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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길의 중간에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2.07.11 15:56
최근연재일 :
2012.07.11 15:56
연재수 :
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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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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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글자수 :
216,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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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08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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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5)

DUMMY

[리슈넬]



갑자기 비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다리를 적셨다. 그 때문에 굳이 평가를 하자면 좋지 않았던 기억이 중간에 끊겨버렸다. 날씨가 개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게 앞으로도 계속 비가 올 거 같다. 하지만 이런 짐작은 항상 맞는 게 아니다. 아침에 비가 세차게 오다가도 오후가 되면 해가 얼굴을 내밀 수 도 있는 것이 날씨니까.




몇 일 동안 오던 비는 평소와 다름없던 어느 날 오후에 거짓말처럼 그쳤다. 가실 줄 몰랐던 먹구름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사이로 해가 나타나는 광경을 리슈넬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빛이 돌아오자 한 동안 잊고 있던 아찬의 가방을 다시 찾기 위해 숲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가방은커녕 그 비슷한 물건도 보지 못했다. 그제서야 리슈넬은 자신이 가방의 생김새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이 상한 그녀는 바닥도 확인하지 않고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가 곧바로 일어나 앉았던 자리를 확인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꼿꼿이 서있었을 풀들이 있던 자리에는 맑은 진흙 물이 엉덩이 모양으로 고여있었다. 재빨리 두 손으로 엉덩이의 물기를 털어냈지만 이미 선명하게 새겨진 진흙 자국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주변에 마땅히 앉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리슈넬은 적당한 크기의 돌들을 모아 바닥에 깔고 앉았다. 습기에 열을 뺏긴 돌들은 앉자마자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웠지만 꾹 참고 있으니 몸의 열기가 옮겨져 앉기 좋은 자리가 되었다.

가끔씩 숲 속을 돌아다니는 바람은 한 여름의 것이라 하기 힘들 정도로 차가웠다. 리슈넬은 눈을 감고 아찬이 가지고 다녔을 가방을 상상했다. 아찬은 동물들에게 쫓기는 도중에 가방을 잃어버렸다. 정확하게는 그랬을 것이다라고 아찬이 말했다. 그러면 큰 크기는 아니다. 매고 다니기 적당한 크기였기에 도중에 사라져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꽤 가벼웠지 않았을까?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가방의 모양은 대충 떠올랐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것도 자신의 가방에 맞춰 생각한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전혀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리슈넬은 ‘색깔이라도 물어볼 걸…’하고 후회하자 마자 ‘다그리엘에게 찾아봐 달라고 할 걸 그랬나?’하고 후회했다.

다음 날이 되자 가방 찾기는 그만둬 버렸다. 숨쉬기 조차 힘들게 만드는 더위 때문이었다. 비교적 움직이기 좋은 환경이 되는 새벽이나 밤에는 빛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애초에 가방을 찾을 시도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시간을 리슈넬은 열매를 모으는데 할애했다. 대충 둥근 것만 찾으면 되니까 상대적으로 쉬웠다. 낮에는 나무 그늘에서 쉬거나 알몸으로 호수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가끔씩 덫을 만들었다.

덫은 얼마 전에 다그리엘이 잡았던 여우와 비슷한 크기의 동물들을 잡도록 만들었다. 리슈넬은 나무 껍질을 모아 비벼서 연하게 만든 다음 그것으로 줄을 만들었고, 당겨지면 조이게끔 매듭을 만들어 동물의 길에 설치했다. 덫은 총 세 개를 만들었다. 리슈넬은 이 덫에 동물이 걸릴 확률은 백에 하나이거나 더 적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시간이 지나도 덫은 처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자주 열매를 따먹는 나무의 가지가 무슨 영문에선지 중간이 뚝 끊긴 채로 땅에 떨어져있었다. 가던 발을 멈추고 무릎을 굽혀 앉은 뒤 손으로 나뭇가지를 들어올려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다 한참 뒤에 길 옆에 흙을 파서 그 자리에 정성스럽게 나뭇가지를 심었다. 하지만 스스로도 가지에서 뿌리가 내려 살아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뭇가지가 안전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돌봐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일은 손이 많이 가진 않았지만 그렇게 해줄 정도로 나뭇가지가 나에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예전에 린이가 나뭇가지를 하나 가져 온 적이 있었다. 허락도 없이 숲에 놀러 갔다가 산딸기 나뭇가지를 꺾어 온 거였다. 나뭇가지 끝에 달린 산딸기는 마치 장식 같았다. 처음에는 혼을 냈다.

