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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품은 꽃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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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2.06.11 23:29
최근연재일 :
2022.06.19 16:00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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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0
추천수 :
122
글자수 :
132,905

작성
22.06.1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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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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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제32화 휘몰아치는 희락

조선시대로 돌아가 신선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흠뻑 빠져보시길 바랍니다. 역사는 우리 미래의 거울이기도 합니다.




DUMMY

혹시 말을 하지 못하는 여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녀가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듣는 것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뭔가 신비한 구석이 있는 여인이었다. 두 번째 청련의 서찰이 당도할 때까지만, 그 집에서 살게 될 거라는 글을 써서, 그 여인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잔잔한 미소를 입에 담을 뿐이었다. 그 여인은 잠자리나 식사준비 혹은 빨래를 할 때도, 여러모로 그녀를 극진히 돕고 배려해주었다.

어느 날 달이 휘영청 뜬 밤에 소피를 보러 밖으로 나간 설아는 너무 놀라서 간이 떨어질 뻔했다. 그 여인이 달빛을 받으며 춤을 추고 있었는데, 어찌나 아름다운지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와 같았다. 기가 막힌 손과 발끝의 동작으로 그려내는 춤사위는 생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조선 춤이었다. 이렇다 할 악기 소리도 없었지만, 그녀는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작은 노랫소리에 맞춰 사뿐사뿐 구름을 밟듯, 학 한 마리가 아름다운 날갯짓을 하듯, 몸을 세우고 낮춰가며 부드러운 춤을 사방으로 펼쳐내고 있었다. 그녀는 혹시 청련의 스승이었던 백련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춤은 반드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설아가 행방불명이 된 후, 여러 날이 지났을 때였다. 청련은 설아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일부러 우정에게 통보했다. 가죽 신발 한 켤레를 벗어놓고 한강으로 투신한 설아의 시신을 찾지 못하였으나, 그녀의 유서로 미루어볼 때, 자살한 것이 틀림없다고 하면서, 청련은 방성대곡을 했다. 우정은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잠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녀가 왜 자살을 하게 되었는지 그녀의 유서를 읽으면서 뼈저리게 실감할 수가 있었던 터라, 그는 그녀의 죽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의 성품이나 의지로 볼 때, 능히 그럴 만한 용기와 결단력이 있는 여인이라고 여기며, 그녀의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죽음을 현실로 인식하게 되자,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그의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너무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버린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는 서럽게 울음을 쏟아냈다.

“설아! 대체 내가 뭐라고, 나 같은 사내를 위하여 죽음을 택하다니요! 난 지금 너무도 아프고 괴로울 뿐이오.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이 내 마음과 온 세상을 덮어버리니, 이제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되었소.”

그가 쉰 목소리로 가슴이 터질 듯 울부짖었다.


그녀의 유품들은 화장터에서 한 줌 재로 태워졌다. 흰 항아리에 담긴 건 그녀의 유해가 아니었다. 청련은 그녀가 읽던 고서들과 옷가지들을 불에 태워 한 줌 재로 만들어냈다. 작은 항아리 안에 들어있던 재는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 위에 흰색 가루가 되어 안개처럼 흩어졌다. 우정은 그녀의 육신과 혼이 담겨 있는 흰색 가루라고 믿으며, 그걸 한강에 뿌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이 그의 손길이 배어있는 재들을 강물 위로 부드럽게 날려주었다.

그 광경을 강변에서 지켜보던 청련은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 없는 오열을 토해냈다. 젊디젊은 꽃다운 나이에 훌쩍 저승길로 떠나가는 그녀의 모습이 마음속에 그려진 까닭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녀가 죽지 않고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정말 죽은 것처럼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삶이 너무도 안쓰럽고 불쌍하게만 여겨졌다.

“내 딸 설아야! 너를 곁에 두고도 어미라고 밝히지 못한 나를 용서해다오.”

