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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 님의 서재입니다.

가슴에 품은 꽃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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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2.06.11 23:29
최근연재일 :
2022.06.19 16:00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1,355
추천수 :
122
글자수 :
132,905

작성
22.06.17 20:57
조회
57
추천
4
글자
10쪽

제4화 불란서 공사관

조선시대로 돌아가 신선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흠뻑 빠져보시길 바랍니다. 역사는 우리 미래의 거울이기도 합니다.




DUMMY

“하하하! 얘! 너 그러다가 진짜 그 통역관의 부인이 되는 거 아니냐? 여기저기 통역하러 다니면서 돈도 많이 벌어 호화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면, 그건 진정 중전마마보다도 훨씬 근사한 인생이 될 게다. 아! 부럽다!” 요 위에 누워있던 궁중 무희가 양 볼을 붉히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설아가 아무리 잡아떼려고 해도, 우정의 뜨거운 눈빛과 창백한 얼굴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내내 지워지지 않고 둥실둥실 떠다녔다. 서관에서 한 번, 기생집에서는 진월의 모습으로 두 번, 경복궁에서는 궁중 무희로 세 번씩이나 그를 만났으니, 그건 인연 중에서도 보통 인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죽여 가며 그녀는 소리 없이 이불 속에서 입을 가리고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우정의 부인이 되어 큰 배를 타고 멀리 떠나는 상상을 하다가, 그만 고개를 여러 번 내저었다. 조선이라는 나라에선 신분의 차이가 엄격한데, 공주나 고관대작의 딸도 아니고 천민 노비 출신이나 다름이 없는 궁중 무희가 어떻게 불란서 통역관의 부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그녀는 혀끝을 깨물었다. 쓸데없는 잡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는 무언의 채찍질이었다. ‘그렇다. 세상의 욕망에 집착하면 고통이 생기는 법. 내가 왜 욕망의 노예가 되어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 안주하려는 것인가. 스승님께서도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똑바로 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허망한 망상에서 속히 벗어나야 내가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어.’ 그녀는 사그라져가는 욕망을 마음 밖으로 거칠게 밀어냈다.

그녀는 그날 밤에 꿈을 꾸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보라색 연꽃이 된 자신의 머리 위에 커다란 황금색 나비가 날개를 팔랑거리며 살포시 내려앉는 꿈이었다. 머릿속이 간질거리고 꽃잎들이 벌어지면서 연꽃은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듯 활짝 피어났다. 그 만개한 연꽃 위로 칠색 무지개가 뜨는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 마냥 화려한 꿈이었다. 하지만 그 황금 나비가 연꽃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을 때, 붉은 새 한 마리가 나타나 연꽃 잎들을 쪼아 먹으려고 날아오자, 황금 나비는 사력을 다해 연꽃을 보호하려고 거칠게 날갯짓을 해댔다. 그 황금 나비의 날개가 갈라지고 핏줄이 터져 핏방울이 뚝뚝 흘러내렸지만, 붉은 새는 쉬지 않고 연꽃을 쪼아 먹었다. 그 작은 나비는 붉은 새를 가로막으려고 연실 파닥이며 힘겨운 군무를 추고 있었다.

