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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품은 꽃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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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2.06.11 23:29
최근연재일 :
2022.06.19 16:00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1,468
추천수 :
122
글자수 :
132,905

작성
22.06.18 12:24
조회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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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0쪽

제6화 꽃 사슴 한 마리

조선시대로 돌아가 신선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흠뻑 빠져보시길 바랍니다. 역사는 우리 미래의 거울이기도 합니다.




DUMMY

“이건 불란서 공사님이 즐겨 마시는, 가비 차라고 합니다. 처음 마시는 분은 좀 쓰게 느껴질 겁니다. 허나, 자주 마시다 보면 그 맛을 알게 되지요. 달고 쓰며 신맛도 있지만,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향도 있고 달달한 맛까지 느껴지니까요. 이게 바로 서양에서 유행하고 있는 가비 차입니다. 궁궐에 계신 전하께서도 자주 드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가비 차가 든 잔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포크로 찍은 빵 한 조각을 그녀에게 내어주면서 걱정하지 말고 그냥 가비 차와 함께 먹어보라고 눈짓을 했다. 그녀는 그가 준 빵 한 조각을 씹으면서 맛을 음미했다. 조선의 찰떡이나 토종 꿀 혹은 한과 같은 음식에서는 전혀 느껴볼 수 없는 새롭고 묘한 맛이었다. 그녀는 가비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러곤 빵을 씹어봤다. 그 가비의 쓴맛이 빵의 단맛을 적당히 잡아주고, 구수한 향기가 나는 가비 한 모금이 한결 맛의 풍미를 북돋아 주는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절묘한 서양 음식의 맛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맛이 꽤 좋다는 표정을 눈빛과 미소와 어깨춤으로 살짝 귀엽게 표현을 했다. 그녀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시원하게 웃으며 철부지 아이처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엔 불란서 전통요리를 먹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하면서, 그는 들뜬 마음으로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속으로는 어쩌면 다음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정 통역관님!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냥 오고 가다가 한성 기생집에서 우연히 만난 기녀라 여기시고 저를 잊어주십시오. 저도 우정 님을 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고 마음속으로 그녀는 보이지 않는 눈물을 아프게 삼켰다.

“설아 씨! 난 지금까지 다른 누구를 위하여 살겠다고 고백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허나, 지금은 약속할 수 있습니다. 난 설아 씨를 위하여 살 겁니다. 설아 씨가 원하는 건 내가 뭐든지 해주려고 합니다.”

그는 자기가 한 말이 좀 쑥스럽게 느껴졌는지, 머리를 긁적이다가 그녀를 위하여 방 한쪽 편에 설치해 두었던 축음기를 틀었다. 불란서 공사가 사용하다가 그에게 선물로 준 축음기였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우며 슬픈 감정까지 느껴지게 하는 새로운 서양음악이 축음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 서양음악은 그녀의 귓가를 스치는가 싶더니 온통 방안을 푸근한 봄바람으로 채워주었다. 처음 들어보는 서양악기들의 연주 소리가 그녀의 가슴을 쿵쿵 두드리고 흔들며, 마음을 하늘로 높이 띄워 올렸다. 아무리 뛰어난 조선의 무희라도 그러한 서양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조선의 악기에서 나는 소리가 정적이고 한이 담긴 깊고 고운 내면의 가락이라면, 서양의 악기 소리는 뭔가 웅장하고 다양하며 솟구치는 파도와 계곡으로 스며드는 산바람과 같은 외면적인 부딪침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단 하루에 있었던 어설픈 만남이었지만, 그녀는 신선한 충격과 감흥을 혀끝에서 전신으로 받아들였다. 자신도 모르게 낯선 사내에게 마음이 끌려가는 걸, 자신의 의지론 도저히 막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 집착과 욕망을 버려야 깨달음을 얻고 육신 안에 있는 참된 내가 살 수 있다.’ 하고 그녀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녀가 가비 차를 다 마시고 찻잔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까지도 축음기에서는 알 수 없는 서양음악이 애절하게 물 흐르듯 연실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 그녀의 입안으로 달고 매끄러우며 힘 있는 그의 혀가 허락도 없이 불쑥 밀려 들어온 탓이었다. 온몸이 떨리고 머릿속에서 천둥 번개가 쳤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면서 우르르 별들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환상이 보였지만, 몸이 구름 위에 뜬 것처럼 황홀한 느낌이 혀끝에서 발끝까지 짜릿하게 뻗어 나갔다. 남녀 간의 입맞춤. 그건 난생처음으로 그녀가 마음에 드는 사내와 하게 된 신선한 사랑의 입맞춤이었다.

