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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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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8.29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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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9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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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쪽

222

DUMMY

리아는 아이처럼 웃고 있는 레비아의 이마를 쓸어줬다.


어려진 모습에 어울리는 앳된 얼굴이 참 보기 좋다.


무언가 바쁜 척을 했지만, 사실 [부활]에 필요한 준비는 딱히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는데 밑 작업은 진작에 끝마친 상태였다.



“후후. 이 여가 애송이처럼 망설이다니. ······응?”


슬며시 옆으로 기척이 다가왔다.


무심코 쳐다본 리아의 눈이 커졌다.



“꾸꾸······.”

《누구냐, 그건? 이 몸은 페일테스다. 꾸꾸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녀석이 아니다.》

“아아. 미안하구나.”


페리가 크게 콧방귀를 뀌었다.


살짝 미소 지은 리아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페리의 목에 손을 둘렀다. 시선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천천히······ 온 마음을 담아 끌어안았다.


페리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는 피하지 않고 얌전히 있어 줬다.


무척이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리아는 삼켰다.


속에 응어리진 이것들은 모두 자신의 미숙함이 초래한 추태. 다른 세상이라 할지라도―― 설령 페리마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멋대로 짐을 덜기 위한 작태는 참을 수 없었다.


어떠한 변명을 하든, 페리가―― 꾸꾸가 죽은 건 온전히 미숙한 자신의 탓이었기에······.


그건 모두 자신이 안고 가야 할 짐이다.


대신, 당시에는 하지 못했던 말을 하기로 했다.



“고마웠단다, 꾸꾸여. 그대와 라프리트가 있어 준 덕에 여는 여로서 있을 수 있었다.”

《······꾸꾸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


까칠하지만 말 속에 배인 상냥함이 느껴진다.


페리 또한 여전했다. 새삼스럽지만 참으로 여러 인연에 복을 받았다고 느낀다.



“후후. 그랬었지. 용서해다오.”


몸을 일으킨 리아는 사죄의 의미로 재차 정성스레 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한동안 그런―― 전생에서는 그다지 겪지 못한, 온화한 한때를 보냈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금세 방해가 들어온 것이다.


리아는 힐끔 시선을 옮겼다. 페리도 동물적 감각으로 느끼고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린다.


바로 지근의 공간이 일렁인다. 공간 이동의 한 종류다.


굉장한 솜씨다. 상당히 공간을 다루는 것에 능한 상대로, 일렁임의 정도가 지극히 미미하다. 이만한 수준은 전생에서도 그리 없었다.


감탄하고 있으니 깔끔하게 열린 공간으로부터 낯익은 기운들이 흘러나왔다.


뒤이어 누군가가 튀어나오며 외쳤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몹시도 다급한, 간절함이 담긴 그 목소리는 매우 그리운 것이었다.


리아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그렇지만 눈을 감고는 차분히 말했다.



“못 본 사이에 꽤 행동력이 좋아졌구나. 설마 단숨에 이곳까지 올 줄은 미처 몰랐노라.”


리아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자꾸만 내빼서 말이죠. 머뭇거릴 틈이 없었습니다.”

“그거참 재난이로구나.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참 박정한 녀석이로다.”

“예. 정말로······.”


동의하는 말에는 힐난의 약간 기색이 담겨있었다. 그걸 네가 말하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인 리아는 느긋하게 몸을 돌렸다.


――스윽.


누구보다도 먼저 리아의 제1 사도, 퍼스트가 기사의 예를 취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가 리카드를 데려온 장본인이었다. 순간 거리를 좁힌 폴스도 그 옆에서 조용히 대기하였다.


둘 다 사뭇 진지하다.


하지만 저들이 예를 차리는 건 이쪽이 아니다. 퍼스트의 인사 또한 멋대로 행동한 사죄를 겸하는 것으로, 저건 그의 주인인 리아―― 지금은 잠들어 있는 그녀에게 향한 것이었다.


알아서 처리하겠지······.


리아는 그를 무시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정면으로 보이는 것은 아주 그리운 얼굴―― 어떠한 상처도 없이 깨끗한 모습의 그였다.


······반갑다.


이것이 리아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저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눈가가 느슨하게 풀릴 만큼 매우 반가웠다.


의식하지 않았지만 나오는 말 또한 다정했다.



“오랜만이노라, 리카드여.”

“예. 세월을 따지긴 뭐하지만 근 300년만입니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이스피리아 양.”

“무탈했겠나? 지금 이 만남이 성사됐거늘?”

“후후. 확실히.”

“······몸은 좀 괜찮나?”

“예. 덕분에.”

“음. 안경을 안 끼니 신수가 훤하구먼.”

“······감사합니다.”


북받쳐 오른 듯 리카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피식 웃은 리아는 시선을 그의 옆으로 옮겼다. 거기에는 그의 약혼녀, 세리오가 있었다.


레비아와의 일전은 적청과 백의 세계를 넘나드는 것이었다. 화려한 것 대비 전투를 벌인 시간 자체는 짧다. 아마 채 5분이 지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즉, 리카드는 이쪽의 마력을 느낀 순간에 곧장 이곳을 향했다는 것이 된다.


얼마나 절박했는지 훤하다. 그러니 걱정이 된 세리오가 따라온 것이겠고, 그 간절함이 리아 외에는 절대 따르지 않을 저 퍼스트를 움직일 수 있었겠지······.



“모처럼이지만 여는 지금 할 일이 있다. 대화는 잠시 후에 나누도록 하자꾸나.”

“······.”

