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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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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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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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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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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206화

DUMMY

“넌 걱정도 안 되니?”


주리는 괜히 호두에게 타박을 주었다. 대웅전 마루에 시름 속에 걸터앉아 있는데, 호두가 눈치도 없이 쪼르르 와서는 “야옹. 야옹.”하며 쓰다듬어 달라고 몸을 비벼대더니 숫제 깜장 몽당치마에 덮인 허벅지 위로 올라와 웅크렸기 때문이었다.


정말인지 쓰다듬고 싶다는 충동을 구태여 참을 생각이 안날 정도로 앙증맞았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오늘 아침, 주리는 새벽같이 대백루로 가서 거지 차림을 한 채 경성역으로 출발하는 정우를 배웅했다.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달라며 입술을 쭉 내민 주리에게, 정우는 주저하지 않고 뜨겁게 응대해 주었다.


“견성암에서 기다리고 있어 줘.”


정우가 입술을 뗀 직후에 한 말이었다.


“아무 일 없을 거니깐, 걱정하지 말고.”


그 말에 주리는 “피. 당연한 거 가지고 뭘 그래요?”라고 혀를 쏙 내밀었었다. 정우는 그 의연한 모습을 보고 싱긋 웃더니,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너에게 줄 게 있어. 끝나고 오면 줄게.”


주리는 그 말에 “지금 주면 안 되어요?”라고 애타게 물었지만, “아직 완성이 안 되어서.”라고 하였다. 정우는 그 말을 뒤로 손을 한번 흔들고 형제들과 합류해 떠났다. 그러나 정우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주리의 웃는 얼굴에는 금세 구름이 끼었다. 괜히 걱정 끼칠까봐 웃는 얼굴로 배웅하였지만, 이미 키스를 요구했다는 것 자체가 불안함 마음의 징표이기도 했다.


견성암에 올라 기다리고 있자니, 그런 마음이 계속 올라오기만 한다. 이건 어지간한 강도 작업이 아니다. 네 명의 관동군 장교 모두 장교로서 무장을 갖추고 무술을 익힌 자들이 틀림 없었다. 그것보다 더 문제는 더 강력히 무장한 헌병대 병력이 20명 이상 열차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소총과 권총, 군도로 단단히 무장한 자들을 상대로, 육군성과 헌병대의 높은 장교라고 자처하며 속여넘기고 대번에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속도가 줄어들 예정이라지만 달리는 기차에서 쉽사리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마음 구석에서 또 다시 감정 하나가 올라온다. 자신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모두가 다 주리가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이시와라 간지가 은밀히 꾸민 음모를 드러내는 건 그녀가 아니면 하지 못했으리라고 말이다. 그러나 주리는 그 이상을 원했다. 더 강렬한 걸 원했다.


그녀는 정우와 함께 가길 원했다. 위험도 고난도 다 같이 나누고 싶었다. 안전한 후방에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한스럽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부의 남자들처럼 무공을 익힌 적이 없다. 마우저 권총을 어떻게 쏘는지도 알고 어떻게 해체하고 조립하는지도 알지만, 쏴본 적은 없다.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기로 한 뒤로 체력적으로 짐이 되지 않으려 매일 아침마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학교 운동장을 여러 바퀴 돌긴 했지만, 그것 말고 몸으로는 내세울 게 없었다.


비록 사모님이 상하이에 오면 무공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지만, 그 무공은 미래에 배울 것이지 지금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장 정우에게 힘이 되주지를 못한다.


그런 의문들이 계속 떠올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대웅전 앞 마당을 탑돌이하듯 몇 번이나 돌아다닌줄 몰랐다. 암자에 혼자 있다 보니 봄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 외에는 들리는 소리가 없다. 그러다 보니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들기에는 딱 좋은 환경이었다.


그러다가 다리가 피곤해서 마루에 앉았는데, 호두가 눈치도 없이 다가와 쓰다듬어 달라고 갸르릉대는 것이다. 평소라면 그 폭발적인 귀여움에 호두를 막 껴안고 “집에 가져갈래애애애!”하면서 방바닥에서 같이 격렬하게 뒹굴뒹굴 거리겠지만,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조그만하고 “야옹. 야옹.”하는 귀여운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그래도 이 아기고양이가 어째 자기 위로하려고 다가온 것 같다는 느낌에,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가져다 대었다. 등을 살살 쓸어주고 턱을 긁어주자 배도 쓰다듬어 달라고 몸을 까뒤집고 비비 꼬자 피식 웃음이 터진다.


