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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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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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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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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8,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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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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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189화

DUMMY

쏴아······. 철썩!


쏴아······. 철썩!


양산빈관 앞 백사장에서 밤바람이 고요히 분다. 경쾌한 물결이 해변으로 몰아친다. 휘엉청 하늘에 뜬 은색 달빛, 호텔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 해수욕장 폐장 시기에도 백사장을 걷는 사람들을 위한 가로등 불빛, 그리고 저만치 보이는 어선인지 정기여객선인지 모를 배에서 나오는 불빛이 밤바다를 아련하게 비춘다.


아직 봄철이라 개장하기 전의 해수욕장에는 둘밖에 없어 보였다. 구둣발에 하얀 모래가 바삭바삭이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주리는 스타킹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백사장을 거닐며 정우와 함께 저 물결 속으로 달려가 발장구를 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빌린 스타킹을 함부로 할 수는 없어서 꾸욱 참는다.


아직 시려운 밤바람에 반소매인 중국 기포를 입어 팔뚝을 다 드러내 쌀쌀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우의 팔이 자신의 허리를 두르고 품속에 앉듯이 걷고 있는 한, 그런 차가움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주리는 춤 추다가 다소 피곤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조잘댄다.


“차암. 오빠가 춤을 그렇게 어색하게 출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백작 행세를 위해 사교댄스를 배웠다고 하셨기에 날 이끌고 추실 줄 알았단 말예요. 그런데 참 내 발 밟을 뻔하시고······.”


그러며 쿡쿡대는 주리에게, 정우는 딱히 응수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춤출 일이 없더라고. 상하이에서 우리가 돈 들여 댄스홀 갈 일도 없고.”


“하긴. 오빠가 춤추고 여자 만나려고 댄스홀이나 구락부 가는 건 참 상상하기 힘들어요. 오빠는 항상 몸가짐도 점잖고, 정부 자금을 먼저 생각하니깐. 모시는 분들 눈치도 보였을 거고요.”


“선생님들도 다 엄격하신 분은 아니야. 도산 선생님은 나가서 놀고 오라고 용돈 쥐어주신 적도 있는걸.”


그 말대로였다. 도산 안창호는 천남건과 그의 제자들이 임무수행이 끝나면 숙소에서 거의 나오지 않자 젊음을 즐기지 못하고 있다고 애석해하며 몰래 자기 지갑에서 용돈을 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정우는 원체 최저한의 생활이 몸에 익은 데다가 도산 선생님도 임정 일과 흥사단 운영에 힘드신 마당에 그 돈을 받지 않으려 했었으나, 선생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생각하여 어쩔 수 없이 받고 말았다.


주리는 그 말에 웃어 버린다.


“분명 오빠는 그 돈으로 나가 노는 게 아니라 권총 탄약하고 총기 소제할 윤활유 같은 거 사는 데 썼겠죠?”


“어떻게 알았니?”


“매일같이 오빠 옆에 있으면 다 안답니다!”


주리는 그러며 정우 품속에 더 파고드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정우는 항상 더 큰 것을, 더 공적인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을 위해서는 돈 쓰는 것을 꺼림칙해 하는, 더 고생하고 힘든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정우는 주리의 지적에 약간의 변명을 한다.


“아주 그런 건 아니야. 총탄 사고 남은 돈으로 영화관 가서 같이 영화 봤어.”


그러나 주리는 족집게처럼, “분명 재개봉관이었겠죠? 거긴 영화표 싸니깐.”이라며 킥킥 웃는다. 정우는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그저 웃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 주리의 얼굴에 잠깐 그늘이 번졌다.


“그래서 안타까워요. 딱 내 나이 때 상하이 오셨는데 놀고 싶은 거 다 참고 자금 사정부터 먼저 생각하셔야 했다니깐요. 난 작년까지만 해도 애들과 어울려 막 놀기만 했는데. 그리고 저기 댄스홀도 그렇고, 경성 거리 곳곳에 자유연애 바람에 춤바람 난 사람이 넘쳐나는데 오빠와 오라버니들은 그런 거 꾹 참고.”


정우는 그런 얼굴을 한 주리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어준다.


