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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상어 님의 서재입니다.

여장공작은 사교계의 여왕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귀신상어
작품등록일 :
2022.01.29 12:54
최근연재일 :
2022.03.28 18:20
연재수 :
4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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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글자수 :
329,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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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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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정령과 용사와 마왕 (6)

DUMMY

“아, 안녕하세요?”


난 우선 손을 모은 채로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속은 이미 타들어가기 시작해 식은땀마저 흘리고 있었다.


젠장······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틀림없다. 에른은 정령검에게 선택받은 ‘용사’다.


그저 용사로서 선택받았을 뿐 아직 아무런 경험을 쌓지 못했던 카르트, 멜리아와는 다른 진짜배기 용사.


그들은 본래 나와 아는 사이였기에 정령의 충고보다 자신의 직관을 우선시했지만 이 에른이란 남자는 다르다.


어쩌면 곧장 내게 적의를 드러내면 악마의 아이니 뭐니 하는 말을 떠들어댈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나온다면 난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아니 애초에 용사란 게 원래 이렇게 살면서 마주치기 쉬운 족속들인가!?


변명을 할까? 모른 척 울어버릴까? 아니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다 그런 막무가내 전법은······.


내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그의 의심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동시에 손 안에 서서히 마력을 모아가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차하면 반격한다. 역시 그 수밖에 없다.


-꿀꺽


난 마른침을 삼켰고 에른의 두 손이 내게로 향하는 순간!


“이, 이럴 수가···. 네가 가련이구나. 가련 레시오스코프. 소문 그대로······아니 그 이상이야! 이렇게 예쁜 아이가 누님의 딸이라니. 내 조카라니! 그, 그렇지. 인사부터 해야지! 만나서 반가워! 난 에른 이그넨! 에른 삼촌이라고 불러줘!”

“네······?”


그건 당혹스러움.


난 내 어깨에 올려진 두 손에 얼떨떨하게 반응하며 몸을 굳혔지만 에른은 흥분한 상태였는지 전혀 개의치 않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적어도 누님의 출산일에는 황제 폐하의 명을 거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네 얼굴을 보러 왔어야 했는데!”

“에른······.”

“말도 안 돼! 대륙에 손꼽히는 절세의 미녀가 될 거라고 호사가들이 그렇게 떠들고 다니기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건 보나마나 매부가 쓸데없는 짓을 한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네 미모를 생각하면 그건 오히려······!”

“좀 진정 해라 바보야!”


-퍽!


드레스를 입으신 어머니의 발이 쭉 올라가더니 에른의 등을 걷어찼다.


“크학! 누, 누님······.”


에른은 바닥에 쓰러져선 애처로운 표정으로 어머니를 올려다보았지만 어머니는 단호하고 팔짱을 끼셨다.


“에른. 내가 편지에 적어놓은 이야기 기억하지? 내가 왜 너를 여기에 불렀는지.”

“네에······. 에렌델의 학장에게 보내는 추천서였죠?”

“그래. 가련은 특례 입학을 해야 하니까.”


에른은 품속에서 주섬주섬 서류를 꺼내 어머니에게 내밀었고 어머니는 그걸 한번 훑어 확인하신 뒤 뮤렌에게 건넸다.


-부스럭 부스럭


그녀는 그 종이 두루마리를 내 짐 속에 집어넣었다.


“혹여 그 자존심 높은 양반이 다른 소리를 할지도 모르니 네가 직접 따라가 담판을 짓도록 하고!”

“하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나 성태한 환영을 받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저 감동······. 우선 들어가서 식사부터 하시고···”

“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미 짐 전부 챙겨온 거 안보이니? 우리가 왜 전부 네 마중을 나왔겠어?”

“예?! 누, 누님 저 이래 뵈도 십성인데······.”


에른은 회포를 풀 새도 없이 곧장 다시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눈에 띄게 당황했지만 어머니는 생각 이상으로 단호하셨다.


“그래서? 조카가 태어나고 15년 동안 코빼기 안 비추다가 이제 겨우 나타나선 그 정도도 해줄 수 없다? 그게 어여쁜 조카에게 보일 태도냐?”

“그, 그렇게 이야기 하시는 건 아니죠!!”


에른은 어머니의 추궁에 당황하는가 싶더니 나를 보곤 손을 마구 저었다.


“가, 가련. 착각하면 안 된다? 삼촌이 절대 너를 미워했던 게 아니야! 다만 황제폐하의 명령으로 공사가 다망해서. 응? 알지? 이해해 줄 거지?”

“하하······.”


