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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길의 중간에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2.07.11 15:56
최근연재일 :
2012.07.11 15:56
연재수 :
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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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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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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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23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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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14)

DUMMY

[사이린]


목욕을 마친 두 사람은 탈의실로 돌아왔다. 몸은 깨끗이 씻었지만 여전히 사용료가 아깝게 느껴지는 건 변함이 없었다. 이제까지도 그랬지만 나중에라도 제 돈 주고 목욕탕에 올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 사물함 뚜껑을 열었다.

“아, 사이린씨.”

하미가 부르는 소리에 사이린은 옷을 입으려다 말고 그녀를 바라봤다.

“이거 입으세요.”

그녀는 시장에서 손수 골라 사온 새 옷을 건넸다. 사이린은 누가 보아도 미소를 지을 정도로 얼굴에 기쁨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가지런히 접힌 짙은 녹색 옷은 새 옷 특유의 냄새와 촉감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저 주시는 거예요?”

“네, 빨리 입어봐요. 그건 저한테 주세요.”

그러면서 하미는 사이린이 꺼내려 했던 낡은 옷을 낚아채듯 집었다. 옷에서는 아직도 생선 비린내가 진하게 나고 있었다. 하미는 그 옷을 적당히 포개서 자신의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바구니 안에는 사이린의 옷 말고도 하미 자신의 옷이 여러 벌 들어있었다.

사이린은 새 옷의 양쪽 어깨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잡고 공중에서 주르륵 펼쳐봤다. 상의와 치마가 연결되어 한 벌로 돼있는, 여태까지 입던 옷과 같은 종류의 옷이었다.

“여름이라서 치마는 좀 짧은 걸로 샀는데 괜찮죠?”

하미의 말에 옷을 몸에 대보았다. 이전에 발목까지 내려오던 치마에 비해 새 옷은 무릎 아래에서 치마가 끝났다. 사이린은 이 옷을 입고 풀밭을 지나가면 다리에 상처가 많이 날 거라 생각했다.

“시원해서 좋을 것 같은데요? 고마워요.” 정작 입에서 나온 말은 하미가 마음 쓰지 않게좋은 면만 부각시킨 말이었다. 약간의 단점이 있다고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리슈넬이 아닌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기뻐했다.

두 사람은 강의 하류로 내려왔다. 하미가 바구니에 넣어 가져온 옷들을 빨기 위해서였다. 사이린이 자기 옷을 스스로 빨려고 했지만 하미가 “목욕도 했고, 새 옷도 입었는데 금방 더러워지면 좀 그렇잖아요.”라고 하면서 다른 옷들과 함께 같이 빨아주기로 했다. 정작 본인은 목욕 뒤에 땀을 흘리는 셈이었다.

덕분에 사이린은 한가롭게 강변에서 손으로 물장난을 치다가 이내 실증 난 듯 무릎을 굽히고 쭈그려 앉았다. 그러다 치마 아래쪽이 바닥에 닿으려 하자 급히 치마 끝을 잡았다. 새 옷을 처음 입은 날에 상하게 하기 싫었다. 그 상태로 멍하니 강을 보고 있다 보니 물고기가 튀어 올랐다가 물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흔적을 쫓기 위해 마지막 사라진 위치를 중심으로 눈을 번뜩여봤지만 물고기는 다시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이린은 주변에 있던 납작한 돌을 들고 일어섰다. 주변에 다른 사람은 전혀 없었고 하미만 저 아래쪽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보기에는 옷을 빠느라 다른 것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보였다. 사이린은 돌의 넓은 면을 아래쪽으로 하고 가볍게 강을 향해 던졌다. 맹렬히 돌면서 날아가는 돌은 물 위를 스치듯 지나가다 강 반대편까지 건너갔다. 돌에 물이 튀는 소리에 하미가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두 여자가 산을 올라가는 계단을 걷고 있을 때도 해는 아직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때 어눅어눅 해질 시간이었다.

“요즘은 정말 낮이 길어졌다는 걸 느낀다니까요.”

하미가 손등으로 땀을 훔치며 말했다. 그녀가 옆구리에 들고 있는 바구니 안의 옷들은 빨래를 끝낸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 끝부분이 말라가고 있었다.

사이린은 종아리에 난 상처가 쓰라려 오는 걸 느꼈다. 예상했던 대로 짧은 치마가 보호해주지 않는 부분은 풀을 스치면서 옅지만 길다란 상처가 한두 개씩 생겼다. 그마저도 신경 써서 풀 사이를 걸었기에 그 정도였다.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면 지금쯤 종아리 전체에 붉게 부운 긴 상처가 나서 보기 안 좋았을 것이다.

“바구니, 저 주세요.”

