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해치웠나?
오스먼드가 마법을 발동하려 했지만, 실크의 검이 더 빨랐다. 무엇이든 으스러트리는 그의 검은 실크의 괴력과 만나 그 파괴력이 더욱 두드러졌다.
하지만 정작 검은 허공을 갈랐다. 게다가 오스먼드가 슬쩍 피하며 오금을 꺾어버리는 탓에 실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와 대련하던 미겔이 자주 쓰던 기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진 실크는 미리 아크리치가 준비한 포탈 속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도련님! 오스먼드 네 이 녀석! 도련님을 어디로 보내버린 게냐!”
투스가 나서서 지팡이를 찍어 누르며 결계를 세우려 했다. 하지만 투스의 마법은 사전준비가 없으면 발동이 느린 것이 흠이었다. 오스먼드가 투스의 마법을 지우려 했으나, 슈네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투스! 이 못난 영감 같으니! 토템을 쓰는 주제에 앞으로 나서면 어떡해?”
슈네트가 타오르는 창과 토해내는 화염으로 오스먼드가 움직이지 못하게 막으려 했다. 그녀의 곁에는 폴암을 든 게일이 따라붙었다.
“방해하면 가만 안 둔다, 꼬맹이!”
“방해는커녕, 제가 어르신의 욱신거리는 허리에 얼음찜질이라도 해드릴 순 있겠죠!”
“뭐야?”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오스먼드의 다리를 얼려버렸고, 창과 폴암이 그의 가슴과 목을 노리며 들어왔다. 그리고 정확히 노리는 곳을 꿰뚫었다.
게일이 외쳤다.
“해치웠나?”
창에 꿰인 아크리치는 비정상적으로 꺾여 축 늘어져 있었다.
“멍청이들! 아크리치는 언데드라고요!”
크리스티안이 외치자, 오스먼드의 뜯어진 살점 밑으로 해골 뼈가 까닥이고 있었다. 결국, 슈네트와 게일도 포탈에 먹혀버리고, 투스의 마법 무효 결계가 뒤늦게 발동했다.
“슈네트!”
“슈네트 걱정일랑 하지 말아요. 그녀는 절대 약하지 않아요. 어디로 이동되었든 살아남을 거예요. 투스, 일단 오스먼드부터 막는 것부터 생각하자고요.”
크리스티안이 투스의 정신을 다시 고쳐잡아 주자, 오스먼드가 너덜너덜해진 허물을 벗어버렸다.
“카그라 친구한테 미안하게 됐어, 몸에 상처를 입혀버렸네. 하지만 투스. 변이마법을 막기엔 결계의 규모가 너무 작은 것 아니야?”
“적어도 마법을 쓰는 건 막을 수 있을 터.”
투스가 지팡이를 바닥에 찍어 누르며 버티고 있었다. 비록 투스가 무방비하게 노출되었지만, 효과는 있었다. 아크리치는 마나홀에서 마력을 공급받아 육체를 유지하는데, 마력이 차단된 탓에 오스먼드의 몸이 조금씩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스먼드가 투스의 앞에 섰다.
“그럼 너는 누가 지켜주지? 너는 내가 이 결계 밖으로 나가는 걸 막을 수 있나? 마법사들은 이 결계를 뚫고 나를 공격할 수 없어.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는 밖으로 나가면? 이 사람 중 누구라도 날 막을 수 있나?”
그가 투스를 지나쳐 결계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럼 나는 어때?”
레오나가 오스먼드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의 뒤로 알프레도와 호세, 그리고 크룩스가 보조했다. 각자의 검을 쥔 네 사람은 마법을 쓰지 못하는 오스먼드가 결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길을 막았다.
레오나가 미겔을 흘긋 봤지만, 여전히 그는 외면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지금 밝혀내야 할 일이 아니었다.
레오나는 인간의 껍데기를 벗어버린 오스먼드를 힘으로 찍어눌렀다. 해골 몸에는 상처를 내봤자 의미가 없으니, 차라리 부수는 게 효과가 좋았다.
뼈가 부서진 오스먼드의 몸은 더는 재생하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었다. 오스먼드는 턱을 달싹였다.