“그대가 아는 누군가와 달리, 여는 도망치거나 하지 않는다. 정 그리 걱정되면 이리 와서 여의 강의를 듣거라.”

“강의······ 말입니까?”

“들어서 손해는 없을 것이다. 어디에서도 듣지 못할 내용이라 자부하니. 거기―― 그대들도. 쫄래쫄래, 성가시게 구는 것이 아니다. 관심이 동하거든 당당히 여의 곁으로 오라.”


방금 막 어마어마한 격전을 벌인 리아였다. 하물며 어투마저도 강압적인 것도 모자라, 패기마저 내뿜고 있다.


물론 의식적으로 한 건 아니다. 리아에게는 이 상태가 지극히도 편한 평시였다.


하지만 본인만 모를 뿐, 세계를 손에 넣었던 패왕의 위압감은 실로 대단히도 엄청났다. 마치 만인을 발아래에 꿇리는 듯한 그러한 압력이다. 덕분에 다들 선뜻 나서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기껏 이 여가 친절을 베풀었건만······.’


리아는 가볍게 혀를 찼다.


맨날 보아왔던 광경인지라 별로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도리어 그리움마저 느낄 만큼 친숙한 모습인지라 살짝 웃음도 나왔다. 혀를 찬 것은 이 감정을 살짝 숨길 요량이기도 했다.


가볍게 숨을 내뱉은 리아는 몸을 돌렸다.



“――그래서 뭘 한다고? 아까는 오지 말라더니 이젠 다 오라고 하네.”

“······.”

“뭘 그런 눈으로 보는데?”

“아니······.”


거하게 미간을 찌푸리는 루데릭.


당연한 것처럼 곁으로 온 찬크에르는 그렇다고 친다. 그러나 일말의 주저도 없이 곧장 다가온 그는 너무나도 예상 밖이었다.


그 격전을 분명 보고 느꼈을 텐데······.


――딱.


루데릭이 가볍게 리아의 이마를 때렸다.


불의의 일격에 리아는 이마에 손을 올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의 세계를 손쉽게 넘나드는 리아에겐 피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전생에서도 제대로 일격을 허용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그러나 살기가 아예 없는, 이토록이나 상냥한 일격은 너무나도 생소했기에 순간 넋을 놓아버렸다.


피식 웃은 루데릭이 리아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세상 어디에 동생을 무서워하는 오빠가 있냐?”


아니. 그러한 오빠는 세상에 넘치고 찼다.


수백 년 동안 세계를 둘러보았기에 단언할 수 있다. 하물며 피조차 이어지지 않은 의남매라면 말할 것도 없다. 믿게 만든 뒤에 통수치는 일은 너무 흔했었다.


그런데······ 아무 반박도 못 하겠다.


한 점의 흐림도 없이 맑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니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하······. 여의 오라비는 굉장한 사내였군.”

“너만 할까. 그리고 똑바로 봐라.”


휙.


루데릭이 쓰다듬던 리아의 머리를 잡아 방향을 돌렸다. 그곳에는 라프리트를 비롯하여 세스타스, 그리고 최근에 리아의 동생이 된 그녀들과 리아의 심복인 바지탄스들이 있었다.


기척으로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잔뜩 화난 것 같은 라프리트나, 잔뜩 심각한 리카드, 울 것 같으면서도 의젓하게 바라보는 로즈린느,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은 세스타스와 눈을 반짝이는 프리에나, 굳건한 의지가 담긴 눈빛으로 직시하는 바지탄스들 등등―― 각양각색의 얼굴들을 마주하니 많은 생각이 든다.



“그래······. 이것이 리아가 만든, 바라는 미래인가. 확실히 여와 같으면서도 다르구나······.”

“청승은 그만 떨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해둬.”

“그리하지, 오라비여. 하나, 지금은 여의 일이 우선이다.”


힐끔 레비아를 쳐다본 루데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울리지 않지만, 여전히 타인을 잘 배려한다. 그 모습이 재차 반가우면서도, 역시 다부진 얼굴을 보니 좀 낯설기는 하다.


살짝 감상에 젖었지만, 리아는 한순간에 패왕으로 돌아와 말했다.



“서두른다. 설명은 한 번뿐이니 관심 있다면 새겨듣도록.”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리카드와 라프리트였다. 둘은 찬크에르와 루데릭을 밀치고 양옆을 파고들어 와 자리를 꿰찼다.


어이가 없던지 루데릭은 콧방귀를 끼었다. 그렇지만 그 무거운 마음을 느끼고는 별말 없이 비켜줬다. 찬크에르 또한 너그러이 아내의 옆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페리도 코웃음 치며 슬쩍 빠져줬다.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리아의 주변을―― 레비아의 시신이 놓인 단상을 둘러쌓았다. 리아의 사도들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서 지켜보았다.


모두를 둘러본 리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여가 알려줄 것은 이 세계의 구조다.”


돌연 거대한 스케일의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몇몇이 멍해졌다. 그 선두는 당연히 로즈린느였다.


일일이 맞춰 주기엔 시간이 아까웠던 리아는 낙오생은 놔두고 말을 이었다.


어차피 진정한 목적은 리아―― 잠들어 있는 그녀를 가르치는 것. 나머지는 솔직히 아무래도 상관없는 덤이다.



“다들 알다시피 이 오엘문리아는 각각 생명, 지혜, 운명, 조화, 허무를 관장하는 다섯의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허무······ 입니까?”