하미가 더위에 지친 모습이 역력하자 사이린은 그녀의 바구니에 손을 뻗었다. 바구니는 아무 저항 없이 사이린에게 옮겨졌다. 하미가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바구니를 받아 든 사이린은 계단의 위쪽 올려봤다. 계단 위에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우중충한 회색의 계단들이 태양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여관에 도착해서 하미가 잠긴 문을 열려고 할 때 계단 쪽에서 누군가가 급하게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구니를 문 옆에 내려놓은 사이린이 소리의 진원지를 확인하러 뒤돌아보자마자 커다란 가방을 등에 맨, 머리와 수염을 제멋대로 기른 중년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사이린을 보더니 기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미!”

그 말에 뒤에서 문을 열고 있던 하미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낯익은 얼굴이 자기를 향해 반가운 표정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와 달리 하미는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저 인간…”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사이린을 지나쳐 하미 앞에 멈춰 섰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소매로 연달아 훔쳐내는 남자한테서 코를 막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바로 뒤에 있던 사이린은 어떻게든 냄새를 참아보려 하다가 눈치채지 결국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뭐라고 했어?”

남자가 물었지만 하미는 가볍게 “아무 말도 안했어.”라고 거짓말했다. 하지만 남자가 “입술 움직이는 거 다 봤는데.” 라고 말했고, 하미는 다시 “너하고는 관계 없는 일이야.”라고 응수했다.

“나하고 관계없는 말을 나를 보면서 했다고?”

그 말에 하미는 마땅히 대응할 말이 없는 듯 표정을 찡그리다가 역한 냄새가 주변에 퍼져있는 걸 눈치챘다.

“너 냄새 심하다. 목욕 좀 하고 와.”

“나 돈 없어.” 남자는 주머니를 뒤집어 보였다. 하미는 한숨을 쉬면서 동전을 남자의 손에 쥐어 주었다.

“가방은 그냥 여기 놔두고 새 옷만 꺼내서 가져가.”

“당연하지!”

남자는 낡은 가방에서 여분의 옷을 꺼내 더운 줄도 모르고 온 힘을 다해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 막 계단을 오르고 있던 청년이 무서운 속도로 내려오고 있는 그의 모습에 기겁하고 옆으로 피할 정도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이린은 벙찐 표정으로 말했다.

“재, 재밌는 사람이네요.”

“그냥 바보예요.” 하미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남자의 가방을 한 손으로 들려다가 생각보다 무게가 나가는 바람에 두 손으로 가방을 들어 거의 끌다시피 하며 여관 안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가방을 발로 벽 쪽으로 밀어놓고 부엌에서 자기 키보다 긴 장대를 두 개 꺼냈다. 장대가 그냥 들면 천장에 닿을 정도라서 하미는 몸을 낮춰 장대를 눕혀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 사이린은 하미가 힘들게 가방을 옮기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한 손으로 가방을 들어보려다 손에 느껴지는 묵직함에 이 도전이 쉽지 않다고 느꼈다.

“빨래 한 거 밖에다 내다 말리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하미의 말에 사이린이 “네”하며 가방을 내버려두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이미 장대 하나를 땅에 박은 하미가 사이린에게도 장대 하나를 넘겨주면서 말했다.

“저 쪽에 구멍이 있으니까 가서 꽂아주세요.”

장대 받아 든 사이린은 총총 걸음으로 구멍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미 박혀있던 장대를 기준으로 살펴보니 땅에 만들어 놓은 구멍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두 개의 장대가 세워지고 단단한 끈을 꺼내온 하미가 장대 위쪽에 나있는 구멍에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남은 부분을 사이린에게 던졌다. 사이린도 하미가 했던 것처럼 장대 끝 구멍에 끈을 묶었다. 간단하지만 실용적인 빨래대가 완성되자 두 사람은 빨래해 온 옷들을 꺼내 널었다.






“이 녀석은 목욕하다 물에 빠져 죽었나?”

땅거미가 질 때까지 남자가 돌아오지 않자 하미는 야채를 다듬다 말고 걱정스러운 듯이 창 밖을 내다봤다. 옆에서 일을 돕고 있던 사이린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 커~다란 나무통에 들어가서요?”

“으음, 확실히…”

하미는 남자가 구멍에서 나오는 물에 만족 못하고 그 큰 나무통을 기어올라가 통 안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상상했다.

“일어나지 못할 일은 아니네요.” 하미의 머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이 상상됐다. 그 상상 속에서 남자는 물에 빠져 죽는 게 아니라 여유롭게 휘파람을 불며 헤엄치고 있었다.

“그런데 예전부터 알고 지낸 분이신가 봐요?”

사이린은 남자를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묻고 싶었던 질문을 마치 지금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묻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것은 참 고달픈 일이었다.

