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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길의 중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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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2.07.11 15:56
최근연재일 :
2012.07.11 15:56
연재수 :
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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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59
추천수 :
162
글자수 :
216,761

작성
12.06.29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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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1쪽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4)

DUMMY

[사이린]


“헤헤, 고마워요.”

사이린은 새 옷을 입고 기분이 한껏 들떴다. 올해만 벌써 두 번째로 얻어 입는 옷이었다. 게다가 이번 것은 꽤나 고급스러웠다. 모양새도 좋지만 겨울 옷 주제에 크게 두껍지 않으면서도 보통 입는 겨울 옷보다 배는 따뜻했다. 남자는 가방도 새로 사준다 했지만 거절했다. 대신 바느질을 가게에 맡겨 리슈넬의 가방을 좀 더 제대로 고쳤다.

남자가 호의를 베푼 이유는 사이린이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날이 추워지는 데도 헤지고 구멍까지 난 옷을 입는 게 안쓰럽기도 했지만 자신의 선생이 그런 꼴을 하고 있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스스로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옷을 사준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사이린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싼 옷을 사줌으로써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후자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사이린은 전혀 그를 다르게 보지 않고 순수하게 선물을 받았다는 것에 기뻐하기만 했다. 그래도 남자는 실망하거나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일로 누군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피리 사러 가볼까요?”

사이린이 앞장서며 걸으려 하자 남자가 주머니에서 흙 피리를 꺼내며 말했다.

“선생이 옷 고를 때 이미 사왔어. 먹을 것들도 좀 사서 마차에 실었고.”

“이야. 빠르네요.”

“여자들은 이상하게 물건 고르는 게 늦더라고. 이런 작은 물건 하나쯤은 사고도 넉넉할 정도로.”

“가슴에 새겨 넣어야겠네요.”

사이린은 악의 없는 말투로 빈정거렸다.

남자가 마차를 끌고 온 곳은 높은 지대에 위치한 마을이어서 지평선에 걸친 붉은 석양이 한 눈에 들어왔다. 사이린은 낮이 너무 많이 짧아져서 오는 아쉬움과 어둠이 가져다 주는 가벼운 피로를 동시에 느끼면서 이제 막 흙 피리를 산 중년 아저씨를 가르쳐야 하는 책임감에 한숨을 쉬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도망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많은 것을 받아버렸다. 결국 승낙한 것도 자신이었다.

마차를 세워둔 곳에 다다른 사이린은 생각했다.

‘그래도 애는 아니니까 잘 따라오겠지.’ 스스로 위로하면서 그녀는 말했다. “그럼 수업을 시작해볼까요?”

“지금 여기서?” 남자는 마차에 오르다 말고 멈췄다.

“네.”

“하지만 좀 조용한 곳에서 시작하는 게 낫지 않나? 알다시피 난 제대로 할 줄 모르잖아.”

“구체적으로 어떤 곳을 원하세요?”

그녀의 말에 남자는 머리를 긁었다.

“그냥 사람이 없는 곳이면 좋을 것 같은데…”

사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지그시 쳐다봤다. 자기도 솜씨가 아주 형편없었을 때는 연주 하는 걸 남이 보는 게 창피해 죽을 뻔했다. 그런데 실력이 조금 붙은 다음에는 그게 과연 창피한 일이었는지 의심됐다. 그 때는 그랬지, 하며 추억할 정도로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 모든 게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됐다.

“그리고 선생은 언니를 찾는다 하지 않았나?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으음, 그렇네요.”

남자가 마차에 올랐고 사이린도 뒤따랐다. 이번에는 뒤쪽이 아닌 남자 옆에 앉았다. 남자가 물었다.

“좋아. 그럼 갈까? 언니는 지금 어디에 있나, 선생?”

사이린은 그 말에 당황했다. 리슈넬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한참을 끙끙 거리다가 남자가 재촉하듯 바라보자 어쩔 수 없이 대충 손가락으로 마을 앞에 난 길을 가리켰다.

“일단 저 길로 가요.”

남자는 군소리 없이 고삐를 흔들어 마차를 출발시켰다. 사이린은 불현듯 리슈넬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어디서 굶고 있는 건 아닌지, 어디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 건지, 얼마 안 있으면 겨울이 올 텐데 따뜻하게 지낼 장소는 있는지 같은 걱정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빨리 언니를 만나고 싶다.’

다그리엘을 부를 계획이 머리 언저리에서 계속 맴돌았다.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눈 앞에 있는데 돌아가는 건 어떻게 보면 미련한 짓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이린은 무엇이든지 포기만 않으면 가장 적절한 순간에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다그리엘을 사용하는 건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절대 부르지 않았다. 게다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지금은 중년 남자까지 가르쳐야 했다. 그를 혼자 놔두고 사라지는 일이나 대놓고 다그리엘을 보여주는 일이나, 모두 여러 가지 의미로 좋지 못한 일이었다.

마차가 달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땅거미가 내려왔다. 이미 주변은 사람 그림자를 찾아 볼 수 없는 벌판이었다. 사이린과 남자는 마차를 길 옆에 세워두고 뒤쪽에 있던 장작과 주변에서 모아온 불쏘시개로 모닥불을 피웠다. 남자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단검을 꺼내 허리춤에 찼다. 사이린은 마차 뒤에서 음식들을 꺼냈는데 남자는 꺼내놓은 것들을 보며 혀를 찼다.

“죄다 고기로군.” 남자가 사다 놓은 음식 중에는 채소와 과일도 많이 있었다.

“그러게요. 제 눈엔 고기만 보여요.”

“지금 고기만 먹으면 나중엔 채소만 먹어야 하는 데 그 땐 어쩌려고?”