학자의 눈이 된 리카드에게 리아는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무신이라는 게 틀린 명칭은 아니다. 본인들도 그리 부르고. 하지만 무한의 힘이 향하는 최종 종착지는 공허―― 그 본질은 허무다. 무신이기에 허무가 아니다. 허무이기에 무신인 것이다.”

“······.”

“뭐, 어려운 이야기는 넘어가지. 중요한 것도 아니고.”


곁눈질로 둘러보니 역시랄까, 찬크에르는 이미 아는 것 같았다. 괜히 신들에 의해 태어난 게 아닌 듯하다.


다른 자들은 전멸이다. 리카드와 라프리트, 그리고 그녀의 머리에 올라탄 히야신스 정도가 얼추 이해한 것에 그쳤다.


똑똑한 그들이 저러니 리아는 아예 이해조차 못 할 수도 있다.


조금 걱정된다. 자기 자신을 아는지라 더욱이······.


‘흐음.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보호자도 있고 하니.’


여차하면 그들이 리아를 도와주리라.



“이어 말하자면, 오엘문리아는 이들······ 소위 오대신이라 불리는 신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지. 그리고 그들은 지상이라 불리게 된 이곳에 관리자를 두었다.”

“직접 하지 않고?”

“세상은 생각보다 정교하다, 오라비여. 신들의 힘은 방대하니 차라리 손대지 않느니만 못할 거다. 마음에 안 든다고 이것저것 건들면 엉망진창이 되겠지. 게다가 일일이 관리하기란 아무래도 귀찮지 않겠나?”

“그걸 말이라고······.”


루데릭은 어이없다는 눈이 됐다.


리아는 애써 무시하고 이어 말했다.



“어쨌거나 관리자인 그들은 이 세계에 최초로 탄생한 존재―― 태초의 반신이다.”


상식적으로 세계 규모라면 관리자도 반신 정도가 아니고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다만, 그 반신이 누구인지는 생략하기로 했다. 이미 리아는 다 아는 내용이니. 놀라는 이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다가는 날이 샌다. 안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고.



“반신인 관리자들의 돌봄 아래 지상에는 과실이 여물기 시작했다. 물론 아득한 세월이 흘러 간신히 맺힌 생명이었겠지. 그리고 관리자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이윽고 지상에는 생명들로 넘실거리게 됐다. ――라는 게 창세기의 이야기다. 다들 한 번쯤은 들어는 봤을 터다.”

“대충은? 관리인이니 반신이니 하는 것은 처음 듣지만.”

“그래?”


루데릭의 말에 세스타스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응? 수인은 달라?”

“조금? 우리는 선조 ‘게헤르 엘’이 수인의 신이라는 전설이 있거든. 지금의 이야기와 조합해 보면······ 아마 그 태초의 반신이지 않을까 싶네.”

“에이. 아니겠지. 전설이라는 건 과장되기 마련이잖아.”

“――아니. 과장은 전혀 없노라. 게헤르 엘은 그 반신이 맞으니.”

“어? 진짜?”

“그러하다, 오라비여. 여는 직접 대면도 했었다.”

“헤에~ 역시 아직 살아있는 거구나.”


세스타스는 곧장 납득했다. 분명 ‘게헤르 엘의 부름’을―― 그자의 가호를 이끌어내는 그이기에 짐작하고 있었겠지.


애당초 게헤르 엘의 부름의 마력에는 개인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제아무리 반신이라지만 그런 게 남기고 간 것에 평생토록 유지될 리도 없으니, 사실 생사는 따질 것도 아니었다. ‘게헤르 엘의 부름’ 자체가 그 반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종의 [염화]이기도 하고······.


리아는 떠올려 보았다. 그 열혈스러운―― 현재는 불씨가 가라앉고 심지에 그 온기가 응축된 것 같은 사내를······.


‘그자는 확실히 번잡한 짓거리와는 연이 멀었었지.’


진중했던, 그래도 마냥 싫지만은 않았던 그를 떠올리며 리아는 입을 열었다.



“하여 본론이다. 여는 물론이고, 이 지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는 신의 축복을 받은 ――신의 자손이다.”

“······뭐?”


루데릭의 멍한 소리를 시작으로 다들 얼빠진 얼굴들이 됐다.


뒤를 이어, 타이밍을 맞춘 것처럼 모두가 동시에 눈이 동그래졌다. 이제야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은 것이다. 이해는 별개지만······.


다만, 전원이 그런 건 아니었다. 홀로 이색적인 안광을 빛내는 자가 있다.


그는 바로 리카드로, 수백 년이나 진보된, 그것도 실전 위주로 발전된 미래의 기억이 있는 그는 얼추 할 말을 눈치를 챈 것 같다. 수심이 깊은 얼굴을 보노라면 경위 대부분을 알아차린 느낌이다.


같은 조건의 라프리트는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꽤 놀라고 있다.


어쩔 수 없으리라. 실전에 치우친 수련만을 한 그녀와, 그 실전에 맞도록 술식을 개발했던 리카드와는 지식의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직계 제자라 하여도······.


리아는 각각의 면면을 둘러보고는 편히 눈을 감은 레비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렇다. 명명백백, 이 지상의 존재들은 모두 신의 자손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하나 빠짐없이 모두 신의 힘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마력······ 말이군요.”


즉시 답하는 리카드에게 리아는 무겁게 긍정했다.



“마력을 다루고, 가공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신의 축복이자, 그들의 자손이라는 확실한 증거다.”


그리 말한 리아는 손바닥에 작은 [광구]를 하나 띄었다.


마력이야말로 신의 신력이 흩뿌려진 부산물임을 모르는 자들은 어리둥절해했다.


