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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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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8.29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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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5,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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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9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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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쪽

223

DUMMY

여러 광경이 스쳐 지나간다.


그것은 누구보다 외로우면서도, 누구보다 강직했던 어느 한 인간의 삶이었다.


참 기구한 일생이었다. 어느 한순간도 결단코 평탄한 적이 없는, 절로 동정하게 되는 그러한 일생이었다. 그 말로 또한 피로 얼룩지어진 수라의 길인지라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럼에도 그자의 마음은 완전무결하게 충족되어 있었다. 절대 흔들리지 않았으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눈부시게 빛났다.


수라의 길을 걷는 자로서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 울컥해 버리고 만다.


바보다.


바보 중의 왕바보. 답도 없다. 정말 도리가 없을 정도의 고집과 우직함이다. 그리될 수밖에 없는 주변의 상황에도 형언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보는 사람이 이러건만 정작 본인은 만족해하니 진짜 울화통이 터진다.


평생을······ 평생을 꿈을 향해 뛰어간 것은 그야말로 귀감이기는 했다. 온갖 꼬임에도 요지부동 앞만 보고 나아간 그 뚝심에는 절로 경탄하게 된다.


그러나 그 대가가―― 그 마지막이 납득할 수가 없다.


정말 용납이 안 된다. 무척이나 화를 내면서도 순순히 순응하는 그녀도, 그 끝을 만들어 낸 자도 모두 용납할 수가 없다.


‘다들 웃기고 앉았어······.’


도대체 무슨 영문으로 이러한 광경을 볼 수 있는지, 무얼 위한 것인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약속한다. 이번에는 절대 그리 끝나지 않을 거라고······.


내 미래는 내가 정한다. 그 누구라도 결코 바꾸지 못하리라.


결연히 마음을 다진 리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전혀 모르는 곳의 천장으로, 잘 가꾸어졌으나 급히 치운 흔적이 역력한 어느 방안이었다.



“보고 배우라지 아니었어? 말해준 것 외에도 왜 이렇게 많이 남겨준 거야? 대체 누가 누구보고 츤데레라는 건지······.”


작게 불평을 말한 리아의 시야가 뿌예졌다. 봇물이 터진 듯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아무 감정도 없는 다른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회한과 기쁨, 슬픔, 체념과 행복의······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감정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리아······.”


이번에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간병을 해주던 에르가 다급히 손수건으로 리아의 눈가를 닦아줬다.


리아는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의지를 무시하고 흘러넘치는 눈물은 쉽사리 마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한동안 에르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가까스로 멈춘 리아는 조용히 물었다.



“얼마나 잤죠?”

“두 시간 조금.”

“다른 분들은요?”

“각자 알아서들 쉬고 있어.”

“그런가요.”


리아는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 염려스러운지 에르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더 누워있어도 되는데?”

“아뇨. 피로는 없어요. 애초에 잘 필요가 없는 몸이기도 하고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신체에 남은 피로는 전무. 어떠한 무리도 없다.


하얀 악몽은 그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았다. 무심하게 행동하는 것 같으면서도 일련의 과정들은 흡사 공기가 부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마력과 육체를 다루는 것 모두가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리아가 보기에는 완벽과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를 속이고 수를 읽히지 않게끔 하는, 전형적인 전투법을 취하지 않았다. 그녀는 구태여 모든 것을 드러냈고, 덕분에 정말 많은 참고가 많이 됐다.


다만, 진짜 전력을 보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쉬웠다······.


하얀 악몽은 전력을 다한다고 했지만 그건 말뿐이었다. 보기와 달리 배려심이 좋은 그녀는 리아의 몸을 우려하여 가진바 전부를 내보이지 않았다.


여러모로 하얀 악몽에게는 여유가 있었고, 상상 이상으로 뛰어난 것은 분명했다. 적어도 처음 예상했던 수준은 까마득하게 넘어섰었다.



“응. 그러니까 나도 더 노력할게. 당신과 모두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그리고 이클립스나 모두의 일은 감사할 필요가 없어.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니까.”


듣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리아는 가슴에 손을 얹고 들려주듯 이야기했다.


감상에 젖는 건 여기까지.


한순간에 의식을 전환한 리아는 강철과 같은 시선으로 에르를 쳐다봤다.



“모두를 모아 주세요.”

“알았어. 금방 다녀올 테니, 그때만이라도 잠시 쉬고 있어.”

“네. 고마워요, 에르.”


따스하게 웃은 에르는 살며시 손등으로 리아의 볼을 쓸어주고는 방을 나갔다.


기다리는 동안 리아는 몸가짐을 정리했다. 살짝 남은 눈물 자국을 지우고 [청결]로 한 차례 몸을 닦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앉아 있으니 잠시 후 에르가 돌아왔다.



“리아.”

“네. 가요.”


자고 있던 방은 영주관에 있는―― 아마 영주의 대리인이 지내던 방이었나 보다. 밖으로 나오니 익숙한 실내가 눈에 들어온다.


에르는 이전에도 썼었던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 안에도 전과 마찬가지의 인원들이 모여있었는데, 리아가 들어서는 순간 긴장감이 맴돌았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사람은 루데릭으로, 그는 괜찮냐고 시선으로 물었다.


‘응. 괜찮아, 오라버니.’


속으로 한 대답이었으나 곧장 알아본 루데릭은 한시름 덜었다는 얼굴로 가볍게 숨을 토해냈다.


그 외에도 일부 화색이 도는 인물들이 있었고, 그런 그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몹시도 서두르는 기색으로 튀어나왔다.


적청의 신속으로 움직인 그는 곧장 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퍼스트······.”

“예!”


이름이 불린 것만으로 퍼스트의 얼굴에 환희가 가득해졌다.



“리카드 씨와 세리오 씨는?”

“안부를 부탁하고는 먼저 돌아갔습니다. 자세한 인사는 개학 때 직접 하겠다고 합니다.”