“고생하는 분들 얼굴이 먼저 생각나면, 그런 데 욕망은커녕 호기심을 보일 생각도 쏙 사라져. 제작년에 자금 사정이 최악이었을 때, 그분들은 임정 예산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시고 식사를 남이 남긴 음식 찌꺼기로 연명하셨어. 그때 우리는 경성에서 밥 먹을 곳이라도 있었는데 말이야.”


“세상에? 정말요?”


주리는 백범 선생을 비롯한 임정의 선생님들이 그 정도로 최악으로 몰렸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정우는 그 때가 기억난다. 미국발 대공황이 모든 것을 쓸어버렸을 때, 그리고 그들 모두가 경성에서 위장신분으로 취직한 직장에서 다 잘렸을 때, 임정의 자금사정은 사상 최악에 이르렀다. 탄핵당한 대통령 이승만이 보복을 위해 미주지역 동포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으로 자금줄을 끊어 버린 이후 어찌어찌 버티던 수입은 상하이 동포들의 사정이 극도로 어려워지며 일시적으로 막혀 버렸었다.


백범 선생은 상황이 좋지 않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다고 전문을 보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임은 머지않아 드러났다. 백범 선생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비서 안공근이 비밀 전문을 보내 상황이 최악임을 밝히고 시급히 자금을 구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모두 1달 내로 굶어 죽을 거라고 말이다.


이는 결국 상하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정상적인 자금획득 수단이 아닌 부일배와 일본인 부호 대상의 ‘작업’을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 오빠하고 다른 분들이 작업해서 번 예산은요?”


“거의 무기 구입하고 기용한 밀정에게 지금 주는 데 썼지. 아, 청사 건물 임대료도 있구나.”


“그럼 자기를 위해서는 사실상 한 푼도 안 쓰시고······.”


주리의 얼굴이 급격히 침울해져 갔다. 2년 전에 자기는 뭘 했던가? 친구들과 생각 없이 혼부라나 하며 미쓰코시나 조지아에 가서 사고 싶은 건 다 사고 먹고 싶은 건 다 먹지 않았던가? 본격적으로 한인애국단원이 되며 사라지나 했었던 죄책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정우는 주리의 그런 얼굴을 보며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말을 했단 말인가?


“지금은 이봉창 동지의 의거 이후 중국 단체들의 후원이 많아졌어. 자금사정이 괜찮아져서 또 그럴 일은 전혀 없어. 우리 노력으로 예산안도 더 늘어날 것이니 힘든 시절도 끝날 거야.”


그러나 주리는 입을 꼭 다문 채 말이 없어졌다. 그러다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갑자기 마음이 아파요. 난 오빠랑 인천에 놀러 간단 마음에 들뜨기만 하고, 선생님들이 고생하고 계신 건 생각도 못했어요.”


주리는 양산빈관의 훌륭한 호텔 방에서 사랑을 나눈 것도, 귀한 음식을 대접받은 것도, 댄스홀에서 재즈에 맞춰 춤을 춘 것도 모두 잘못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다들 고생하는 데 자기 행복만 생각하였다고.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와 같이 행동하고 말았다고.


정우는 다 괜찮다, 본격적으로 고생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노는 것을 아무도 뭐라 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주리가 침울하게 “내가 태생이 결국 부일배 부잣집 딸내미라 그럴까요?”라고 말하자 강한 자책감이 밀려왔다. 내가 대체 뭣 하러 정부 자금 상황 얘기를 이 마당에 말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정우는 순간 감정이 치솟았다.


“정부 선생님들은 다 너를 대견스러워 하시고 아껴주실 거야. 네 태생이 어찌 되었든 자발적으로 힘든 길을 선택했으니깐. 네 말대로 지금은 거리 곳곳에 자기 즐거움만 찾는 사람이 가득한 세태인건 맞아. 최소한 적에게 빌붙지는 않더라도 자유니 모던이니 하면서 성인 가르침에 전근대니 봉건이니 폭력이니 억압이니 인습이니 하는 딱지를 붙이고 자기 욕망을 마음껏 충족하려는 사람이 넘치지.”


정우는 주리 손을 꽉 잡고, 눈물이 고인 듯한 그 동그란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네가 더 빛나 보이는 거야. 넌 그런 것과 다 결별하겠다고 맹세했으니까. 안정된 삶 따위 다 버리고 나와 같이 그 수라장으로 갈 거라고 약속했으니까. 그런 마당에 오늘처럼 조금 즐겁게 지낸다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만약 네 출신 가지고 쓸데없이 문제 삼는 사람이 정부에 있다면······.”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정우가 이때 자기가 이전이라면, 감히 상상도 못할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 사람과 상종하지 않을 거야.”


