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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길의 중간에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2.07.11 15:56
최근연재일 :
2012.07.1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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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7.1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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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길의 중간에서 - 마지막화

DUMMY

[에이린]



“으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사방으로 산산조각 났다. 주변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물론 부엌 밖에서 청소하던 사람들까지 그 소리에 놀라 안을 들여봤다. 사건의 주인공인 에이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으로 접시 조각을 집으려 했다.

“자매님, 물러서세요.”

나이가 지긋한 수녀가 빗자루를 들고 그녀 대신 접시를 치워줬다. 혼은 나지 않았지만 에이린은 자기 때문에 청소 시간을 지체되어 모두에게 일일이 사과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평소 행실이 착실하고 성격 또한 좋아 누구와도 다투지 않은 결과였다.

마침 부엌 근처를 지나가던 하미로서는 소란 중에 다른 수녀들이 에이린에 대해 하는 말을 우연히 엿들었다.

“요즘 에이린, 어딘가 이상하지 않아? 가끔가다 멍하니 있는 때가 있는 것 같은데 예전에는 저러지 않았잖아.”

“어디 아픈 거 아닐까? 감기라던가.”

“글쎄, 감기는 아닌 것 같은데. 평소 때는 멀쩡하다가 어느 순간 멍하니 있거든.”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지만 하미로서는 거기까지만 듣고 자리를 에이린이 방으로 돌아가려면 꼭 지나야 하는 계단 위로 자리를 옮겼다.

에이린을 처음 봤을 때는 열 살도 안된 어린 아이였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꼬마를 억지로 여섯 명이 함께 쓰는 방에서 생활하게 했다. 머리가 조금 굵어지고 가슴이 봉긋해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에이린은 혼자서 방을 썼다. 처음에 그녀가 방을 혼자 쓰게해달라고 요구를 해왔을 때는 당연히 모두들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가 요구한 곳은 아무도 쓰지 않는 수도원 구석의 작은 방이었다. 그 방은 일과 시간에 주로 활동하는 곳에서 너무 멀었고, 다른 곳에 위치한 방보다 매일 계단을 한 층 더 올라가야 했다. 아무도 바라지 않는 방을 쓰겠다고 했으니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과 마찰도 일으키지 않고 항상 밝은 얼굴로 생활하는 아이가 왜 유독 방을 혼자 쓰고 싶어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방에 들이지 않으려 해서 그녀에게 결벽증 비슷한 것이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본인도 그 소문에 대해선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던 그녀가 거지꼴을 하고 나타난 한 여자와 방을 함께 쓰겠다고 했을 때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사이린이 수도원을 나간 후부터 그녀의 상태가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 같았다. 점점 혼자서 멍하니 있거나 집중을 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더니 모든 일에서 실수를 하기 시작했다. 하미로서는 에이린과 대화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계단 아래에서 누군가의 발걸음이 들려왔다. 이 늦은 시간에 이 계단을 사용할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었다. 에이린이 피곤한 얼굴로 계단을 올라오다가 하미로서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인사했다. 인사를 받은 하미로서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매님, 오늘은 긴히 할 얘기가 있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그런데 같이 방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제 방 말씀이신가요?”

하미로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린은 안절부절 못하며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이 쪽으로…”

가끔씩 수녀들의 방을 들락날락 하미로서도 에이린의 방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기로 마음 먹으면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건 에이린의 생활 태도가 워낙 모범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방답게 다른 수녀들의 방보다 확연히 작았다. 그런 방에 침대를 억지로 두 개나 놔두니 움직일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았다. 하미로서가 사이린이 쓰던 침대에 앉을 때 에이린은 촛불을 키고 자기 침대 위에 앉았다. 두 사람의 숨소리와 촛불 타는 소리만 들릴 만큼 조용해졌을 때 하미로서가 입을 열었다.

“제가 찾아온 이유를 알고 계시죠?”

“예. 대충…”

“요즘 자매님의 상태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매사에 산만하고 집중력이 없어요. 가끔씩 아무 생각이 없는 것처럼 가만히 있지를 않나 예전에는 안 하던 실수도 많이 하시고요. 웬만하면 이런 말 안 하는데 원래 그러지 않았던 분이 그러시니 걱정이 돼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잘 하려고 하는데 그게 잘…”

“원인이 뭔가요?” 하미로서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딱히 그런 건 없어요.”

“사이린씨 때문인가요?”

에이린이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아니요. 그 분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왜 그렇게 놀라시는 거죠?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건 그 분이 계기를 만들어 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전부터 원인은 저에게 있었습니다.”

