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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님의 서재입니다.

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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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최근연재일 :
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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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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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778,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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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30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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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191화

DUMMY

정우와 주리가 저녁 먹기 전 호텔 방 침대 위에서 뒹굴며 밀어를 속삭이고 있던 때, 오재두 경부보는 잔뜩 굳어진 표정으로 보성전문학교 정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는 카라스마 세이지 백작의 또 다른 신분인 오궁섭 교수에 대해 취조하기 위해, 보성전문학교 교장 김병로를 직접 찾아갔었다.


가인 김병로는 오 경부보와도 안면이 있었다. 물론 사이는 전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김병로는 그의 친우인 애산 이인, 긍인 허헌과 더불어 불령선인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자로 악명높은 변호사였다. 고등계에서 체포한 용의자들이 형법에 보장된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않고 있다며 여러 차례 경찰서에 찾아와 구두로, 서면으로 항의하고 언론에 제보하며 시끄럽게 만드는 것을 예삿일로 하는 자였다.


그만큼 김병로란 이름 석 자는 고등계 형사들에게 짜증을 임계치까지 치솟게 하는 망할 놈이었다. 특히 오 경부보에겐 더욱 그랬다. 저 망할 변호사가, 흰 두루마기를 위풍당당하게 휘날리며 고등계 사무실로 들어올 때마다, 언젠가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저놈 머리통에 총탄을 박아주고야 말겠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그가 제국법을 들먹이며 불령선인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위험인물이어서만은 아니었다. 경찰의 고함과 협박을 그저 옆을 지나가는 벌레 소리처럼 여기는 태도는, 그의 저주스러운 아버지, 오세창 진사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었던 것이었다.


“아. 우리 구면 아니오?”


김병로 교장이 교장실에 들어온 그를 보자마자 한 첫 마디였다. 소파에 몸을 푹 들어가게 않고,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한 채 팔짱을 낀 채로.


오 경부보는 테이블 위에 다짜고짜 몽타주부터 올려놓았다.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의 얼굴을.


“이 얼굴 아시죠?”


그러나 그 질문에, 김 교장은 고개만 갸우뚱하고 “누굽니까, 이 사람?”이라고 되물었다.


“발뺌할 생각입니까? 법과 교수인 오궁섭 아닙니까?”


“오궁섭······. 오궁섭이라?”


김 교장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잠깐 까닥하다가, “아. 법과에 그런 조교수가 있긴 했었죠.”라고 끄덕인다.


오 경부보는 눈을 치켜뜨고 이 망할 변호사 겸 전문학교 교장을 노려본다.


“교수 임용할 때 얼굴도 안 봅니까?”


“원래 그랬어야 하는 게 맞는데. 내 기억으로는 오 조교수 임용 때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뭐 때문입니까?”


“뭐긴 뭐요. 당신네 경찰 덕분이지.”


김 교장의 눈에 비웃음이 서렸다.


“난 그때 당신네들의 조작 사건 피해자를 변호하느라고 학교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소. 그래서 그때 교수 임용 같은 업무는 행정실장에게 위임하였고.”


오 경부보는 대놓고 경찰을 상대로 조롱조의 말을 하는 김 교장을 당장 처리하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렸다.


“그럼 행정실장은 어디 있습니까?”


“아, 그때의 행정실장은 그만두었소.”


“그럼 어디 갔습니까?”


“만주로 갔다고 아오.”


“만주 어디?”


오 경부보의 계속된 추궁에도, 김 교장은 여전히 여유만만하다.


“거기까지 내가 알아야 할 이유가 있소?”


이 인간이 진짜! 오 경부보는 뿌드득 이를 갈았다. 그는 이렇게 굴종은커녕 뻣뻣하게 구는 인간이 제일 싫었다.


“오 교수 관련 서류가 보관되어 있습니까? 인사기록 카드라든지.”


“글쎄요. 행정실에 한 번 문의해 보시오. 나도 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워낙 일이 많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말이오.”