그러나 호두를 쓰다듬으며 위안을 삼으면서도 기분이 다시 침울해진다.


“넌 좋겠다. 걱정 없어서.”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나가서 혹시 다쳐서 돌아오지 않을까, 아니면 영영 사라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없어서 좋겠다. 주리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푹 한숨이다. 곱고 섬세한 손이 눈에 들어온다. 정우의 못박힌 손과 달리 그저 보드랍기만 한 손. 자신이 이제까지 고생 하나 없이 살아왔다는 징표로 보이니 더욱 답답하다.


그러나 주리는, 바로 떨쳐 일어나서 고개를 도리질한다.


“에이, 참!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생각 끝에 도달한 곳은, 지금 조급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여럿인데 왜 그 자리에 끼지 못한다고 해서 조바심을 내고 울적해 있단 말인가? 욕심이 생기면 한도 없다더니, 그게 딱 자기 말하는 것 같다. 고민하고 있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데, 괜히 쪼그려 앉아서 잡생각이나 하고 있는 건 너무나도 시간낭비 같았다.


주리는 허벅지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호두를 옆에 내려놓고는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문수보살, 보현보살과 함께 내려다보고 있다. 주리는 불상 앞으로 가서 섰다. 지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기도하는 것이었다.


‘세존이시여, 이 하찮은 우바새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그렇게 생각하며 절을 한번 한 순간, 마음 속의 짐이 덜어지는 느낌이었다. 전신을 움직이며 절을 할수록, 어느새 덥혀진 몸에 땀방울이 맺혀 떨어질수록, 마음 깊이 엉켜 있던 번뇌의 덩어리가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기도를 올릴 때 하는 절의 수가 108번인데도, 이미 그 수를 넘어선 채 얼마나 했는지 모를 정도로 계속 절을 올렸다. 호두도 주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지, 다가와서 놀아달라고 애교부리지 않는다.


부탁드립니다, 세존이시여. 모두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발원하나이다. 작업이 성공적으로 끝나기를 발원하나이다. 제가 언젠가, 하루 속히 몸도 마음도 다 강해져서 정우 오빠와 같은 자리에 서길 발원하나이다.


그렇게 기도에 정신을 맡긴 채, 거의 무아지경이 되어 다리 아픈줄도 모르고 절을 올릴 때였다.


갑자기 경건함으로 휩싸인 굵은 목소리 하나가 웅웅 들렸다.


-우바새여. 네 기도가 극락정토에 닿았느니라.


“에? 에에에에엑!”


주리는 화들짝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뜨고 비명을 질렀다. 이곳에는 분명 자기밖에 없다. 그런데 이 목소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을 연화대 위에 앉아 내려다보고 계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셨단 말인가? 아니면 자기 몰래 누가 암자에 침투했단 말인가?


하도 놀란 나머지 급하게 뒷걸음질을 친 순간, 잘 닦아놓은 나뭇바닥에 양말 신은 발이 쑥 미끄러졌다.


“어? 어? 어?”


주리는 양팔을 마구 휘둘렀으나 계속 절을 하다 보니 다리 힘이 다 빠진 관계로 끝내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였다.


“엄마야앗!”


우당탕!


결국 뒤로 벌러덩 넘어지며 양다리를 위로 쳐든 채 등을 바닥에 쾅 부딪치고 말았다. 아파서 눈을 질끈 감은 와중에도 깜장 치마가 훌러덩 내려가 뒤집힌 느낌이 들었다. 허벅지에 찬 바람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부처님 앞에서 허벅지도 모자라 드로워즈까지 다 드러났다는 예감에 “난 몰라!”소리가 나온다.


그때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주리가 지난 몇 시간 동안 계속 듣고 싶은 목소리였다. 정우였다. 그가 신발도 벗지 않고 화급히 대웅전 안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주리는 등이 살살 아픈 와중에도 기쁨에 겨운 함박웃음을 터트리고는 상반신을 확 일으켜 그를 껴앉았다.


“다친데 없죠? 총맞은 데 없죠? 다 멀쩡하죠?”


정우의 탄탄한 몸을, 그리고 웃음짓는 얼굴을 어루만지며 자신이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님을 자각한다. 그녀의 연인은 보란듯이 여기 돌아와 있는 것이다.


“내가 뭐랬니? 별일 없을 거라고 했지?”