항상 나긋나긋하던 에이린이 눈에 힘을 주고 상대를 노려보는 모습은 굉장히 낯설었다. 그만큼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럼 그 원인이란 건 뭐죠?”

답지 않게 목소리가 약간 흥분되어 있었다. 반항적인 태도를 접해 어쩔 수 없이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반응이었다.

에이린은 눈을 내리깔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지금 할 이 한 마디가 가져올 폭풍을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왔다. 이제 생각에서 벗어나 행동할 때였다. 폭풍은 여전히 두려웠지만 이대로 천천히 늪에 가라앉기는 싫었다.

“전 이곳이 싫습니다.”

에이린은 단호한 어조로 힘있게 대답했다. 충격을 받아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하미로서를 떠올리며 앞을 바라봤다. 예상과 다르게 하미로서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랬군요. 그럼 사이린씨를 방에 들인 건 외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나요?”

“아마도요.” 에이린은 고개를 떨구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매님. 저를 보세요.”

하미로서는 에이린의 두 손을 잡고 얘기했다.

“저와는 다르게 자매님은 어릴 때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들어왔지요. 그건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정말로 원한다면 이 곳이 아닌 곳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자매님께는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만큼 그 선택이 잘못 되었을 때의 책임도 스스로 지셔야 합니다.”

“그런 것쯤은 각오하고 있어요.”

에이린의 대답에는 젊은 사람다운 패기가 담겨있었다. 하미로서는 그녀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걱정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도 저는 일단 다른 제안을 드립니다. 순례자의 옷을 입고 여행을 떠나세요. 여행이 끝났을 때 이곳으로 돌아와서 그 동안에 있었던 얘기를 해주세요. 그리고 그 때 선택하는 겁니다. 이곳에 있을지 밖으로 나갈지를 말이죠.”

항상 차가운 모습만 보여주었던 하미로서의 따뜻한 말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에이린은 마음이 뭉클해졌지만 그에 앞서 자신이 받게 된 기회에 대한 기쁨이 있었다. 그것 역시 에이린이 아직 젊었기 때문이었다. 늙은 여인의 진심이 담긴 말이 아니었다면 에이린은 지금 받은 이 제안을 당연한 권리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수도원을 나가기 전에 세상을 알아볼 기회를 주는 것은 하미로서가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정말… 그래도 될까요?”

에이린이 기쁨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입니다. 제가 이곳에 머물고 있는 한 자매님이 돌아왔을 때 내쫓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럼 언제쯤 출발하면 될까요?”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가능하지요.”

에이린은 상기된 표정으로 하미로서를 바라보다가 이내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늙은 여인은 어린 여자를 품에 안아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며칠 뒤부터 수도원에 에이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떠난 사실은 처음에는 몇 사람 밖에 알고 있지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퍼져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몇 명은 순례자의 옷을 입은 에이린의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녀들은 에이린이 떠난 이른 아침에 깨어 있던 부지런한 수녀들이었다.

이 일은 나이 어린 또래 수녀들에게 화제가 되었다. 자기도 순례길에 오르고 싶다고 부러움을 표현하는 이도 있었고, 어떻게 하면 순례자의 옷을 입을 수 있는지 방법을 물어보는 이도 있었다. 에이린과 친하게 지냈던 사람은 그녀가 말없이 떠난 것에 못내 속상해했다.

하미로서는 에이린이 떠나고 며칠 동안, 하루에 한 번은 그녀가 벗어놓고 간 수도복을 꺼내 들고 바라봤다. 그럴 때마다 회색의 순례자의 옷을 입고 기뻐하는 그녀의 표정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아마도 에이린은 성지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 속으로 한 곳쯤은 가주길 원했다. 늙은 여인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국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는 꼴이 되었다. 어떤 길을 가던 그건 에이린의 선택이고 대답이니 이제 신경 쓰지 말자고 자신과 약속했다.





에이린은 마차를 타고 수도로 가고 있었다. 마차 운전수까지 포함해 모두 세 명이 타고 있었다. 순례자의 옷을 입은 덕분에 원래 가격은 반도 안 되는 돈으로 고급 마차를 타서 기분이 한껏 좋아진 상태였다. 뒷좌석에 같이 탄 청년은 다행히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 같아 보였다. 그는 마차에 타고 있는 내내 바깥 풍경만 보고 있었다. 모처럼 만난 인연인데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던 에이린이 먼저 말을 걸었다.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어디로 가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청년이 드디어 그녀에게 시선을 주는가 싶더니 기대와 다르게 뚱한 표정을 지었다.