오 경부보는 계속 이 자와 말하기가 싫고, 또 추궁해도 얻을 것이 없어서 실례했다는 인사 하나 없이 교장실을 박차고 나왔다. 그 직후 들어간 곳은 이사장실이었다. 경영 위기에 처한 보성전문학교의 새로운 이사장으로 등장한 경성방직 사장이자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가 다음 취조 대상이었다.


여유롭고 귀티 나는 웃음을 짓고 있는 김성수 이사장은 표면상 환대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오 경부보는 김성수 사장이 그 재력을 바탕으로 총독부 관리들과 강고한 인맥을 구축했음을 잘 알기에, 김 교장을 대할 때보다는 한층 예의 있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오 경부보에게는 김성수 또한 수상쩍은 인간이었다. 총독부에 협조하되 노골적인 협조는 피하는 태도, 민족주의 계열 불령선인들을 뒤에서 지원한다는 풍문, 그의 신문 동아일보에 간혹 등장하는 불경한 기사들, 그리고 몇 년 전에 상하이 가정부를 방문했다는 첩보. 하나같이 김성수를 단순히 총독부에 협조적인 돈 많은 실업가로만 보이게 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김병로보다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글쎄요. 제가 이사장으로 취임한 지 두 달도 안 되어서 말입니다. 오궁섭이란 조교수가 있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네요.”


“정말입니까? 정말 본 적이 없습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제가 취임하기 전에 있던 분 같군요.”


김성수에게는 이 정도밖에 얻어낼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극, 오 경부보는 시간낭비만 했다고 느끼며 행정실을 찾아가서, 오궁섭 교수 관련 서류들을 있는 대로 다 내놓으라고 채근하였다. 그러나 30여분 쯤 후에 돌아온 답변은 이리하였다.


“죄송합니다. 언제 근무했다는 기록만 있지 자세한 인사기록은 남아 있지 않네요.”


“겨우 몇 년 전 자료잖소! 자료 보존연한이 그렇게 짧단 말이오?”


“아무래도 우리 쪽 직원이 저번에 폐기할 자료 소각하며 실수로 태운 모양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오 경부보는 땀을 뻘뻘 흘리며 사과하는 행정실장에게 “뭔 일처리를 그렇게 하오!”라며 윽박지른 후, “나중에 다시 오도록 하지.”라며 으름장을 놓고 서로 복귀하게 되었다. 보성전문학교을 죄다 뒤집어 놓을 전면적 압수수색을 요청할 작정이었다.


한편 교장실 창문을 통해 학교를 빠져나가는 오 경부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김경로 교장과 김성수 이사장의 표정은 심각했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임시정부에서 왔다는 사람들 때문일까요?”


김성수의 물음에 김병로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소.”


김병로는 3년 전날 밤의 일을 떠올렸다. 열띤 변호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자고 있을 때,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확 떴었다. 방으로 들어오는 어스름한 달빛에, 사람 그림자가 비춰져 있었다.


놀라 고함을 지르려는 그때, 굵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선생님. 저는 상하이 정부에서 왔습니다. 이 시간에 허락 없이 찾아온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 정체불명 괴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말투에 예의가 있고 위협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상하이 정부에서 왔다는 이 괴인은 얼굴을 가리려는 듯 탈을 하나 쓰고 있었다. 그가 내민 백범 김구의 친필 신임장을 보고 오밤중에 나타난 강도가 아니라 정말 정부 사람임을 인지힐 수 있었다.


“선생님 댁은 낮에는 항상 감시받고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 시간에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놀라게 해드려서 참으로 죄송합니다.”


이 괴인이 예의범절을 갖추고 고개를 숙이니, 김병로는 차마 그렇다고 이렇게 놀라게 하면 어떡하냐고 타박할 수가 없었다.