이들 모두에게 자세한 내막을 이해시킬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앞으로의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설명은 해야 했다.



“반려여, 부탁해도 되겠나?”

“······.”


찬크에르는 입을 다물었다.


무표정이지만 리아 기억 때문인지, 어쩐지 무척이나 싫어하는 게 훤히 보인다.


하지만 이쪽에게 반려라 불리는 게 싫은 것이었다. 부탁 자체는 들어주려는지, 순간 그에게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으윽?!”


용왕의 마력―― 아니, 찬크에르의 신력에 다들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두려움과 공포로 인한 것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예외도 있었다. 그들은 나트알의 주민들과 넘버즈, 그리고 라프리트와 방금 막 온 리카드와 세리오였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 정도만 덜할 뿐, 다들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허억. 허억······.”


찬크에르가 신력을 도로 회수하니 도시 여기저기서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난다.


짧은 시간인 데다가, 부담을 주려는 의도도 전혀 없었기에 신체적인 무리는 없다. 그저 정신적인 중압감에 힘들어하는 것이었다.


리아는 천천히 찬크에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몸에 밴 패왕의 자태로 그를 가리켰다.



“소개하노라. 여기 이자야말로 여의 반려이자, 이 지상의 관리자―― 태초의 반신이다.”


멍한 시선이 찬크에르에게로 향했다.


루데릭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가 설마 세상의 관리자임과 동시에 반신이라고는 생각지 못해 얼이 빠졌다. 그렇지만 그는 찬크에르가 용왕임은 알고 있는 터라 남들보다는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야, 리아.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

“여도 그리 내키진 않았다. 하나, 이보다 빠르고 명확하게 그대들을 이해시킬 방편이 없었다. 더욱이 다음 내용과도 연결되어 있기에 필요했다.”

“다음?”

“음.”


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쳐다보는 모두에게 말했다.



“직접 겪어봐서 알겠지만, 이 지상의 존재들은 고작 내뿜는 신력에―― 작디작은 신의 위광에도 어떠한 저항조차 못 한다. 왜냐? 지상의 존재들은 신의 축복을 받음과 동시에 그들에게 예속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감이 좀 그런데······, 신이 바라기만 하면 우린 돌연 죽을 수도 있다는 거야?”

“그렇다, 오라비여. 하늘에도 닿을 위대한 자라 한들······ 가볍디가벼운 신의 변덕으로 쉽게 사그라진다.”


이 지상의 존재들은 그런 존재다. 신들의 장난감이자 신들의 노예,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직접 겪어본 이상 부정할 순 없다.


루데릭은 살짝 신음을 흘렸다. 그보다 조금 늦게, 앞선 일과의 관련성을 하나둘 깨닫기 시작한 이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리고 이내 공포로 물든 시선이 찬크에르에게로 몰린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평소엔 아내 바라기인 애처가지만, 그는 엄연히 이 세상 생태계의 제일 꼭대기를 차지한 반신. 방금 막 이들의 노예임을 몸소 체험한 이들로서는 그가 두려울 수밖에 없다.


냉정하게 말해, 오엘문리아는 오대신이 만들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러나 실제로 겪어보면, 그중에서도 영혼 깊이 각인된 용왕의 신력을 몸소 체감하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돌연 자신이 너무나도 왜소하게 느껴졌겠지······.


아무 사정을 몰랐다면 그저 경외심이 들었을 거다. 하지만 사정을 안 다면 제아무리 강한 정신의 소유자라도 마냥 쉽게 받아들일 순 없으리라.


더군다나 실제 사례인 레비아도 있다. 유구의 세월 동안 지상의 존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이 강요되었었다.


무서운 건 이마저도 레비아라는 수단을 이용했을 뿐이라는 거다.


신이 직접 나선다면 저항할 도리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 신에 필적할 만큼 강하다고 하더라도······.


‘리아여, 명심하거라. 신은 결단코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분명 대국적인 시야와 전능한 힘을 지닌 하느님이지만, 자율 사고를 하며, 독립된 성향을 지닌 하나의 개체다. 절대 방심해선 안 되느니라.’


비록 다 뜻이 있고, 세상을 위해 필요한 일일지라도 탐탁지 않다. 휘말려 죽는 자들에겐 그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지 않은가.



“가장 악질적인 건 도망칠 곳도 없다는 거겠지. 세상에는 그들의 의지인 마력이 빠짐없이 퍼져있으니.”


달리 세상을 창조한 신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그들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곳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오대신이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죽음이 찾아온다.


아니꼽다······.


처음부터 지상을 관리했다면 그나마 이해라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관리자를 두었다. 그것은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찬크에르 또한 같은 말을 했었다.


그럼에도 신들은 슬금슬금 이 지상에 관여를 해왔다. 관리자들조차 모르게 몰래.


리아의 경우, 직접 겪어본 전적마저 있는 상태다. 그러하다 보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들에게는 분노가 치민다.


그런 식으로 할 바엔 차라리 개입한다고 공표라도 하던가······.


리아는 슬쩍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강하게 힘을 담아 말했다.



“절망적이지만 신의 횡포에 대응할 수단이 아예 없는 게 아니다.”


여태까지의 긴 설명은 구경꾼들을 위한 것. 이제부터가 잠들어 있는 리아만을 위한 진짜 본론이다.


내용 자체는 넘버즈들을 보노라면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넘버즈들의 제작 방식 자체가 신들의 영향을 받지 않게끔 된 것이니 말이다.