내 손을 꽉 잡고 정말 열심히 해명하는 그에게 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 정말 아무런 적의도 없는 건가? 그럼 그때 정령들이 했던 말은 대체 뭐였던 거지?


그리고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니라면 방금 십성이라고······. 그런 터무니없는 발언이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지나간 것 같은데······?


십성이라면 단신으로 성 하나는 거뜬히 함락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일컬어지는 괴물중의 괴물들. 하지만 내 앞에서 두 팔을 흔들어대며 날 달래기 위해 호들갑을 떨어대는 이 남자가 정말 그 정도의 강자인 걸까?


괴리감이 내 인지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으면 널 위해 선물이라도 사오는 건데. 뭐, 뭘 좋아하니? 역시 드레스가 좋아? 가방? 수도에 연줄이 잔뜩 있어서 한정판도 전부 구해줄 수 있는데!”

“선물 공세가 통하는 것도 어렸을 때나 그런 거지.”

“예엣?! 그런······.”

“후후. 안타깝게 됐군. 에른 이그넨. 어릴 때 가련은 지금보다 훨씬 예쁘고 귀여웠는데.”

“정말입니까?! 매부! 이런 젠장!!”


어이. 당신들. 그만해라. 나 자살한다.


에른과 아버지는 생각보다 사이가 괜찮은지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으며 신을 냈고 어머니는 뮤렌에게 무언가를 이야기 하고 계셨다.


난 안심 반 불안감 반으로 눈치를 살피며 우두커니 서 있으려 했지만 아까부터 줄곧 신경 쓰이는 시선이 하나.


-으음······,

“크흠!”

-으음············.


헛기침을 하며 괜히 눈을 피해도 소용이 없었다.


에른과 계약한 정령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지긋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대놓고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도 별 말이 없는 걸 보면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 게 맞는 상황인 것 같은데······. 설마 아직 의심에서 벗어난 건 아닌가?


난 다시금 심장이 조이는 것을 느꼈지만.


-흥. 여자는 외모보단 내실이지. 지나칠 정도로 얼굴이 예쁘면 속은 썩어있을 게 틀림없어.


아무래도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냥 째리는 거였구나.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고.


“가져왔습니다······.”


어머니의 어떤 명령을 듣고 조용히 사라졌던 뮤렌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의 두 손 위에는 손수건이 그리고 손수건 위에는 날카롭게 벼려진 강철검 두개가 올려져 있었다. 난 뒤늦게 지금 내가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다시금 기억해 냈다.


“가련 내가 이야기했지? 네가 우리의 말을 듣지 않고 탑에 가길 거부한다면 그 이유를 증명해야 할 거라고.”

“그, 그러셨죠······.”

“시험의 내용은 간단하다. 가련. 네가 파날라에 남아 싸우고 싶다면 에른을 상대로 그 실력을 증명해보련?”

““······네?””


나와 에른이 동시에 얼빠진 반응을 보였다.


“뭐라고······하셨나요?”

“잘못 들었니? 그렇담 다시 말해주마. 가련. 대학에 가고 싶지 않다면 내 동생 에른 이그넨과 대련해 그에게 유효타를 입혀보렴.”


그러니까······싸워? 내가 용사랑······십성이랑??


응······?


그건,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해요!?”

“누, 누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죠! 협의된 적 없는 사안 아닙니까?!”


어머니의 농간에 당한 나와 에른 두 명이 동시에 소리를 지르며 따지고 들었다.


“불만이 있다면 그대로 에렌델의 탑으로 향하면 될 일이다. 내가 집을 나올 땐 그럴 각오로 일을 저질렀어.”

“그때 어머니에게 십성을 상대로 유효타를 먹일 실력이 있었다고요?!”

“아니. 징징대며 매달리는 에른을 때려눕히고 나왔지.”

“몇 살이셨는데요?”

“에른은 7살.”

“억지잖아요!”


장난 때림?!


난 억울함을 호소하듯 주변을 둘러봤지만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와 뮤렌 역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는 듯 내 시선을 피하기만 할뿐.


“아아! 그래서 이렇게 당연하단 듯 모이신 거로군요?! 이미 제가 떠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셨으니까!”


십성은 대륙 최강. 내가 그의 상대가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디까지나 합당한 시험이다. 만일 네가 이곳에 남게 되더라도 에른에게 상처도 입히지 못하는 실력으론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것이 뻔하지 않니?”

“누, 누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어머니의 냉정한 발언에 오히려 에른이 나를 옹호하고 나섰다.


하지만 난 열불을 내면서도 속으로 그녀의 논리에 납득하고 말았다.