“성실하시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어제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하얀 악몽과의 재회. 리아와 만나려 찾아온 것은 아니기에 인사는 뒤로 미룬 것이었다.


의외라면 의외지만, 그 나름의 배려이면서 꽤 책임감 있는 행동이었다.


리아는 참으로 리카드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리아 님! 멋대로 행동한 죄, 이 목숨으로 달게 받겠나이다!”

“아냐. 데려다줘서 고마웠어, 퍼스트.”

“오오. 황송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진심으로 크게 감격했는지 퍼스트의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한 걸음 물러서서 지켜보던 폴스도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쳤다.


정말 매번 유난이다······.


뭔가 그리운 기분을 느끼면서 리아는 물었다.



“학원 쪽은? 자리를 비워도 괜찮니?”

“예. 반복 훈련 위주이다 보니. 잠시 비운 정도로는 괜찮습니다.”

“그래? 바쁘지 않다면 잠시 같이 있을래? 모처럼 왔는데 그냥 보내기가 좀 그러네.”

“옛! 기쁘게 따르겠나이다!”

“어, 응.”


그렇게 좋을까. 퍼스트는 만면에 화색이 돌며 기뻐했다.


부담스럽지만 본인이 좋다 하니 딱히 할 말이 없다······.


리아는 퍼스트를 물리고는 천천히 걸어, 비어있는 상석으로 가 앉았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괜스레 크게 울린다.


그런 실내를―― 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두를 찬찬히 둘러보며 리아는 말했다.



“우선,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많이 놀라셨을 겁니다.”


리아는 살며시 머리를 숙였다.


그게 전부였다. 부차 설명이라던가, 사과에 대한 진정성 자체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 그저 형식상으로 행동을 취한 것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이 점을 문제 삼지 않았고, 리아도 딱히 그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당연하듯 넘어갔다.



“그럼, 레비아.”

“옛!”


앳된 외침과 함께 넘버즈의 뒤편에 자리했었던 레비아가 쏜살과 같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리아의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다만, 이번에는 절을 하듯 머리를 박진 않았다. 제대로 예법을 갖춘 모양새였다. 뒤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폴스를 보면, 아마 그의 지도가 있었으리라 예상된다.


‘일부러 딱딱하게 굴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좀 과하다고 생각하며 리아는 턱을 괬다.



“몸은 좀 어떤가요?”

“완벽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시고요?”

“리아 님의 권속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설명이 필요 없어서 좋네요. 앞으로······ 오랜 세월 잘 부탁드려요, 레비아.”

“네! 이 영혼이 다 닳아도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레비아는 정중히 예를 보이고는 조용히 물 흐르듯 깔끔하게 넘버즈의 뒤로 돌아갔다.


뭔가······ 자기들끼리의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것 같은 분위기다.


기분 탓만은 아닌 게, 늠름하게 가슴을 펴는 레비아를 동년배로 보이는 폴스가 대견하다는 양 바라본다. 정확한 기준은 모르겠지만 상하 관계가 있음은 확실해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본인들이 만족스러워하니 딱히 터치할 생각은 없다.


리아는 마족 주민들을 쳐다봤다.



“여러분, 보셨다시피······ 이렇게 됐네요.”

“예.”


바지탄스가 대표로 묵묵히 대답했다. 언뜻 초연한 태도에서는 어떠한 불만도 없어 보인다.


다른 마족 주민에게서도 반발은 없었다. 현 상황을 모두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스피리아 님······.”

“리아로 괜찮아요, 레비아.”

“옛, 리아 님. 송구합니다만, 발언을 해도 되겠습니까?”

“네. 편한 대로 하세요.”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히 머리를 숙인 레비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이곳 이베시온의 마족 여러분들······ 정말 죄송했습니다!”


쿵!


레비아가 넙죽 절을 하더니 냅다 땅에 머리를 박았다. 그녀는 그 상태에서 말하였다.



“리아 님으로 인해 제가 여러분께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는지 알게 됐습니다. 사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은 압니다. 그래도 사과드립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부디! 분이 풀리실 때까지 마음껏 때리십시오!”


쿵!


레비아는 재차 머리를 땅에 세차게 내리박았다. 얼마나 셌는지 돌바닥이 쩌적하고 갈라진다.


그런 그녀를 바지탄스와 마족 주민들은 감정이 없는 눈으로 쳐다봤다.


잠시 후 바지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의 뜻은 아가씨의 뜻. 당신을 용서하고 말 것도 없다.”

“개인적으로는 어떠신데요? 풀릴 만한 원한이 아닐 텐데요?”

“물론 그러합니다. 결코 풀릴 리가 없는 한이죠. 하지만 전부 무지로 인한 것. 잘못이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순진무구한 자를 어찌 벌하겠습니까?”

“아이와 마찬가지로 엄히 혼내는 것으로 넘어가신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럴 수준을 아득히 넘지 않았나요?”

“아가씨께서 받아들이셨다, 그것만으로 기회를 주기엔 충분합니다. 저희가 그러했듯이······.”


바지탄스의 말에 마족 주민들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원망이나 원한 같은 질척한 감정은 담겨있지 않았다.


리아는 손가락을 튕겨 바닥을 원상태로 복구했다.



“여러분들의 뜻을 알겠어요. 그러니 약속할게요. 다시는 여러분과 같은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레비아가 확실하게 세상에 대해 좀 더 알아가게 하겠다고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바지탄스에 이어 마족 주민들 전원이 복창하며 머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솔직히 전혀―― 오히려 반대로 감사를 전해야 할 판국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사양하는 것은 바지탄스들의 의지를 짓밟는 무례한 짓. 잠자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대신 속으로라도 온 마음을 담아 이들에게 경의와 칭송의 말을 읊조렸다. 당신들이 나트알의 주민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레비아, 모처럼 받은 기회예요. 미안하다는 그 마음만큼 정진하도록 하세요.”

“옛!”