그 외에도 라프리트와 리카드, 세리오를 보면 확실하다. 리아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신의 주박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그래도 그 내막을 자세히 아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여가 가르치려는 [부활]도 그대가 아는 [생명 창조]와 비슷하면서도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니 후에 곤란하지 않도록 똑똑히 새겨듣거라.”


그리 중얼거린 리아는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리아여,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신력이다. 자신만의 신력을 갖고 나서야 비로소 신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지점에 선 것이다. 넘버즈나 그대의 지인들이 찬크에르―― 오대신에 가장 가까운 그의 신력에 굴하지 않았던 것도 그러한 연유다. 다들 리아, 그대의 신력에 적잖은 영향을 받고 있어서다.”


리아 본인은 모르고 있을 거다. 하지만 나트알의 주민들은 리아의 신력에 완벽히 동화되어 있다. 평소 몸을 부대끼며 생활한 것과 더불어, 마을에 있는 신목이 지속적으로 신력을 내뿜는 탓일 거다.


이 말인즉슨, 리아는 이미 오대신으로부터 그들의 주권을 강탈해 갔다는 뜻이었다. 아마 나트알의 대기에도 리아의 신력이 마치 결계처럼 일정 비율로 유지하며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신의 간섭을 막기 위해······.


말하자면 일종의 성지화로, 리아의 세계수가 뿌리를 내린 나트알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오대신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영토였다.


라프리트와 리카드, 세리오 등······ 지인들에게 구태여 본인의 신력이 담긴 마도구를 준 것 또한 필시 신의 간섭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겠지. 마찬가지로 신체를 신력으로 재구성한 세스타스도 그러하고.


이러한 리아의 행보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철저’했다.


전혀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잘도 여러 방면에서 신이 끼어들 틈 하나를 만들어 두지 않았다.



“음. 어째······ 점점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는 느낌이다만?”

『말씀대로. 마스터는 당신은 물론이고, 무수히 많은 이스피리아의 지식을 전부 계승했습니다. 모르실 턱이 있겠습니까?』

“······맹우여, 그걸 왜 이제 알려주나? 제법 많이 늦지 않았는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연 끼어든 아이는 자기 할 말만 하고는 쏙 들어가 버렸다.


당했다. 완전히 놀아났다. 여태 무게 잡고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얼마 만일까. 이딴 취급을 당한 것은.


조금이지만 얼굴에 피가 쏠린다.



“실로 배짱도 좋구나. ······아. 그건 처음부터 그랬었군······.”


이젠 어이가 없는 걸 넘어 허탈하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한 번도 겪지 못한 경험이 조금 신선하기도 했다. 전생에서는 경외와 두려움이 가득한, 잔뜩 경직된 태도만을 겪었던 터라.



“······나쁘지는 않군.”

“뭐가? 왜 또 혼자 중얼거려?”

“아무것도 아니다.”


루데릭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음에도 미심쩍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리아의 기억 전부를 전해 받은 게 아닌지라 잘 모르지만, 리아는 평소에 어지간히도 혼잣말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중요한 내용을······. 그러지 않으면 루데릭이 저리 반응할 리는 없어 보인다.


‘뭐어······ 이건 여라도 어찌할 방도가 없구나. 알아서 잘 고치거라. 암만 그래도 중요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흘려대는 건 문제잖은가.’


속으로 말하고 보니 왠지 기운이 빠진다.


이게 영겁의 시간 끝에 간신히 도달한 완성체라니······.


뭔가 갑자기 인생의 회한이 몰려온다. 죽기 전에도 그런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했건만.


‘그래도 시작한 건 끝을 맺어야겠지.’


어깨를 떨군 리아는 무지하게 없는 의욕을 억지로 쥐어짜 냈다.



“리아여, [부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영혼의 온존이다. 암만 신체가 멀쩡해도 그곳에 담길 혼이 없다면 인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 그렇기에 사전에 여의 신력을 축복의 형태로 나눠준 것이다. 레비아의 영혼이 육체에서 떠나지 않도록.”


잡아두는 건 쉽다. 마력에는 의지가 담기니까.


신력이라고 다르지 않다. 육체에서 혼이 떠나지 않도록 강하게 의지를 담으면 된다. 마력의 양도나, 마법사 죽이기의 방식과도 유사한 거다.


애당초 신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순리와 법칙을 무효화 할 수 있다. 그러니 신력만 있다면 어려울 건 하나도 없다.



“여기까지 준비를 맞춰뒀다면 한시름 던 것이다. 여가 느긋이 강의를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영혼이 육체를 떠난 것으로, 만약 그런 상태라면 대공사가 된다.


······아니, 솔직히 되살리기 무척이나 까다롭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윤회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육체를 잃은 영혼은 이 시스템으로 인해 신계―― 천상이라 불리는 곳으로 환수된다. 죽으면 신에게로 간다는 소리도 이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죽지 않는 한―― 죽어서도 잘 모를 내용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실이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생각하기로는 아마 마력으로 유령의 상태를 유지한 유명인이 자신을 거둬들이려는 모종의 힘을 느끼고는 발설한 게 아닌가 싶다. 혹은 떠들기 좋아하는 어느 용왕이 나불거렸다거나······.


여하튼 환수된 영혼은 서서히 순백의 상태로 정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당연히 강제적인 건 아니다. 앞에서는 번듯한 모습만 보여주려는 신들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됐거나,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는 자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


무엇보다 천상은 거의 시간이 정지한 세계다. 덕분에 아주 오래전에 죽은 자도 아직 정화 작업을 거치지 않았다면 소생할 수 있다.


