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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막심! 절망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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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F
작품등록일 :
2021.05.26 01:43
최근연재일 :
2021.08.1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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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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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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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12.

DUMMY

“애초에 준비된 필드에서도 살아남지 못하는 걸 상대로 뒀을 리도 없지.”


이제부터 싸우라고 한 게 방금 전이다. 그런데 싸우라고 하자마자 곧바로 죽여 버리는 일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아무래도 신이 준비한 존재인 만큼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 지독한 열기 속에서 얼굴을 포함한 전신을 갑옷으로 꽁꽁 싸매고 있음에도 호흡이 거칠어지기는커녕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아마도 여신이 미리 환경에 대응하는 장비를 장비시켰거나 별도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조치한 것 같았다.


‘연예인이랑 재벌, 그리고 적을 걱정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일은 없지.’


한마디로 괜한 걱정이었다는 소리다. 하물며 이제부터 싸울 적을 걱정했으니 득보단 실이 훨씬 크다.


“그건 뭐, 됐다고 치고.”


자, 이제 어떻게 한다?


용사의 눈이 부동의 기사를 훑었다.


“안 움직이네.”


기사는 처음과 똑같은 자리에 그저 서 있을 뿐이었지만 그 변함없는 모습은 얼핏 멍때리는 것처럼도 보이기도 했다.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방법은 투구 전면에 가로로 그어진 틈 사이로 희미하게 반짝이는 공허한 푸른빛뿐.


이대로 계속 움직이지 않아주면 서로 좋은 셈이었지만 그래서야 이곳이 마련된 의미가 없다.


‘분명 도중에 멈추는 일은 없다고 했지.’


여신은 말했다. 도중에 멈추는 일은 없을 거라고, 둘 중 하나가 행동불능이 될 때까지 싸움은 계속될 거라고.


아마 여신은 했던 말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기사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이유는 단순히 튜토리얼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망설이는 용사에게 여신이 마지막으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것과 동시에 그가 먼저 움직이기를 원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용사는 이제 더는 피로하지도 않건만 이상하게 피로감을 느끼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잠시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어차피 피하는 건 불가능해.’


이미 이곳은 여신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었으니, 어떤 선택을 하던 간에 결국엔 싸움을 피할 순 없었다. 어떻게 입을 놀린들 여신은 들어주지 않을 테고, 무엇보다 입을 놀릴 상대가 사라져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슬슬 진짜로 각오를 다져야 한다. 안 그럼......’


용사는 자신을 담담히 바라보던 여신의 눈을 떠올렸다. 직접 입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명백히 튜토리얼의 위험성을 암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움직이지 않는 펀치머신과 달리 이번에는 실제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상대였다. 언제 어디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이 안 되는 만큼 생각처럼 원만하게 굴러가지 않을 공산이 컸다.


‘그리고 저 기사의 힘이 최저 30점은 넘어선다고 했지.’


말이 30점이지 그저 힘 하나를 뜻하는 게 아닌 종합적인 능력치의 합이 30점 오버였다. 물론 60점대인 용사와 비교할 순 없겠지만 마냥 경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애초에 테라의 최상위 기사의 힘이 머신 기준으로 최소 30점 이상이 나온다고 들었는데도 어떻게 그리도 쉽게 승리를 자신할 수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머신의 30점이 절대 평범한 30점과 다르다는 것을 직접 몸으로 알아봤음에도 그랬다.


그 당연한 것을 왜 지금껏 잊고 있었는지. 갑작스레 상상도 못한 힘을 가지게 된 탓에 잠시 눈에 뵈는 게 없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재차 현실을 자각하니 지금껏 저 혼자서 사람을 죽이니 마니 했던 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후우. 침착하자. 침착. 아직 내가 무적이라고 증명된 게 아니야.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평범은 벗어났지만 아직 특별까진 아니다. 설령 점수 차가 두 배나 난다고 해도 방심해선 안 됐다.


용사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이후 덮쳐온 위기감 때문에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후우우우우.”


