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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길의 중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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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2.07.11 15:56
최근연재일 :
2012.07.11 15:56
연재수 :
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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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32
추천수 :
162
글자수 :
216,761

작성
12.05.08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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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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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1쪽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6)

DUMMY

[리슈넬]


새벽의 차가운 공기에 기침을 하며 잠에서 깼다. 무거운 눈을 떠보니 아직 어둡긴 했지만 주변에 미약한 빛이 퍼져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껏 심호흡을 하려고 숨을 들이쉬다가 순식간에 몸 안이 차가워져 급히 입을 닫았더니 남아있던 잠이 금방 달아났다. 나무 뿌리에 눕혔던 몸은 바로 옆의 흙 위로 떨어져 있었다. 잠결에 좀 더 평평한 곳으로 옮긴 것 같았는데 그 덕에 몸 여기저기에 돌이 배겼다.

리슈넬은 상체를 일으켜 잠이 덜 깬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어젯밤 어둠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숲의 모습이 뚜렷하게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현재 있는 위치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오른손을 옮기다가 이름 모를 풀을 눌러버리는 바람에 풀 위에 놓여있던 이슬이 손바닥 가득 묻었다. 리슈넬은 이슬 묻은 손바닥을 빤히 바라보다 혀로 핥았다. 목을 축이기에는 양이 너무 적었다. 반사적으로 귀에 정신을 집중해 물소리를 찾았다. 오랫동안 숨죽이고 있었지만 물소리가 들리지 않아 이번에는 바람을 찾았다. 하지만 바람 또한 불어오지 않았다. 리슈넬은 갑자기 심한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방에서 물통을 꺼냈지만 두 모금 정도 마시지 바닥나 버렸다. 이걸로는 갈증을 없애기 부족했다. 급한 대로 주변을 둘러봐도 물이라고는 풀잎에 내린 조그만 이슬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몸을 숙여 풀 잎마다 맺힌 이슬을 핥아 먹었다. 무릎에 묻은 흙을 아무리 털어도 없어지지 않을 때가 되셔야 갈증이 겨우 사라졌다.

한숨 돌리고 있을 때 햇살에 눈이 부셔 절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너무 약해 겨우 주위를 볼 수 있을 정도였던 빛은 어느 새 숲을 품 안에 거둘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문득 어젯밤 같이 길을 잃어버리기 전에 빨리 주변을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옆에 있던 나무를 올려봤다. 가지는 꽤 튼튼해 보였지만 불행히도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 있었다. 근처에 있는 다른 나무들도 마찬가지였다. 리슈넬은 한숨을 쉬며 양팔과 다리를 나무 줄기에 걸치고 느린 속도로 나무를 올라갔다. 가지를 붙잡은 뒤부터는 속도에 가속이 붙었다.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자 아침 햇살이 정면에서 얼굴을 때려 눈을 뜰 수 없었다. 리슈넬은 나뭇가지를 밟고 있는 발의 위치에 주의하며 왼손으로 빛을 가렸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호수의 푸른 물이 보였다. 호수 건너편에도 큰 나무는 보이지 않아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때였다.

“아이고야…” 저도 모르게 신음이 나왔다. 바로 뒤 쪽에 그토록 찾고 있던 큰 나무가 있었다. 지금 있는 곳에서 아주 조금만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리슈넬은 멍한 표정으로 나무를 바라보다 몸에 힘이 빠지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떨어질 뻔했다.

혹시 있을 상황을 대비해 대충 눈으로 위치를 확인한 리슈넬은 땅으로 내려 오면서도 가슴은 나무가 있는 방향으로 유지했다. 위치를 알고 나니 수많은 나무들 사이에서도 큰 나무의 모습이 확실히 보였다. 아니 애초에 보일 수 밖에 없는 크기였다. 어제 밤과 새벽의 어둠만 아니었다면 훨씬 빨리 찾아냈을 것이다.

당신이 대장이군요. 처음 나무를 봤을 때 리슈넬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치 누군가 만들어준 것처럼 나무를 중심으로 몇 백 걸음 정도나 되는 넓이에 단 한 그루의 나무도 존재하지 않아 멀리서 보면 호수처럼 숲 중간에 구멍이 뚫긴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거기에 이곳은 호수를 함께 숲 속에서 제대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 명당의 정 중앙에 리슈넬과 리슈넬과 리슈넬이 스무 명이상 모여 양팔을 뻗어야 겨우 손이 닿을 만큼 굵은 줄기를 가진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자신이 한없이 작아 보일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나무 앞에서 리슈넬은 긴장했다. 무릎까지 자란 풀들이 치마에 계속 부딪혀 걸음을 방해했다. 리슈넬은 풀들의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이상하게 나무에 가까워 질수록 긴장했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기 멋대로 대장이라 정하고 그에 따른 위압감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을 말이다. 이 나무는 그 무엇도 위협하지 않고 다가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리슈넬은 다시 한번 나무를 찬찬히 살펴봤다. 나무는 매우 친근했고 자비로웠다. 자신의 튼튼한 줄기에 리슈넬이 등을 기대자 나무는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포근하게 안아 줬다. 온 몸에 힘이 빠지면서 동시에 허기가 느껴졌다. 가방을 열고 지금 있는 것들 중 가장 맛있는, 그래서 오랫동안 아껴둔 양념된 고기를 꺼냈다. 비싼 음식이라 양은 많지 않았지만 이번엔 아껴둘 생각 따윈 없었다. 배는 점점 불러왔고 따뜻한 아침 해가 몸을 데워줬다. 리슈넬은 행복을 느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나무를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한 직후 갑자기 얼마 전에 비 때문에 천막이 무너져내려 근처에 있던 나무 아래서 하룻밤을 지낸 일이 생각났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나무도 참 따스했다. 따로 집을 짓거나 찾으려던 생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리슈넬은 나무를 친구 삼아 그의 줄기와 뿌리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숲에 처음 온 날 만난 곰을 제외하면 숲의 동물과 직접 마주친 적은 없었지만 밤이 되면 사방이 각종 동물들의 울음소리로 메워졌다. 몇몇은 리슈넬이 있는 큰 나무 근처를 서성였고 그 중에는 한번 뛰기만 하면 바로 덮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까지 온 놈도 있었다. 리슈넬은 자기를 공격 당하지 않는 것을 나무 보살핌 덕이라 생각했다가 혹시 자기가 동물들이 신성시 여기는 곳을 침범했을 거란 생각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 가설은 금방 틀린 것으로 생각되어 고개를 흔들었다. 만약 큰 나무가 그들의 성스러운 장소였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신을 쫓아냈을 것이다.