새벽에 잠이 깬 설아는 나비 장신구를 오래도록 들여다보면서, 그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해몽을 해보려고 나름 애를 썼지만,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 나비 모양의 장신구를 우정에게 다시 돌려주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은 가까이할수록 그만큼 마음은 상처를 받고, 평생토록 고통의 불구덩이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아무래도 우정이 더 큰 일을 저지르기 전에 그를 만나서 설득을 하고, 그 장신구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걸 밝혀야, 일이 제대로 수습될 수 있을 것이야.’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날이 밝아오자 우정은 숙소에서 일어나 얼굴과 손을 씻고, 불란서 공사관에서 가져온 빵조각에 꿀을 발라 먹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안의 혀에 감겼다. 향이 구수하지만 다소 쓴맛이 입안을 개운하게 만들어주는 가비 한 잔을 끓여서 마셨다. 불란서 공사가 즐기는 음식이었지만, 그것은 시간을 절약하고 조반을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평소의 습관대로 그는 한복을 차려 입고 밖으로 나섰다. 어쩐지 그녀를 처음 만났던 서관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만날 수는 없어도 그녀의 손길과 체취가 밴 서관이 그리워졌다. 그곳에서 그냥 서성거리다 보면 병든 마음이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체중도 줄고 밥맛도 떨어진 데다가 몸에서 열까지 나니, 그야말로 상사병이 아니겠는가. 내가 설아를 만나야 회복이 될 텐데.’ 하고 그는 그 서관을 향해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수면시간을 제대로 채우질 못한 탓인지, 두어 번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그는 정신을 차리고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었다.


고뿔이 심해서 잠시 의원을 만나고 오겠다며 궁궐의 숙소를 빠져나온 설아는 속보로 장악원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스승인 청련을 급히 찾아가 만났다. 그녀의 스승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주시했다.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불상사가 생기도록 처신을 한 것이냐? 연분이 났다면 궁궐로 들어가기 전에 말끔하게 정리를 했어야 마땅한 일이다. 궁중 무희는 이미 임금의 여자나 다름이 없는데, 그러고서도 네가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이냐?’ 청련이 따끔하게 훈계를 하면서 화를 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어서 빨리 우정을 만나지 않으면 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올라 자신이 위험해질 것만 같았다. 그녀의 가슴이 콩닥콩닥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허면, 언제 그 통역관이 이곳으로 온다고 하였습니까? 어디로 가야 제가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겁니까?” 그녀가 청련에게 물었다.

그녀의 스승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걸 어찌 알겠느냐고 하면서, 버럭 화를 냈다. 그러다가 설아가 불쌍하게 보였는지, 청련이 침묵을 깨고 겨우 입을 열었다. 그녀는 보름 후에 그가 장악원으로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설아에게 알려주었다.

설아는 단전에 기를 모으고, 느리게 심호흡을 했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행동이었다. 아무래도 보름 후면 늦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예측을 할 수 없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신을 찾아다니다가 나중에는 궁궐 앞에서 자신의 간청을 들어 달라고 전하께 애걸을 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서운 집착의 노예가 된 젊은 사내가 마음만 먹으면 무서울 것이 없을 거라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야말로 이성을 잃은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혀, 그녀는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사랑의 감정을 무섭게 짓누르고 있는 알 수 없는 형체로 인해 극심한 두려움에 빠지고 말았다. 절로 그녀의 손끝이 고추잠자리의 날개 마냥 파르르 떨려왔다. 임금의 여자를 탐한 사내라면 국법에 의해 옥에 갇히거나 처형을 당할 수도 있고, 자신은 임금을 욕보인 죄로 단칼에 목이 잘릴 수도 있다는 걸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그녀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의 마음을 다시 돌려놓아야 한다는 일념이 뾰족한 쇳조각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아프게 찔러 댔다. ‘그게 안 되면, 난 능지처참을 당해 죽을 수도 있다.’ 하곤 그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그녀는 불란서 공사관으로 달려가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그가 한가하게 공사관에서 업무를 보고 있을 상황이 아닐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는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저자거리의 서관이나 골동품을 파는 곳에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내다봤다.

“그래, 그곳으로 가면 그를 만나볼 수 있을 게야.”

그녀는 품 안에 그가 보낸 나비 형상의 장신구를 조심스럽게 집어넣고는 장악원을 나왔다. 그녀의 뒤에서 청련의 쉰 목소리가 비수처럼 날아왔다.

“설아! 넌 장악원 이편 기생이 아니라, 일편 궁중 무희라는 걸, 한시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너의 주인은 그 사내가 아니라, 조선의 임금님이시다.”