리아는 물러나라고 손짓했고, 레비아는 재차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는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은 그쪽이네요. ······드카네스 씨라고 했던가요?”

“그러하옵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위대하신 분은 됐어요. 평범하게 이스피리아라 불러주세요.”

“말씀에 따르겠나이다.”


오거의 노파는 몹시도 긴장하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억지로 받아들인 것이 확실하였다.


상당히 탐탁지 않았지만 리아는 이어 말했다.



“드카네스 씨들은 앞으로 어찌할 예정인가요?”

“예정이라 하심은······?”

“당신들―― 오거들의 거주지 말이에요. 설마 이대로 이곳에 눌러앉을 생각은 아니겠죠?”

“이스피리아 님께서 반환을 원하신다면 기꺼이.”

“그게 아니에요.”


완전히 잘못 짚고 있다. 애초에 이베시온은 이쪽의 영토도 뭣도 아니다. 그냥 바지탄스를 따라온 객원에 불과할 뿐이다.


‘점술사라고 하기에, 오거들을 이끄는 것 같아 나름 대국적인 안목을 지닌 줄 알았는데······.’


숲의 주민이니 이런 류의 감각이 떨어지는 건 이해하지만, 하나하나 설명하려니 조금 귀찮다.



“하아. 어쩔 수 없지. 잘 들으세요. 이곳은 마족령······ 마국의 영토죠. 하지만 지금껏 이곳을 되찾으려 국가 차원에서 나서지 않았죠. 과연 왜일까요?”

“레비아께서 계셨기 때문이겠지요······.”


영 감이 없는 건 아니었나 보다. 드카네스는 곧장 의도를 파악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과연······. 레비아께서 이제 계시지 않을 테니 더는 가만히 놔둘 이유가 없다는 말씀이로군요.”

“한바탕 난리를 치기도 했으니 곧장 감시병을 통해 소식이 전해지겠죠. 고민할 시간은 별로 없을 거예요. 선택은 자유에요. 다만, 맞서 싸운다는 선택지는 별로 추천하지 않아요. 당신들······ 몰살당할 거예요.”

“그렇습니까······.”


드카네스는 한숨을 토해냈다. 모두의 미래를 짊어진 무게가 여실히 느껴지는 무거운 한숨이었다.



“이스피리아 님께선 저희가 어찌하였으면 좋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저라고 딱히 답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라. 당신들의 사정도 모르고.”

“그렇지요······.”


리아는 고개를 떨군 드카네스를 잠시 보다가 말했다.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볼게요. 오거가 어째서 여기에 있죠? 숲의 민족인 당신들이 구태여 익숙하지도 않은 마족의 마을에서 거주하는 연유가 있을까요?”

“확실히 저희는 대해의 북쪽, 깊은 숲속에서 풍족하진 않아도 평온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민 전원이 이주했다······. 보통 일이 아니었나 봐요?”


드네카스는 잠시 숨을 골랐다.



“아실지 모르오나, 대해는 딱히 세력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껏 있더라도 일정 지역을 차지한 소규모 군락이 전부지요. 이러한 구도는 여태 변함이 없었고, 서로에게 관여도 하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아니게 됐다?”

“예. 새로운 세력이 출몰하였습니다. 대해의 서쪽 부근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으며 본인의 존재를 알렸죠.”

“응······?”


나트알도 대해의 서쪽에 있다. 근처라면 필시 기척을 알았을 터다. 저 큰 대해의 북쪽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면 분명히.


하지만 그런 기운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묘하네. 그 근방이라면······ 내가 모를 턱이 없을 텐데? 주변의 경계는 확실히 했으니까.”

“저, 실례이오나, 이스피리아 님의 거주지는 혹시······?”

“방금 말씀하신 대해의 서쪽 부근이에요. 그곳의 작은 마을에서 가족과 지내고 있어요.”

“아아. 그렇게 된 것이었군요······.”


드카네스가 그리 말하는 것과 동시에, 에르 또한 사정을 알았다는 듯한 기색을 발하였다.


쳐다보니 눈을 깜박이는 것으로 대답한 에르가 드카네스에게 물었다.



“그 기운을 느낀 게 언제쯤이지?”

“정확한 시기는 애매합니다만, 아마 3년이 다 되어갈 겁니다.”

“확실하겠군.”

“뭐가요?”

“저 녀석이 느꼈다는 기운 말이야.”

“오. 역시 에르. 그래서 누구인데요?”

“우리야······.”

“에엥? 저희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근처에 사는 거라면 한 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뜻밖에 대답에 리아는 어안이벙벙해졌다.



“떠올려 봐. 3년 전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때라면 아마······ 바지탄스 씨들이 오실 때였죠?”

“맞아. 그리고?”

“그리고······? 아! 마력을 방출했었어요!”


분명 마력을 방출하긴 했었다. 시에르보―― 사슴 씨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


에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배고픔으로 인해 신경이 곤두선 바지탄스들에게 강대한 살기와 함께 그 방대한 마력을 흩뿌렸었다.


퍼즐이 맞춰졌다.


당시에는 마력을 잘 제어할 수 없는 탓에 저지른 실수이기도 했으나, 마력의 확산이 그리 넓게 되는지 몰랐었다. 그래서 여태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었는데······ 그 일이 이렇게 이어질 줄은 정말 상상치도 못했다.


리아는 무심코 이마를 짚었다.



“사람 일은 모른다지만 이게 이렇게 되네······.”

“리아.”

“아아. 괜찮아요. 좀 놀랐을 뿐이에요.”


짧게 숨을 내쉰 리아는 시선을 드카네스에게로 옮겼다.



“이래저래 헛걸음하시게 됐네요. 대해를 벗어나는 대장정이었는데.”

“아니옵니다. 정체를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지 않습니까? 이스피리아 님과 세계의 관리자님을 뵙게 된 것만으로도 이곳에 온 가치는 충분했사옵니다.”