청련이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자신만의 비밀을 꺼내어 되씹었다. 설아의 아비가 죽기 전에 장악원에 맡긴 그 아이가 바로 자신의 친딸이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그 비밀을 설아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저 수제자로 삼기 위하여 피눈물이 나도록 혹독하게 훈련을 시켰던 지난날들이 가슴을 후리고 지나가는 바람결에 느껴질 뿐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설아가 친딸이었음을 밝히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어쩐지 그녀가 경성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아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청련은 눈물에 섞인 침을 간신히 삼켜가며 ‘꺼이- 꺼이-’ 서러운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우정은 흰 장갑을 끼고 그녀의 흔적이 묻은 재를 강 위에 뿌렸다. 불현듯 그녀의 춤사위가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강물 위로 솟구치는 잉어처럼 별안간 떠올랐다. 그건 눈부시게 화려하고, 혼까지 몽롱하게 만드는 춤사위였다. 그는 흰 장갑을 벗고 뱃머리에 앉아 준비해온 대금을 불기 시작했다. 밝고 화사한 웃음을 드러낸 채, 한이 맺힌 조선 춤을 추고 있는 설아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서 아른거렸다. 그는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그녀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도 아름다운 춤을 추면서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디선가 날아온 노랑나비 한 마리가 흰 한복을 입은 그의 어깨에 앉아 살랑살랑 춤을 추듯 날갯짓을 해댔다.

그는 여전히 구슬픈 가락이 담긴 곡을 쉼 없이 대금으로 연주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화려한 춤사위를 선보이는 아름다운 그녀의 미소와 희열로 채워진 그의 얼굴은 어느새 꿈결처럼 하나로 겹쳐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그녀가 살포시 다가와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 것만 같은 환상에 사로잡힌 채, 그는 평온한 얼굴로 대금을 연주했다.

“불란서로 가고 싶다고 했지요. 내가 그대의 가죽 꽃신을 가슴에 품고 파리로 가겠소이다. 그대가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곳이니.”

우정이 대금연주를 마치고, 양손으로 그녀의 가죽신을 가슴에 품었다.


조선에 대한제국이 세워지고 여러 해가 지난 후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됨으로 말미암아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일본의 통감부가 경성에 세워졌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했다. 이제 대한제국이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된 거나 다름이 없는 역사적인 비극이 시작되었다.


우정은 지리산을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가을 하늘은 청명했고 시원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 산이 그의 시야에 들어오자, 그는 감탄하듯 눈부신 얼굴로 신음을 쏟아냈다. 그는 무술과 학문을 가르쳤던 스승 도율을 만나기 위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일본을 등에 업은 이완용으로 말미암아 고종은 날마다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짙은 가비를 마시면서 씁쓸한 인생의 고독을 맛볼 수밖에 없는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친일파 대신들과 일본인들이 활개를 치는 곳이 되었다. 백성들도 희망을 잃어버린 절망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을 치며, 죽지 못해 겨우 살아가는 비참한 몰골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일본의 손아귀에서 도무지 벗어날 기력이 없는 조선을 수치로 여기고 있는 자가 우정이었다. 그는 그런 조선을 헤아려볼 때마다 견딜 수 없는 분노에 몸부림을 치곤 했다. 그래서인지 도율 스승을 만나 마음의 위로와 치유를 받지 않으면 살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설아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는 삶의 의욕을 모두 잃고 그저 떠돌이처럼 방황하며 살아야만 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깝고 처량해서인지 혼자 있으면 연실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그가 온갖 번뇌에 시달리며 지리산 자락에 있는 초가집 앞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흰색 한복을 입은 여인들이 장구를 메고 마당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도저히 산에 사는 여인들답지 않게 너무도 곱고 아름다웠다. 그녀들의 춤사위 또한 놀라울 만큼 빼어나서 그는 잠시 발길을 멈추고 그녀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두 여인의 옆모습을 한 번 쳐다보곤 가슴이 부서질 듯이 아려왔다. 잠시 눈을 감아봤다. 잊을 수 없는 설아의 모습이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진 탓이었다. 그는 가슴속에 숨겨두었던 설아의 가죽신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다가, 울컥하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굵은 눈물 줄기를 얼굴 위로 흘려냈다. 조금 떨어진 숲속으로 들어가서 그는 그녀들의 춤사위를 눈여겨 지켜봤다. 그러곤 늘 지니고 다녔던 대금을 꺼내어 호흡을 가다듬고는 연주를 시작했다. 장구 소리와 대금 소리는 꽃과 나비처럼 서로 연합하여 신묘한 소리의 조화를 이루어냈다. 그녀들은 숲속에서 들려오는 대금 소리를 듣고는 살포시 웃음을 입가에 담아냈다. 한들한들 어깨춤을 추면서 때론 앞뒤로 발끝을 살짝살짝 내밀며 그녀들은 우아한 곡선의 미를 드러냈다. 그녀들은 아름다운 장구춤의 절정을 향해 절묘한 선율을 담은 몸짓을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면서 흥이 난 우정도 신명 나게 대금을 연주하며 휘몰아치는 희락을 가슴으로 느꼈다. 문득 젊은 여인이 그를 향해 얼굴을 돌릴 적마다 그는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얼굴이 세상을 떠난 설아와 너무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는 장구춤과 대금연주가 멈추게 되면, 그녀의 얼굴을 꼭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심장은 연실 두근거렸고, 처음 설아를 만났을 때처럼, 어느새 그는 거친 호흡 소리를 내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여기가지 읽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복되고 좋은 일들이 많아지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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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28 ji******..
    작성일
    22.06.19 16:20
    No. 1