“수도로 가는 마차를 탔으니 당연히 수도로 가지요.”

“아하하… 네, 그렇죠.”

당황하며 웃음으로 상황을 넘기자 청년은 무심하게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에이린은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럼, 무슨 일로 수도에 가시나요?”

창에 걸었던 팔을 안으로 집어넣은 청년이 귀찮은 듯이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일자리 구하러 갑니다. 이 쪽 동네는 물에 비해서 벌이가 너무 좋지 않거든요.”

“물이요?”

“그러니까 그 뭐냐, 예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단 말입니다. 얼마 전까지 매표소에서 배표를 팔았는데 왜 그리 진상들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이젠 질렸어요. 수도에 가면 적어도 그런 인간들은 없을 거 아닙니까.”

“확실히 그 쪽 사람들은 다들 점잖다고 하더라고요.”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이었지만 수도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그런 인상이 있었다.

“그래야죠. 그래서 비싼 돈 내고 가는 거니까.” 청년은 에이린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그 쪽은 수도에 왜 가는 겁니까?”

“아, 저는 찾고 싶은 곳이 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요. 수도에는 커다란 도서관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그곳에서 하나하나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 해서…”

“그래요? 어디 한번 나한테 말해봐요. 이래 봬도 뱃사람들과 얘기하면서 여러 곳을 알고 있으니까. 혹시 알아요? 내가 알고 있는 장소 일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눈을 반짝이는 청년이 갑자기 너무 믿음직스럽게 보여 에이린은 큰 마음을 먹고 기억의 파편들을 얘기했다.

“그러니까… 제가 찾는 건 어떤 집이에요. 집 뒤로 조그만 개천이 흐르고 집 앞으로는 잔가지와 잎이 수북한 나무가 있는 곳이고요.”

“음음, 그리고?”

“그게 다예요.”

청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소리 없이 웃었다. 자신감이 없어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에이린의 모습이 거짓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그걸로 어딘가를 찾는 건 불가능해요. 세상에 그런 장소가 한 두 군데여야지.”

“하지만 꾸준히 찾다 보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밖을 한 번 봐요. 나무가 지천으로 깔려있죠? 저 나무 중에서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연이 있는 나무를 찾으라면 그 쪽은 찾을 수 있겠어요?”

분명 그 말대로 저 많은 나무들 중 한 그루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개씩 지워나간다면 결국에는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차는 저녁 때가 되어서야 수도에 도착했다. 이제까지 봤던 그 어느 곳보다 큰 도시가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모습은 수도원을 나오길 잘했다고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밤이 되기 직전임에도 거리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어 활발하다는 단어는 이런 것에 쓰이는 거구나, 하고 감탄했다.

오랫동안 같은 공간에 있었던 청년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그는 어느새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아쉬운 기분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했다. 에이린은 하미로서가 선물해준 가방을 등에 매고 옷에 달린 모자를 당겨썼다. 이제 도서관을 찾을 차례였다. 하미로서가 말하길 큰 건물을 찾다 보면 금방 찾을 거라고 했었다.

과연, 온통 큰 건물만 있는 도시였지만 큰 것 중에서도 큰 건물은 눈에 쉽게 띄었다. 에이린은 그 건물들을 일일이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다녔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도서관과는 상관없는 건물이었고, 몇 군데에서는 아예 무시까지 당했다. 저 높이 보이는 지붕만 보고 걷다가 막다른 길을 만나 되돌아 오는 경우도 몇 번씩 생기자 급히 피곤해졌다. 땅은 이렇게 평평한데 산을 서너 번은 탄 기분이었다. 그 사이 석양이 짙어지며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결국 사람들에게 길을 묻기로 결심했다.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건 굉장히 어려웠지만 이대로 길가에서 밤을 지내고 싶지 않았다. 에이린은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 중 심성이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가던 길을 막힌 남자는 신경질 적으로 말했다.

“뭐야?”

“저기… 제가 도서관을 찾고 있는데 초행길이라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혹시 길을 가르쳐주시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조심스럽게 남자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얼마나 사납던지 에이린은 자기도 모르게 모자를 눈썹 밑까지 끌어당겼다.

“한 번만 말해줄 테니까 잘 들어. 이 길로 쭉 가다가 사거리가 나오면 왼쪽으로 가. 가다보면 술집이 나올 텐데 거기에서…”

남자는 제법 상세하게 길을 가르쳐줬지만 왠지 점점 더 화가 나는 것처럼 보였다. 설명이 모두 끝나자 허리를 숙여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그는 길 위에 침을 뱉더니 그대로 가버렸다. 에이린은 오늘 기분이 좋지 않은 사람을 귀찮게 한 거 같다고 생각했다.