괴인은 긴히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감히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어떤 부탁인가 하니, 임시정부를 위한 공작에 필요한 위장 신분이 하나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보성전문학교의 조교수로. 하필 왜 우리 학교냐고 묻는 그에게, 괴인은 보성전문학교가 민족을 어느 학교보다 중시하며 민족 실력의 향상에 공헌하고 있는 만큼 가장 협조를 구하기 쉽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김 교장은 그 대답이 만족스럽기도 하였고 또 임시정부에 협조한다는 것이 좋은 일이라 여겨 실제 존재하지 않는 교수의 인사기록과 강의기록까지 만들어 주겠다고 흔쾌히 대답하였다. 오궁섭이라는 이름이 즉석에서 만들어졌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부는 가인 선생님의 공헌을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괴인은 여러 차례 머리를 조아렸었다.


“그렇다면 그 정부 요원들에 대해 경찰이 수사한다는 건데, 그 사람들에게 경고해 주어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김성수가 답답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김성수는 1929년에 상하이 임시정부를 방문해 후원금을 전달했을 때, 임정 소속 요원들이 경성에 침투해 있다는 백범의 귀띔을 들었었다. 실제 그들로 추정되는 탈쓴 청년들이 한밤중에 담을 넘어 불쑥 찾아와 후원금을 전달해 준 적도 있었다. 또한, 동아일보의 열성적인 기자 몇이 이 연쇄강도 사건을 심층취재하고 있다 한 것을 편집부에서 퇴짜를 놓게 하여 이들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쏠리지 않도록 하였다. 그런 만큼 그들이 경성에서 무사히 활동하기를 바라고 있던 차인데, 경찰이 냄새를 맡고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병로도 마찬가지로 답답한 표정이었다. 김 교장은 이 괴인에게 앞으로도 정부를 도우려면 계속 연락해야 할 것인데, 어디로 찾아가면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괴인은 답변을 해 주지 않았었다.


“참 비밀주의적인 사람이었소. 내가 연루될 것을 우려하여 알려주지 못하겠다고 했는데, 혹시 나를 통해 정보가 유출될 것이 우려된다는 걸 돌려 말하는 것 같았소. 둘 다일 수도 있고.”


김 교장은 그러며 궐련을 하나 빼 입에 물었다.


“큰일은 없었으면 좋으련만······.”


경찰이 오궁섭 교수에 대해 물어보았다는 보고가 들어오자마자, 그는 자신이 오궁섭 교수를 전혀 모른다고 증언하기 위해 미리 짜둔 각본을 생각하고 연습했었다. 조작된 인사기록 카드도 불태워서 담당 형사가 오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는 학생들을 콕 집어서 취조하는 것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저 경부보는, 수치스럽게도 조선 사람인 경부보는 집념이 강한 인물로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오궁섭 교수와 연쇄 강도들의 연관성을 파악하려 날뛸 것이었다. 김경로 교장은 계속되는 불길한 감각에, 잎 궐련을 초조하게 태우고만 있었다.


몇 시간 후, 오 경부보는 이들의 진상을 전혀 모르는 채 서로 복귀했다. 와카마쓰 경부는 유의미하게 알아낸 것이 거의 없었다는 보고에 실망한 표정이었다.


“이러면 놈을 사칭죄로 잡아 넣을 수도 없고, 또 보성전문학교와 놈들의 연관성을 파악할 수도 없지 않은가?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어.”


경부는 그렇게 투덜거리고는, “베이징 영사관 경찰부에서 보내준 것도 별 쓸모가 없었는데 말이야.”라고 내뱉었다.