주리는 그렇게 말하는 정우의 눈이 너무나도 올곧아서, 벅차오르는 감동에 눈물을 터트릴 뻔했다. 이때 울어버리기에는 너무 부끄러워 잠시 올라오는 뜨거울 걸 조용히 삼켰다. 정우는 인내심 있게 주리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방금 한 말을 돌아보니, 상대가 어른이라고 해서 전전긍긍하고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 사부 천 지부장은 사모님이 일본 사람이란 이유로 기꺼워하는 기색을 보이는 사람에게 항상 맞서지 않았던가? 자신이 사부를 본받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울적했던 마음을 밤바람 속에서, 그리고 정우의 품속에서 진정시킨 주리는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나도 참 바보예요. 오빠가 편지로 분명 자기학대는 그만두라고 말했었는데 또 까먹고.”


다시 주리가 웃어주니 정우는 이 웃음을 계속 볼 수 있다면 총독부도 모자라 제국의회와 황거까지 폭탄을 던지고 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웃기기도 하여 웃음이 비어져나온다.


주리는 그런 정우에게 “이게 다 오빠가 자금 얘기 해서 그렇잖아요!”라며 삐진 얼굴로 뻣팅기지만, 금세 깔깔 웃는다.


그렇게 얼마간 걷던 둘은 해안선 끝까지 가게 되었는데, 눈에 들어오는 게 하나 있었다. 시꺼먼 바위 너머로 살짝 보이는 그림자가 있었다. 파라솔이었다.


“어라? 벌써 저런 게 있네요?”


“그러게. 관리하는 사람들이 여태 안 치웠나보다.”


바위 너머에 있다 보니 해수욕장 폐장 후 파라솔과 자리를 정리하던 관리인들이 못본 모양이었다.


“잘 됐다! 저기 가서 앉아요!”


한 바탕 춤을 춘 데다가 백사장을 계속 걷다 보니 다리가 피곤하던 참이었다. 주리는 정우 손을 잡아끌고 파라솔 아래로 향했다. 아래 깔린 돗자리에 둘은 털썩하고 나란히 주저앉았다.


“우와아아!”


주리의 입에서 감탄사가 쏟아졌다. 같이 걷고 있느라 채 신경쓰지 않았던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자리 위에 앉은 순간, 저 하늘의 무수한 별빛이 한 눈에 들어왔던 것이었다.


검은 도화지에 뿌려진 보석 가루처럼 빛나는 무수한 별들이 빛난다. 손을 뻗어 건드리면 우르르 쏟아질 것 같았다. 그 별들이 둥근 달의 은빛과, 빛 속에서 일렁이는 어두운 바다와 함께 일대 황홀경을 일으켰다.


청주에 요양을 내려갔을 때나 가족끼리 해수욕장에 갔을 때를 제외하면 계속 경성에서만 살았던 주리였다. 그때도 오밤중에 거닐어 본 적은 없었다. 경성 번화가 밤거리의 빛에 가려져 왔던 별빛들이라, 주리에게는 그것들이 너무나도 신비했다. 계속 보다 보니 흡사 공중으로 붕 뜨는 기분이었다.


18살 때부터 중국 해안 대도시와 경성 밖을 나가지 않은 정우에게도, 이런 밤하늘은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명멸하는 별빛 속에서, 정우는 옛날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간도에서 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의 보살핌과 가르침 속에서, 집안일을 거들고 아버지에게 성학의 가르침을 배우고 동네 의사인 카라스마 세이지 선생님에게 서양에서 왔다는 각종 진기한 것들을 배우다가 지금은 형제인 친구들과 나가 뛰어놀던 때였다.


정우가 애들과 뛰어 놀다가 총을 맞아 피흘리며 쓰러진 것을 발견하고 어른들을 불러와 의원으로 실어 갔으며, 마적단의 일원이라는 뒷말이 무성한 험상궂은 외지인이었던 남건 아저씨가 집 머슴 노릇을 하며 같은 방을 쓸 때, 무뚝뚝한 그에게서 각종 호기심을 느끼고 이런저런 물음을 하며 따라다닌 것도, 그가 회복된 몸으로 현란하고 멋진 봉술을 연마하던 것을 몰래 보다가 들켜서 가르쳐달라고 떼써서 초식 몇 가지를 배운 것이 어제 일처럼 기억난다.