그래. 가능은 했다. 신계에 있는 영혼을 데려오고, 그 영혼에 완벽히 맞는 육체가 있다면 소생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전 생에 하얀 악몽도 자주 했었던 일이니 아예 불가능한 건 확실히 아니었다.


그저 귀찮을 뿐······.


정말 끔찍하게 귀찮다.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신계에, 죽은 영혼들만이 모인 그곳에서 특정인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마력이 거의 없어 분별도 잘 안되는 자를······.


금세 상대가 답하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정말 오래 걸릴 수도 있는 단계였다. 영 생뚱맞은 자가 [소생]임을 알고 응답하기도 하여 더욱 오래 걸린다.


가장 큰 문제는 기껏 찾더라도 미약한 영혼으로는 차원의 경계를 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다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소생]과 [부활]의 가장 큰 차이점임과 동시에, [부활]을 더욱 선호하는 배경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 [소생]은 원래의 육체로 되살아나는 것이고, [부활]은 새로운 신체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환생이라고 보면 된다.”


난이도가 높은 건 당연히 [부활] 쪽이다. 압도적으로 어렵다.


신의 영역인 창조에도 닿은 초월급의 대마도이니 당연했다. 겨우 인간이 정한 10급에 머무는, 전생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소생]과는 비교 자체를 불허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부활]의 절차는 넘버즈―― [생명 창조]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육체에 맞게 영혼을 조정할 수 있는 [생명 창조]와는 달리, [부활]은 영혼에 맞게 육체를 준비해야 한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단순히 순서만 바뀐 듯하다. 그렇지만 [생명 창조]는 실수를 하더라도 마력이 소비된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타격이 없는 반면, [부활]의 실수는 곧 되살리려는 영혼의 붕괴였다.


일반적으로 죽는 것과는 다르다. 자칫 잘못하면 영원한 죽음―― 소멸을 맞이하고 만다.


까놓고 말해, 엄청난 리스크다. 차라리 다소 소모되더라도 [소생]을 택하는 편이 훨씬 이로워 보인다. 전생에서 되살리는 것에 [소생]이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활]을 고집하는 이유는 신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신의 주박에서 벗어나는 완벽한 방편은 아니다. 결국에는 신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니. 현 나트알의 주민과 마찬가지다. 그저 여로 주인이 바뀌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진정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과 같은 선상에 오르는 것뿐이다.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모든 순리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순리를 거스를 순 없으니 말이다. 그 스스로가 하늘에 설 수밖에는 없다.



“그렇지만 단언한다. 저 줏대도 없는 음습한 오대신들에게 속박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라고. 적어도 불합리한 처사는 없을 거다. 그것만큼은 약속할 수 있다.”


불만이라면 도로 되찾아 가면 된다.



“순순히 내줄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말이다.”





패기롭게 입꼬리를 올린 리아가 살며시 레비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윽고 레비아의 몸이 살며시 빛을 냈다.



“생성 계열의 마법일까요······?”

“네. 육체를 재구성하고 계시네요. [치유]의 원형일 듯한데, 아마 영혼도 비슷하게 재구성하시는 듯합니다.”


혼잣말에 대답이 돌아왔다.


작은 목소리로 대꾸한 그 사람은 리카드로, 그는 이젠 전신이 빛나는 레비아에게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당시에는 눈에 담을 틈도 없었지만, 아마 피프스 양―― 넘버즈 분들의 육체를 만들었을 때와 같은 방식이겠지요. 실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마법입니다. 원료는 신력이겠지만요.”

“역시 선생님이시네요······.”

“감탄만 하실 게 아닙니다. 라프리트 양도 집중하도록 하세요. 이만한 대마도를 찬찬히 견학할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습니다. 심상마법의 요령과도 같습니다. 술식을 의식하는 게 아니라 감각으로 느끼는 겁니다.”

“아, 예!”


라프리트는 잔뜩 기합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문득 이전 직계 스승이었던 시절의 그가 떠오른 탓이었다.


‘묻고 싶은 말은 많지만······ 우선, 선생님의 말씀대로 집중하죠.’


라프리트는 일순간에 잡념을 날렸다.


그리고 곧장 탄성을 냈다.


언뜻 보면 단순히 육체를 만드는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느껴보면 레비아의 영혼에 맞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재구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은 쉽지만 그야말로 신의 영역에 닿은 대마도다.


그 과정이 세포 하나하나마다, 너무나도 섬세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과연 세상을 손에 넣은 패왕의―― 리아의 마법이다. 이리 친절히 풀어 사용함에도 진도를 따라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곁의 안네도······ 경악으로 입을 떡 벌렸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그녀는 되려 남들보다 그 높은 수준을 보다 깊이 느낀 것이었다. 앞서 레비아와의 일전에서도 이런 반응은 아니었다.


안네가 저 정도다. 솔직히 보면서도 전혀 이해가 안 된다. 평생토록 저곳에 발을 디딜 일은 없을 것이란 확신마저도 든다.


그러나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 정말 어떻게 만난 리아의 앞에서 어찌 그러겠는가. 머리가 터질 듯한, 감각마저 꼬이는 기분이지만 꾸역꾸역 참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렇게 이젠 쓰러지겠다 싶을 때쯤······ 리아의 마법이 종료됐다.


영혼의 정착도 마친 레비아는 혈색도 좋고 숨도 규칙적으로 내쉬었다.


그래. 그녀는 전설에서나 나오는 소생을 이루어 낸 것으로, 창조신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새로운 존재가 탄생하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무에서 창조된 넘버즈와는 다르다. 오대신에게 종속된 자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것이니까.