그들은 하루 전에, 베이징 영사관에서 부탁한 자료가 도착하자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남은 것은 허탈함이었다. 분명 이 먼지냄새 나는 서류는 “장백대호” 천남건이 베이징에서 무뢰배 노릇을 할 때의 정보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천남건은 독립사상을 가진 위험인물도 아니었고 그저 베이징의 거대 밀수폭력조직 “황성파”의 중간 간부쯤 되는 자라 집중적인 감시대상도 아니었다. 그가 영사관 경찰 기록에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베이징에 유입된 대륙낭인들을 상대로 무력을 행사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알 수 있던 것은 천남건이 젊은 시절에 대륙낭인들과의 충돌을 비롯한 각종 폭력사건에 관여되었으며 그의 의형인 “하북옥룡” 장카이셴이 조직에서 출세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고, 황성파가 베이징에서 다른 방파들의 기습으로 무너질 때 같이 베이징을 탈출한 후 행적이 묘연하다는 보고서뿐이었다. 당시의 몽타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정보로 알아낼 수 있던 건, 이때의 그는 그냥 폭력조직에 소속된 무뢰배였는데 어느 시점부터 독립사상과 배일사상을 가지고는 불령선인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현재 도움이 되는 정보는 전혀 아니었다.


정보가 없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짜증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들은 수사를 위해 사이온지 긴모치 공작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메이지 유신의 공로자이자 천황의 원로대신을.


사이온지 공작이 수사에 일단 동의는 했다. 공작이 카라스마 백작에 대한 현재까지의 수사정보를 보고 수사가 필요하다 생각한다고는 했다. 만약 그들이 카라스마 백작의 범죄행위를 입증하지 못한다면, 원로대신의 사람을 건드린 대가를 치르고 말 것이었다. 사이온지 공작이 앞으로 언제 그들의 목을 조여오려 할지 짐작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성과 없이 시간만 흘러가는 건 정말 피가 말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한 지 얼마 후, 희소식이 들어왔다. 총독부 상공과에서 카라스마 백작이 운영한다는 회사 관련 자료를 입수하러 간 부하 형사들이 가져온 정보였다.


회사개설 신청서와 법인등록신청서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모두 양식에 맞춰서 정확히 기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수상한 곳은 회사의 형태였다.


“분명 여기 광업회사지?”


“그렇습니다.”


“광산 팔려면 돈 많이 필요하겠지?”


“당연히 그렇죠.”


이때 와카마쓰 경부가 눈썹을 찌푸린다.


“그런데 회사를 주식회사가 아니라 유한회사로 해?”


대량의 자본금이 필요한 광업을 하는데 대규모 자본금을 끌어올 수 있는 주식회사가 아닌, 주식시장에 상장하지 않고 비공개적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유한회사 형태로 회사를 설립한 것이 매우 이상스러웠다. 수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쓰이 재벌 고문변호사하고 제가 통화했는데 말입니다.”


오오이시 순사의 말이었다. 오 경부보가 미쓰이 사토시 사장이 미쓰이 재벌의 상무 출신이었다고 한 것을 기억한 것을 토대로 오오이시 순사가 직접 조사를 해 보았다. 그런데 미쓰이 쪽에서는 미쓰이 사토시 상무가 있었던 건 맞는데 몇 년 전에 중국으로 출장을 갔다가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한 것이었다.


“그럼 미쓰이 사토시란 놈은 대체 누구야? 그리고 강도질하는데 회사는 왜 차리고?”


와카마쓰 경부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노무라 순사부장은 “위장신분이 필요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라고 하지만, 경부는 “그렇다고 번거롭게 회사까지 차려?”라고 되묻는다.


바로 그때였다. 오 경부보는 갑자기 뱃속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카라스마 백작과 미쓰이 상무는 사촌 여동생의 약혼식 날, 좋은 사업이 있다며 그의 외숙부 한덕만 참의와 접촉했었다. 백작은 지난달 3일에 한 참의와 만났었다고 증언했었다.


이 수상쩍은 회사와 외숙부가 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건가?


“아무래도 제 외숙부님을 직접 조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참의님을?”


오 경부보의 단호한 말에 와카마쓰 경부가 놀란다.


“이 두 놈은 좋은 투자처가 있다고 외숙부님에게 접근했어요. 뭔가 수상쩍은 짓을 하려고 그런 것 같은데, 역시 외숙부님에게 따져 묻는 게 상책입니다.”