정우는 주리의 등을 토닥이며 속삭인다. 주리는 넘치는 기쁨에 겨워 생글생글 웃는다. 모두들 아무 일 없이 임무에 성공하고 돌아왔다. 임시정부는 무사할 것이고 이시와라 간지 중좌의 흉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모두가 노력한 결과가 이 같이 다가왔다. 당장 펄쩍펄쩍 뛰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생각 하나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주리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진다.


“방금 부처님 목소리, 오빠였어요?”


“어······.”


정우는 크게 당황하였다. 막 견성암에 돌아왔을 때, 대웅전에서 부처님에게 열심으로 절을 하는 주리의 뒷모습이 보였다. 분명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 확신하여 대견스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살짝 장난기를 느꼈다. 절에 몰두한 주리에게 부처님 흉내낸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그래서 일부러 목소리를 근엄하게 내며 말을 걸었는데, 주리는 크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허둥지둥하더니 발이 미끄러져 뒤로 나자빠지며 망측한 모습을 보이고 만 것이었다.


“오빠죠? 그렇죠?”


주리가 마구 추궁하자, 정우는 “미안해.”하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주리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코에서 김을 뿜더니 마구 심통을 부린다.


“뭐에요, 진짜! 난 정말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줄 알았다고요! 난 오빠 걱정하며 애태웠는데 오빤 장난치시기에요? 오빠 때문에 부처님 앞에서 민망한 꼴 보였다고요! 분명 부처님이 ‘우바새여, 어찌 정숙하지 못하고 덜렁대느냐?’라고 하실 게 분명하다고요!”


주리가 도리질하며 따따따 소리를 지르니 정우는 별 수 없이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라고 반복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주리는 매몰차게도 팔짱을 끼고는 “흥!”하고 몸을 확 돌려 돌아앉아 버린다.


정우는 완전히 삐져버린 주리를 달래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과의 말을 하지만, 주리는 요지부동이다. 얘를 어찌하나 하고 전전긍긍할 그때, 계속 “흥!”만 하던 주리가 입을 연다.


“사과를 말로만 하나요?”


정우는 그 말에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방금 말은 최대한 차갑게 하려 노력한 것 같지만, 그 속에 웃음기가 분명히 섞여 있었다.


“그래. 행동으로 해야겠지?’


정우는 돌아앉은 주리 바로 앞으로 걸어갔다. 앉아있는 주리는 눈을 감은 채 짐짓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입술은 어떻게든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려고 씰룩거리고 있었다. 정우는 주저하지 않고 주리 얼굴을 부드럽게 잡고 자기 입술을 내밀었다.


둘의 나직한 신음소리가 맞닿은 입술에서 흘러나온다. 정우는 부처님이 마음 속에서 “우바이여. 어찌 이리 망측하느냐?”라고 꾸짖는 느낌이 들어서 키스하는 와중에도 세존께 죄송하다고 용서를 구해야 하였다.


뜨거운 입맞춤이 지나간 후, 주리는 얼굴이 상기된 가운데에서도 깔깔 웃는다.


“내가 이 맛에 오빠 놀린다니까요!”


비록 정우 때문에 뒤로 나자빠졌기에 화가 치민 건 사실이었지만, 정우가 진심으로 사과하는 걸 보고 마음이 풀린 데다가 또 이번 기회에 차갑게 구는 자신에게 쩔쩔매는 그를 다시 보고 싶었던 게 주리의 마음이었다. 정우는 “그래. 그래. 내가 졌네.”라고 하며 주리의 장난을 무리 없이 받아준다는 신호를 보인다.


이때 주리가 양손을 내민다.


“나 선물 주어야죠!”


정우가 무사히 왔음을 확인한 주리는 이제 주겠다고 한 선물을 고대한다. 혹시 청혼을 위한 가락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뛴다. 값비싼 금가락지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대충 구리로 만들었어도 다 받아줄 수 있었다.


“아. 그래. 잠시 기다려.”


정우는 그러며 팔을 뻗어서, 마루와 방 사이의 턱 아래 있는 뭔가를 잡는다. 아마 저게 선물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가락지가 든 함은 아니었다. 그것은 책이었다. 시중에서 염가에 파는 딱지본 책이 아닌, 제법 괜찮은 장정을 한 책이었다.


“자, 선물이야. 받아 주었으면 해.”


정우가 싱긋 웃으며 내민 책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펼쳐본다. 무슨 책일까?


그때 주리는 헉 하고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표지를 넘기자마자 드러난 속표지에 쓰인 내용 때문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저

-이정우 옮김

-박종팔 삽화


“시간 쪼개서 번역한 거야. 저번에 말했잖아. 우리말 판본이 없어서 아쉽다고. 그래서 내가 부족한 실력이나마 한번 해봤어. 삽화는 종팔이에게 부탁했고, 인쇄소는 히로가 알아봐 줬어.”