현재의 사모님인 영자 누나가 사탕으로 유혹하는 바람에 무릎 위까지 올라와 다리를 다 드러내는 양복 반바지에 긴 양말을 신고 사진을 찍히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망신스러웠지만, 그래도 추억으로 남은 일이었다.


열 두 살 나이 때의 정월 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달집을 태울 때, 남건 아저씨와 영자 누나가 마을 사람들 몰래 어둑한 곳으로 가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로를 갈구할 때를 봤던 것도 떠오른다.


그때는 그게 뭔지 몰라 무섭고 징그러운 와중에 처음 느껴보는 야릇한 흥분감까지 들어서 울 뻔했었다. 남건 아저씨는 그걸 봤다고 하자 마치 벼락 맞은 것 같은 표정을 해서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었다. 그때의 사부님은 자신도 전전긍긍하는 표정을 보여줄 수 있었다는 듯 끙끙대다가, 결국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그런 것을 통해 아이가 생긴다고 최초의 성교육을 해 주었다. 자기도 그런 걸 통해 태어난 거냐며 울상을 하고 있을 때, 사부님은 절대 의사 선생님께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다.


이젠 자신이 그런 걸 했다고 생각하니 참 이상한 기분이다.


그때는 쌀독에 쌀이 비고 텃밭에 심은 작물이 잘 자라지 않을 때의 걱정을 빼면 아무 걱정이 없었다. 배고프면 배고픈 대로 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았으니까. 아버지 이항진 훈장이 손수 말한 공자, 맹자, 주자, 정자와 율곡, 사계, 그리고 자랑스러운 우암의 가르침 속에서 누구를 부러워할 것도 없고, 누구를 질시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정우의 손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 시절은 다 끝났다. 그 겨울밤에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서. 그날 이후는 비탄, 통곡, 그리고 타오르는 분노의 날이었다. 모두의 무덤 앞에서 대성통곡하고는 꼬박 하루 동안 자리를 지키다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고 며칠 동안 사라졌던 사부가 이 모든 것을 주도한 자들의 목을 베어서 마을 사람들의 영전에 바친 이후로.


“오빠? 뭔 생각해요?”


주리의 목소리가 정우의 상념을 깨웠다.


“뭐예요. 내가 별 이쁘다고 해도 대답도 없고.”


“하하. 미안. 잠깐 생각에 잠겼었네.”


정우는 주리에게 옛날 간도 시절 얘기를 풀어놓을까 생각하다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아직은 주리가 즐겁게만 지내 주었으면, 상하이 뒷골목에서 본격적으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날이 올 때까지는 행복하기만 했으면 하였다. 일본 헌병대와 거기 기용된 마적단이 마을을 불태우고 마을 사람 전부를,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모든 이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는 이야기는 지금 꺼내고 싶지 않았다.


“아아. 저런 거 매일 밤 볼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어라.”


주리는 이제 아예 돗자리에 드러누워서 중얼거린다. 정우도 옆에 나란히 누워서 별을 본다. 주리 손을 부드럽게 잡은 채.


주리는 별빛 속에서 고개를 돌려 정우 얼굴을 슬그머니 쳐다보고 배시시 웃는다.


“오빠. 나라가 독립하면 민호 오라버니하고 무역회사 세워서 일하기로 했죠?”


“그래. 그랬지.”


주리는 잠깐 무언가 생각하더니, 입을 연다.


“거기 일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고모부님 고모님 계신 곳에 내려가서 살고 싶어요. 청주의 아버지 고향은 그곳 사람들 보기 도무지 부끄러워서 못가겠지만, 거긴 괜찮을 거예요. 오빠는 계속 여유 없이 바빴고 또 힘든 일도 많았으니까, 그런 데서 우리끼리 한적하게 지내는 거, 좋다고 생각해요.”


정우는 놀랐다. 주리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기 생각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짚었으니까. 정우는 가끔 간도가 그리웠다. 그 시절이 그리웠다. 시, 분, 초 단위로 움직이지 않고, 계절에 따라 평온하게 움직이던 그 시절이.