이를 일부나마 이해한 자들에게서 경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신의 위업에도 견줄 경이로운 광경이었습니다.”

《참말로. 순수한 창조라닝······. 때려 부수는 것만 잘하는 줄 알았는뎅······.》

“응? 당신······. 당신이 환수, 히야신스이십니까?”

《맞앙. 리아에겡 들었엉?》

“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도 반가웡! 근데 영광은 너무 오버다, 얘!》


히야는 뱀의 머리를 살살 흔들었고, 그녀의 말을 당연히 알아듣는 리카드도 정중히 머리 숙여 인사했다.


분위기가 좋다. 그러한 순간에 현기증이 났다.



“아, 아가씨.”

“고, 고마워요, 안네. ······히야도. [치유] 고마워요.”

《잠시 쉬는 게 어떠닝?》


히야의 [치유] 덕분에 급격히 편해졌지만, 아직 머리는 띵하고 도는 듯한 기분이다. 바닥을 보니 진짜 땅이 빙글빙글 돈다.


하지만 부축해 주는 안네의 손을 놓고 똑바로 일어섰다.



“무리하지 말고 쉬어라. 그 정도의 여유는 있다.”

“아뇨. 저는 괜찮아요, 이스피리아 양.”

“흠. 그런가······.”


레비아의 머리를 한 번 쓸어준 리아가 뒤를 돌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 돌아보는 작은 몸짓에 엄청난 위압이 몰아친다. 만인을 발아래에 꿇리는 절대적인 지배자의 위압이었다.


완전히 압도당한 라프리트에겐 리아가 엄청 커다랗게 보였다. 그리고 그 연분홍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그대로 무릎을 꿇어버릴 뻔했다.



《정신 똑띠 차리거랑.》


머리 위에서 들리는 히야의 목소리와 함께 한결 편해졌다. 그녀가 주변에 얇게 보호막을 쳐서 위압감을 막아준 것이었다.



“미안하게 됐군. 한평생을 이리 살아왔던지라. 이것만큼은 여도 잘 조절이 안 되는구나.”

“알고 있어요.”

“그래······. 그러했었지.”


다소 씁쓸하게 중얼거린 리아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반려여, 레비아와 다른 자들은 맡기도록 하마. 여는 잠시 옛 인연들과 시간을 가지겠다.”


라프리트는 황급히 쫓아가려다가 따라오는 기척에 돌아봤다.



“미안한데, 안네는 기다려 주세요.”

“······.”


안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매번 따돌려져 화를 내는 게 아니다. 그녀는 과연 독대를 가져도 괜찮은지를 염려하는 것이다.


정말 무의미한 걱정이다. 왜냐하면 저항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방금 막 벌어진 인외의 결투를 봤잖은가. 만약 리아에게 딴마음이 있었다면 자신들은 이미 죽은 목숨. 진작에 신과 대면하고 있었을 터였다.


안네도 이내 깨닫고는 대화 잘 나누라며 배웅해 줬다. 슬쩍 맡긴다는 시선을 히야에게 보내긴 했지만······.



“세리오 양, 저도 다녀오겠습니다.”

“어, 네. 저기, 근데 리아 양의 저 분위기는 대체······?”

“나중에 다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약속이에요?”

“물론이죠.”


따스하게 미소 지은 리카드는 살며시 세리오를 안아줬다. 그러고는 새빨개진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따라붙었다.


리아가 그런 리카드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사이가 좋구나.”

“약혼녀니까요.”

“호오. 그거 축하할 일이로군.”

“예······.”


리카드의 무거운 대답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 이상의 대화는 없었고, 리아는 마당 한편에 놓인 나무 그늘 밑에서 멈춰 섰다.



“자. 그럼······. 실로 오랜만이로다, 두 사람.”


눈을 마주한 그녀는 미소 지었다. 광인인 척 연기하기 전의, 상냥하고 순수한 그때와 같은 미소였다.


기억 속의 그녀와 교차하자 참을 수 없는 감정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라프리트는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안 말리세요?”

“먼저 나서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차마 제가 할 순 없는 노릇이니. 세리오 양도 계신 판국에. 그저······ 제 몫도 함께 담아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죠.”


고개를 끄덕인 라프리트는 리아와 정면으로 마주 섰다.


그리고······


짜악――!


여태 쌓였었던 게 많았던 만큼 자제는 없었다. 낼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리아의 따귀를 때렸다. 때린 자신의 손이 아플 정도로 세게.


미동조차 하지 않고 맞아준 것은 그녀 나름의 사죄이려나······.



“흐음. 거친 인사로구나, 라프리트여.”


리아는 가볍게 뺨을 어루만졌다.



“얼마나······ 정말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미안하게 생각하노라. 진심이다. 하나, 그대들과의 만남은 여의 결의가 흔들리기에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제가 죽은 다음에나 그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나요?”


잠시 눈이 커졌던 리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의 친우는 꾸꾸와 그대뿐이다. 세상을 정복하는 도중에도 그것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고, 줄곧 그대들을 지켜보고 있었노라.”


가슴에 손을 얹은 리아의 목소리는 더없이 순수하고 진실하였다. 그 감정이, 그 깊은 애정이 가슴 깊이 파고든다.


말문이 막혔다. 뭐라 하고 싶었는데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은 허무하게 흩어져 내렸다.


그런 라프리트를 대신하여 가벼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 죄송한데······, 저는 이스피리아 양의 뭡니까? 설마 저만 따돌리시는 건 아니겠죠?”


