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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웅 님의 서재입니다.

롱 리브 더 데블킹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신현웅
작품등록일 :
2019.06.10 02:12
최근연재일 :
2020.01.06 14:45
연재수 :
90 회
조회수 :
8,622
추천수 :
142
글자수 :
510,676

작성
19.10.30 13:42
조회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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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2쪽

63화 이것은 용사의 데뷔 무대인가.

DUMMY

“내 이름 같은 거, 알 거 없잖아.”


퉁명스럽게 말을 던지고 사라진 그 녀석을 대신해 미겔이 눈을 떴다. 그 뒤로 실크와 미겔은 산을 오를 때까지 사념체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설산은 가파르고 군데군데 얼어버린 바위 탓에 미끄러웠다. 미겔은 괜찮았지만, 실크는 피로가 쌓이고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실크, 너 안색이 안 좋아.”


“그런가.”


실크는 절벽을 오르내리는 험준한 산맥에서 곰의 모습을 포기하고 인간의 몸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추위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그는 얼음에 박힌 죽은 잔가지를 짚고 올라가다 가지가 부러져 넘어져서야, 자신이 무리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춥다.”


실크의 코에서 콧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 해골몸도 관절 사이가 얼어붙어 버릴 것 같은데 너는 오죽하겠어. 일단 몸을 데울 것부터 찾아보자고.”


다만 건조한 설산에서 마른 가지라면 모를까, 장작으로 삼을 물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른 가지조차도 양이 충분치 않았다.


“일단 쓸모있는 게 있는지 찾아보자구.”


미겔은 자신의 오두막에서부터 바리바리 짊어지고 온 가방을 열어보았다. 말린 약초를 곱게 접어 포장한 봉투들과 간편한 조리기구들 그리고 마른고기 따위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검 한 자루와 슈네트에게서 받은 반지 한 쌍이 있었다. 차를 끓이거나 요리를 하기 좋은 물건들이었지만, 정작 불이 없어서야 쓸모가 없었다.


반면에 실크의 짐은 단출했다. 한 손으로도 들리는 작은 짐 안에는 마족의 특징을 숨겨주는 아티팩트 반지와 엘렌이 챙겨주었던 쿠키 몇 조각, 그리고 미겔과 마찬가지로 리저드맨의 마을에서 받은 대검이 전부였다. 아티팩트 반지를 제외하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물건은 전혀 없었다.


“그야 나는 맨몸으로 포탈을 타고 떨어졌으니, 챙길 물건도 없는 게 당연하다.”


실크는 길쭉한 주둥이로 그르렁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털가죽을 둘러 곰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절벽을 오르내리지 않는다면 곰의 모습인 게 유리했다.


장작 삼을 게 전혀 없으니 실크가 이어 말했다.


“이대로 가죽을 두르고 쉬고 있으면 추위 정도는 가실 것이다. 하지만 조금 잠이 오는군.”


“이런 데서 잠을 자겠다는 말은 죽겠다는 말인데?”


“곰은 겨울잠을 자는 법이다.”


“그건 깊은 굴속에 들어갔을 때 이야기지, 아무리 곰이라고 해도 이런 눈바람 속에서 자는 건······.”


미겔은 시야를 흐리는 눈보라 속에서 희끄무레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불! 불이다! 여기에 사람이 사는 모양이야! 실크! 실크?”


“드르렁.”


“일어나!”





열 명정도 되는 엘프들은 두 사람을 미행하고 있었다. 저 기묘한 곰과 해골이 프로메테우스와 무슨 관계인지 몰라도, 도망자 엘프가 주목하는 인물들이니 무언가 단서를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하이페리온의 명령으로 실크와 미겔을 멀리서 따라오던 엘프들은 혹한의 추위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왕국엔 겨울 같은 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두꺼운 모피를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수 씨앗도 잘 다루지 못해 추위를 막을 목화솜 따위도 만들 수 없었다.


그들은 추위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세계수 씨앗을 장작으로 만들어 태우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불을 피우면 저들에게 위치가 탄로가 날 게 뻔했다. 그래서 엘프들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우리가 이렇게 추위에 떨고 있는 것보다 차라리 저들을 포박하는 게 빠르지 않을까?”


“재판관님께서는 저들을 미행하라고 했지, 잡아 오란 말은 하지 않았어.”


“하지만 잡으면 미행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잖아? 심문하면 되니까.”


“그러면 이대로 추위에 시달리다가 얼어 죽을까?”


긴급회의는 짧게 마무리되었다. 애초에 깊게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들은 불을 피워 두 사람을 유인하기로 했다. 다행히 그 작전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마찬가지로 추위에 힘들어하던 두 사람이 엘프들이 피운 연기를 보고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겔은 실크의 아티팩트 반지를 빌려서 인간의 모습으로 변장했다. 아무리 마계라고 해도 스켈레톤이 말을 걸어서 좋을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불을 피운 자들이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라고 하면 그때 스켈레톤의 모습으로 돌아오면 되는 일이었다.