“그리 말해주시는 건 고맙지만······ 평범하게 대해 주셨으면 하네요. 에르도.”

“찬크에르면 된다.”

“알겠사옵니다.”


드카네스는 조용히 머리를 숙여 예를 보였다.



“그래서 결정은 하셨나요?”

“결단이 섰습니다. 저흰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사옵니다.”

“좋은 선택이에요. ······아아. 세력이니 영토니, 이쪽은 전혀 관심 없으니까 염려하지 말고 편안히 지내세요.”

“예. 배려해 주셔서 감사드리옵니다.”


드카네스는 정중히 예를 표했다.



“후우~ 그러면, 이 건은 이걸로 끝인가?”

《이제 돌아가는 거냐?》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함을 풀고 있으려니 페리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리아는 그런 페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네. 이제 돌아가도록 하죠. 나름 즐거운 여정이었네요.”

《즐겁기는······. 지루하기만 했다.》

“어차피 돌아가서도 잠만 잘 거면서. 모처럼 운동도 하고 좋았잖아요.”

《뭐, 돌아다니는 맛은 좀 있었다.》

“그렇죠?”


땍땍거리지만 역시나 조금 재미있긴 했나 보다.


왠지 귀엽다는 생각이 든 리아는 페리의 머리를 헝클이는 것처럼 양손으로 마구 쓰다듬었다.


귀찮아졌는지 페리는 훌쩍 도망치듯 거리를 벌렸다.


리아는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돌아가도록 하죠. 드카네스 씨는?”

“저희도 곧장 짐을 꾸려 출발하도록 하겠사옵니다.”

“음······. 생각해 보니 저흰 여러분이 떠난 다음에 출발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연락을 받은 마왕이 곧장 날아오면 곤란할 수도 있을 테고.”


어쩌면 이들이 이베시온을 공격한 주범이라 착각하여 공격할지도 모를 일이다. 레비아에 따르면, 습격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바지탄스들이 전부이니······.


‘레비아와 비등한 수준만 되더라도 오거들을 몰살하는 건 손쉽겠지.’


전후 사정을 아는 자가 있다면 만약의 사태에도 원만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드카네스들이 모두 떠난 뒤에 돌아가는 게 여러모로 좋아 보인다.



“아가씨, 잠시 괜찮겠습니까?”


열심히 고민하고 있자니 바지탄스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인가요?”

“남는다는 것 말입니다. 그 역할을 저희가 수행해도 되겠습니까?”

“저희만 먼저 돌아가라고요?”

“그렇습니다. 저흰 저자들을 보낸 뒤 주민들의 주검을 수습하고자 합니다.”

“아! 마, 맞네요. 죄, 죄송해요. 깜빡 잊고 있었어요.”

“후후. 사과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저희가 할 일이지 않습니까? 마음 쓰시지 말고, 아가씨는 먼저 돌아가 계십시오.”

“어떻게 그래요! 도와드릴게요!”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힘든 일도 아니니. 게다가······ 다녀올 곳도 있습니다.”

“다녀올 곳이요?”

“마왕성입니다.”

“아아. 보고를 하고 싶다 하셨었죠······.”

“예.”


확실히 예전에 분명 그러한 부탁을 했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이제야 마국으로 오게 됐지만.


허락은 당연했다. 오히려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생긴다.


하지만 조금 우려되니······



“폴스.”


근처 벽면에서 대기하던 폴스는 단숨에 [그림자 이동]으로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



“하명하십시오!”

“그런 거창한 게 아니란다. 그저 바지탄스 씨들과 함께 가주었으면 하는 거야.”

“곤경에 처하거든 도움을 주란 말씀이군요.”

“응. 폴스가 있으면 볼일을 다 보고 돌아오기도 편하잖아.”

“알겠습니다. 이 폴스, 리아 님께서 하달하신 임무를 완벽히 수행할 것을 감히 약조합니다!”

“너, 너무 부담 갖진 말고······. 느긋하게, 관광 다녀온다는 느낌으로 하렴.”

“존명!”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하는 폴스.


솔직히 미안하면서도 조금 불안하다. 하지만 달리 적임자가 없으니 믿고 맡겨야겠지······.



“다들, 이만 돌아가죠.”

“모시겠습니다.”

“응. 부탁해.”

“예!”


돌아가는 거야 사실 에르가 [그림자 이동]을 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모처럼 나선 퍼스트의 성의를 보아 그에게 맡기기로 했다.



“여러분,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드네카스 씨도······. 평온한 귀향길이 되시길 바랄게요.”


인사를 마치고, 퍼스트는 곧장 공간 이동 마법을 발동했다.


한순간 공간이 일렁였다. 그것이 가라앉았자 곧이어 익숙한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리아······?”


도착한 곳은 2층으로 증축된 집 앞으로, 이제 막 집으로 들어가려던 필리아가 문고리를 잡은 채 눈을 깜빡였다.



“다녀왔어요, 어머니.”

“어······ 아. 어서 오렴.”


딸의 인사에 정신을 차린 필리아는 미소 지었다.


필리아가 다가오자, 에르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다녀왔다며 인사했다.



“생각보단 일찍 왔구나.”

“날아갔으니까요.”

“그래. 별일은 없었고? 아까 네 마력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굉음과 함께 난리도 아니었는데.”

“네. 큰일은 아니었어요.”


부모의 촉이 발동했나, 필리아가 잔뜩 의심스럽다는 듯한 시선을 보낸다.


안타깝게도 전혀 믿음이 없다. 필리아는 반드시 무언가를 저질렀다고 확정하고 있었다.


‘그만한 소동이었으니 어쩔 수 없으려나?’


천방지축 취급은 불만이지만 납득하고 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리아, 너······.”


돌연 필리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리고······


툭툭.


작은 물방울이 땅으로 떨어진다.


뭔가 했더니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마치 수도꼭지가 열린 것처럼······ 멈출 기세도 없이 흘러넘친다.