“린아. 나뭇가지를 함부로 꺾으면 안돼. 나무가 아야, 한 단 말이야.”

“정말?”

“정말. 다음부터는 꺾으면 안돼?”

린이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그래서 다른 집 엄마들이 아이들이 말을 안 들어 속이 썩는다고 얘기하면 자연스레 어깨가 올라갔다.

“그런데 이건 왜 꺾어 온 거야?”

“이걸 집 근처에 심어서 이만~큼 자라게 하면 산딸기 먹으러 숲까지 안가도 되잖아!”

그 말에는 나도 조금 흥미가 생겼다. 그런데 나는 식물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열매를 맺도록 키워내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내가 할거야! 언니는 아무것도 하면 안돼! 알았지? 하지만 딸기가 나오면 언니도 줄게!”

린이는 집 옆에 구멍을 파고 산딸기 나뭇가지를 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니 나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면서 저 나무에서 산딸기를 얻어먹으려면 다음 여름이 되어야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기특하게도 린이는 중간에 관두지 않고 매일같이 나뭇가지에 물을 주고 보살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식수를 얻으려면 강까지 가서 물을 길어와야 했다. 처음 며칠 린이는 식수를 나뭇가지에 주었지만 나중에 스스로 깨달았는지 아니면 내 눈치를 본 건지 숲에서 물을 길어왔다. 그 물은 강보다는 더러웠지만 충분히 깨끗한 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산딸기 가지는 얼마 안가 말라 죽고 말았다.

“언니, 산딸기가 죽었어.”

죽은 나뭇가지 앞에서 린이는 어느 때보다 서럽게 울었다. 나는 힘내라고 어깨를 두드려줬다.




믿을 수 없게도 더위는 나아지지 않고 더욱 심해졌다. 리슈넬은 이제 아침과 저녁을 빼면 호숫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발을 한번 움직여도 땀이 날 정도로 더웠다. 숲 속은 나무 한 그루 없이 온 몸으로 햇빛을 받아야 하는 곳보다는 시원했다. 그래도 아는 곳 중에는 호수 안이 숲 속에서도 가장 시원한 곳이었다.

그늘 아래는 잠을 자기에 아주 좋은 온도를 유지했다. 낮에 호수에 있지 않을 때 리슈넬이 하는 행동은 대개 그늘 아래서 낮잠 자기였다. 그러다 잠에서 깨어나면 나무에 몸을 기대고 아무 생각 없이 하늘을 바라봤고, 배가 고프면 아침에 따놓은 열매를 나물과 같이 먹었다. 그리고 몸에 힘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되면 옷을 벗고 다시 호수에 들어갔다. 이제는 수시로 호수 바닥까지 내려갔다 올라왔다. 호수 안에서 리슈넬은 물고기를 손으로 잡으려고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니 손 끝으로 꼬리를 만질 수 있게 되었고 결국에는 두 손으로 잡는 것까지 성공했다. 대부분은 잡자마자 순식간에 손에서 빠져나갔지만 잡지 못한 물고기에 미련은 두지 않았다.

리슈넬은 회를 먹지 못했다. 그래서 물고기를 먹으려면 불에 익혀야 했는데 더운 날씨에 불 피우는 작업은 너무 고달팠다. 그리고 물고기 특유의 비린내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물고기가 너무 먹고 싶어 참을 수 없는 날이 있었다. (대개 열매와 나물이 질릴 때였다.) 그런 날에는 날씨가 더운 것도 개의치 않고 불을 지폈다. 남아있던 소금은 생선을 먹을 때 모두 사용했다.

