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_제3세계라니
스킨십이 금지된 파라다이스라니!
<53화>
제3세계라니
* * * * *
“흐억...”
경하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괜찮아?”
“괜찮아?”
지동일과 안지훈이 경하의 곁으로 다가들었다. 그들은 잠시 지금의 일 역시 파라의 계산은 아닐까 말하는 중이었다.
“어엉.. 사람들이, 사람들이 죽었어요.”
“어떤 사람들?”
“아까 1219구역?”
“이미 지나왔어. 무서워하지 마. 이미 죽은 사람이야.”
경하는 잠시 전의 기억에 몸서리가 쳐졌다.
“사람들은, 사람들은 그냥 죽은 것이 아니었어요. 검은 눈동자의 그림자. 그건 사람들을 모두 죽였던 물체였어요.”
“뭔가 기억이 났어? 동굴의 이야기?”
“어떤 것이 기억났어?”
지동일은 울고 있는 경하를 안아주었다. 경하는 잠시 울음을 그치면서 지동일을 밀어냈다. 이런 와중에도 스킨십은 두려운 본능처럼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지금 어서 나가야만 해. 위험할 수도 있어. 시간이 많이 없는 것 같아. 1219구역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봤지? 우리가 지나왔던 동굴이 사라졌어. 이젠 앞으로 가야 해.”
지동일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서둘러야 되는 건 사실이었다.
“바깥에 위험이 있더라도 나가야 하는 건 맞아요. 어서 움직여요. 지금 우리가 지나온 동굴이 닫힌 걸 보면 더 빠른 속도로 우리가 가야 할 길도 닫힐 수 있다는 말일 테니까요.”
“그럼 달려야지. 가자.”
경하는 힘을 내야 했다. 모두들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렸다.
휘잉---
드디어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다.”
“바깥에 거의 다 왔나 봐. 힘내.”
경하에게도 바람이 느껴졌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이들이 지나쳐온 동굴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달려요. 어서 더 빨리.”
잘못하면 동굴 속에 갇힐 수 있었다. 이들은 젖먹던 힘까지 짜내서 달렸다. 안지훈은 힘들어했지만 말하지 않고 달릴 뿐이었다.
“빛이에요.”
빛을 본 이들은 더 힘껏 달렸다. 동굴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더 놀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제발 경찰국만은 아니길 바랐다.
이들은 조심스럽게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은 겨울이었다. 눈은 없었다. 겨울이라고 모두 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찬바람이 불었다. 옷들이 기능을 하지 않아서 모두 추웠다. 긴장감은 추위와 함께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아무도 없어요. 다행이에요.”
“그런데 여긴 어디야?”
“음.. 이곳은...”
지동일도 이곳이 어딘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지난 번 지동일과 경하가 갔던 곳이 아니었다. 이들이 1219구역의 벽을 가로질러 바깥으로 나왔으니 어느 방향일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파라는 아니었다.
경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집중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자작나무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쪽이에요.”
경하가 두 개의 길에서 어느 한 길을 가리켰다.
“아니야. 이쪽이야. 이쪽으로 가.”
지동일이 말했다.
“왜요? 제 감은 이쪽이에요. 이쪽이 안전한 곳일 거예요.”
“내 감은 이쪽이야. 봐, 저기 높은 산 보이지? 저 쪽으로 가면 자작나무 숲도 가깝고 엑스트라 마을도 이어져 있을 거라고.”
“아니에요. 이쪽에도 산이 보이는데 이쪽 산이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길이에요.”
지동일은 경하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아니라고 했다. 지동일은 엑스트라 길을 잘 알고 있으니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느낌은 그쪽이 아니었다.
“경하 씨, 자작나무 숲을 그때 누가 데려다 줬지? 내가 데려다 줬잖아. 그런데 나보다 이쪽을 더 잘 알아?”
“그.. 그건 아닌데.”
둘의 이야기에 안지훈은 무척 놀라고 있는 것 같았다.
“뭐야, 두 사람?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고? 왜? 어떻게? 여기가 파라다이스는 아니잖아? 경계구역을 어떻게 왔다는 거야?”
“그렇게 됐어.”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이쪽이야.”
“아니야, 이쪽이라니까.”
경하와 지동일은 자신들이 예감하는 길이 맞다고 서로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리아는 우리가 파라다이스를 탈출했다는 것을 알 텐데 왜 엑스타라 사람들은 하나도 안 보이지? 안다면 도와줄 텐데. 경계구역이어서 일까? 경계구역은 파라다이스 경찰국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으니 리아의 사람들이 오기 힘들 수 있을 거야.”
“리아의 사람들까지 만났어? 나, 그냥 돌아가야겠어.”
“이 정도는 각오한 거 아니었어? 약한 모습 보이지 마. 경하 씨도 가만히 있는데.”
“그건 아니지. 경하 씨는 당사자... 아, 아니 그건 또 아니지만 어쨌든 엑스트라의 리아를 만나서 엑스트라에서 지내야 하는 건가?”
“당연하지. 지금은 엑스트라의 리아만이 우릴 도와줄 수 있어.”
“맞아요. 지금은 리아를 만나는 것이 급선무예요.”
경하도 리아를 만나야만 안전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파라다이스에 있었으면 경하 씨는 아마도 지금쯤 식물인간일 거야. 그런 일을 반복한다는 것은 아니잖아?”
지동일이 다시 강조했다. 지동일이 이렇게 자신을 위해 애쓰는 것에 경하는 감동할 따름이었다.