“하하······. 이것 참······. 이리도 애틋했으면 그냥 보고 가지 그랬어. 뭐라 할 사람도 없는데 말이야······.”

“리아야······.”

“괜찮아요.”


아니. 전혀 괜찮지 않다. 막 눈을 떴을 때처럼 복잡한 감정들이 들끓어 당장이라도 엉엉 울어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참고, 리아는 대충 눈가를 닦아냈다.


그 모습을 차마 보기 힘든지 에르의 눈썹이 움찔거린다. 아마 제대로 닦아주고 싶은 것이리라.


그러나 지금은 괜한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물론 그런다고 필리아의 얼굴이 펴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 아버지랑 다른 분들은요?”

“다들 알아서들 쉬고 있지 않으려나? 불러 모아 줄까?”

“네. 소개하고 싶은 분이 있거든요.”


본인 이야기인 것을 안 레비아는 잔뜩 긴장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리아를 잠시 걱정스럽게 보던 필리아는 시선을 돌렸다.



“귀여운 아이구나. 하지만 이 기운은······. 게다가······”


말을 끈 필리아는 차분히 주위를 둘러봤다.



“폴스랑 바지탄스 씨들이 없구나. 처음 보는 분도 계시고.”


필리아의 시선을 받은 퍼스트는 기사다운 태도로 아주 정중하게 묵례했다.



“그것도 포함해서 이야기하려고요.”

“그래. 가자꾸나.”


필리아는 리아를 번쩍, 가볍게 안아 올렸다. 리아는 놀라면서도 미소로 그녀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한동안 조용히 걷다 리아는 말했다.



“저기, 어머니······.”

“응?”

“오대신들 말이에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생각하다니?”

“다음에 보면 한 대 쥐어박을 예정이거든요.”

“신을?”


발상이 신선했나, 필리아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어이없는 소리겠지. 하지만 그녀는 결코 비웃거나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진지하게 들어주며, 애정이 담긴 눈매로 따스하게 바라본다.



“딸이 그리 하고 싶은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이 엄마는 응원한단다.”

“감사한데, 그래도 될까요······?”

“솔직히 신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잘 공감이 안 되는구나.”


‘뭐, 그건 그렇겠지.’


신이 실존한다는 것을 다 아는 이 세계에서도 정작 신에 대해 아는 건 전무. 직접 대면한 자도 극소수인지라 지구와 다를 바 없이 뜬구름 잡는 존재였다. 그저 있다는 것만 명확할 뿐.



“하지만 엄마는 별로 따지고 들 마음이 없구나. 타인에겐 무관심한 네가 그러는 거잖니? 다 이유가 있겠지.”

“어······ 저, 그렇게나 남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나요?”

“겉으로는 사교성도 좋고 명랑하지. 하지만 부모잖니. 딸이 어떤지 정도는 보면 알아.”


그리 말하며 필리아는 찡긋, 윙크했다.


리아는 제법 놀랐다.


확실히 타고난 성품 자체가 타인에게 무심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생에서의 이야기. 현생은 육체의 영향 탓인지 감격의 기복도 크고, 전생과는 여러모로 다른 부분이 많아 꽤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여태 그런 줄 알았는데······ 실상은 별 차이가 없었나 보다.



“이제 와 말하지만, 정말 누굴 닮아서 그런지 살짝 걱정도 했었단다.”

“그, 그랬었군요.”

“그래도 아끼는 사람에겐 지극 정성이잖니. 이 엄마를 닮은 거지.”


그리 말한 필리아는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엄마도 아빠 외에는 달리 무관심했었단다? 덕분에 마을 어르신들과 아버지한테 매일 한소리씩 듣고는 했었어.”

“어머니가요?”

“후후. 그래.”


그 필리아가 에이브안에게 잔소리를 듣다니······.


전혀 상상이 안 된다. 오히려 그랬는데 어쩌다가 입장이 역전되었는지 도리어 궁금하다. 마을 주민들과도 무척이나 친하게 잘 지내고.


사람 일은 모른다지만, 진짜 뭘 어떻게 하면 그리될 수 있는 건지······.



“엄마도 많이 어렸던 거지. 하지만 리아를 배고 나서 좀 달라졌단다.”

“저요?”

“딸에게 부끄러운 엄마가 될 순 없잖니. 리아도 그렇지 않니? 아이리스에게 자랑스러운 엄마로 있고 싶잖아.”

“당연하죠!”

“그래. 그런 딸이니까 엄마랑 아빠는 믿고 지켜보기로 했단다.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지. 아이리스를 품으면서 급격히 의젓해지더라. 물론 이 엄마랑 닮았으니 당연하겠지만.”

“저도 달라지긴 했군요······.”

“주변을 둘러보렴. 안 달라졌다면 네 주위에 이렇게나 널 아껴주는 분들이 있었겠니? 그러니까, 마음먹었다면 망설이지 말렴.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너와 네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최선을 다하려무나.”

“네.”


이러한 어머니가 또 있을까.


너무나 고맙고 자랑스러웠던 리아는 엄마를 꼬옥 끌어안았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묘한 상황이 골머리를 아프게 한다. 게다가 하얀 악몽이 남긴 여러 지식들 때문에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다.


모두 잘 해낼 수 있을지 불현듯 걱정된다.


무엇보다 하얀 악몽······. 그녀가 패배하여 죽었다는 게 리아의 가슴을 술렁이게 했다.


그만큼 하얀 악몽은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느끼기로는 이미 에르와도 필적할 수준. 완력과 지력 모두 그날의 컨디션이라든가, 예기치 못한 트러블로 승부가 갈릴 수 있을 정도의 박빙이었다.


아니. 완력만큼은 에아에실이라는―― 정녕 검인지조차도 모를, 전혀 해석이 안 되는 엄청난 검을 갖고 있는 점에서 되려 하얀 악몽 쪽에 손이 들린다.