서관에서 좋은 서책들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던 우정은 서책 한권을 뽑아 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의 앞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한 여인을 바라보면서, 그는 숨통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하마터면 ‘허억-’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녀는 자색 옷고름을 단 미색 저고리와 녹색 한복 치마를 단아하게 차려 입고 있었는데, 가늘고 긴 목 위로 하얀 얼굴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처럼 보이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그가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설아였다. 그녀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그의 영혼을 단숨에 흡입하듯 바라보며 말없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어······ 어떻게 궁궐에서 빠져나와 이······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우정이 말을 더듬거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그녀를 대할 때 입안에 무엇이 들어있는 것처럼 혀가 꼬이고 말까지 더듬었다. 무슨 죄를 지은 사람처럼 그의 얼굴이 붉어지고 눈동자도 초점을 잃은 채 흔들렸다.

“우정 통역관님! 이걸 돌려드리려고 제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런 귀한 선물을 받을 만한 신분도 못 되고, 그걸 받아서도 절대로 안 되는 처지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녀가 양손으로 나비 형상의 장신구를 그의 앞에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냥 작은 제 마음이라 여기시고, 그 선물을 받아주십시오.” 그의 목소리가 힘없이 내려앉으며 기운을 잃었다.

그녀는 일편 궁중 무희가 되었으니, 임금님 앞에서만 춤을 추어야 하는 여인이라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어쨌거나 임금님의 여인이 된 몸이니, 함부로 궁 밖에서 다른 사내를 만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그를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궁궐 밖에서 남몰래 사내를 만나는 것은 국법을 어기는 일이나 다름이 없으니, 부디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놓아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여기가지 읽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복되고 좋은 일들이 많아지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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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제32화 휘몰아치는 희락 +4 22.06.19 59 4 10쪽
31 제31화 일본 자객 22.06.19 41 3 10쪽
30 제30화 끊어진 밧줄 22.06.19 33 3 10쪽
29 제29화 철도부설권 22.06.19 33 3 9쪽
28 제28화 조선의 춤사위 +2 22.06.19 37 3 9쪽
27 제27화 국제파티 22.06.19 34 3 9쪽
26 제26화 노서아 공사관 22.06.19 34 4 9쪽
25 제25화 조선 왕비의 죽음 22.06.19 34 4 9쪽
24 제24화 여우 사냥 22.06.19 31 3 9쪽
23 제23화 서찰 22.06.19 28 3 9쪽
22 제22화 빈 무덤 +1 22.06.19 34 4 9쪽
21 제21화 사냥개 22.06.19 31 3 9쪽
20 제20화 꼬꼬뱅 22.06.19 34 3 9쪽
19 제19화 밑밥 +1 22.06.19 34 4 9쪽
18 제18화 불란서로 가다 +1 22.06.19 33 4 9쪽
17 제17화 밤하늘에 뜬 달 22.06.19 31 4 9쪽
16 제16화 도율 권법 22.06.19 30 4 9쪽
15 제15화 무형의 벽 22.06.19 33 4 9쪽
14 제14화 그의 이름 22.06.19 32 4 9쪽
13 제13화 무서운 싸움꾼 +1 22.06.19 38 5 9쪽
12 제12화 좋은 동지 22.06.19 36 4 9쪽
11 제11화 금상첨화 22.06.19 35 4 9쪽
10 제10화 조선의 학자 22.06.19 39 4 9쪽
9 제9화 동양화 +2 22.06.19 41 4 9쪽
8 제8화 운명 22.06.19 40 4 9쪽
7 제7화 밀담 22.06.19 45 4 9쪽
6 제6화 꽃 사슴 한 마리 22.06.18 48 4 10쪽
5 제5화 가비 차 22.06.18 51 3 10쪽
» 제4화 불란서 공사관 22.06.17 58 4 10쪽
3 제3화 향기로운 꽃과 나비 +2 22.06.17 70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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