“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알고 지낸 놈이에요.”

그러면서 하미는 어린 소녀처럼 수줍게 웃었다.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본 사이린은 호기심이 달아올라 자기도 모르게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서로에 대해 잘 아시겠네요?”

그 말에 하미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잘 알다마다, 너무 잘 알아서 탈이에요. 마드니는 어릴 적하고 똑같아요. 좋게 말하면 변한 게 없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철이 안든 거고.”

마드니, 사이린은 남자의 이름을 기억했다.

“하미씨는 어릴 적하고 비교해서 어떤 것 같아요?”

“저요? 음…”

대답이 나오기 까지는 짧지만 긴 시간이 소요됐다. 중간에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좀 더 신중하게 말하고 싶었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더 길게 가졌다. 사이린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제가 생각하기에 저는 꽤 많이 변한 거 같아요. 그래도…”

하미는 이를 보이며 웃었지만 속은 아무 것도 없는 허울뿐인 웃음이었다. 그녀는 무심코 창 밖을 바라보다가 순간 깜짝 놀랐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변하지 않는다면 저런 바보 같은 행동을 할 거라는 것도 쉽게 예측할 수 있긴 하지만.”

사이린도 그녀의 시선을 쫓아 창 밖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꽃들이 머리만 내놓은 채 문이 있는 방향으로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는 꽃의 범인에 대해 사이린은 많이 알지 못했지만 하미의 ‘철이 안 들었다’란 증언과 첫만남에서 본 그의 성격을 보면 충분히 이런 행동을 할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날 건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는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갔다. 드디어 문이 열리면서 마드니가 나타났다.

“짜잔!”

양손에 어디선가 꺾은 꽃들을 다발로 들고 만세 자세로 여관에 들어온 마드니는 두 여자가 무덤덤하게 자신을 보고 있자 창피함에 온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두 여자 중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 덕분에 지독히도 어색한 시간이 흘렸다. 마드니의 머리 속은 점점 새하얗게 칠해졌다.

“그거 어디다 둘려고?”

드디어 하미의 구원의 한마디가 날아왔지만 마드니는 거기까지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머리 속에서 여러가지 상황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가 선택한 말은 결국 처음에 생각난 말이었다.

“그냥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마드니는 꽃을 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질문과 맞지 않는 엉뚱한 대답에 하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쉬었다. 마드니의 행동에 마땅히 다른 대처법이 생각나지 않아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한숨이었다.

“꽃병 가지고 나올 테니까 기다려.”

하미가 부엌으로 사라지자 거실에는 마드니와 사이린만 남았다. 어색한 시간이 다시 한번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서로를 잘 모르는 사람들끼리 있으면 반드시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사이린은 야채를 다듬으며 마드니를 무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마드니는 뻘줌하게 서있거나 약간 거리를 두고 의자에 앉는, 그런 정말로 어색한 상황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기에 어떻게든 대화를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꽃이 예쁘네요.”

사이린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마드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도 마찬가지로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은 반드시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죠? 마을 주변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예쁜 것들만 꺾어온 거예요.” 그는 자연스럽게 사이린 맞은편에 앉았다. “그나저나 손님인가요?”

마드니도 드디어 사이린을 처음 본 순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상쾌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금방 자신의 실수를 눈치챘다. 일반 손님이 야채 손질 같은 일을 도와줄 리가 없었다. 마드니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이린은 자신이 돈 내고 묶고 있는 정상적인 손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할 때 하미가 부엌에서 나왔다.

“다락방 손님이셔. 자, 여기에 꽂아봐.”

하미는 탁자 위에 물이 조금 담긴 긴 유리병을 올려놓았다.

“아하, 다락방!”

마드니는 수수께끼가 모두 풀려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다는 듯 가볍게 꽃들을 유리병에 집어넣으려 했지만 꽃들의 수가 너무 많아 전부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마드니는 포기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줄기를 꾹 눌러 유리병에 넣으려 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하미가 그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치며 말했다.

“야야, 그러다 꽃들 다 죽는다.”

그러면서 하미는 마드니에게서 꽃을 몇 개 낚아챘다. 마드니는 안타까운 눈길로 그 꽃들을 바라봤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손에 남겨진 꽃들만이라도 조심스레 유리병에 집어 넣었다.

“난 옆집 갔다 올게.”

하미는 꽃을 든 손을 코앞에서 가볍게 흔들면서 여관을 나갔다. 또 다시 마드니와 사이린만 휑하니 남겨졌다. 사이린이 이번에는 무슨 말로 대화를 해야 할까 하고 고민할 때 마드니가 고개를 쭉 내밀며 말했다.

