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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품은 꽃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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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2.06.11 23:29
최근연재일 :
2022.06.19 16:00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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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5
추천수 :
122
글자수 :
132,905

작성
22.06.18 12:19
조회
51
추천
3
글자
10쪽

제5화 가비 차

조선시대로 돌아가 신선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흠뻑 빠져보시길 바랍니다. 역사는 우리 미래의 거울이기도 합니다.




DUMMY

“믿지 못하시겠지만, 저······ 저는 첫눈에 그대를 보고 반했습니다. 처······ 천부님께 그대를 아내로 맞이하게 해달라고 서원기도까지 드렸습니다. 전 그대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내가 된 걸 모르시겠습니까?”

“이렇게 고집을 부리시면, 제가 죽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정 통역관님도 무슨 봉변을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 허니, 제발 저를 잊어주십시오.”

우정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녀를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는 자신이 사지가 찢겨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결단코 접을 수 없다고 울먹였다. 전하를 뵐 수 없으면 불란서 공사에게 고하여 전하의 허락을 받아낼 거라고 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것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그녀는 고통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임금님의 곁에는 중전마마도 계시고, 후궁들과 궁녀들이 많지 않습니까? 굳이 궁중 무희를 탐하실 명분이나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제가 불란서 공사님을 통하여 말씀을 올리게 된다면, 아마도 임금님은 기쁜 마음으로 내가 그대를 사랑할 수 있도록 윤허해주실 것입니다.”

“아직도 조선이 어떤 나라인지 그렇게도 모르십니까? 이곳은 미국이나 불란서가 아니라 엄격한 노비제도가 살아있는 조선 땅입니다. 그건 사사로운 인정이나 몇 마디 말로 해결될 문제가 절대로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녀의 눈가에 슬픔으로 얼룩진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는 잠시 입을 열지 않고 침묵을 지키다가 그녀의 깊은 눈동자를 주시했다. 그러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의 열정과 사랑이 오히려 그녀에게 큰 짐이 되어 고통만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궁중 무희도 결국은 왕의 노비나 다름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임금이 죽으라면 죽어야 하고, 임금이 옷을 벗으라면 벗을 수밖에 없는 궁중의 노비가 무희들이었다. 이성적으로 판단을 해본다면, 그녀를 놓아주고, 두 번 다시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아야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포기하려는 마음을 품으면 더욱더 그녀의 환영에 사로잡혀 숨조차 쉴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이 엄습해왔다. ‘이것이 죽음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저주받은 사랑이란 말인가?’ 그는 뜨거운 눈물을 꾸역꾸역 목 안으로 삼켰다. 이미 자신의 지식과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선을 넘었다는 것을 우정도 알고 있었다. 미칠 것 같은 마음이 그의 머릿속을 뒤흔들어 댔다. 그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실컷 울고 싶은 충동이 느껴져 미간을 심하게 찡그렸다. 그의 입술이 슬픔 속에서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는 문득 불란서 공사의 말이 떠올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불란서에서는 남녀 간에 그런 격렬한 사랑의 감정이 느껴지면, 사내가 꽃 한 다발을 갖고 그녀에게 찾아가서 진심이 담긴 고백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꾸밈없는 진정한 사내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받아주는 열정적인 존재들이 불란서의 여성들이었다. 사내가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담고 날마다 괴로워하며 비참한 삶을 살아간다는 건 비겁한 모습이었다. 그건 아주 쓸모가 없는 하찮은 졸장부나 하는 일이라고 여기는 자들이 불란서 사내들이었다. 만약 그런 사내가 주변에 있다면, 사람도 아니라며 여인들조차 손가락질을 해대는 나라가 불란서였다.

허나, 조선의 전통문화는 그곳과 전혀 다르다는 걸, 그는 뼈저리게 실감했다. 남녀 간의 순수하고 애끓는 사랑조차도 전통문화의 쇠사슬에 단단히 묶여 있는 폐쇄적인 나라가 조선이었다. 모든 인간의 평등과 자유가 보장된 불란서처럼 되려면, 절대적인 개혁이 필요한 나라가 조선이기도 했다. 그는 현실을 한탄하며 주먹을 쥔 손으로 가슴을 툭툭 쳤다. 뭔가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속에서 치밀어 올라왔다. 그의 입안에서는 탄식 어린 굵은 신음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왔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서도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일그러진 입술이 조금 열리며 작은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순수한 사랑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꽃향기가 물씬 배어 나왔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살포시 그녀를 끌어안으며 크고 부드러운 손으로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녀는 울음을 참으려고 애를 쓰다가 그만 격한 신음을 토해내며 왈칵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천한 노비나 다름이 없는 궁중 무희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생명을 걸겠다는 그의 애끓는 사랑이 너무도 감동적이고 고맙게만 여겨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천한 노비 신세가 되어 평생토록 궁중 귀신으로 살아가게 될 것을 생각하니, 서럽고 한 맺힌 눈물만이 연실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가 하찮은 벌레 같은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용기를 내어 고백도 하고 혼인까지 생각하는 걸 보면서, 그녀는 가슴 뭉클한 감동 속에 마음이 용해되었다. 그의 품 안에 있는 순간만큼은 그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라는 마음이 생길 만큼 행복했다. 무한한 기쁨이 꽉 막힌 그녀의 가슴을 뚫고 힘 있게 샘솟고 있었다.