그만한 하얀 악몽이―― 이미 세계마저 제패했다는 그녀가 졌다는 것이, 자신에게 차례가 넘어왔다는 것이 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방금까지는······.


분명 그러했는데, 그 고민이 필리아의 품에 안기니 언제 그랬냐는 듯 눈 녹듯 말끔히 사라졌다.


진짜 괜한 고뇌를 했다. 믿고 맡겨준, 홀가분하게 떠나간 하얀 악몽에게도 면목이 없을 지경이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는데 말이다.



“그래. 누가 됐든 건드리면 배로 되갚아 줄 뿐이야.”


작게 중얼거린 리아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차갑고 냉혹하게 빛나는 눈은 하얀 악몽을 닮아있었다.













“그러면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리아 님.”


늦은 밤. 은은히 내리쬐는 달빛 아래에서 퍼스트는 자신의 주인에게 깍듯이 예를 갖춰 머리를 숙였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웠어. 음식은 입에 맞았니? 너무 붙든 게 아닌가 싶네.”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이 퍼스트, 리아 님과 한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함께 식사하는 영광마저 누리어 더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찰나였지만 퍼스트의 눈썹이 애처롭게 밑으로 떨어졌다.


정말 아쉬웠다. 리아의 소개에 매우 친근히 반겨주는 주민들도 그러했지만, 무엇보다 리아와 한 테이블에 앉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매 순간이 황홀했었다.


음식 또한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었지만, 그것조차도 잘 모를 만큼 감동에 젖었었다.


다시금 떠올리니 무심코 넋을 놓아 버릴 것만 같다.


[기억 공유]를 영 내키지 않아 했던 폴스의 기분마저도 조금 공감이 된다.


과연 꺼려지긴 한다. 제아무리 동료라 할지라도 그러했다. 리아와의 추억을 나눈다는 게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폴스에겐 미안한 짓을 했군. 그래도 폴스는 특성상 리아 님과의 추억을 재차 쌓아갈 기회가 찾아오겠지······.’


부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다. 그러나 각자 주어진 역할이 있기에 불만 따윈 없다. 게다가 리아라면 넘버즈 모두를 아껴줄 것임을 알기에 질투심 따윈 생겨나지 않는다.


솔직히 아예 없다고는 못할 거다. 하지만 따져 물을 녀석은 넘버즈에 없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럼, 리아 님.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응. 무슨 일이 있거든 연락하고, 혹여 심심하다 싶으면 아무 때나 놀러 와. 모두에게 말해둘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른 넘버즈들도 편히 오라고 해줘.”

“예. 꼭 전해주겠습니다.”


이미 최상의 예를 보이고 있었던 퍼스트는 무릎을 꿇은 그 상태로 인사하고는 [전이]를 발동했다.


시야가 일렁이고, 이내 가라앉았을 때는 수백 km 떨어진 어느 방 안이었다.


그곳은 리카드가 마련해준 교직원 숙직실로, 퍼스트는 천천히 일어나며 낯익은 자신의 방을 둘러봤다.


실내는 갖가지 가구가 배치되어 있어 제법 사람이 사는 분위기가 흐른다.


당연히 퍼스트가 준비한 건 아니다. 초월자에 이른 퍼스트에게는 어느 하나 필요 없다. 단지 혹여 리아가 찾아오면 기겁할 수도 있다며 폴스가 제작하여 멋대로 놓았을 뿐이다.


당시에는 기껏 만든 노고를 생각하여 두었는데, 이렇게 바라보니 나름 나쁘지 않다. 폴스의 의견도 제법 일리가 있고.



“침입자는······ 없군.”


물건의 흐트러짐, 마력의 잔향 등 떠나기 전과 다름없다.


처음 이 방에 배정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상당한 침입자가 들락거렸었다.


제 딴에는 리아의 정보를 모으려 한 것이었겠지만, 실로 어수룩하기 짝이 없다. 도리어 퍼스트 쪽에서 역으로 정보를 받아갈 따름이었다.


그것도 옛일. 현재는 거의 침입하는 녀석이 없다. 이따금 방과 후 모임의 멤버가 물으려 찾아오는 정도랄까.


아마 더 이상 이쪽에 신경을 할애할 여유가 없는 것이겠지.


확인을 마친 퍼스트는 [염화]를 발동했다.



『모두 들리나? 다녀왔다.』

『오오! 왔다, 왔어! 기다렸다구!』


답한 건 세컨드로, 가장 먼저 [염화]를 수락하는가 싶더니 꽤 흥분해 있다.



『무슨 일이었어? 세상이 질겁하던데?』

『리아 님이 하신 것 말고 뭐가 더 있지?』

『사도인 우리가 설마 그걸 모를까? 그게 아니라 경위를 묻는 거잖아. 경위!』


가슴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다른 자들도 대답은 없었으나 답답하다는 감정이 전해진다.


그만큼 다들 알고 싶다는 거겠지.


충분히 심정이 공감된다.


리아에 의해 창조된 넘버즈에게 불가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일이 가능했으며, 알고 싶은 게 있으면 그 즉시―― 그곳이 어디라 할지라도 꿰뚫어 볼 수가 있다.


마력레벨은 겨우 초월자에 이르렀으나, 리아에게 주어진 능력은 그 끝을 모른다. 마력의 절대량쯤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절대자급이다.


이 세계 전체로 보더라도 비등한 존재라고는 기껏 해 봐야 용왕이나 정령쯤이 전부다.


하지만 이러한 넘버즈라도 창조주, 리아만큼은 예외다.


리아를 꿰뚫어 본다는 것은 어불성설. 멀리서 지켜보는 것조차도 감히 할 수 없으며, 세상의 진리를 모두 깨우친 그 눈부신 지모에는 발치도 다다르지 못했다.


그러하니 사도임에도 정작 리아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아니, 애초에 파악하려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주제를 모르고 불속에 뛰어드는 나방과도 같다. 그러나 리아의 뜻을 이해하려는 것을 멈추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리아의 사도이기에······.