모닥불 주위엔 후드를 깊게 눌러쓴 다섯 명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깊은 후드를 눌러 쓴 탓에 인간인지 마족인지 알지 못했지만, 인간인 자신에게 적대하지 않았기에 미겔은 그들을 같은 인간이라 미루어 짐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런 설산에서 여행자를 만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미겔이 인사하며 인기척을 내자, 후드를 눌러쓴 사람 중 한 명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같은 일족인것일까, 다섯 쌍의 녹색 눈동자는 미겔을 경계하고 있었다.


미겔은 엉거주춤하게 서서 말했다.


“실은 제가 산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불을 피울 게 없어서 이대로 얼어 죽는 줄 알았지 뭐에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불가를 빌릴 수 있을까요? 빌려주신다면 적지만 먹을 것을 나누어드릴게요.”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두 팔을 벌리고 말했다.


“물론이죠, 이것도 모두 신의 뜻이겠지요.”


미겔은 허락받은 불가에 다가가며 말했다.


“아, 순례 중이신 순례자시군요. 혹시 어느 분을 모시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저희는 젤 코바님을 모시는 사제들이지요.”


“자연을 관장하시는 분이시군요. 아마 모든 환경에 순응하는 게 젤 코바님의 가르침이셨지요.”


불 가에 앉은 미겔은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짐을 풀고 냄비에 눈을 담아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는 일단 가볍게 차를 우릴 생각인지, 말린 허브를 두 줄기를 뜯어 넣었다. 순례자들은 ‘겨우 허브차라니 모닥불을 빌려줬는데 야박하다’라고 불평할 수 없었다. 엘프인 그들은 질이 좋은 허브를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미겔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몸을 덥히는 허브들을 골라 뜯어 넣고, 입이 심심하지 않게 맛을 내는 향신료도 조금 넣었다.


어느새 엘프들의 시선이 냄비 안으로 집중되었다. 그들은 침을 삼키며 자신의 그릇을 들고 미겔이 따라주는 차를 귀하게 받아마셨다. 결국, 그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향도 맛도 이렇게 좋은 차는 정말 오랜만에 마십니다.”


“그런가요.”


미겔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들어 절벽 위를 보고 말했다.


“다른 다섯 분도 내려와서 함께 마셔요.”


미겔이 고개를 들자, 절벽 위에서 활에 시위를 당기던 엘프들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실크가 나타났다. 굳은 얼굴의 실크는 추위 탓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미겔은 여전히 빙긋 웃으며 끝내지 않은 말을 마저 마쳤다.


“얌전히 따라주시죠.”





네드는 비좁은 마차 안에서 알폰스의 부하들의 눈총에 시달려야 했다. ‘과연 알폰스님이 점찍은 용사라 그런지, 평범해 보이는 게 적들이 방심을 유도하기 좋게 생겼군.’과 같은 말을 듣고 있으니 온몸에 진드기라도 붙은 듯 낯간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네드에게 다행이라면 비슷한 처지의 거츠가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그는 어딘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 창백했던 그의 안색과 비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피부에 생기가 있어 보였다.


“국왕 폐하, 그리고 용사님. 저희는 왕성으로 가는 도중에 시비스터에 들려 즉위식을 거행할 것입니다. 연설은 저희가 모두 도맡아 하니 두 분께서는 그저 서 있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데요.”


연설을 도맡아 했던 테너 가수 출신의 협회원이 네드를 위아래로 훑어보다 의문이 생겨서 말했다.


“역시 이건 아닌 것 같지?”


“역시 아니지.”


벽화를 그리던 화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구 내가 용사가 아닌걸 알아챈 건가!’ 네드는 생각했다. 자기들 스스로 오해해놓고 인제 와서 용사가 아닌 게 들키면, 그대로 땅속에 조용히 묻히며 없던 일이 될 것 같았다. 양치기는 무릎 위에 주먹 쥔 손안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벽화공이 진지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두 분 다 의상을 갈아입으셔야겠어.”


“예? 의상이요? 옷이요?”


“그렇습니다. 용사님. 그래스호퍼에서 즉위식을 열었는데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던 건 거츠 국왕님의 차림새가 농부의 차림새였기 때문이죠!”


“······예?”


네드가 되물었지만, 정작 예술가협회의 사람들은 서로의 세계관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용사님도 마찬가지예요! 즉위식을 할 때 국왕님의 곁에 서 계실 텐데 그런 넝마 따위를 입고 있어서야 테스널 왕국의 이름 아래 위신이 서지 않겠죠!”