리카드였다. 눈썹을 늘어뜨린 그는 다소 섭섭하다는 듯이 말하였다.


그 모습에 리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리가 있겠나? 리카드······, 그대는 가족을 잃은 여의 양부 같은 존재였노라. 그대와 함께 산 2년은 여의 인생에서 가장 따듯했던 순간이었다.”

“그러한데 척안으로 만드신 겁니까?”

“다소 과했었지······. 하나, 그대라면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다. 여의 생각대로 그러했고.”

“확실히 덕분에 반역 의혹은 말끔히 떨어지긴 했습니다. 다른 의혹들도 덩달아 모두 해소됐고요. 만약 그때의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분명 근 시일 내에 제 목이 떨어졌겠죠. 도대체······ 그 당시에 얼마큼이나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말을 끈 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라프리트여, 좀 기분이 풀렸는가?”

“조금은요.”


사실은 전혀 풀리지 않았지만 일단 그렇다고 했다.


곧장 이를 알아본 리아는 작게 웃었다.



“리카드여, 그대는 어떠한가?”

“변함없네요. 저는······ 여전히 저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분명 선택의 여지는 없었겠죠. 하지만 당신께서 저를 양부로 여겼듯, 저 또한 당신을 양녀로 여겼습니다. 그러한데 저는 딸을 잘라냈죠······. 그것도 모자라······ 너무나도 무거운 짐을 당신이 짊어지게 해버렸습니다.”

“그건 여가 멋대로 정한 것이다. 그대와는 아무 관계도 없느니라. 라프리트도 마찬가지다. 겨우 그대들이 이 여의 패도를 좌지우지할 수 있으리라 여겼나? 혹여 그렇다면 그대들은 자신을 무척이나 과대평가한 것이니라.”

“평화―― 저와 라프리트 양을 위한 평화였음에도 말입니까?”


그랬다. 모든 자들과 대립하고, 기어코 이 세상을 손에 넣은 리아의 목적은 오직 하나······. 자신의 양부와 유일한 친구인 라프리트가 분란이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었다.


그것만이 리아의 전부였었고, 그 어린아이의 꿈이나 다름없는 일을 리아는 정말로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거의 이루어 냈다. 자기 자신을 대가로······.


과연 어느 아비가 딸의 희생으로―― 어마어마한 피를 쌓고 쌓아 얻은 평화를 받아들일 수가 있겠나.


라프리트도 그러하였다.


용납 못 한다. 그딴 평화는 줘도 안 받는다. 어째서 함께 헤쳐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왜 홀로 결단하고 나섰는지 화만 날 따름이다.


물론 그럴 여건이 아니었음을 이젠 안다. 그렇지만 서운한 건 서운한 거다. 분해서 평생 잠을 설쳤을 만큼. 수명이 다한 마지막 순간에도 차마 눈이 감기지 않았었다.


제법 흉흉해진 분위기를 느끼고는 극단적이었던 본인의 행동을 돌이켜 보았나, 천하의 하얀 악몽이 곤란하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고, 리아의 눈썹이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여의―― 타인의 바람을 왈가왈부하는 게 아니다!”


그리 소리친 리아가 훌쩍 몸을 날렸다. 그 끝이 향하는 건 리카드로, 그는 화들짝 놀라면서 날아오는 리아를 받아냈다.



“이, 이스피리아 양?”


리카드는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도 흐트러진 리아를 조심스레 팔에 앉히듯 고쳐 안았다.



“――리아다. 리아에겐 리아라 하지 않나?”

“제법······ 갑작스럽습니다?”

“뭐 어떠냐? 지금의 여는 단 한 명의 신하만을 거느린 평범한 계집이다. 제멋대로 굴 수도 있는 것이겠지. 여하튼, 애칭을 용서하마.”

“하아······. 그게 평범한 분의 태도입니까? 지칭하시는 것도 여전하고. 게다가 평범한 여성분에게 신하는 보통 없을 겁니다.”

“······불만인가?”

“아뇨? 그럴 여부가 있겠습니까, 리아 양.”

“그대도······ 제법 산뜻해졌구나.”

“세월이 세월이지 않습니까. 진작에 변했지요. 300년이나 절 피한 리아 양은 모르셨겠지만.”

“그만 눈총 주거라. 미안하다 하지 않았느냐?”

“내키면 그만하도록 하죠.”

“허허······.”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상쾌하게 웃었다. 그러다 조용히, 리아가 리카드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리카드여, 다른 세상에서의 일은 다른 세상의 것이다. 이곳까지 끌고 오는 건 무의미하다. 더군다나 여는 이미 그대에게 사과받았다. 하물며 용서마저도 했지.”

“예······. 분명 리아 양께 용서받았습니다······.”

“무책임한 말은 하지 않으마. 그래도······ 이젠 자신에게 조금은 관대해지거라. 그대는 그래도 된다.”

“······하하. 별수 없겠네요. 기껏 딸이 충고해 주는데. 노력하겠습니다.”

“음. 지금은 그거면 됐다······.”


리아는 쓰다듬던 손길 그대로 리카드의 목에 손을 둘러 그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리카드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꽉 악물고는 리아를―― 자신의 딸을 부서지는 물건처럼 소중히 안았다.


잠시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리아는 재차 리카드의 머리를 토닥여주고는 그의 품에서 훌쩍 내려왔다.


작가의말

진짜 오랜만에 돌아왔습니다

-2가 준비되어 있으니 자세한 인사는 거기에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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