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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점퍼Jumper, 순간이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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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2.09.2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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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1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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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7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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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2-17

DUMMY

*


아무 일도 없을 것 같던 와중에 사건은 갑작스레, 혹은 자연스레 찾아왔다.


“오늘은 그저 집에 있으려고 해.”

“그러십니까.”


킬번 자작은 여태까지 외출을 즐겼던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기라도 했다는 듯.

하루는 저택 내에서 꼼짝않고 있기도 했다.


집 안에서 나가지 않더라도. 이미 고용된 하인들은 모두 제각기 일을 하고 있었고. 저마다의 기술을 발휘해 자작이 살아가는데 어떤 불편함도 없도록 애를 썼다.


김일수는 자작이 머무는 공간 근처에 늘 있으려고 했다. 기본적으로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식의 생각이다.


평범한 경호라면 외부에 요인이 있을 때에나 경호를 위해 까다롭게 굴테지만. 지금은 경호대상이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하는 상황이다.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만큼. 더욱 더 철저하게 굴 수 밖에 없었다.


돈을 받고 일을 하는 처지이기도 했으므로. 요인이 바란다면 근처에서 심리적 부담감을 해소시켜 주는 것 역시 중요하리라.


정신적으로 불안감이 치솟으면. 결국 위급한 상황이 터졌을 때 보호대상이 돌발 행동을 할 여지가 있었다. 통제하기 수월한 상태로 요인을 관리하는 것 역시 경호 시의 노하우였다.


주로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유지한 채 맴도는 식이었다. 제법 크기가 큰 밀실이라고 한다면. 같은 방에 들어가 멀찍이 떨어져 시간을 보낸다. 혹은 지나치게 좁거나 은밀한 장소, 침실 따위라면 옆 방에 있거나. 그런 공간마저 없다면 그냥 근처 복도에 서 있기도 하고.


24시간. 12시진동안 계속되는 경호라는 건 진을 빼놓기 마련이었다. 김일수는 체력적으로 크게 부담이 가지는 않았다.

체력이라는 게. 부담이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단련이 된 몸이 아닌가. 훈련에 의해서도. 연습에 의해서도 그러했고. 이 시대에 있는 어느 특수 부대나 특작 요원보다도 지랄맞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 그의 생활이었다.


거진 나라가 없는 인간처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구르고 있었다. 버젓이 조선, 대한제국은 실존했지만. 실상은 그러했다.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는, 무지막지한 시대였다. 강대국들은 약소국들의 사정을 다 돌보지 않았고.

가장 끔찍한 것은, 강대국 축에 확실하게 끼지 못한 일본 제국과 같은 나라였다.


그런 나라는, 자신들이 약소국의 처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더욱 잔혹하게 자신의 아래를 만들고 짓밟았다.

끔찍한 짓이다. 두려움에 찬 인간이 상대를 비틀어 죽일 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겠는가. 차라리 여유로운 강자라면 하지 않을 짓거리들을. 일본 제국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고.


악인들 중에서도 음흉한 작자들이 더러 있는 일본의 사정을 보았을 때. 대한제국의 미래가 그리 밝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위로 청에, 옆으로 일제에. 그리고 그 위로 아라사에. 또한 그 외부에서 오고 있는 다양한 열강들의 압박에 조선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본디 그러했던 지정학적 위치였고. 고생을 깨나 많이 한 역사를 갖고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여태까지의 고난들보다 더욱 버거운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일수는 자국의 미래를 그리 보았다. 밝지만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가장 비관적인 현재를 되뇌이곤 하는 것이 그의 머릿속이다. 아무리 보아도 암울한 것밖에 보이질 않는 미래. 자국의 미래가 그러하다는 점에서 그는 우울증에 빠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지경이었고.

사실은 이미 어느 정도 앓고 있는 지도 모른다.


킬번 자작은 자신의 가장 넓은 방 중 하나에서, 안줏거리와 함께 포도주를 즐기고 있었다.


하루 종일 집에 있겠노라 선언을 한 뒤에 그 말을 다름없이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멋들어진 수정 조명등이 천장에 붙어 있고. 그 외에도 고아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의 내장 가구들이 잔뜩 들어찬 저택이요, 방이었다.


표범의 가죽을 벗겨 가공을 해 만든 카펫을 밟고서.


킬번 자작은 예의 약간 검은 여성양복을 입고 유리잔을 기울였다.


김일수는 세상에 있는 갖가지 문물들에 대해서 제법 박식하고, 또 익숙한 편이었다. 이동을 하는데 아무런 힘도 시간도 들지 않고. 아무 곳으로나 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으로서 당연스러운 것일지 모른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모두가 화끈한 여행을 하지는 않지만.