태도는 좋지 않았지만 남자의 설명은 꽤 정확해서 얼마 안가 도서관처럼 보이는 큰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도시에는 이미 밤이 내려와 있었다. 이 곳이 제발 도서관이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하면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넓은 복도와 함께 멀리 위치한 커다란 원형 책상이 보였다. 벽에 걸려있는 촛불들의 인도를 받듯이 에이린은 안으로 들어갔다. 원형 책상 너머는 촛불이 켜져 있지 않아 복도가 어두웠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져 제발 누구라도 나오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계세요?”

대답 없는 정적만 주변을 채우는 가운데 원형 책상 쪽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섭지만 호기심을 누를 수 없었던 에이린은 천천히 원형 책상에 다가갔다. 그녀가 책상 끝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내미는 순간 사람의 손이 갑자기 위로 튀어 올랐다.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에이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으로 달리다가 옷 끝자락을 밟고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코에서 강렬한 통증이 느껴져 손으로 훔쳐보니 손바닥 가득 피가 묻어있었다.

“저기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에이린은 깜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마른 몸을 한 젊은 남자가 놀란 얼굴로 서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에이린을 가리켰다.

“어어, 코피…!”

그 한마디를 하고 남자는 다시 원형 책상으로 돌아가 안 쪽에서 깨끗한 천 조각을 꺼내 가져왔다. 그는 그걸 에이린에게 내밀며 말했다.

“일단 이걸로 막으세요.”

천 조각을 받아 든 에이린은 창피해서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게 재빨리 가렸다. 코피가 얼마나 나오는지 천 조각이 금방 붉게 물들었다. 남자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어색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 시간에는 찾아오는 분이 거의 없어서 잠시 쉰다는 게… 설마 순례자 분께서 오실 줄 알았으면 미리 준비라도 했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그가 거듭 사과하자 에이린은 얼굴에서 천을 떼고 말했다.

“아니요. 저야 말로 늦은 시간에 찾아봐 죄송합니다.”

“아, 저기, 피! 피!”

에이린은 다시 천을 얼굴에 갖다 댔다. 정말이지 최악의 첫인상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곳이 도서실 입니다.”

남자가 문을 열자 건조한 공기가 종이 냄새와 밖으로 밀려나왔다. 어두워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으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고 커다란 공간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남자가 촛불을 들고 앞에 서며 말했다.

“그런데 묶으실 곳은 정하셨습니까?”

“아니요.”

“그러면 제가 한 곳을 추천해드리겠습니다. 순례자 분들이 자주 묶으시는 곳이 근처에 있거든요.”

“감사합니다.” 시선은 주변에 있는 책들을 스치면서 대답했다.

“아, 그리고 혹시 책을 읽으시다가 불쾌한 부분이 나와도 그러려니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교회에서 나온 분들이 아니면 여자들이 책을 읽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에이린의 경직된 반응을 본 남자는 헛기침을 한 번하고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휘파람을 불었다. 하지만 어두운 곳에서 울려 퍼지는 휘파람은 오히려 역효과만 일으키는 것 같아 금방 입을 다물었다.

“책은 이 곳에서 보시면 됩니다.”

남자가 도서실 정 중앙에 있는 커다란 책상을 소개하며 들고 있던 촛불을 에이린에게 건넸다. 촛불은 일반 적인 물건과 다르게 위쪽에 구멍이 뚫린 투명한 유리로 보호되어 있었다.

“이건 잘못해서 쓰러뜨려도 불이 날 위험이 없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너무 졸리면 밖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 안에 있는 방대한 지식이 사라져버리면 정말 슬플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남자는 촛불이 없는 데도 앞이 보이는 것처럼 걸어서 도서실을 나갔다. 에이린은 그 모습이 마치 옛날 얘기에 나오는 마법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도 잠시, 그녀는 두 손으로 뺨을 때리고 촛불을 높이 들었다. 약한 촛불 하나로는 이 넓은 장소를 반도 채우지 못했다. 수도원의 작은 도서실과는 정말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마차를 같이 탔던 청년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 걸로는 불가능해, 수 많은 나무 중 하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압도적인 지식 속에서 원하는 것만 쏙쏙 골라내서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큰 것부터 시작해 계속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언젠가는 답에 닿을 것이라고 믿었다. 도중에 주저 앉을지언정 시작도 하기 전부터 도망치기는 싫었다. 에이린은 촛불을 들고 책장 사이로 들어갔다.


작가의말

그 동안 부족한 소설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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