결국 내게 남은 길은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증명하는 것. 그뿐이다.


난 턱을 당기고 검을 향해 손을 뻗었고 그중 하나를 에른에게 살짝 던져주었다.


-휙, 턱!


에른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여기면서도 그 검을 받아 쥐었다.


“가겠습니다.”

“가, 가련. 진심이니? 이러다 다치게 될 거야. 너는···”

“얕보지 말아주세요. 에른 삼촌. 저도 레시오스코프의 지식과 이그넨의 힘을 물려받았습니다.”

“정말······.”


그는 곤란하단 듯 어머니의 눈치를 살폈고 그의 옆에 서있던 정령이 흥! 나를 비웃는 게 보였다.


-얼굴 좀 예쁘다고 세상이 만만한 줄 건방진 계집에게 본때를 보여주지.

“실피나! 좀!”


쟤는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잘됐다. 이곳의 누구도 내가 시험을 통과하리라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는 건 가장 허를 찌르기 좋은 때이기도 하다는 뜻!


“아하트······. (깨어나라)”


난 마어를 중얼거렸고 그와 동시에 둑이 무너진 듯 밝은 남색의 마력이 흘러넘쳐 공간을 물들였다.


-콰가가가가!!


“가, 가련. 너 정말······.”


에른은 안쓰럽다는 듯 눈썹을 구부렸다.


그래. 알고 있다. 그가 가진 마력은 정령검에 의해 몇 배고 증폭되어 압도적인 양과 밀도를 가지게 된다. 더군다나 아직 불완전해 보였던 멜리아 카르트와는 달리 완성된 그의 힘은 아마 말 그대로 동화 속의 용사에 필적할 테지.


하지만 근력이 강하다고 무조건적으로 전투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게 아니듯. 마력의 절대량이 승부를 판가름하지 않는다.


중요한건 법식의 응축성과 효율성.


나와 아버지가 만들어낸 통합 이론이라면 용사의 마력조차 꿰뚫을 수 있다. 난 그렇게 믿고 있다!


“알 라하디 울루 (뒤틀린 영혼의 강욕이여)”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남색의 마력은 내 손끝에서 각각 적색 녹색 청색을 띠며 3 갈래로 나뉜 뒤 나선을 그리며 다시 한 데 뒤섞였다.


여러 개의 얇은 창이 서로 엮이면서 원뿔 모양의 랜스 형태를 취한 독특한 형상의 무기.


애초부터 검으로 그를 상대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검의 승부로 들어가는 순간 나의 패배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일. 난 내 방식대로, 마법으로 승부한다!


-파즈즈!


내가 손에 그 무기를 쥐자 강력한 스파크가 바닥과 연결되었다가 튀기기를 반복했다.


그건 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1000년 전의 기록을 토대로 재현해낸 고대 드워프의 유물 아티팩트.


[빅토르의 강창]


기록으로만 남은 오리지널과 비교한다면 일회성인 데다 일부 기능만을 재현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일격의 데미지만큼은 충분히 재현할 수 있다.


즉 이건 현 시점에서 내가 구현할 수 있는 최강의 마법.


오직 적을 살상하고 파괴한다는 기능에 집중시켰기에 아버지에게조차 보일 수 없었던 비기.


하지만 용사라면 십성이라면 응당 버텨내겠지!


-쿠구구구······.


마법에 부여된, 지나치게 날카로운 살상력이 대기에 살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느낀 건 이곳에 있는 전원,


그렇다면 대비할 새도 없이 결판을 낸다!


“크윽!”


지나치게 많은 용량의 마력이 단숨에 소비된 탓에 혈관이 팽창하며 고통을 주었다.


-에른!! 날 집어라!! 죽는다!!

“뭐···!? 아, 알겠어! 실피나!”


에른은 뒤늦게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드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내 손에 들린 랜스에 부여된 기능은 매우 간단하다 적에게 겨눠진 즉시 모든 질량이 에너지체로 전환되어 투사되어 목적지를 꿰뚫는다. 즉 조준만 제대로 한다면 막는 것도 피하는 것도 불가능. 사용자인 나조차도 그 일련의 절차를 인식하지 못한다.


창끝은 앞을 향했고 그 순간···


-즈왕!


“큿!?”


내 손에서 창이 떠남과 동시에 에른의 옆구리에 창이 꽂혔고 그는 그대로 충격에 실려 뒤로 날아갔다.


-쾅!!


결국 20m 가량을 떠밀려간 그가 저택의 벽에 부딪치며 분진이 일어났다.