“레오나. 나는 당신을 마왕으로 만들 생각이었어요. 당신이 이 왕국을 부수고 싶어 했으니 원하는 걸 이뤄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왜 지금은 왕국을 지키려 검을 잡은 거죠? 당신의 부모를 죽이고 동료들을 죽이게 한 테스널 왕국이 증오스럽지도 않던가요?”
레오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두개골에 검을 꽂아놓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제 더는 흔들리지 않아. 지켜야 할 게 있는 용사를 한낱 리치 따위가 이길 순 없어.”
리치는 여전히 웃음 띄고 있었다.
“물론이죠. 그렇겠죠.”
오스먼드가 투스의 결계 속에서 흩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오스먼드가 그려두었던 홀 안의 마법진들이 반응하며, 모든 벽면과 바닥이 포탈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뭐라고?”
레오나를 비롯해 홀 안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 포탈 건너편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레드드래곤 우르슬라는 예외였다. 유일하게 오스먼드와 비견되는 마력을 가진 그녀는, 자신을 덮친 포탈을 상쇄시켰다.
바스러졌던 오스먼드는 따로 숨겨두었던 마나홀에서 재생하며 나타났다.
“우르슬라도 날 막을 거야? 네가 가로막는다면 이길 자신은 있어. 그보다 드래곤은 방관주의 아니었던가?”
레드드래곤은 나긋했다.
“하지만 도를 넘었어. 오스먼드.”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내가 아니라 저들이 막을 거야.”
우르슬라가 포탈을 고갯짓으로 까닥였다. 그녀가 물었다.
“저들을 어디로 보낸 거야?”
“어딘가 금방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보내버렸지.”
고개를 끄덕인 우르슬라가 몸을 비틀어 자신의 등을 보였다.
“그래도 개중에는 영리한 녀석도 있었군.”
우르슬라의 등에는 갈퀴 달린 식물이 달려있었다. 그리고 그 식물의 주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설리반이었다.
설리반은 아공간 속의 제물들을 보고 깨달았다. 세계수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우르슬라가 말한 반나절의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엘프들이 기운을 담아 지켜낸 신목이 평범한 늙은 나무가 되어버릴 터였다. 변질된 제물은 다름 아닌 신목이었다.
“이제 알았어.”
설리반의 말에 오스먼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설리반은 충격을 받아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너는 세계수를 없애버릴 생각이야. 엘프들을 바깥으로 내보내기 위해서.”
설리반이 허공에 애꿎은 손가락만 까닥거리다가 이어서 말했다.
“그럴 거면 바로 태워버리던가 뽑아버릴 것이지, 왜 이렇게 배배 꼬인 계획을 세운 거야?”
오스먼드는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네. 나는 모든 걸 없애버릴 거야, 설리반.”
하지만 오스먼드가 어물쩍거리며 넘겨버린 대답이 아공간 안쪽에서 들렸다.
“엘프들이 제아무리 식물마법에 강하다고 해도, 인간이나 마족에 비하면 소수 종족이기 때문이지.”
초대마왕이었다. 그는 실크와 레오나가 자신의 앞을 지나가도 잠자코 있었다. 슬라임은 자신의 추론을 꺼내놓기로 했다.
“오스먼드, 당신이 마법을 일부러 뒤틀어 놓았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중요한 건 왜 뒤틀어 놓았는가. 즉, 목적이었죠. 벨라는 당신의 꿈을 뒤져본 결과, 마법의 구조가 뒤틀려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우르슬라는 마법이 뒤틀린 탓에 모든 생명체의 소멸이 될 거라 예견했죠.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어요.”
우르슬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슬라임을 치켜봤다.
“오스먼드의 절대 목적이 변이마법이 아닌 생명체의 소멸이라면, 우르슬라는 부작용이 나타날지언정 그 마법을 상쇄시킬 수 있어요. 하지만 오스먼드는 우르슬라의 등장에 차분하더군요. 모인 사람 중 가장 위협적인 인물인데 말이죠.”
듣고 있던 거츠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초록색의 슬라임이 출렁였다.