“하지만, 저번에 전화통화 했을 때 완강히 거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윤 순사의 지적이었다. 한 참의가 전화로 카라스마 백작과 만났는지 확인하려 했을 때, 그는 자기 뒷조사를 한다며 역정을 내고 끊었었다.


“나도 그게 신경 쓰이긴 하지만, 지금은 수사가 우선이다.”


오 경부보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모두 한꺼번에 간다면 외숙부님도 더 수사를 거부하진 못할 겁니다. 아무래도 위압적 분위기에는 약한 사람이라서요.”라고 하며 1과 형사 전체가 한 참의 회사 사무실로 같이 갈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니 와카마쓰 경부도 “자네 판단이 그렇다면 뭐.”라고 하며 윤 순사만 남기고 일제히 한 참의의 회사 사무실로 향하였다.


한 참의는 조카가 찾아왔다고 하자 “바빠 죽겠는데 왜 지금 오냐!”라고 짜증을 내려 하다가, 형사들이 갑자기 우르르 사장실로 들어오니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참의님. 수사 차 협조를 구해야 할 것이 있어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와카마쓰 경부가 깍듯이 인사한다. 상대가 중추원 참의인 데다가, 한 참의에게 오 경부보의 뒤를 봐주는 댓가로 한 두푼 받은 것이 아니었기에 예의를 갖출 수밖에 없다.


“수사라니요? 제가 수상한 일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저는 총독부 중추원의 참의이자 모범 납세자이자 주요 국방헌납급 기부자······.”


한 참의는 갑자기 들이닥친 형사들이 풍기는 분위기에 눌리면서도, 자신의 직위를 들먹이며 나름의 항의를 하려 든다.


그러나 오 경부보가 말을 딱 자른다.


“숙부님이 수상하다는 게 아닙니다. 숙부님과 거래하는 회사가 수상하다는 거죠.”


“뭐? 어디가? 내 거래처는 다 확실한데?”


“미쓰이-카라스마 자원개발회사 말입니다.”


“뭐? 어디?”


그 말에 한 참의는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야 이놈아! 이상한 소리 말아! 저번에 거기 카라스마 백작님이 네가 놓친 강도와 눈빛이 비슷하다 뭐다 하며 수상하게 여긴 것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이놈아. 닮은 사람 있을 수도 있지 왜 자꾸 그래? 그분들이 얼마나 많은 이익을 우리 회사에 가져다줄 것인지 알기나 하냐?”


“외숙부님. 저는 농담하러 찾아온 게 아닙니다.”


오 경부보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한 참의가 꺼림칙함을 느낄 정도로. 오 경부보는 긴 설명을 시작했다.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이 얼마나 수상한 인간인지 도쿄 외무성까지 가서 확인했다고. 신원도 불분명하고 조선 입국 후 행적도 불분명하다고.


그러나 한 참의는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놈아. 너 직업병이 단단히 걸렸구나! 그 백작님의 양부님이 불온한 사람인 건 나도 그 자리에서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애비가 불온하면 아들도 불온하다는 건, 나도 불온하다는 말이잖냐? 네 외할아버님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이었는지 너도 기억하잖냐. 그런데 난 어떠냐? 충량한 황국신민 아니냐? 그런 거 가지고 의심하면 정말 한도 끝도 없어.”


“참의님. 우리는 진지합니다. 이 일로 우리 모가지까지 걸려 있단 말입니다.”


노무라 순사부장이 채근하지만, 한 참의는 그저 껄껄 웃는다.


“형사님들. 이상한 데 빠지지 마세요. 회사 차리신 분들이 뭐가 아쉬워서 강도질한단 말입니까? 제가 그 사람들 잘 아는데, 절대 그런 사람들 아닙니다.”


이때 마쓰우라 순사가 오오이시 순사 귀에 속삭인다.