잡았나? 피어오르는 연기에 시야가 가려 판단할 수 없었지만. 고민 할 시간은 없었다. 주도권을 잡은 상태에서 우위를 굳힌다!


난 왼손으로 팔꿈치를 받치고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붙여 찌르듯 위로 올려 수인을 맺었다.


“아스타 데른 호른! (휘감아 오르는 염화!)”


직후 거대한 불꽃의 기둥이 피어오르며 분진과 반응해 더욱 큰 폭발을 일으켰다.


-콰쾅!!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미 뼈도 못 추렸을 화력.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 더!!


-짝!


두 손을 겹쳐 깍지를 끼고 세 번째 마법을 퍼붓는다!


“아다트 에네오! (대지신의 분노)”


-콰가가가가!!!


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른 돌주먹들이 폭발 너머로 쇄도해 처절한 폭력을 때려 넣었다.


짧은 찰나에 연속으로 발생한 굉음들로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하아······. 하아······, 된 건가?”


천천히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기절한 건······아니. 설마, 뒤?!


아무런 근거 없는 직감. 하지만 강한 확신이 있었던 난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몸을 비틀어 후방을 확인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에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과하마. 가련. 네 말대로 내가 널 얕봤던 모양이야.”

“말도 안···”


-퍽!!


칼등으로 후려치는 강력한 충격이 내 복부를 강타했고 다음 순간 세상이 빙글 돌아갔다.


정신이 흐려진다. 사실상 기습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청색급 마법을 무자비하게 퍼부었는데 그걸 순식간에 돌파해 날 기절시키다니······. 이게 십성. 진짜 괴물딱지잖아.


내 몸은 그대로 무너졌고 에른의 굵은 팔이 그런 나를 받쳐주었다는 기억만이 뇌리에 희미하게 남았다.


*


가련이 정신을 잃고, 테스트의 결과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뮤렌이었다.


“어머! 어떡해!?”


처음부터 이 승부를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던 갈발의 메이드는 승부가 결판난 즉시 허둥지둥 달려가 기절한 가련의 얼굴을 살폈다.


“걱정 마세요. 상처 없이 정신을 빼앗았습니다.”

“정말이겠죠!?”

“물론입니다.”

“아아! 정말!!”


에른이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뮤렌은 오히려 에른을 노려보며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는 주인의 상태를 살피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녀가 아는 한 무엇이든 거뜬히 해내는 천재에 가까웠던 가련이 이렇게까지 무력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처음이었기에 더욱.


고작 평민일 뿐인 메이드가 자그마치 제국의 십성에게 버럭버럭 대드는 꼴이라니. 누군가 봤다면 기겁하며 경을 칠 일이었겠지만 에른은 입맛을 다실뿐이었다.


처음 본 사랑스런 조카에게 검을 휘둘러버리고 만다면 누구나 그런 심정일 것이다.


“이제 납득하겠니? 내가 널 부른 이유를.”

“어느 정도는요. 네······.”


유리앙의 질문에 에른이 작게 수긍했다.


그는 설마 가련이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저항하리라고도 그리고 이렇게나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가냘프고 아름다운 귀족 영애. 그게 조카에 대한 첫 인상이었는데 말이다.


그는 팔꿈치부터 손목까지 일직선으로 찢어진 자신의 상처를 슬쩍 내려보고는 가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빅토르의 강창이 그의 옆구리를 꿰뚫기 직전 정령검을 사이에 끼워 넣어 간신히 빗겨냈지만 온전히 무사할 수는 없었다.


“매부. 대체 뭘 가르치신 겁니까? 저건 너무 위험해요. 아직 15살뿐이 되지 않은 아가씨가 배울만한 마법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가르친다고 아무나 배울 수도 없겠지만······.”

“내가? 글쎄······. 그 아이가 저지른 일에 놀란 것은 나도 마찬가지인걸. 아니. 이미 난 몇 년 전부터 난 항상 번뜩이는 가련의 재치에 놀라는 들러리 역할이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설마 십성 중 하나인 에른 이그넨에게 상처를 입힐 줄이야.


그가 방심하고 있었고, 가련을 공격할 의사가 없었고 또한 손에 들린 것이 평범한 검이었었다고 해도.


예언의 내용을 알고 있는 아버지로선 더욱 머리가 복잡해진다.


“가련은 에렌델로 가야만 해. 그 아이의 재능이 잘못된 방향으로 꽃을 피운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군.”

“지나치게 뛰어난 미색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매부?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죠.”


에른은 추하게 기절한 꼴조차 보호본능을 일으키고 있는 조카의 마성에 고개를 저으며 피를 닦았다.