사이린은 그것까진 생각해 본 적 없단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는 길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내가 할 테니까 선생은 모닥불이나 죽지 않게 봐줘.”

남자는 적절한 비율로 한 끼 식사 분의 고기와 채소를 꺼내 그릇에 담았다. 보통 먹는 식사 양에 비교하면 조금 적었지만 아껴야 하니 이 정도가 알맞을 것 같았다. 그 뒤 지친 말들의 고삐를 풀고 먹이를 물에 풀어줬다.

그러고 보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지출이었다. 남자는 왜 자신이 어린 여자에게 흙 피리를 배우기 위해 이 정도로 많은 돈을 쓰는지 궁금했지만 곧 오랫동안 원하던 기술을 배우게 된다는 기대감이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니 주변에서 빛이라고는 모닥불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소변을 보러 갔던 사이린이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며 말했다.

“주변이 하나도 안 보이네요. 달이라도 떴으면 괜찮았을 텐데.”

사이린은 모닥불 옆에 자리잡고 앉아 품에서 흙 피리를 꺼냈다.

“그럼 첫 수업을 한 번 해볼까요?”

“아 맞다. 선생.”

“예?”

갑작스런 제지에 사이린은 필요이상으로 놀랐다. 겉으로 내색은 안 해도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제 불었던 곡 한번 연주해 주지 않겠나?”

“그거요? 뭐, 도전 정신에 불을 붙이는 의미로 해드리죠.”

사이린이 손을 흙 피리 위에 올리고 익숙하게 숨을 불어넣으려는 순간, 남자가 다시 한 번 제지했다. 약간 짜증이 났다.

“그런데 그 곡 이름이 뭔가?”

“이름이요? 음… 없는데.”

“없어? 혹시 직접 만든 건가?”

“아니요.” 사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언니가 만든 거예요.”

“지금 찾아가는 그 언니?”

“예. 여태까지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생각도 안 해봤고, 붙인다 해도 제가 만든 게 아니니까 전 붙일 수 없네요.”

“그럼 지금까진 그 곡을 뭐라고 불렀지?”

사이린은 팔꿈치를 무릎에 올리고 주먹으로 머리로 받친 자세로 고민했다.

“언니가 가르쳐준 곡이요.”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꼭 이름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

두 사람 모두 할 말이 없어지자 주변에 풀 벌레 소리만 가득 찼다. 손으로 흙 피리를 만지작거리던 사이린은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일부러 큰 소리를 냈다.

“자, 그럼 연주하겠습니다. 제목은 언니가 가르쳐준 곡.”

차가운 바람에 손가락은 움직이기도 힘들만큼 얼어갔지만 연주는 시작됐다.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실수가 한 번도 없었다.



[리슈넬]


뜬금없이 무언가를 하고 싶어 미치겠다. 그 무언가가 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속이 답답해지니까 과거에 내가 저질렀던 부끄러운 일들이 연관성 없이 멋대로 떠오른다.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온 몸이 떨리면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만한 그런 일들. 무언가를 해서 이 기억들이 떠오르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부끄러움에 온 몸을 배배 꼬다가 결국엔 죽어버릴지도 몰라.

다행히 행동할 무언가는 금방 찾아냈다. 밤새 숲에 눈이 잔뜩 내려 사방이 하얗게 됐다. 집 안에 가만히 있으면 눈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고, 오늘 아침도 그 소리에 잠이 깼다.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여는데 꽁꽁 얼어있어서 힘이 꽤 들었다. 거의 문을 부수다시피 하며 열었다. 나무가 주변에 빽빽이 심어져 있어도 눈이 발목보다 더 높이 쌓여있었다. 하긴, 눈을 막아줄 나뭇잎은 이미 떨어진 지 오래였으니까.

아무런 흠집이 없는 눈밭은 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이 든다. 눈을 발로 푹푹 밟으면서 걷다가 멈춰서 뒤를 돌아보니 발자국이 나를 따라오는 것 마냥 길다랗게 이어져있다. 그 단순한 행위가 너무 재미있어서 숲 안을 내 발자국으로 가득 채울 생각으로 추운 것도 잊고 눈 속을 뒤뚱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내 것 이외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내 엄지 손가락만한 이 발자국은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의 것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도 모르게 발자국을 따라가고 있었다. 게다가 일부러 걸음 속도를 맞추려고 총총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누군가 봤으면 분명히 그게 뭐 하는 거냐고 웃었을 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작은 발자국 옆에 다른 동물의 커다란 발자국이 찍히기 시작했다. 작은 발자국의 보폭이 갑자기 넓어지고 큰 발자국이 그 뒤를 맹렬히 추격했다. 나도 뛰고 싶은 욕망이 생겼지만 너무 추워서 걸음을 좀 더 빠르게 하는 게 한계였다. 그래도 그 덕분에 발자국을 보면서 작은 동물이 언제 뜀박질을 했는지 어디서 방향이 틀었는지 같은 것을 대충이나마 알 수 있었다. 발자국이 두 개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작은 여행은 끝났다.

단번에 어떤 일이 일었는지 알아챘다. 얌전하던 눈 밭이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었고 그 위로 작은 동물의 것으로 보이는 붉은 피가 뿌려져 있었다. 큰 동물의 발자국만 남아 그것이 간 방향을 가리켰다. 딱히 어떤 행동을 해야 할 지 몰라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속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 졌을 때 모두 뱉어냈다. 입김이 넓게 퍼졌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모습이 하얀 눈에 천천히 스며드는 피와 비교되어 잠시 동안 멍하니 서있게 만들었다.

갑자기 불어온 찬 바람과 함께 어디선가 눈이 떨어지는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아직 눈은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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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5) 12.06.08 744 4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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