『다들 알고 있겠지만, 리아 님의 뜻을 억측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당연하지.』


세컨드를 시작으로 다들 이구동성으로 그렇다고 외쳤다.


퍼스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 리아 님은 너무 똑똑하셔서 솔직히 따라가기가 좀 벅차.』

『나도 세컨드에게 동의! 천재 중의 천재이신지라, 설명에 생략하시는 것이 많아서 가끔 제대로 이해한 건지 불안할 때가 있어.』

『그런가? 리아 님아는 꽤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 아냐?』

『아앙?! 리아 님의 말씀 속에는 수만 가지의 의도가 담겨있거든?! 네가 근육 대머리라서 이해를 못 할 뿐. 아니면, 리아 님이 어중이떠중이랑 같다는 소리야?!』

『허, 참. 너무 말 같지 않은 소린 하지 마, 세컨드. 그냥 해 본 말이니까. 하지만······ 이해 못 한다는 건 맞긴 해. 난 리아 님아가 무얼 바라는지, 무얼 하고 싶은지 전혀 감이 안 잡히네. 뭔가 종잡을 수 없달까?』

『뭐어······ 그건 어쩔 수 없겠지.』

『리아 님께선 워낙 자신의 바람을 말씀하시지 않으시니까요. 저희에게도 무척 간단한 일만 시키시고요.』

『그것조차도 다 뜻이 있으시겠지만······ 정말 리아 님은 뭘 어떻게 하고 싶으신 걸까?』

『자자. 다들 진정하도록.』


퍼스트는 과열되는 대화를 막고는 모두를 집중시켰다.



『모두가 염려하듯 나 또한 리아 님의 뜻을 억측하지 않으려 조심스럽다. 그러니 지금 해줄 이야기도 어떠한 보탬도 없는, 순수한 객관적인 사실만을 말한다는 것을 알린다.』


서두를 뗀 퍼스트는 이베시온에서 있었던 일을 선언한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요약하여 말해주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들은 넘버즈들은 한동안 깊은 고뇌에 빠졌다.



『흠······. 잘 모르겠네. 구태여 하얀 악몽을 그 신체에 강림시킬 연유가 있으셨나? 제법―― 아니, 우리랑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긴 했지만.』

『그러게. 다른 미래의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리아 님은 리아 님인지라 꽤 강하긴 했어. 묘한 검도 가졌었고.』

『말이 나온 김에, 에아에실이란 검은 어떻습니까? 정말 그만한 검이었나요?』

『정말 세계를 소재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담긴 힘이 진짜 어마어마하더라. 피프스도 실제로 보면 까무러칠걸? 용케도 검의 형태로 담겨 있구나 싶더라니까.』

『대략적으로 환산하자면요?』

『글쎄. 아마······ 못해도 찬크에르레이의 15배쯤?』

『그 정도라면······ 정말 세상을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응. 말하는 태도도 그렇고, 어쩌면 진짜일지도? 하지만 대단한 건 하얀 악몽 쪽이지. 그걸 멀쩡히 다룰 수 있으니까. 보통이라면 잡자마자 영혼까지 가루가 되어버릴걸?』

『――잠깐. 이야기가 너무 세는데? 중요한 건 그쪽이 아니잖아?』


살짝 짜증이 담긴 서드의 말이 울린다.


매사 대충인―― 그리 인격이 구성된 서드지만, 그의 리아에 대한 충성심은 나무랄 곳이 없다. 오히려 보이는 것과 달리, 다른 넘버즈보다도 융통성이 없는 게 서드다.


그런 그에게 리아 이외의 이야기는 관심 밖. 짜증을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같은 사도로서 이런 서드의 성향을 잘 아는 모두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서드는 조용해진 분위기를 잠자코 지켜보다가 말했다.



『일단 정리하자면, 하얀 악몽의 강림은 리아 님아가 무언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이 정도로 요약하면 되겠지, 퍼스트?』

『그렇다. 내 개인적인 주관으로도 그리 판단된다. 굳이 본인보다 월등히 약한 존재를 불러낼 이유는 없으니.』

『그럼, 다음 이야기다. 리아 님아가 새로운 권속을 받아들이셨다. 온전히 리아 님아의 영향만을 받은 진정한 권속이지. 혹여 이의가 있나?』

『있을 리가 없잖아?! 마초 대머리!』

『리아 님의 뜻이야말로 우리의 뜻입니다.』


피프스의 말에 세컨드가 격하게 동의하는 감정을 흘렸다.



『레비아와도 다 말해뒀으니 편하게 대해 주면 돼.』

『잠깐, 폴스! 그까짓 것―― 이라고 하면 안 되겠지. 흠흠. 어쨌든, 설마 걔랑 우리가 동급이라는 식으로 말하진 않았겠지?』

『응? 어떻게 동급이 돼? 우린 머리부터 발끝까지 리아 님에게 창조됐는데. 재활용이랑은 엄연히 다르잖아?』

『흐음. 잘 알고 있네.』

『당연하지. 리아 님을 대할 때의 태도도 확실히 교육해 놓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살짝 모자람은 있긴 하지만······ 그 부분은 윗사람으로서 다들 친절히 가르쳐 줘.』

『이러나저러나 정식으로 리아 님의 권속이 되었다면 다음 정기 회의부터는 참가시켜도 되지 않을까요?』

『나쁘진 않네. 살짝 궁금하기도 하고.』


퍼스트도 속으로 동의했다.


솔직히 급이 맞지 않는―― 리아에게 창조되지 않은 자가 끼는 건 거슬렸다. 하지만 그래서는 후에 세력이 커졌을 때 문제가 벌어진다.


세력이 클면 클수록 의사소통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기에 못마땅하면서도 이후를 고려하여, 미리 연습한다는 느낌으로 레비아를 끼어도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명령 하달도 편할 테고.


다른 넘버즈도 비슷한 결론을 내고는 다음 회의에 레비아를 끼우자고 동의했다.