용사는 많은 감정을 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 번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쓸어내린 얼굴에는 긴장과 체념이 뒤섞여 있었지만 나름의 각오 또한 함께 했다. 적어도 앞으론 얼굴에 드러날 정도로 거부감을 표하진 않을 것이었다.


‘절대 방심하지 말자.’


각오를 마친 용사는 정면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속으로 신중히,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다짐하며 무거운 첫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기사와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용사의 전력으로 뛴다면 한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용사는 앞서 다짐한 대로 방심하지 않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결코 크지 않은 보폭으로 조심조심 기사를 향해 다가간다. 하지만 나아가는 몸과 달리 용사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이 떠올라 있었다.


한발, 한발 기사와 가까워짐에 따라서 긴장감이 배로 솟구치고 있건만 시야에 든 기사는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다. 흐트러짐이 없다. 미동이 없다.


그것이 용사에게는 더 없이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대체 왜 안 움직이는 거야?’


비선공도 비선공 나름이지. 우락부락하게 생긴 적이 콧김을 푹푹 내쉬고 있으면 그래, 다가가면 공격하겠구나 싶어 대비라도 하지, 무슨 장식물처럼 숨소리도 없이 서 있기만 하니 뭐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지 알 수가 있나.


아무래도 실전경험이 없다 보니 적의 침묵은 그 자체로도 초심자에겐 압박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저리도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야 이쪽도 덩달아 뻣뻣해지게 된다. 그러나 용사의 발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심신을 옥죄는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본인의 발걸음에 집중하다 보니 발이 멈출 틈이 없었던 탓이다.


오히려 자신의 발걸음에 집중하는 편이 효과적으로 압박감을 중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부터는 다리의 움직임은 더욱 더 빨라지기만 했다.


그 탓인지 처음에는 머뭇거림이 존재하던 그의 발걸음도 이제는 거의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수준이 되어 있었는데, 덕분에 둘 사이의 거리는 더욱 빠르게 좁혀지고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용사의 호흡도 가빠지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다가가게 할 셈이냐?’


대체 언제까지?


용사는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현 상황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느꼈다.


이제 곧 퍼스널 스페이스가 개인적인 영역까지 도달한다.


타인이 접촉하면 불쾌감을 느낄 거리이자 팔을 길게 뻗으면 그냥 닿는 거리란 말이다.


원래 사람이 이 정도 거리까지 다가가면 자연히 경계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눈앞의 기사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불쾌감도, 짜증도, 불안도, 경계심도 다가오는 이에게 표출할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다. 이쯤 되면 무언가를 느끼긴 하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인격 같은 건 없는 건가?’


용사는 그의 존재를 인식한 이래 처음으로 그의 존재를 의심했다.


여신은 분명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라고 확실히 구분했지만 그럼에도 용사는 그를 사람으로 인식했다. 그렇기에 그의 안위를 걱정했고 여차하면 생존에 협력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본 기사의 모습은 분명히 그 확신에 금이 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인형, 인가......’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것.


그리고 기사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둘 중 먼저 거부감을 느끼고 물러선 것은 기사가 아닌 용사였다.


‘이, 이 이상은 안 돼.’


“크으흑.”


용사는 무의식중에 제 잇속을 짓씹고는 그 고통에 두 눈을 부릅떴다.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덕분에 긴장과 압박으로 좁고, 어둡고, 흐릿하기만 했던 시야가 확 넓어졌다. 하지만 직후 용사는 느닷없이 지근거리에 나타난 기사의 모습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쳐야 했다.


“우왓!”


‘어, 언제 이렇게......’


언제 이렇게까지 가까워졌던 걸까. 아마도 너무 긴장했던 나머지 시야가 좁아져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다행히 갑작스러운 시야 확장에 놀라 뒤로 물러난 덕분에 서로 간에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용사는 의식적으로 몇 발 더 물러난 뒤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어쩐지 이 이상 다가가선 안 될 것 같은 불길함이 그리하게 만들었다.


철컥.


그 순간 용사는 묘한 금속음이 자신의 귓가를 스쳤다고 느꼈다.