며칠 동안 맑은 날이 계속 된다 싶더니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소나기는 한번에 몰아치지 않고 하루에 서너 번 되풀이 했다. 비가 올 때면 더위는 조금 가시지만 몸을 움직이기에는 더 좋지 않은 날씨가 돼버렸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에도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움직이든지 가만히 있던지 어떻게 있어도 습기가 몸에 쌓여서 질척해졌다. 이러나저러나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리슈넬은 불현듯 일전에 설치해 놓은 덫이 생각났다. 그 때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지만 확인한 횟수는 단 두 번이었다. 무엇인가 걸려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덫을 설치한 사람의 의무가 리슈넬을 움직였다. 무거운 몸을 움직여 숲 속을 걷는 건 덫을 설치한 게 후회될 정도로 힘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덫에는 작은 여우 한 마리가 목이 걸려있었다. 하지만 기쁜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바로 옆에 있는 싸리 나무 밑에 새끼 여우 세 마리가 불안한 표정으로 숨어있었다. 놈들은 제 딴에는 잘 숨기 위해 몸을 조그맣게 뭉쳤지만 나무와 확연히 구분되는 털 색은 숨길 수 없었다. 리슈넬은 새끼들과 덫에 걸린 여우를 번갈아 보다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재수도 좋구나…”

몸을 낮추고 덫에 걸린 여우에게 손을 뻗자 이를 들어내며 접근을 거부했다. 뚱한 표정으로 여우를 쳐다보다가 재빨리 손을 움직여 덫을 해체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여우는 덫에서 벗어나자마자 새끼들과 함께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리슈넬은 입을 삐죽 내밀고 덫을 정비해서 다시 설치했다.

호수로 돌아가는 도중에 다시 소나기가 쏟아졌지만 숲의 나무들이 비를 막아주었기 때문에 걸음에 멈춤은 없었다. 가끔씩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빗물이 몸으로 떨어지면 신기하게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빗물이 나뭇잎 위에 모였다가 한번에 떨어지는 장소를 발견한 리슈넬은 그 밑에서 입을 벌리고 기다리다가 떨어지는 빗물을 마셨다. 차가운 빗물은 기묘하게도 단맛이 났다. 이 느낌이 얼마나 갈지 알 수 없었지만 비가 계속 오면 언젠가 상쾌함이 추위로 바뀔 것을 알고 있었다. 리슈넬은 비가 빨리 그치길 바라며 근처에 있던 나무에서 젖지 않은 줄기를 찾아내 몸을 기댔다.

시간을 죽이고 있는 동안 리슈넬의 눈은 바로 앞에서 떨어지고 있는 빗방울을 위 아래로 쫓았다. 땅에 떨어져 사방에 흩어져버리는 빗방울에 시선이 멈췄을 때, 흩어지는 빗방울에 옆에 있던 검은 개미 세 마리가 봉변을 당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 장면은 얼마 전 땅에 심어놓았던 나뭇가지가 겹쳐 보였고 리슈넬은 한달음에 나뭇가지를 심은 장소로 뛰어갔다.

비가 떨어져 만들어진 작은 웅덩이들 사이에서 리슈넬이 심어준 모습 그대로, 나뭇가지는 있었다. 리슈넬은 나뭇가지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런데 빗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져 옆으로 조금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런데도 빗방울이 따라오듯이 머리 위에 계속 떨어져서 피하는 것을 단념했다.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 지, 피하는 것을 포기하자 흩어져있던 정신이 나뭇가지에 모일 수 있었다. 먼저 눈으로 나뭇가지를 살펴보고 손으로 잡아 살짝 흔들어 보았지만 그걸로는 땅에 단단히 박힌 건지 그냥 서있기만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리슈넬은 고민하다가 손에 힘을 주고 나뭇가지를 위로 잡아당겼다. 흙이 위로 조금 올라오긴 했지만 나뭇가지는 땅에 붙어있었다. 리슈넬은 다시 한번 고민하다가 손가락으로 나뭇가지 밑을 살살 파냈다. 그리고 작지만 땅 속을 파고든 하얀 뿌리를 볼 수 있었다. 리슈넬은 파헤친 흙을 곱게 메워서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갑자기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젖은 나무의 진한 냄새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시자 몸이 나무 냄새로 가득 차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비오는 날에는 강 근처에 가면 안돼.”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데 린이는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

“왜냐면 작년같이 물에 휩쓸릴 수 있잖아. 그 때는 운이 좋았지만 잘못됐으면 크게 다쳤을 지도 몰라. 물은 평소에는 착해도 화가 나면 아주 무서워.”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잘못됐으면 죽었을지도 몰라’ 였다. 하지만 어린애한테 그런 말을 할 순 없는 것 아닌가.