우정은 설아를 데리고 불란서 공사관에 있는 숙소로 갔다. 마침 불란서 공사가 사적인 일로 이틀 후에나 공사관으로 온다고 하면서 숙소의 열쇠를 그에게 맡겼던 탓에, 그는 그녀를 그곳으로 초대할 수 있었다. 그녀가 주변을 너무 의식하며 남의 눈에 자주 띄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아서, 그는 그녀를 가장 안전한 장소인 공사관의 숙소로 불러들였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녀가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하여 그는 온갖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일부 한량 끼가 있는 조선의 사내들은 아무리 사랑하는 여인이라도 그저 하찮은 노리개 정도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는 달랐다. 그는 그녀를 마치 여신을 대하듯 했다. 상대방을 늘 배려하고 조심스럽게 언행에 신경을 쓰는 사내가 우정이었다. 그녀를 위하여 지극정성을 다하는 태도를 보면서 그녀도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런 열정과 사랑을 가진 사내라면 평생토록 함께 살아도 후회가 되지 않을 거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그의 얼굴을 대충 뜯어보면 어딘가 좀 낯설고 차가운 인상을 주는 사내라는 느낌이 들곤 했다. 하지만 자세히 눈여겨 뜯어보면, 그에게 남다른 새로운 매력들이 있었다. 그의 눈동자 하나 만큼은 어린아이처럼 맑고 순진해 보였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있었고 서양인처럼 피부가 유난히 흰 편이었다. 그는 하얀 무명치마처럼 흰 피부를 가진 조선 사내였다. 외형으로만 보면 그를 가까이한다는 게 아주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막상 그녀가 그를 사귀면서 색다른 맛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마음이 그리도 따뜻하고 감성적이며 온유할 줄은, 그녀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를 가까이한 후부터 설아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것은 그녀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마음이 그를 향해 흠뻑 기울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의 숙소에는 갈색 침대가 하나 있었고, 의자와 책상이 창문 쪽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관과 골동품 상점에서 구입한 서책들과 도자기들이 크고 긴 진열장 안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우정 통역관님은 고서나 도자기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이렇게 많은 고서들과 도자기들을 수집하신 걸 보면.”

“어린 시절부터 고서나 골동품을 꽤 좋아했습니다. 아마도 제 부친의 영향을 받은 모양입니다. 부친께서 얼마나 서책들을 좋아하셨는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손에 서책을 쥐고 계셨으니까요.”

“아!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부친은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조선의 춘향전이나 사씨남정기 같은 서책들을 즐겨 읽는 편입니다. 헌데, 부친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까지 서책을 쥐고 계셨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하신 분입니다. 저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후세에 남길만한 좋은 글들을 쓰고 싶습니다.”

그녀가 춤만 추는 무희라고 생각했는데, 서책을 읽고 글까지 쓴다는 말을 듣고 그는 그녀에게서 더 깊고 오묘한 매력을 느꼈다.

그녀는 책장 앞으로 가서 두리번거리다가 고서 한 권을 꺼내어 들었다. 그녀가 책장을 넘기며 읽는 동안, 그는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면서 주방으로 나갔다. 잠시 후에 그는 손수 빵과 가비와 과일 한 접시를 둥그런 은쟁반에 받쳐 들고 그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입술에서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얼른 보고 있던 책을 덮고 그가 들고 있는 은쟁반을 양손으로 받았다. 그는 괜찮다고 하면서 멋쩍게 웃었지만, 그런 일은 여인들이나 하는 거라고 하면서, 그녀는 은쟁반을 빼앗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달콤한 빵 냄새와 그윽한 가비 향이 담긴 하얀 잔 두 개가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눈부시도록 하얀 컵 안에서 찰랑거리는 짙은 갈색 가비가 신기하게만 여겨졌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가비 차를 보곤 호기심이 생겨 그녀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여기가지 읽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복되고 좋은 일들이 많아지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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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제32화 휘몰아치는 희락 +4 22.06.19 61 4 10쪽
31 제31화 일본 자객 22.06.19 42 3 10쪽
30 제30화 끊어진 밧줄 22.06.19 33 3 10쪽
29 제29화 철도부설권 22.06.19 33 3 9쪽
28 제28화 조선의 춤사위 +2 22.06.19 38 3 9쪽
27 제27화 국제파티 22.06.19 35 3 9쪽
26 제26화 노서아 공사관 22.06.19 35 4 9쪽
25 제25화 조선 왕비의 죽음 22.06.19 35 4 9쪽
24 제24화 여우 사냥 22.06.19 31 3 9쪽
23 제23화 서찰 22.06.19 30 3 9쪽
22 제22화 빈 무덤 +1 22.06.19 35 4 9쪽
21 제21화 사냥개 22.06.19 31 3 9쪽
20 제20화 꼬꼬뱅 22.06.19 35 3 9쪽
19 제19화 밑밥 +1 22.06.19 34 4 9쪽
18 제18화 불란서로 가다 +1 22.06.19 34 4 9쪽
17 제17화 밤하늘에 뜬 달 22.06.19 31 4 9쪽
16 제16화 도율 권법 22.06.19 30 4 9쪽
15 제15화 무형의 벽 22.06.19 33 4 9쪽
14 제14화 그의 이름 22.06.19 33 4 9쪽
13 제13화 무서운 싸움꾼 +1 22.06.19 39 5 9쪽
12 제12화 좋은 동지 22.06.19 37 4 9쪽
11 제11화 금상첨화 22.06.19 35 4 9쪽
10 제10화 조선의 학자 22.06.19 40 4 9쪽
9 제9화 동양화 +2 22.06.19 41 4 9쪽
8 제8화 운명 22.06.19 40 4 9쪽
7 제7화 밀담 22.06.19 46 4 9쪽
6 제6화 꽃 사슴 한 마리 22.06.18 48 4 10쪽
» 제5화 가비 차 22.06.18 52 3 10쪽
4 제4화 불란서 공사관 22.06.17 59 4 10쪽
3 제3화 향기로운 꽃과 나비 +2 22.06.17 71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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