아주 작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소리가 난 것조차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였기에 들었다기보다는 소리가 나는 것을 느꼈다는 쪽이 더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마저도 정말로 소리가 난 게 맞는지 의심스러워 사실상 감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소리가 났어.’


게다가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마치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돌연 언젠가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확히 제목이 어떻고,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너무 오래돼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눈앞의 기사처럼 갑주를 착용한 기사가 잔뜩 나오는 중세풍 영화였던 걸로 기억했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두터운 갑주를 입고 허리춤에는 검을 차고 있었고,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마치 주머니 속 동전이 절그럭절그럭 소리를 내는 것처럼 갑주의 이음새끼리 부딪치면서 딱 이와 비슷한 소리를 냈던 기억이 있었다.


‘설마?’


거기까지 떠올린 용사는 혹시 하는 생각에 기사의 허리춤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보았다.


아주 잠깐. 조금이라도 시선을 주는 게 늦었다면 보지 못했을지도 모를, 눈 한 번 깜빡이는 순간 어느새 원래대로 되돌아가 버릴 정도로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찰나 기사의 왼손은 명백히 허리춤에 걸린 칼집을 쥐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지나간 일이었기에 자신이 잘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틀림없었다. 기사가 움직였다.


지금까지 움직인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기사가 드디어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자신이 들었다고 느낀 소리가 바로 저것에서 비롯되었음을 직감했다.


기사가 취한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정도로 용사는 바보가 아니었다.


칼집에 얹어진 손은 당연 검을 뽑기 직전 단계다. 즉, 기사는 자신의 검을 뽑으려 했단 뜻이었다.


기사는 용사와 싸울 적으로 설정되었으니 용사가 이리도 가까이 다가오면 검을 뽑는 것이 당연했다. 오히려 어째서 그런 당연한 것조차 떠올리지 못했는지 그 순간 정신이 완전히 나가 있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그런데 손까지 가져가 놓고 왜 뽑지 않았지?’


저도 모르는 사이 베일 뻔했다는 사실에 오싹함을 느끼면서도 용사는 이 부분에서 의문을 느꼈다.


분명 방금 전 용사는 정신적으로 크게 몰려 있었다. 자신의 시야가 좁아진 것도 기사가 검을 뽑을 수 있다는 위험성도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아마 그보다 훨씬 작은 체구의 어린아이조차 노리고자 했다면 간단히 급소를 노릴 수 있었을 만큼 빈틈을 드러낸 순간이 바로 그때였다.


말 그대로 절호의 기회.


검을 들고 있는 이상 뽑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런데도 기사는 검을 뽑지 않았다. 도리어 칼집을 잡은 손을 도로 놓음으로써 원래는 나지 않았을 소음을 발생시켰다.


원래라면 기사의 움직임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을 터인데, 이 사소한 행동 하나로 용사가 자신의 행동을 잡아내도록 만들었다.


대체 기사는 왜 그런 실수를 했던 것일까?


자아가 없는 인형이라서?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인형이기에 그런 사소한 부분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일까?


곰곰이 생각해본 용사는 자신의 추측이 반 정도만 맞을 거라고 판단했다.


확실히 기사는 여신이 말한 대로 사람보다는 인형이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사람과 똑같은 구조와 생김새라는 부분이 다소 꺼림칙하긴 했지만 한 번 확신에 금이 가고 나니 아무리 용사라도 완전히 같은 사람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기에 용사는 큰맘 먹고 그를 사람으로 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를 보는 불쾌감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보는 관점을 사람에서 인형으로 바꾸니 확실히 이질감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사람이 아닌 인형이라고 생각하니 지금껏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떠올릴 수 있었다.


용사가 보기엔 기사는 인형보다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자동기계에 더 가깝다고 봤다. 미리 설정된 설정값을 따라서만 움직이는 무척이나 정밀한 기계장치 말이다. 그리고 기계는 고장이 나지 않는 이상 어지간해선 실수를 하는 일이 없다.


기사가 정말로 살아있는 기계라고 한다면 그가 보인 일련의 행동은 아마도 그에게 내장된 알고리즘에 따른 행동양식일 가능성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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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3. 21.06.16 8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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