“아니야. 물은 안 무서워. 그리고 난 그 때 재미있었는걸?”

도대체 얘는 어떻게 그런 일을 격어도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아마도 나는 작년에 린이가 물에 휩쓸려갔을 때부터 알게 모르게 화가 나있었던 것 같다. 그 화는 나 때문에 생긴 것이기도 했지만 절반 정도는 린이가 원인이었다. 비 오는 날 밖에 나가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거란 생각은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내 화와 걱정을 무시하듯이 린이가 명랑하게 대꾸하자 그 동안 속에 있던 화가 터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재밌어?! 재밌다고?! 그러면 비 올 때 언니가 강에다가 던져줄까? 지난번 그건 운이었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린이는 굳은 채로 날 빤히 쳐다보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언니… 왜 그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지만 내 화는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왜? 이제야 자기가 잘못한 걸 안 것 같아? 언니가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야 말을 들어?”

결국 린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평소와 다르게 전혀 소리를 내지 않는 울음이다. 입을 꾹 닫은 채로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마음이 아파왔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앞으로도 린이가 내 말을 안 들을 거란 생각이 들어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약속해! 강 근처에는 가지 않겠다고!”

린이는 겁먹은 건지 아니면 나에게 반항하는 건지 그저 훌쩍이기만 했다. 내가 무서워서 생각도 제대로 못했을 거고 울음을 참는 것에 온 힘을 쏟고 있었지만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나는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알겠다는 대답을 원했을 뿐이다.

다시 한번 화가 폭발했고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린이의 뺨을 있는 힘껏 때린 뒤였다. 린이는 결국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뺨을 때린 것도 이유였지만 린이가 울면서도 목이 간 소리로 “안 갈게, 비오는 날에는 강에 안 갈게. 언니.”라고 소리지르듯 대답했기 때문이다. 그 때 내가 느낀 것은 미안하다는 감정이 아니었다. 나는 린이에게 죄를 지었다.

며칠 동안 린이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렇게 후회할 걸, 화를 내기 시작할 때부터 후회할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의지로 멈출 수 없었고 나는 계속 후회했다. 다행스럽게 린이는 며칠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 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가끔씩 린이가 뭔가를 하기 전에 내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너무 아려와 참기 힘들었다.





얼마 뒤에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지면서 난 어이없게도 감기에 걸려버렸다. 내 몸에서 나오는 숨을 손바닥에 뿌리면 뜨거웠다. 가만히 있으면 더웠고 그렇다고 시원한 곳에 있으면 추웠다. 머리는 한시도 멈추지 않고 빙글빙글 돌고 목은 계속 간지러워 기침이 자꾸 났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신기한 건 움직여도 괴롭고 가만히 있어도 괴로운데 그 강도가 동일했다. 결과적으로, 난 몸져 누웠다.

조금 있다 보면 나을 줄 알았는데 감기는 점점 심해졌고 열도 내가 느끼기엔 심각할 정도로 올라갔다. 이젠 사소한 감기가 아니었다. 바보같이, 난 린이에게 화를 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생각할 기운이 있을 때만이었다. 나중에는 생각이고 뭐고 깨어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목이 탈 때면 온 힘을 짜내야 간신히 ‘물’이란 짧은 단어를 뱉을 수 있었다. 나중에 린이에게 들어보니 4일 동안이나 몸져누웠었다. 기특하게도 그 4일동안 린이는 그 동안 날 간병해주고 미숙하지만 죽도 만들어 먹여주었다. 나중에 부엌을 보니 그간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지 알만했다.