“둘이 한팀이란 거예요. 물론 그들의 목적은 변이마법도 아니고, 소멸마법도 아니죠. 설리반이 말한 대로 세계수를 없애버리는 것은 엘프들이 더 넓은 세상으로 풀어주기 위한 것이죠. 그러면 설리반에게 생긴 궁금증을 풀어야 해요. 고작 엘프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데 왜 이렇게 복잡하고 귀찮은 과정을 밟았는가. 그 이유로 엘프들이 섞이기 좋은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그들은 소수민족이기에 개체 수가 많은 인간을 결코 이길 수 없었을 겁니다.”
초대마왕은 분노하고 있었다. 언성이 높아지며 격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래서 오스먼드는 마족을 이용한 겁니다. 스스로 마족이 되어 인간과 마족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스스로 절대 악을 연기하고 있지요. 역시나 마족의 얼굴을 하고요. 그 결과 인간이 제아무리 많은 개체 수를 가졌을지언정 마족과 엘프 모두 적으로 두고 싶지 않으니, 엘프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려 할 겁니다. 오스먼드 당신이 바라마지않던 엘프들에게 가장 좋은 환경이겠죠.”
오스먼드와 우르슬라가 반론하지 않으니, 그가 빈정거렸다.
“오스먼드 당신에겐 실크가 참 눈엣가시였겠죠? 역대 마왕 중 유일하게 인간에게 우호적인 반쪽짜리 마왕이었으니까.”
오스먼드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정말 놀랍네요. 당신이 말한 대로예요. 과연 여러 종족을 마족으로 한데 묶은 마왕님다우시군요. 설리반이야 같은 엘프니 걱정하지 않지만, 거츠와 당신만큼은 입막음해야겠어요. 그 뜻은 잘 아시리라 믿겠습니다.”
그때 마왕성 홀에 포션이 깨지며 희뿌연 안개가 만들어졌다. 아크리치의 해골 몸으로도 마비될 정도로 강력한 마비약이었으며, 초대마왕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그 안개를 피하지 못하고 마셔버렸다.
“윽, 이건. 도대체······!”
공기 중에 떠다니는 약 기운이 사라지자, 줄리엣이 나타나 슬라임 핵을 쥐었다. 슬라임을 속박하던 마법을 뚫고 손을 집어넣은 탓에 상처가 생겼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마침내 핵을 잡아 뜯은 줄리엣이 말했다.
“이것만 있다면, 인큐버스 킹을 되살릴 수 있어.”
줄리엣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레오나가 정신을 차리니, 그곳은 왕성 안 용사훈련소였다. 이젠 쓰이지 않아, 창고로 쓰이는 듯 인적도 드문 곳이었다. 하지만 레오나의 눈에는 아직도 그곳에서 훈련하던 동기들이 눈에 선했다.
그녀의 곁에는 미겔이 따라 쓰러져 있었다. 레오나가 화색을 띠며 그를 부축했다.
“미겔! 보고 싶었어! 나는······. 나는 이렇게 루가루가 되었지만, 미겔을 지켜주려고 돌아왔어.”
하지만 미겔은 정신을 차리자, 화들짝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으악! 오, 오지마!”
자신이 알고 있던 미겔과 달라져 있다는 걸 알지 못한 레오나는 깜짝 놀라 길쭉한 주둥이를 가렸다. 그리고 그 주둥이를 가리는 팔을 두른 털가죽을 가렸다. 그녀는 미겔의 앞에 가려야 하는 것이 많았다.
미겔이 바들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네가 알고 있던 미겔이 아니야······.”
마왕성에 모였던 사람들이 포탈을 타고 넘어간 곳은 각자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스탕달은 바크만을 시해했던 루가루의 숲이었으며, 챠오는 쓸쓸하게 지냈던 시비스터의 폐허, 게일은 키클 온천, 알폰스는 엘라이자의 사과농장 등이었다.
그중 실크가 정신을 차린 곳은 미겔의 오두막 뒤편에 꾸려진 밭이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심겨 있지 않은 빈 밭이었지만, 실크는 어렵지 않게 처음 미겔을 만난 날을 기억했다. 실크는 자연스럽게 이끌리듯이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오두막에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큭? 컥. 자네는······?”
카그라 후작이 스튜를 먹다 사레가 들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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