벽화공이 네드의 낡은 셔츠를 잡아당겼고, 흥분한 목소리로 더더욱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때마침 저희에게 연극 의상이 있습니다! 늘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죠! 비록 예법에 맞는 정복이 아니지만, 트레비앙 의상실의 자수가 박힌 고급품이라고요! 그러니 그딴 저질 따위는 찢어버리자고요!”


테너 가수도 질세라 소리쳤다.


“코, 코발트블루!”


모든 사람이 그를 쳐다보자, 그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눈을 희번득 뜨고 말했다.


“제, 제 코발트블루 색의 옷을 바치겠습니다. 조금 사용한 티가 나지만, 늘 소중히 다뤄온 의상이지요. 용사님의 체형에도 잘 어울릴 옷입니다. 제가 장담하지요.”


벽화공이 큰 결심을 한 친구를 우러러보며 말했다.


“너······, 너! 그 옷은 네가 2막 1장에서 조명을 받으면서 나타날 때 입는 옷이잖아! 괜찮겠어! 그 옷이 없어도? 그 코발트블루 의상은 두 번 다시 만들 수도 없는 명품이야!”


“오, 나의 친우여. 더는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그 말을 아껴주게. 다만 내 나라에 대한 충성심만 기억해주었음 바라는 마음일 뿐이라네.”


‘이 사람들은 미쳤어.’ 네드는 생각했다.





하지만 예술가협회가 네드와 거츠에게 의상을 골라주며 떠들썩한 시간도 얼마 가지 않았다. 그들은 드디어 시비스터에 도착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시비스터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마족들과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이, 이것은!”


협회 사람들은 눈 앞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해명을 원하고 있었다.


“이것은 용사의 데뷔 무대인가.”


누군가 조용히 말한 것이었지만, 그 효과는 굉장했다. 협회원들은 순식간에 저 마을을 부수는 마족들이 알폰스 수장님이 마련한 연극이며, 네드가 나타나 구원하리라는 시나리오라며 철석같이 믿어버렸다.


마을에 닥친 거대한 위협. 혜성과 같이 나타난 용사가 그들의 적을 물리치고, 뒤이어 새로운 왕이 나타난다!


협회원들이 저들만 아는 용어를 나열하며 신이 나고 있던 차였다.


네드는 바로 칭송받던 ‘코발트블루 색의 연극 의상’에 팔다리를 쑤셔 넣고 뒤늦게 나타났다. 그가 보기에도 맵시 있는 옷이라는 건 인정하는데, 바짓가랑이가 꽉 끼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사타구니가 불편해 어기적어기적 걷던 네드는 협회원들에게 느닷없이 연극용 칼을 받았고, 시비스터에 나가 싸우란 말을 들었다.


심지어 그 칼은 장식만 화려했지, 연극용이라 날 따위는 벼려져 있지 않았다. 네드는 슬라임도 베지 못할 검을 들고 시비스터를 향해 등 떠밀려 가게 되었다.


“다 수장님이 계획하신 거니까 대충 휘둘러도 알아서 쓰러질 거에요! 저 괴물들이요! 뭣하시면 적당히 마법이나 부려주세요. 그러면 저들도 죽은 척 연기를 할 겁니다.”


네드는 그게 아니라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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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87화 해치웠나? 19.12.27 31 1 11쪽
86 86화 마왕성에 온걸 환영하는 바다. 용사여. 19.12.25 29 1 11쪽
85 85화 아파하는 나 자신이 얼마나 가련하던지. 19.12.20 33 1 11쪽
84 84화 벨라! 으악! 으아악! 19.12.18 34 1 11쪽
83 83화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구요. 19.12.16 30 1 11쪽
82 82화 저를 데려가세요. 19.12.13 37 1 11쪽
81 81화 방구석에 처박혀있던 쓰레기라고 했다! 19.12.11 3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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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73화 에취! 19.11.22 31 1 12쪽
72 72화 일어나셨나요, 달링? 19.11.20 42 1 12쪽
71 71화 드래곤은 아직 한창 잘 시간이라고! 19.11.18 38 1 11쪽
70 70화 삼키라니까요! 19.11.15 35 1 12쪽
69 69화 모두 하나같이 멍청하고 잔인하기 짝이 없어. 19.11.13 35 1 11쪽
68 68화 스튜는 좋아하나? 좋아해야 할 거야. 19.11.11 37 1 12쪽
67 67화 그렇군. 하지만, 거절한다. 19.11.08 34 1 12쪽
66 66화 건들면 문다. 19.11.06 40 1 12쪽
65 65화 애는 착해. +1 19.11.04 36 1 11쪽
64 64화 도시락인가, 아폴의? 19.11.01 30 1 11쪽
» 63화 이것은 용사의 데뷔 무대인가. 19.10.30 35 1 12쪽
62 62화 단단히 홀리셨군요. 19.10.28 38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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