날이 후덥지근하게 더운 날이면 리슈넬은 옷을 호숫가에 벗어두고 알몸으로 수영했다. 그러다가 호수 중앙쯤에 가만히 떠있으면 물 위의 몸은 뜨거운데 아래 쪽은 시원한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 없었다. 호수 안으로 잠수해 들어가서 숨이 차오를 때쯤이면 바닥이 간신히 보이기 시작했지만 어둠이 철저히 보호해주어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리슈넬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물 위로 올라왔는데, 호수 바닥에 큰 애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영을 마치면 옷을 한 손에 들고 여전히 알몸인 채로 큰 나무까지 걸어갔다. 그러면 나뭇가지와 잎으로 한차례 걸려진 여름 햇빛이 그녀의 몸을 보듬어주어 물기가 깨끗이 사라지며 몸의 온도를 기분 좋게 맞춰줬다. 가끔 풀이 피부에 상처를 내기도 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큰 나무가 있는 장소로 돌아오면 리슈넬은 옷을 나무 뿌리에 던져두고 풀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그렇게 있다 보면 어느 새 짧지만 달콤한 낮잠에 빠지게 되었다. 이 일은 일상이 된지 오래였다.

하지만 한 날은 수영을 한 뒤 호숫가에서 낮잠을 자다가 땅거미가 질 때쯤에야 잠에서 깼다. 리슈넬은 숲에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다. 호숫가에 남아있을지 큰 나무로 되돌아갈지 고민하다가 큰 나무로 되돌아가는 걸 선택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도중에 어둠이 내렸다. 머리가 혼란스럽고 가슴이 뛰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지만 이번에는 큰 나무가 있는 곳까지 찾아갈 수 있었다. 이전보다 숲의 지형에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큰 나무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큰 용기를 주었다. 이 일이 있는 후에는 무료할 때 한밤 중의 숲을 거니는 일도 일상 중 하나가 되었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려는 시간에 숲을 거닐며 간단히 먹을 것을 찾다가 사람 머리만한 열매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냥 슬쩍 보기만하고 지나쳤다. 무엇보다 나무를 엉거주춤하게 올라가는 행동은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날 따라 이상하게 다른 먹을 거리가 보이지 않아 결국 그 열매가 달린 나무 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나무 위에 올라가 그 길쭉한 연녹색 열매를 바로 앞에서 보니 갑자기 식욕이 들어 빨리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등으로 간단히 쳐보니 통 거리며 귀엽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 크기도 크기지만 밑부분을 받쳐보니 무게도 상당해 어떻게 따낼까 고민하다가 꼭지를 줄기에서 떼는 순간 손을 놓았다. 열매가 떨어지면서 깨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이 엄청난 열매는 풀 위에서 한번 퉁 하고 튀어 오르더니 멀쩡하게 착지했다. 내친김에 한 개를 더 따서 떨어뜨렸다. 나무에서 내려와 양손에 열매를 들어보니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역시 한 개만 딸 걸 그랬나…

떫다.

열매 속은 겉과 다르게 하얀색인데 향긋한 냄새가 정말 맛있어 보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열매는 떫다. 때리면 돌도 부숴질 것 같은 딱딱한 껍질을 겨우 반 토막 내서 먹어본 결과가 이러니 참담하다. 원래 이런 열매던가 아니면 내가 익기도 전에 따버렸거나 어쨌든,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속을 파내 주변에 뿌려버렸다. 난 먹을 수 없어도 주변에 빼곡히 나있는 풀들이나 나무는 어떻게든 먹지 않을까? 속을 파내고 나니 딱딱한 껍질만 남았다. 그 높은 곳에서 떨어졌어도 겉에 상처만 조금 났고 겉도 속도 멀쩡하다. 이건 다른 곳에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




숲 속에는 평소에는 몰랐어도 어느 순간 알게 되는 길들이 있었다. 그건 동물들의 길이었다. 동물의 길은 인간의 길과 다르게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것은 종족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과 길에 대해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들이 본능적으로 자신의 자취를 감추느라 오랜 세월 동안 익혀온 능력 중 하나 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땅으로만 다니는 동물들의 흔적을 드문드문 찾는 것이 리슈넬에게는 최선이었고 기쁨이었다. 숲에 들어와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큰 나무를 둘러싼 풀들 사이에는 옅은 갈색 길이 하나 생겼다. 동물의 길과 다르게 그 길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피력하기에 바빠 보였다. 리슈넬은 그 부분이 유감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에 있던 풀들을 보호하기 위해 살금살금 걷는 것 같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인간의 길이 나는 것은 그녀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리슈넬은 굳이 그걸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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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1) 12.06.22 618 5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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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1) +2 12.05.30 743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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