게도 아오야기 중위가 제 목소리를 알고 있으니 그러지 못하였군요. 지부장님께서 잘 하셨습니다. 임제 (臨濟) 선사가 ‘할(喝)!’로 어리석음을 깨뜨리고, 명상 중 조는 사미 등에 죽비를 한대 내리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스님이 올리는 칭찬하는 말에 천 지부장은, “그랬으면 좋겠군요.”라고 짧게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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