창문 밖에서 그 광경을 몰래 훔쳐보던 오정도는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순진한 줄로만 알았던 우정이 장악원 출신의 궁중 무희와 연분이 난 걸 보고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저 말도 안 되는 기가 막힌 사건이라고 여겼다. ‘적어도 궁중 무희라면 궁궐로 들어간 궁녀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헌데, 하늘같은 임금을 배반하고 외간 남자와 그것도 불란서 공사의 통역관과 눈이 맞아 대낮에 서로 속살을 맞대다니 이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아니지. 어쩌면 오히려 내게 잘된 일이야.’ 하고 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우정과 궁중 무희의 약점을 잡았으니, 두 연놈은 이제 내 손안에 있는 거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크크큭!’ 하고 오정도는 소리 없이 킬킬거렸다. 오정도는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창문 밖에서 그들의 뜨거운 애정행각을 낱낱이 지켜보며 침을 흘렸다.

“너무 예쁘고 아름다워! 궁중 무희가 어찌 저리도 곱고 눈부실 수가 있는 걸까? 아! 우정이 부럽다!”

오정도는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른 아침이었다. 설아가 머리를 감고 곱게 빗질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장악원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포도청에서 나온 포졸들이 누굴 찾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설아의 숙소 앞으로 십여 명의 포졸들이 거친 발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들 중에 포도청 종사관으로 보이는 자가 설아에게 거칠게 손가락질을 하며 ‘네가 설아라는 궁중 무희인가?’하고 거만한 음성으로 물었다. 번갯불이 치듯이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사납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당당한 목소리로 그렇다고 했다. 그와 동시에 그 포도청 종사관은 그녀를 포박하라고 포졸들에게 명했다. 포졸들은 흰색 포승줄로 그녀를 단숨에 묶더니 억센 손길로 장악원 밖으로 끌고 나갔다. 포도청 종사관은 어디선가 몰려든 기생들과 구경꾼들을 둘러보곤 권위적인 자세로 한 마디를 토해냈다. ‘궁녀가 몰래 궁궐을 빠져나가 외박을 하고, 외간 사내와 그것도 불란서 공사의 통역관과 불륜을 저질렀으니, 죽어 마땅한 일이다. 이 죄인은 참수형을 면키 어려울 것이니, 그리 알라.’ 하고 먹이를 입에 문 사나운 짐승처럼 커다란 눈알을 부라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청련과 장실은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마치 돌부처처럼 서서 참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지만, 그토록 빠르게 포도청에서 포졸들이 나올 줄은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도한 눈빛으로 스승의 얼굴을 되돌아보곤 맥없이 그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그건 마치 목에 쇠줄이 걸린 꽃 사슴 한 마리가 사납고 못된 사냥꾼들에게 질질 끌려가는 모습과도 흡사했다. 비록 포박된 죄인이 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지만, 흰색 한복을 입고 있는 그녀는 마치 은은한 향을 간직한 한 송이 목련처럼 아름답기만 했다.

그녀가 끌려가는 걸 보고, 청련은 장실을 불러 귓속말로 속삭였다.

“너는 어서 불란서 공사관으로 가서 그 통역관에게 이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 촌각을 다투는 시급한 일이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설아의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 청련이 떨리는 음성으로 장실에게 명을 내렸다.