그리고 마지막, 본론이라고 할 수 있는 주제의 바턴은 퍼스트가 이어받았다.



『이제 리아 님의 발언이다. 모두 어찌 생각하는지 듣고 싶다.』


다들 꿀꺽 침을 삼켰다.


넘버즈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리아. 리아의 말은 신탁이며, 넘버즈의 존재의의 그 자체였다.


평소 경솔한 세컨드나 태평한 폴스마저도 이 순간만큼은 진지했다.


‘리아 님의 말씀이라······.’


간단하게 보면 말한 대로의 뜻이겠지만, 리아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무수한 모략과 지모를 담는 지략가다. 결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될 것이다.


함부로 주인의 의중을 파악하려 들어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지나치는 건 있을 수 없다.


단언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무지해서도 안 된다. 진정한 충정이란 답이 없음을 알면서도 주인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각자 진지하게 고민을 이어갔고, 가장 먼저 서드가 입을 열었다.



『나는 포기. 아까도 말했지만, 도저히 리아 님아의 뜻을 모르겠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오대신과 대척점에 서겠다는 것일 텐데, 그 리아 님아가 그리 단순할 리는 없잖아?』


반박조차 할 수 없는, 지극히 상식적인 의견에 다들 저마다 침음을 흘렸다.



『저기, 그냥 내 의견일 뿐이지만, 어쩌면 리아 님은 성지――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시려는 거 아냐?』


폴스의 말에 퍼스트의 뇌리가 번뜩였다.



『그런가?! 그런 것이로군!』

『갑자기 뭔데?』

『리아 님의 의향 말이다. 폴스의 말대로다. 리아 님께선 성지에서 편안히 지내시려는 거다.』

『퍼스트가 하는 말씀이니 분명 허튼소리는 아니겠지만······ 그리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말은 그렇지만 잔뜩 의구심을 품는 피프스.


그녀를 따라 폴스를 뺀 전원이 살짝 의심스럽다는 기색을 풍겼다.



『모두의 기분은 이해한다. 구태여 우리들을 만들고, 동시에 여러 일을 진행하시는 리아 님을 보노라면 필시 의아할 테지. 하지만 오거의 점술사에게 리아 님은 이리 말하셨다. 영토의 야욕은 없다고······.』

『세계를 본인의 발아래에 두길 원치 않으신다고?』

『하긴. 세계 정복쯤은 우리만으로도 쉽잖아? 리아 님아치고는 멀리 돌아간다는 느낌이긴 했어.』

『그러면 이 모든 게 리아 님께서 편히 지내시기 위한 밑거름이었다는 말씀인지요?』


보이진 않겠지만 퍼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리아 님께서는 이리 말씀하셨다. “누가 됐든 건드리면 배로 되갚아 줄 뿐이야.”라고.』

『아아. 그런 거야?』


서드를 시작으로 하나둘 말뜻을 이해했다. 물류를 장악하고 정계에 영향력을 점차 넓히는―― 꼼꼼히 뒷세계에도 영향력을 확장해 나가는 이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큰 계획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리아의―― 지고의 주인의 뜻을 드디어 알게된 넘버즈들은 환희하였다.


의욕적인 모습들이 보기 좋다.


그리 생각하며 퍼스트는 만족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리아 님이 바라시는 건 이 세계. 지상 따위가 아니다. 오엘문리아라는 세계 자체를 원하시는 거다. 당신의 적 따윈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위해······!』


더는 벅차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던 넘버즈들은 외쳤다.



『우리의 주인이신 리아 님께 이 세계를!』

『본디 세계는 리아 님아의 것. 정당한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이 순리지.』

『이 몸을 바쳐 리아 님께 세계를 바치겠습니다!』

『지고하신 리아 님께서 이 비루한 세계를 통치하신다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흉흉한 기운이 휘몰아친다.


다들 생각이 없는 건 아니기에 결계를 쳐놨을 테지만, 혹여 그게 없었더라면 근방 일대에는 사망자가 속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제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제1 사도, 퍼스트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도 쉽사리 진정하지 못하고 한동안 투지를 내뿜었다.



『피프스의 말대로다. 리아 님께서 통치하는 세계란 실로 아름답겠지. 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난관이 있을 터다. 물론 우리라면 무난하게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리아 님의 구상안을 모르는 이상 신중해야만 한다.』

『당연하지. 우리의 하찮은 지혜로는 감히 리아 님께 닿지 않으니까.』

『리아 님아 본인도 굳이 멀리 돌아가는 귀찮음을 감내하고 있고.』

『그만큼 섬세한 계획이겠지?』

『하지만 차근차근 짚어가는 것이라면 저희도 충분히 리아 님의 손발이 될 수 있습니다.』

『음. 리아 님은 결코 다급하지 않다.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은 아주 손쉬움에도 처리해야 될 일을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계신다. 무척이나 평화롭게.』

『그렇다는 건······.』


의미심장한 세컨드의 말에 따라 전원의 시선은 어느 한 장소로 향하였다. 그곳은 마르티즈 후작 가의 별장으로, 넘버즈의 모두는 거리를 뛰어넘어 그곳에 있는 알렌나시안 후작을 바라보았다.


작가의말

-2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인사는 거기에서 자세히 하겠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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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216 +2 24.03.01 46 0 40쪽
254 215 +2 24.02.22 54 0 40쪽
253 214 +2 24.02.15 48 0 45쪽
252 213 +2 24.02.01 63 0 48쪽
251 212-2 +2 24.01.22 45 0 21쪽
250 212 +2 24.01.22 54 0 33쪽
249 211-2 +2 24.01.03 59 0 20쪽
248 211 +2 24.01.03 88 0 43쪽
247 210 +2 23.12.03 130 0 45쪽
246 209 +2 23.12.03 55 0 41쪽
245 208 +2 23.11.11 65 0 55쪽
244 207 +2 23.10.29 87 0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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