김일수는 살기 위해서 많은 여정을 거쳤다. 그것이 그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어디로든 탈출을 하고자 한 것일지 모른다. 암운이 드리운 한반도의 미래에서. 자그마한 빛줄기라도 찾고 싶었는지도.

그렇게 온갖 군데를 돌아다니고. 많은 사람과 문화와 양식을 경험하고. 말을 배우고. 능력을 더욱 익히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결국 미래를 찾았는가는, 아직도 답할 수 없는 문답이었다.


킬번 자작의 집 내에 있는 모든 것들은 온통 이국적이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고. 대한, 한성부에 머무르는 고위층이라 할 지라도 신기할법한 물건들이 많이 있었지만.


김일수는 그 모든 것들을 제법 놀라지 않고 대하고 있다.


그런 모습이 킬번 자작에게 있어 또 흥미로운 것이었을지도.


"앉지?"


킬번 자작이 요염스런 모습으로 이야기를 했다.


젊은 여성이었다. 김일수보다야 나이가 많았지만. 백인종과 황인종의 차이가 있어 이질감이 들 수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상관 없을 정도로 미인이었고. 연심을 품고자 하면 품을만도 한 인물이었다.


방 안에는 킬번 자작과, 덩치가 큰 백인 경호 하나. 그리고 김일수가 있었다. 바로 문 밖에 다른 백인 경호원이 서 있었고.


킬번 자작이 앉은 자리가 방의 중앙 즈음이었고. 그녀의 기준으로 오른쪽 대각선 방향. 2시 즈음에 창문이 있었다.


김일수는 킬번 자작의 말에 별 대꾸없이 가까이 다가가, 맞은편에 앉았다. 처음 의뢰를 받아 저택에 오고, 자작의 이야기를 들을 때와 비슷한 구도였다.


"들지?"


자작은 편하게 이야기를 했다. 서양에도 나이를 굳이 따지는 관습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몇 년이라도 김일수에 비해 나이가 많기도 했고. 일단 고용주의 신분인데다, 작위를 가진 귀족이며 일가의 가주이기도 했다.

존중을 해 줄 건덕지를 찾자면 아주 많은 인물이다. 김일수는 그녀가 편히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불쾌히 여기지는 않았다.

설령 불쾌하게 여겼더래도 티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로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들끼리 늘 만나고 지나치고 헤어지는 것이 그가 겪고 있는 삶이였다.


속셈을 들켜봐야 좋을 일은 없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다. 그러다보니 다소 굳은 표정을 하고 뚱, 하니 서 있는 경우가 많아졌는지 모른다.


김일수는 흐릿한 눈으로 그녀가 밀어두는 유리잔을 들었다. 별 생각없이 포도주 전용의, 입구가 넓은 잔의 목을 집었다. 유리를 사용해서 이리 아름다운 공예를 만들다니. 장인이 수제로 만든 것일까.


공업화가 이루어진 열강들의 산물은 모두 놀라운 것들뿐이다. 언제나 말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물건도 찍어내듯 만들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김일수는 어쨌든 공업에 조예가 깊은 장인은 아니었다. 알 바 없는 물건을 잠시 구경하는데 킬번 자작이 포도주 병의 주둥이를 툭 밀어넣는다.


자연스레 균형을 맞춰 적포도주를 받았다.


왈칵, 하고 상당히 많은 양을 부어주는 여인이다. 경호를 위해 애쓰는 보호자에게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일런지.


김일수는 반 이상 차버린 잔을 보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제법 깔끔한 발음의 영어를 쓰고 있었다. 말이 통하는 황인종은 분명 작금의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부류 중 하나이리라. 함선을 타고 세계를 누비고 있는 백인종들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보통 포도주를 이만치 따라 마십니까?"

"애정이라고 생각해줘."


허허. 김일수는 종종 웃었다.

정말로 웃겨서라기보다는. 딱히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을 때 내뱉는 것이었다.


제 잔을 밀어오는 킬번의 손길에 김일수 역시 마주 유리잔을 대었다. 짠, 하고 부딪히는데 적포도주가 튈 뻔했다.


아무리 봐도 예절이 아닌 듯한 꼴이었지만 어쩌겠나. 김일수는 고이 받아 마셨다.


"맛이 어때."

"씁."


김일수는 비강으로 느껴지는 향과 풍미를 느꼈다. 시큼한 맛이 조금 돌기도 하고. 달짝지근한 감도 있었다. 씁쓸한 입맛이 후반부에 남는다.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종미에는 깊고 오래된 풍미만이 남아 입 안을 채운다.

썩 괜찮은 맛이었다. 포도주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으나. 이만하면 상급품이 아닐까 생각이 되었다.

애초에 술을 그리 즐기는 편도 아니었다.


조선에는 망국의 짐작을 하고서 술이나 퍼마시자, 며 낮부터 지랄하는 부류들도 있었지만.