장실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은 그에게 심적인 고통을 주었다. 설아가 포도청에서 나온 포졸들에게 잡혀갔으니 도와 달라는 비보를 그에게 전했던 탓이다. 그는 눈앞이 캄캄해 졌다. 손을 쓸 겨를도 없이 궁궐에서 나온 군사들에게 끌려갔다면, 생명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불란서 공사의 도움을 받아 고종의 허락이라도 받아냈다면 좋았을 거라고 하면서, 내심 후회를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알겠소. 내가 설아 씨의 조속한 석방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힘을 써볼 것이니, 아무런 염려도 하지 말고 돌아가서 기다리세요. 청련 스승님에게도 그리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되는 일이라고 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불란서 공사님이 도움을 주신다면, 곧 해결될 겁니다.”

“잘 알겠습니다! 허면, 그렇게 알고 저는 장악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한동안 울상이 되었던 장실의 얼굴에 밝은 화색이 돌았다.

어쩐지 신뢰감이 가는 우정의 말을 듣고 나서, 장실은 어두웠던 마음이 어느 정도 평안해 졌다. 반드시 설아를 절망의 감옥 속에서 구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무리 온 천하를 호령하는 조선의 임금이라도, 불란서를 대표하는 공사의 말을 우습게 여기진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기도 했다. ‘설마 임금님이 불란서 공사의 말을 무시하고 설아를 참수하여 불란서와 맺은 공약을 깨는 어리석음을 범하진 않을 것이다. 우정 통역관이 불란서 공사님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설아는 풀려날 수 있을 거야.’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장실이 씩씩하게 돌아가는 걸,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고 있던 우정은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은 위험이 설아에게 닥칠 것만 같아서 였다. ‘청나라 속담에 선하수위강(先下手爲强), 후하수조앙(後下手遭殃)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먼저 손을 쓰면 강해지지만, 나중에 손을 쓰면 재앙을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불란서 공사가 조선의 임금을 만나 간청을 하도록 해야 한다. 허나, 무슨 수로 불란서 공사를 움직인단 말인가?’ 그는 길게 한숨을 토해내곤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동자가 햇살을 받아 검푸른 보석처럼 번뜩였다.




여기가지 읽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복되고 좋은 일들이 많아지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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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제32화 휘몰아치는 희락 +4 22.06.19 73 4 10쪽
31 제31화 일본 자객 22.06.19 44 3 10쪽
30 제30화 끊어진 밧줄 22.06.19 36 3 10쪽
29 제29화 철도부설권 22.06.19 35 3 9쪽
28 제28화 조선의 춤사위 +2 22.06.19 40 3 9쪽
27 제27화 국제파티 22.06.19 37 3 9쪽
26 제26화 노서아 공사관 22.06.19 42 4 9쪽
25 제25화 조선 왕비의 죽음 22.06.19 37 4 9쪽
24 제24화 여우 사냥 22.06.19 32 3 9쪽
23 제23화 서찰 22.06.19 32 3 9쪽
22 제22화 빈 무덤 +1 22.06.19 36 4 9쪽
21 제21화 사냥개 22.06.19 33 3 9쪽
20 제20화 꼬꼬뱅 22.06.19 38 3 9쪽
19 제19화 밑밥 +1 22.06.19 36 4 9쪽
18 제18화 불란서로 가다 +1 22.06.19 38 4 9쪽
17 제17화 밤하늘에 뜬 달 22.06.19 35 4 9쪽
16 제16화 도율 권법 22.06.19 32 4 9쪽
15 제15화 무형의 벽 22.06.19 34 4 9쪽
14 제14화 그의 이름 22.06.19 36 4 9쪽
13 제13화 무서운 싸움꾼 +1 22.06.19 40 5 9쪽
12 제12화 좋은 동지 22.06.19 39 4 9쪽
11 제11화 금상첨화 22.06.19 37 4 9쪽
10 제10화 조선의 학자 22.06.19 42 4 9쪽
9 제9화 동양화 +2 22.06.19 46 4 9쪽
8 제8화 운명 22.06.19 44 4 9쪽
7 제7화 밀담 22.06.19 48 4 9쪽
» 제6화 꽃 사슴 한 마리 22.06.18 52 4 10쪽
5 제5화 가비 차 22.06.18 54 3 10쪽
4 제4화 불란서 공사관 22.06.17 63 4 10쪽
3 제3화 향기로운 꽃과 나비 +2 22.06.17 75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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