“다락방 손님이라고 했죠? 혹시 이상한 경비병들에게 잡혀왔어요?”

“예? 예…”

“가기 싫다는 데도 막 끌고 오지 않았나요?” 그는 무슨 예언가라도 된 것처럼 확신에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네! 맞아요. 험악하게 생긴 사람들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막무가내로 끌고 오더라고요!”

사이린은 흥분해서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사실 민병들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새빨간 횃불 때문에 험악하게 보인 건 사실이었다.

“누군가의 명령이나 듣는 놈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 행동거지가 똑같은 법이죠. 그런데 그냥은 여기에 안 왔을 테고… 아가씨, 혹시 혼자 있었나요?”

사이린은 말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야, 여자 혼자 다니기에는 힘든 세상인데 대단하네요.”

“그런가요?”

“그럼요. 일단 나쁜 일 같은 건 뒷전으로 하더라도 여러 가지로 그런 시대니까요.”

정체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적당히 얼버무린 단어의 사용했지만 사이린은 그 말뜻을 이해했기 때문에 조금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그것을 눈치챈 마드니는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벽에 기대고 있는 자신의 낡고 더러운 가방을 발견했다. 사이린은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입고 있던 옷은 어떻게 하셨어요?”

“아, 그거요. 밖에 빨래대를 세워났길래 빨래해서 같이 걸어났어요.”

사이린은 흐음-하고 콧소리를 냈다. 그 사이 마드니는 자신의 가방으로 걸어가서 주먹만한 크기의 보따리를 꺼내 탁자 위에 풀었다. 보따리를 열자 먹음직스런 냄새와 함께 손가락 마디 크기의 붉게 양념된 고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이게 뭐예요?”

사이린이 시선은 고기에 고정시킨 채 말했다.

“얼마 전에 농장 일을 돕게 됐는데 그곳에서 돈 대신 이런 걸로 주더군요. 소고기에 매운 양념한 거라던데 맛있어요. 드셔보세요.”

마드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이린은 고기를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 양념은 매웠지만 살짝 단맛도 느껴졌다. 평소 먹던 대로 고기를 천천히 씹어먹으며 맛을 음미했다.

“맛있어요.”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그렇죠? 그 곳에서 직접 만든 양념으로 만든 건데 저도 먹을수록 감탄이 나오더군요.”

두 사람이 고기를 먹으면서 그 맛에 놀라고 있을 때 하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나갈 때 들려있던 꽃 대신 잘 손질된 생선이 담긴 그릇이 들려있었다. 마드니가 반색하며 말했다.

“하미, 이거 좀 먹어봐.”

“아, 지금은 이거 좀 정리해야 하니까 나중에.”

하미가 그를 힐끗 보기만하고 부엌으로 들어가자 마드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옛날에는 저렇지 않았는데…”

옆에서 고기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던 사이린은 그의 눈치를 보며 먹는 것을 멈추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옛날에는 지금하고 달랐나요?”

“그럼요. 새로운 것을 보면 사족을 못 써서 달려들고, 항상 제 팔을 끌고 여기저기 놀러 가자고 하고, 조금이라도 징그러운 걸 보면 꺅하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항상 자기가 저보다 용감하다고 하면서 모르는 길을 앞장서서 걸어가기도 했지요. 천상 소녀였어요.”

마드니의 눈은 어느새 추억에 젖어 빛나고 있었다. 사이린은 현재의 하미에게서 마드니가 말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그녀의 눈에 하미는 어떤 일도 흐트럼없이 대하고 자신의 일을 착착 해치우는 믿음직스런 사람이며, 과정이 어쨌든 자신에게 머무를 장소를 마련해준 착한 사람이기도 했다. 하미에게서 소녀다운 모습을 본 확실한 기억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다고 단언하기에는 망설임이 일었다.

“게다가 예전에는 지금처럼 주름살도 없었…” 마드니가 능청 떨듯이 말하는 도중 이야기의 주인공이 부엌문을 덜컥 열며 나왔다. 마드니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방 정해 줄 테니까 가방 들고 따라와.” 하미가 고개로 방향을 가리키며 말하자 마드니는 순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 이거 가져가셔야죠.”

사이린이 말린 고기가 든 보따리를 다시 동여매 마드니에게 건넸다.

“앗, 감사합니다! 사실 이게 전부라서 아껴 먹어야 했거든요.”

마드니는 자기 가방을 등에 짊어지고 하미를 따라 안쪽 복도로 사라졌다. 마드니가 하미에게 장난기 섞인 말로 대화를 시도하는 듯 했는데 소리가 작아 자세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하미가 간단히 무시한 듯 했다. 사이린은 두 사람의 대화 모습을 머리 속에 잠시 떠올렸다가 다시 야채를 다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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