그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술로 달래기에는 응어리진 것이 지나치게 쓰고 비대했다. 술을 마셔 해결할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다. 그의 고민은.

잊혀지지도 않을 뿐더러.


싸구려 진통제에 몸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잖아도 살기 팍팍한 세상이고. 간이고 위장이고. 신경성의 이유로 남아날 것이 없는 꼴의 세상인데.


나름 양반가의 출신이니 고급주 따위를 마셔본 경험은 있었다. 그에 비추어, 미각에 집중해 가늠해볼 따름이었다. 술에 대한 평가는.


"비싼 겁니까?"


따박따박. 김일수는 존대를 했다. 킬번 자작은 호호, 하고 여성스레 웃으며 말을 한다.


"나름? 사치를 부리자면 부리지 못할 것이 없는 처지이니.

먹고 마시는 데에 그리 아끼지는 않지."


하나 둘··· 여인은 손가락으로 셈을 하는 듯 했다. 빤히 바라보자 김일수에게 이야기를 했다.


"열 병이면 저기 바깥에 있는 차를 살 수 있겠군."

"아, 그것."


차, 라고 하는 것은 자동차를 의미했다. 서양에는 벌써 자동 동력 기관이 만들어진 이후였다. 그런 기술력에 기인하는 각종 공업 기계들은 그들의 국력을 떠받치는 근간이 된다. 동시에 압도적인 무기를 생산하는 비결이기도 했고.


자동차, 라는 물건을 그리 많이 보지는 못한 시대였다. 전차 따위는 자주 돌아다녔지만.


이 시간에도 각종 기술력에 대한 개발 경쟁이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안다. 하루하루,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조선은 그런 첨단에서 멀어져갈 뿐이다. 입맛이 어쩐지 씁쓸하다.

무엇을 먹건, 마시건, 보건 조선을 생각하게 되는 건 병인지 아닌지. 김일수는 그저 고개만 주억거렸다.


"탐탁치 않은 게 있나?"


김일수는 고개를 저었다.


"달리 없습니다."

"기뻐 보이지는 않는군."

"자작께서 기쁘시지 않은 탓일 수도 있고···"


김일수는 말을 고르다 제법 솔직하게 털어두었다.


"모국의 일을 생각하면 영 기쁜 표정을 짓기가 어렵더군요."

"그런가. ···어디라고 했지?"

"아라사··· 러시아 아래. 청··· 차이나 아래에 있습니다. 재팬의 옆이고···."


김일수는 눈살을 조금 찡그리며 설명을 잘 해내기 위해 고심했다.


"지금 아프리카 대륙에서 동부로 바다를 건너 한참을 가야 합니다. 인디아보다 위지요. 아메리카 대륙보다는 한참 전이고."

"호."


킬번 자작은 흥미롭다는 듯 한반도의 위치를 머리에 새겨넣었다.


그녀의 눈빛도 영 또렷하지만은 않다. 취기가 약간 도는 지도 모른다. 벌써 홀로 홀짝인 것이 한 병이 넘었고. 그 다음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편안한 가죽 소파에서 곧바로 손이 닿는 낮은 테이블 위에는 다과, 안줏거리 따위가 늘어져 있었다. 잘 익은 치즈 조각을 집어 먹으며 그녀가 이야기한다.


"그곳은 어떤가. 살만한, 좋은 나라인가?"

"하하."


······.


김일수는 잠시 뜸을 들이곤 말한다.


"영 좋지 못한 꼴이군요. 살기 좋냐라···. 어쩌면 지금 이전에도 썩 좋은 나라는 아니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황상이 있고··· 나랏일을 하는 이들이 제대로 굴 때는 제법 살만했을 겁니다.

외세가 침략을 했을 적에는 조금 더 고단했을 것이며···.

최근은 영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고 지워지질 않는군요.

약소국이라 말입니다."

"······."


킬번 자작은 길게 이야기하는 김일수의 말을 빤히 보며 듣고만 있었다. 나열된 말 속에서 김일수의 생각을 읽는 것이기도 하다. 제법 박식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일수가.


백인들. 오만한 강대국의 시민들은 간혹 자기들 세계에서 벗어난 인물들이 모조리 무지렁이들일 거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자신들이 세계 최고의 모든 걸 갖고 있노라 생각하는 교만이고.

그건 어느 시대건 사실이 될 순 없었다.

최강대국, 최선도국도 결국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지는 않는다. 세계란 그렇게 지어져있지 않았으므로.


보편적으로 대부분의 분야에서 세계의 주도권을 가질 수는 있겠다. 허나 변방에도 사람은 살고. 변두리에서도 천재는 태어나며 문화는 가꾸어질 수 있었다.