5일째 되는 날 아침에도 감기 기운은 아직 남아있었지만 제 정신이 돌아왔고 몸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나았다. 그래서 오후에 린이가 밖에 놀려나갔을 때 집 안을 힘껏 청소했다. 조금 힘들긴 했지만, 몸을 움직이니 한결 개운해졌다. 도중에 쉬면서 창 밖을 보니 하늘에 석양빛이 옅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해가 짧아졌다고 생각하면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자니 며칠 전 일이 머리에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대로 얼버무린 채로 있을 수는 없었다.





“며칠 전에 화냈던 거 있잖아. 언니가 잘못했어. 미안해.”

말을 하고 난 다음에는 쉽게 생각되지만 말을 하기 전에는 너무 하기 어려운 이 말을 했을 때는 스스로가 대견했다. 린이는 밥을 먹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럼 강에 가도 돼?”

“응?”

“언니가 강에 가면 안 된다고 했잖아. 이제 가도 되는 거야?”

난 손을 저었다.

“아니아니, 강을 가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예전처럼 비가 와서 물이 많이 불었을 때 강에 가면 안 된다는 거야. 위험하니까.”

“아, 다행이다.”

린이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언니가 아플 때 물 없어서 강에서 물 길어 왔거든. 이건… 괜찮지?”

이런 상황에서 애를 야단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당연히 괜찮지.”

“정말?!”

린이는 자기가 낼 수 있는 최대한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너무 마음이 풀렸는지 음식을 옷과 식탁에 떨어뜨리며 먹는 바람에 내가 닦아줘야만 했다.





그 때도 지금처럼 계절이 바뀌던 시기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난 몇 년간 혼자였고 그 동안 감기에 걸린 적이 거의 없다. 아니, 린이가 어릴 때 살던 마을(이라고 하기엔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았지만)을 떠난 뒤에는 병이란 걸 걸려본 적이 없었다. 마을을 떠난 계기가 된 일은 한 아주머니에게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란 말을 들은 것이었다. 예전부터 그런 말을 종종 들어왔고 말 자체는 칭찬과 부러움이었다. 하지만 그 말 속에 무언가 숨겨져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때가 아마 린이가 10살 정도가 되었을 때였다.

깨달음은 한 순간이라고 하던가? 언젠가 잠에서 일어난 직후 집 밖에 나왔다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떤 암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물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다 보니 알게 되었다. 물 속의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이에 비해 어려 보였다. 처음에는 잘못 본거라고 생각했고 그 다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냥 수긍하니까.

집이 마을에서 멀찍이 떨어져있었기 때문에 한산한 낮에 아무 걱정 없이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린이는 떠나는 그 순간까지 싫다고 소리쳤다. 내일 친구들이랑 놀기로 약속했다고, 집이 아니면 무섭다고, 어디로 가는 거냐고 계속 따져댔다. 이전의 일도 있어서 난 최대한 감정을 참고 린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말했다.

“린아, 언니도 될 수 있으면 집을 놔두고 어디 가고 싶지 않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겼어. 그래서 가야 해. 언니도 사실은 가기 싫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설득하기 좋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막상 나온 말은 횡설수설하기만 했다. 그래도 착한 린이는 더 이상 떼쓰기를 그만뒀다. 울음은 멈추지 않았지만 그것까지 요구하기는 애한테는 너무 심했다.

그렇게 나와 린이는 십 년 가까이 산 장소를 떠났다. 그 뒤에는 어떤 곳에서 살게 되도 짧게는 오 년 길게는 십 년이 지나면 다른 곳으로 떠났다. 잘 알게 된 이웃들과 인사를 하며 떠나기도 했고 처음 떠났을 때처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떠나기도 했다. 그 동안 린이는 부쩍 자라 이제는 키도 나와 거의 비슷해졌다(그래도 내가 약간 더 크지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엄마와 딸로 보이지 않았고, 그렇게 싫었던 새댁 소리도 더 이상 듣지 않게 됐다. 그제서야 난 내가 꿈이 아니라 현실 속에 있는 것을 알게 됐다. 난 내가 알기 훨씬 전부터 더 이상 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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