“이거 사기 피해자가 피해사실 인지 전에, 사기 가해자에게 보이는 태도 비슷하지 않냐?”


오오이시 순사는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까닥인다.


이때 한 참의가 제안 하나를 한다.


“못 믿으시겠으면, 서로 만나서 오해 풀 자리라도 주선해 드릴까요?”


형사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한다. 카라스마 준이치로건 미쓰이 사토시건 만약 자리에 응해 나타난다면, 그 자리에서 왜 회사를 유한회사로 했는지, 회사 목적이 무엇인지 추궁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와카마쓰의 말에 한 참의는 흔쾌히 수화기를 치켜들고 전화교환수 아가씨에게 미쓰이-카라스마 자원개발회사 사무실 번호를 말해주며 연결을 부탁한다.


그런데 이상했다. 수십 초가 지나도, 거의 시간이 1분이 지나도, 통화가 연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말한 번호로 연결한 거 맞소?”


한 참의가 짜증을 내며 교환수에게 물었다. 그 번호로 연결했다는 대답에 그럼 다시 해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10초, 20초, 30초가 지나고, 1분이 지나도 또 연결이 되지 않는다.


“이······. 이상하네? 아무도 받지 않는다는데?”


한 참의가 당혹감에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금방 얼굴이 풀어지며 “사무실을 비우기라도 했나 봅니다. 회사 휴무일이라던지요.“라고 하며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형사들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당장 그 사무실 주소 말씀하세요.”


와카마쓰 경부가 명령조로 말했다. 무섭게 굳어진 표정으로.


“당장!”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 작성자
    Lv.35 뿌링틀
    작성일
    20.08.30 23:33
    No. 1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0.08.30 23:39
    No. 2

    ㅎㅎ 고맙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5 고단풍
    작성일
    20.09.03 21:16
    No. 3

    부디 한발 늦었기를...
    오재두는 정말 마지막까지 저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군요.ㅠ
    다른 의미로 참 저를 긴장타게 하는 인물이에요.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0.09.03 21:22
    No. 4

    다음에 계속!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7 PnPd
    작성일
    20.09.16 06:20
    No. 5

    오재두가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요....
    그나저나 역시 이승만한테도 항소하라고 하신 김병로답군요. 간덩이가 배밖으로(......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0.09.16 09:59
    No. 6

    용감무쌍 가인 선생...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 영락태왕
    작성일
    21.06.19 20:56
    No. 7

    아씨;;; 이러면 안되는데 (중간에 김경로 라고 오타 있어요). 근데 김성수 친일파로 알았는데 저런 모습보니까 좀 기분이 묘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1.06.20 12:32
    No. 8

    친일과 항일이라는 이분법으로 가릴 수 없는 회색지대의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김성수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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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205화 +7 20.09.28 264 10 17쪽
204 204화 +8 20.09.26 265 9 16쪽
203 203화 +8 20.09.23 274 9 13쪽
202 202화 +8 20.09.20 279 11 12쪽
201 201화 +14 20.09.19 266 10 13쪽
200 200화 +8 20.09.16 272 10 16쪽
199 199화 +8 20.09.13 280 10 17쪽
198 198화 +6 20.09.12 269 10 16쪽
197 197화 +8 20.09.11 266 11 17쪽
196 196화 +6 20.09.07 285 9 16쪽
195 195화 +10 20.09.04 267 10 15쪽
194 194화 +10 20.09.03 265 10 20쪽
193 193화 +10 20.09.01 272 9 15쪽
192 192화 +10 20.08.31 278 10 22쪽
» 191화 +8 20.08.30 271 13 20쪽
190 190화 +12 20.08.27 281 10 17쪽
189 189화 +8 20.08.23 275 12 18쪽
188 188화 +8 20.08.20 272 9 19쪽
187 187화 +12 20.08.17 276 11 21쪽
186 186화 +8 20.08.16 289 10 15쪽
185 185화 +10 20.08.15 285 1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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