진정 세계를 아우르는 학자들은. 늘 그들의 지성이 전부가 아니며 세상을 빈틈없이 담을 수 없음을 시인한다. 위대한 역사의 족적은 그런 겸손한 인물들에 의해 늘 새로운 장이 적히곤 한다.


그런 천재적인 선도국의 인물들로부터 빚을 지는 미련한 이들은. 그저 타고난 모든 것이 제 잘난 덕인줄 알고 변두리 구석의 인간들에게 매몰차게 구는 법이 있었다.


킬번은 눈앞의 사내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새삼스럽게 참으로 이질스런 자, 라고 느껴진다.


그녀 역시 정상적인 사고와 상황은 아니었다. 아비를 잃고. 홀로 먼 이국 지역에서 사업을 감당하고 있으며. 주변에서는 거대한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었고. 격변의 시대와 지역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름대로 발버둥을 치는 실정이다.


거기에 믿을만한 자도 그리 많지 않은데다. 근처에 있는 권력자들은 그녀가 탐탁찮은 모양이었다.

킬번의 입장에서 보자면 망설임 없이 인종 학살을 자행하는 자들이 미치광이 그 자체였으나. 서로의 생각은 언제나 갈리고 달라질 수 있는 법이었다. 미쳐버린 인간들이 그들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자신을 죽이려 든다면 뭐.


그들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행동이 바뀌어야 할 뿐.


'세상은 위험과 미지에 대한 모험으로 가득 차 있다.'


생전. 그의 부친, 킬번 자작이 하던 말이었다. 지금 킬번 자작은 그녀였지만. 아직도 그녀는 부친의 가르침 속에서 살아간다. 그 흔적이나 그림자는 지울 수도 없고. 지우고 싶지도 않은 것이었다. 힘이 들때면 어쨌거나 찾게 되는 게 아버지의 말씀이다.

인생이라.

삼십대 후반을 앞두고 있었지만 조금도 모르겠는 것이다.


신께서는 그녀를 어떻게 인도하고 있는지.

태어날 때부터 잉글랜드의 교회를 다녔던 그녀다. 부친과 모친에게 이끌려 침례를 받았었고.


고난 가운데 내던져지면 절로 외치게 되는 것이 파더, 의 이름이었다. 하늘에 계신 주, 아버지.


킬번은 먼 곳을 바라보듯한 눈동자로 고개를 저었다.


상념도 좋지만 움직여야 하는 현실이 있다면 그것을 직시해야만 하리라.


야욕에 의해 살인을 하는 작자들에게 곱게 목을 내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 스스로 죽고 싶어진다면 또 모를까. 아직이었다, 아직.


생에 대한 갈구.


세계 최강대국의 귀족이라 할 지라도 별반 다를 건 없는 바였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초라해지는 자들이 많았고. 신분과는 관계가 없는 공평한 문Gate이었다. 그건.


전쟁이 실존하며 난무하는 시대이기에 더욱 확실해지는 진실이었다.


"자네도 고생이 많군."

"자작만 하겠습니까."

"괘씸한 소리도 할 줄 아는군."

"하하."


김일수는 농처럼 건넸다가 웃고 말았다. 더욱 짙은 농짓거리를 뱉을 수는 있었으나. 상대나 상황 정도는 가려야 하리라.


쾅.


그리고 저택을 떨게 만드는 폭음이 난데없이 바깥에서 들려왔다.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그처럼 생경할 수 없는 다음 문장이었으나.


벌어진 현실은 그런 이질감을 거친 이빨로 씹어 부숴뜨렸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 개연성이 없어도,


준비되어 있던 경호원은 뛰쳐나가야 한다.


그게 군인이었다.


김일수는 벼락소리처럼 외쳐댔다.


"자작을 부탁하네!"


그렇게 말하면서 고급 목재 테이블을 짓밟고 넘어가 자작의 어깨에 손을 대었다.


우웅.


그리고 곧바로 이질적인 에너지의 흐름과 함께 작은 소리가 들렸다. 어지간히 예민한. 또 특수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이가 아니라면 느끼기 어려운 전조 현상이었다.

미약한 소리와 함께 김일수는 사라졌다.


킬번의 어깨에 손을 얹고 순간이동을 했다. 한 호흡 뒤에 나타난 건 아직 당황하고 있는 백인 경호원의 바로 앞이었다. 다행히 그는 방의 구석에서 반 걸음 즈음 움직인 찰나였다.


김일수는 그대로 자주 보았던 백인 경호원의 어깨에도 손을 얹었다.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엔 총 세 사람이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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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96. (끝) 23.01.09 83 0 17쪽
100 95. 23.01.07 54 0 21쪽
99 94. 23.01.03 50 0 22쪽
98 93. 22.12.30 46 1 14쪽
97 92. 22.12.28 48 0 16쪽
96 91. 다시, 봄 22.12.26 43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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