“그런데 결국 제게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한 셈이 되는데요? 가련이 일어나면 직접 설득하실 생각이신가요. 누님?”

“뭐? 그럴 리가 없잖아. 붕대를 감아 상처를 숨기고 당장 출발하도록 해. 그 아이가 미련을 가지지 않도록.”

“······이따금 누님께선 너무 잔인한 일을 하십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가련이 타고난 운명은 너무나도 가혹하기에 부모의 선택을 아이에게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유리앙은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아들을 서글픈 눈으로 쳐다보다가 그에게 등을 돌렸다.


“떠나렴. 그리고 가련에게 허튼소리하면 십성이고 뭐고 가만두지 않을 거야.”

“질이 좋지 못한 농담이십니다······.”


이 아이가 그리도 이곳을 떠나지 않으려 했던 건 분명 부모에게 가진 애정 때문이었을 텐데. 하지만 동시에 누님과 매부가 이 아이를 영지에서 떨어뜨려 놓으려 한 것 역시 아이에게 품은 애정 때문. 복잡한 문제야.


“아. 마지막으로 이걸.”

“네?”


유리앙이 품 속에서 붉은 색의 보석 목걸이를 동생에게 건넸다.


그걸 받아든 에른은 고개를 끄덕이고 뽑아들었던 정령검을 허리춤으로 되돌린 뒤, 하나뿐인 조카를 등에 업었다.


그날, 가련 레시오스코프는 파날라를 떠났다.


그리고.


*


“뭐라고요? 편입생? 이 시기에 말인가요?”

“네. 카트린느 님! 거기에 추천 입학의 형식을 빌려서 편입하는 것이라 합니다. 오늘 학장실의 사용인들에게서 새어나온 이야기니 틀림없을 겁니다!”

“재미있네요. 또 혈통의 고귀함 따위는 없고 하찮은 마법 재능만 믿고 나대는 유나 비비프 같은 족속이 들어온다면 곤란한데 말이죠!”


내로라하는 대륙의 귀족들과 천재들이 모여드는 에렌델의 탑에서 가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한적하고 지루한 유배 생활이 아니었다.


작가의말

무대는 이제 파날라 바깥으로 옮겨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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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장공작은 사교계의 여왕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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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모험가들의 도시 뮤스턴 (3) 22.03.28 44 0 15쪽
42 사이비 종교 라마트라 (4) 22.03.08 32 2 21쪽
41 사이비 종교 라마트라 (3) 22.03.07 33 1 18쪽
40 혼의 수복 (3) 22.03.06 35 1 21쪽
39 혼의 수복 (2) 22.03.05 45 2 19쪽
38 사이비 종교 라마트라 (2) 22.03.04 40 2 17쪽
37 사이비 종교 라마트라 (1) 22.03.03 42 1 19쪽
36 혼의 수복 (1) 22.03.02 41 2 20쪽
35 모험가들의 도시 뮤스턴 (4) 22.03.01 45 2 18쪽
34 모험가들의 도시 뮤스턴 (2) 22.02.27 46 2 16쪽
33 모험가들의 도시 뮤스턴 (1) 22.02.26 55 2 17쪽
32 마왕의 혼 (5) 22.02.25 57 2 14쪽
31 마왕의 혼 (4) 22.02.24 54 2 15쪽
30 마왕의 혼 (3) 22.02.23 55 2 14쪽
29 마왕의 혼 (2) 22.02.22 62 2 17쪽
28 마왕의 혼 (1) +1 22.02.21 100 1 18쪽
27 황제의 명령 (2) 22.02.20 62 2 14쪽
26 황제의 명령 (1) 22.02.19 67 2 16쪽
25 에렌델의 탑 (3) 22.02.18 68 2 19쪽
24 에렌델의 탑 (2) 22.02.17 70 2 18쪽
23 에렌델의 탑 (1) 22.02.16 73 2 21쪽
» 정령과 용사와 마왕 (6) 22.02.15 79 2 19쪽
21 정령과 용사와 마왕 (5) 22.02.14 75 1 16쪽
20 정령과 용사와 마왕 (4) 22.02.13 97 1 17쪽
19 정령과 용사와 마왕 (3) 22.02.12 93 2 19쪽
18 정령과 용사와 마왕 (2) 22.02.11 98 1 18쪽
17 정령과 용사와 마왕 (1) 22.02.10 114 2 15쪽
16 세계 제일의 미녀 (5) 22.02.09 127 2 14쪽
15 세계 제일의 미녀 (4) 22.02.08 123 2 14쪽
14 세계 제일의 미녀 (3) 22.02.07 113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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