주리는 떨리는 손으로 다음 장을 넘겨 본다. 흰 바탕에 “사랑하는 주리에게 바친다.”라고 손글씨로 쓰인 부분을 넘기고, 루이스 캐럴이 본편으로 들어가기 전에 남긴 시 “황금빛 오후”를 읽는다. 정우가 손으로 직접 옮긴 글자 하나하나가, 원문을 읽으며 느낀 것을 그대로 살려주고 있다.


다음 장을 넘겼을 때, 주리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온 것이 드러난다. 우리말로 옮겨진 앨리스 이야기가.


“시간에 쫓기기도 해서 원문에 있는 영국식 말장난 같은 건 잘 옮기지 못한 것 같아. 그래서 좀 실망할 수도 있으니까······..”


정우는 루이스 캐럴이 본문 속에 넣어놓은 번역하기 곤란한 말장난들을 어떻게 번역할지 머리 싸매고 고민하다가 결국 대충 넘긴 부분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분명 캐럴이 이 책의 해외 수출은 생각하지 않고 쓴게 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고민하기가 더 여려운 환경이라서 결국 어느 정도는 적지 않은 의역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주리의 귀에는 정우가 미리 하는 사과가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이건 나잖아요!”



주리가 놀람과 환호에 겨워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레 아래로 추락하게 된 공포와 미지의 세계로 여행한다는 기대감이 뒤섞인 얼굴로 에이프런 드레스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깊은 굴 속을 추락해 가는 삽화 속 앨리스는, 금발을 한 만 7살 반의 영국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칠흑같은 머리에 치렁치렁한 댕기를 뒤로 땋아묶은 10대 후반의 동아시아 여자아이. 얼굴 생김새를 자세하게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그게 누가 모델인지는 말 안해도 알 수 있었다.


“그래. 종팔이에게 너하고 비슷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었어. 계속 이상한 나라에 가보고 싶다고 했으니, 이렇게라도 소원 들어주고 싶어서.”


주리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우 품에 돌진하듯 달려들었다. 그 기세에 정우는 “어엇!”하더니 뒤로 넘어진다.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주리의 눈에서 눈물이 펑펑 떨어진다. 그러면서도 얼굴은 피어난 꽃처럼 활짝 웃고 있다.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저 넌지시 아쉽다고 말했을 뿐인데, 정우는 그걸 잊지 않고 선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녀만의 책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각종 말장난으로 가득해 번역하기 까다로운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며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좋아! 좋아요! 정말 좋아요! 이건 내 평생의 보물이에요! 어디에 가든 가져갈 거예요! 죽어서 관에 들어갈 때도 가져갈 거예요!”


고조된 기분을 마구 풀어내던 주리는 정우의 두루마기에 눈물을 훔치고 얼굴을 묻는다. 정우는 주리가 기대 이상으로 기뻐하자 흐뭇한 감정이 넘치는 채로 그녀의 등을 쓸어 준다.




그렇게 정우 품 속에서 나올 생각을 안하던 주리는, 얼굴이 새초롬하게 빨개지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저······. 그러면요······.”


뭔가 부끄러운 말을 하려는지 목소리가 떨리고 살짝살짝 더듬거린다.


“저번에 보여주셨던 꽃밭으로······. 부처님 앞에서······. 그럴 수는 없으니깐······.”


겨우겨우 하고싶은 말을 꺼낸 주리는, 채 마무리를 못 짓고 “에헤헷.”하며 수줍게 웃음짓더니 정우 가슴에 얼굴을 비빈다. 정우는 주리의 귀여운 유혹을 거부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지금 그녀가 속에서 조용히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한 통을 부은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래. 가자.”


정우는 몸을 일으켜 그녀의 뜨거운 손을 잡아 이끈다..


그런데 주리는 마루에 앉아 댓돌에 올려놓은 구두를 신다가, 그 말고 누구도 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다른 분들은요?”


정우는 그 질문에 피식 웃는다.


“그걸 지금 물어보면 어떡하니?”


“오빠가 아무 일 없이 왔으면 다 괜찮으실 거 아녜요.”


주리가 그러며 입술을 삐죽인다. 정우는 주리 뺨을 살짝 꼬집어 자기 외에 다른 사람들을 제쳐놓은 데에 약간의 벌을 주고 대답했다.


“소련 총영사관. 거기서 다들 할일이 있어.”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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