    30화 완주 축하드립니다!!
    계속 잼나융~~!
    공모전 끝나도 계속 연재해주셔융!! ^0^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2 gr*****
    작성일
    22.06.19 16:26
    No. 2

    감사합니다. 관심과 배려 덕분에 완주했네요- 앞으로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당분간은 타이핑을 쉬려고요. 고속주행하느라고 눈과 손가락이 좀 아프네요.

    복 많이 많이 받으세요. 파이팅!!!!!!!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9ps
    작성일
    22.12.10 18:32
    No. 3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2 gr*****
    작성일
    22.12.10 19:38
    No. 4

    만이천봉님 방문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문운속에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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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2화 휘몰아치는 희락 +4 22.06.19 60 4 10쪽
31 제31화 일본 자객 22.06.19 41 3 10쪽
30 제30화 끊어진 밧줄 22.06.19 33 3 10쪽
29 제29화 철도부설권 22.06.19 33 3 9쪽
28 제28화 조선의 춤사위 +2 22.06.19 37 3 9쪽
27 제27화 국제파티 22.06.19 34 3 9쪽
26 제26화 노서아 공사관 22.06.19 35 4 9쪽
25 제25화 조선 왕비의 죽음 22.06.19 34 4 9쪽
24 제24화 여우 사냥 22.06.19 31 3 9쪽
23 제23화 서찰 22.06.19 28 3 9쪽
22 제22화 빈 무덤 +1 22.06.19 34 4 9쪽
21 제21화 사냥개 22.06.19 31 3 9쪽
20 제20화 꼬꼬뱅 22.06.19 34 3 9쪽
19 제19화 밑밥 +1 22.06.19 34 4 9쪽
18 제18화 불란서로 가다 +1 22.06.19 33 4 9쪽
17 제17화 밤하늘에 뜬 달 22.06.19 31 4 9쪽
16 제16화 도율 권법 22.06.19 30 4 9쪽
15 제15화 무형의 벽 22.06.19 33 4 9쪽
14 제14화 그의 이름 22.06.19 33 4 9쪽
13 제13화 무서운 싸움꾼 +1 22.06.19 39 5 9쪽
12 제12화 좋은 동지 22.06.19 36 4 9쪽
11 제11화 금상첨화 22.06.19 35 4 9쪽
10 제10화 조선의 학자 22.06.19 39 4 9쪽
9 제9화 동양화 +2 22.06.19 41 4 9쪽
8 제8화 운명 22.06.19 40 4 9쪽
7 제7화 밀담 22.06.19 46 4 9쪽
6 제6화 꽃 사슴 한 마리 22.06.18 48 4 10쪽
5 제5화 가비 차 22.06.18 51 3 10쪽
4 제4화 불란서 공사관 22.06.17 58 4 10쪽
3 제3화 향기로운 꽃과 나비 +2 22.06.17 70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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