‘역시 지동일이 가자고 하는 쪽으로 가야겠다. 저렇게 나를 위해 애쓰는 마음인데. 그리고 지난번에 자작나무 숲을 안내해준 것도 지동일이니까.’
경하는 지동일을 믿어보기로 했다. 지동일 덕분에 여기까지 왔으니 나머지도 믿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이 선택은 훗날 두고두고 후회를 남기게 했으니 선택의 순간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일의 선택은 언제나 작은 것이지만 직선의 각도가 조금만 바뀌어도 그것의 끝은 너무도 다른 결과에 다다르곤 했다. 경하의 선택도 그러하였다.
겨울 숲은 이파리가 없어서 적이 어딘가 숨어서 엄호하며 나타날 것 같지는 않았다. 겨울 숲은 산의 능선을 훨씬 잘 보이게 하였지만 모르는 길은 의미도 없어 보였다. 이들은 자연과 너무 멀리 살아온 터였다.
“추워서 해가 지기 전에 동굴이라도 찾아야 할 것 같아. 아니면 불을 피울 곳을 찾아야 할지도 몰라.”
보이스카웃 소년처럼 지동일이 말했다.
“불을 피웠다가 들통이라도 나면 어떡하려고요?”
“맞아. 불을 피우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어.”
이들은 일단 추위로부터 피할 곳을 피해야 할 지경이었다. 바람은 너무 차가웠다.
“그런데 마라는 통신이 안돼요?”
“아직 안 되네. 경계구역 가까운 곳에서는 통신이 되는데 여긴 아닌가봐. 바비는?”
“바비 역시 통신이 안 돼요. 바비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봐 걱정이에요.”
“걱정하지 마. 은신의 능력을 보유했으니 알아서 살아 있을 거야.”
“은신의 능력이라니? 그건 또 무슨 능력이야? 이건 뭐 너무 놀라운 거 아니야?”
“은신의 능력이 있어요?”
안지훈과 경하는 은신의 능력이라는 생소한 말에 놀라고 있었다.
“그건 해킹능력 위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어. 해킹은 다른 프로그램에 살짝 숨어들어가서 다른 프로그램을 빼오거나 망가뜨리기도 하잖아. 들키지 않게 자신을 숨기고 여기 저기 묻어서 옮겨가는 것이 해킹의 능력 중 하나라면 은신의 능력은 그렇게 어떤 프로그램 뒤에 숨어 있다가 필요할 때 발현되는 능력이야.”
“바비도 은신의 능력이 있어요?”
“우리 마라한테 고마워나 해. 이번에 시스템 리셋 전에 마라가 바비에게 아주 엄청난 힘을 나눠줬으니. 마라가 큰 일을 한 것이지.”
“마라는 정말 대단해요. 그런 일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실행했다는 건가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업그레드까지는 마라가 한 것이 맞아. 그러나 실행은 주인의 승인이 있어야 해. 내가 부탁했어. 마라에게.”
“마라에게 부탁했다고요?”
“나 역시 내가 파라다이스를 빠져나갈 경우, 마라가 걱정되었거든. 그래서 물었어. 내가 상황이 복잡하게 되어 파라다이스를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방법이 있냐.”
“그래서 마라가 방법을 찾은 건가요?”
“놀라운 건 마라가 이미 생각해두었다는 거야.”
“왜요?”
“생태적으로 주인을 배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위기가 닥칠 경우 가상의 일을 시뮬레이션해봤다고 해. 그러다 방법을 찾았다고 했어.”
“스스로 위기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워요. 정말 마라의 능력은 어디까지일까요? 그런데 왜 아직까지 그런 능력을 알 수 없었을까요? 가령 다른 ABT들은 서로 연결이 되어있기도 하니까요.”
“마라는 자신의 능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에게 위험하다는 것을 안 것 같아.”
“난 들으면서도 너무 놀라 할 말이 없어.”
안지훈은 그저 놀라운 것 같았다.
“그래서 바비도 생존을 위한 여러 가지를 업그레이드했군요. 다행이에요. 어디서든 바비가 살아 있다는 것만도 너무 좋아요. 우리가 마라나 바비를 부를 수 있는 상태가 오면 그들이 찾아온다는 거잖아요? 우리가 동굴에 있을 때 바비가 찾아온 것처럼요.”
“마라가 이번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바비에게 업그레이드 해줬더니 바비가 핑크 레벨 감성단계를 마라에게 업그레이드 해줬다고 해. 난 그건 원치 않았는데 마라가 궁금했나 봐. 자신은 지적인 일만 관심 있었는데 바비의 반응이 의외였다나?”
“고마워요. 바비에게 큰 선물을 주셨네요.”
“고맙다고 하니 기분이 좋긴 해.”
“그런데 길이 영 안 나오네요.”
“으윽. 좀 불안하긴 한데. 이 정도면 길이 나와야 하거든.”
“뭐라고요? 이곳을 고집한 거잖아요.”
“우리 나름의 길을 찾는 법칙이란 게 있잖아. 그걸 따랐을 뿐이야. 그런데 지금은 의외라서.”
“추워죽겠어요. 우린 길을 못찾아서 죽는게 아니라 추워서 동사할 지경이에요.”
곧 해가 질 것이었다. 어두우면 더욱 곤란할 지경이 될 것이었다.
“큰일이야. 가장 안 좋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는데.”
“뭔데요? 설마 제3세계?”
“제3세계? 날 차라리 지옥에 보내줘. 상상만도 무섭다.”.
날 그냥 둘 수 없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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