“존경받는 고모부님의 친척이라고 하면 시골 사람들도 도시에서 온 뜨내기라 생각하지 않고 많이 도와줄 것 같아요. 거기서 호젓하게 살 수만 있다면······.”


그러나 못내 걱정되는 것들이 여럿 있었다. 촌에서의 생활도 아무튼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그도 부모님을 도와 필요한 농사일들을 해 봐서 안다. 도시 생활만 해오고 시골에서도 고된 일을 겪지 않은 주리가, 땡볕에서 허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견디고 땀을 줄줄 흘리며 김을 매고 부드러운 피부가 타고 거칠어지는 삶을 견딜 수 있을까? 거름과 두엄 냄새 속에서 살 수 있을까? 주리는 정우가 걱정하는 눈빛을 금방 읽고 또 샐쭉히진다.


“치이. 시골 생활 낭만적으로 본다고 잔소리하지 말아요. 상상도 못하나?”


그러며 볼멘소리를 하는 게 귀여워서 픽 웃고 만다. 목숨이 오가는 곳에 뛰어들겠다고 자처한 애가, 그런 생활을 못 견딜까?


얼마간 누워 있던 정우는, 밤공기가 한층 차가워짐을 느끼고 슬슬 들어가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몸을 일으킨 그 때, 주리가 잡은 손을 잡아당긴다.


“그냥 들어가게요? 저렇게 별이 반짝이는데?”


돌아본 정우는, 입술을 삐죽 내민 주리를 보고 그녀가 뭘 원하는지 바로 알았다.


“분위기 진짜 낭만적인데. 호텔방보다 더 좋은데.”


그러며 입술을 조물거리는 주리를 보고, 어쩔 수 없다며 결국 다시 누워 버렸다. 그러니 주리가 다시 웃는 낯을 한 채 속삭인다.


“그리고 이건 지금 와서 말하는 건데요.”


정우는 주리의 말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나 지금 드로워즈 안 입었어요.”


“뭐, 뭐?”


정우는 순간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너 그럼 그 옷 입을 때부터······.”


“히히히. 그렇답니다! 어쩌나요? 드로워즈 입고 이거 입으면 영 맵시 안 나는데.”


정우는 이제야 중국 기포가 주리의 몸에 그리 착 달라붙어 아찔하고 유연한 곡선을 과시하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정우는 자기가 다 부끄러웠지만, 그냥 헛웃음을 한번 하고 말았다.


“다음엔 그러지 마라.”


그 말에 “싫은데요.”라는 장난스러운 답변 뒤로, 서로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 작성자
    Lv.35 뿌링틀
    작성일
    20.08.25 16:30
    No. 1

    합스! 합스! 합스!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0.08.25 16:46
    No. 2

    ㅋㅋㅋㅋ 댓글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5 고단풍
    작성일
    20.09.03 21:00
    No. 3

    주리도 참...
    못 말리네요.ㅋㅋ
    잔망스런 매력이 있다니까요.ㅎ
    그나저나 이승만이 그런 만행을 저질렀나요?
    그것도 몰랐던 사실이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0.09.03 21:03
    No. 4

    실제 이승만은 탄핵당한 이후 임정에 대한 금전적 지원을 일시적으로 끊었었습니다. 이후 관계를 회복하긴 하지만요.

    주리는 여간 잔망스럽지 않아요 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7 PnPd
    작성일
    20.09.16 06:15
    No. 5

    주리....음탕......오져따리............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0.09.16 09:59
    No. 6

    대탕녀 주리!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 영락태왕
    작성일
    21.06.19 20:48
    No. 7

    천남건도 성교육은 힘들었나보군요 ㅋㅋㅋ그나저나 이승만은 임정에 지원 끊은거 생각하면 역사적 평가를 떠나 그냥 비호감 그자체인 인물이에여 ㅡㅡ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1.06.20 12:32
    No. 8

    공과 과를 같이 보자는 말조차도 중립인 척 하는 말로 보이게 하는 사람 -_-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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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190화 +12 20.08.27 280 10 17쪽
» 189화 +8 20.08.23 275 12 18쪽
188 188화 +8 20.08.20 271 9 19쪽
187 187화 +12 20.08.17 275 11 21쪽
186 186화 +8 20.08.16 289 10 15쪽
185 185화 +10 20.08.15 284 1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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