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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길의 중간에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2.07.11 15:56
최근연재일 :
2012.07.11 15:56
연재수 :
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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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61
추천수 :
162
글자수 :
216,761

작성
12.06.13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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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7)

DUMMY

[사이린]




“여자 혼자 이런 장소에서 지내는 건 정말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에요. 주변을 보세요. 죄~다 남자들뿐이잖아요. 그것도 젊은 사람들도 아니고 대부분 나이든 아저씨들이고. 그런 사람들은 자기를 억지로라도 다른 사람 위에 올리려고 하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사방에 가득하니 행동 하나하나가 감시 당하는 기분 이예요. 아니 실제로 감시 당했을 거예요. 여기에서는 여자라곤 저 뿐이니까. 뭔가를 산다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압박감을 느껴요. 돈을 더 적게 내는 것도 아니고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는 데도 그런다니까요.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눈치를 보게 됐어요. 그나마도 오빠가 감시자들에게 부탁해서 보호받게 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난폭하게 굴었을지 상상도 안돼요. 밥도 길 잃은 동물 새끼 마냥 눈치 보면서 먹어야 해요. 자기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니면서 제 먹는 소리가 너무 크다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도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는데요. 배를 타려는데 여자 혼자서는 타지 못하게 하더라고요. 매표소 직원에게 암만 부탁을 해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더라고요. 대판 싸우고 나니 기분도 꿀꿀하고 그 근처를 무작정 걸었어요. 밤이 돼서 기분도 풀 겸 맛있는 거나 먹으려고 어느 술집에 들어갔는데 글쎄 거기 있던 남자들이 내가 뭘 주문할지를 두고 내기를 하는 거예요. 나 참 웃겨서. 뭘 주문하는 것이 그렇게 신기한 일이라고.”

일어나자마자 치아이는 이곳에서 그 동안 느낀 감정들을 열심히 쏟아냈고 사이린은 그 말에 공감하면서 한편으론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말할 내용은 치아이 쪽이 훨씬 많아서 사이린이 한마디 하면 치아이는 서너 마디를 했다.

장시간 동안 속에 쌓여있던 얘기를 쏟아낸 두 여인은 이제 시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하루에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다른 길에 비해 많다 해도 수요가 공급보다 많았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판을 벌이고 있었다. 개중에는 길을 통과할 돈을 마련하기 위한 사람들도 있었고, 길을 통과하는 것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이 곳은 그 어떤 곳에 있는 시장에 꿀리지 않을 만큼 활기가 넘쳤다.

두 여인은 물건을 구입하지는 않고 구경하면서 물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만 했다.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큰 소리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치아이는 근래 그 어떤 날보다 즐거워했다.

그러던 중 온 몸에 깨끗한 구석이 없는 남자가 구석에서 초라하게 펼쳐놓은 물건이 사이린의 눈길을 끌었다. 치아이의 말을 무시하고 진열된 물건 앞에 쪼그려 앉은 사이린의 시선은 낡은 가죽 가방에 머물렀다. 자판 주인이 처음 맞는 손님에게 파는 물건들의 장점을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사이린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오직 낡은 가방에만 있었다.

“저기요. 이 가방 어디서 난 건가요?”

갑작스런 물음에 주인은 상품 설명을 그만두고 가방을 바라보며 이걸 어디서 가져왔더라, 하고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사이린에게는 그 표정이 상당히 작위적으로 보였다.

“글쎄요. 잘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그런데 그게 중요한가요?”

“아니요. 별로 중요하지 않죠. 그런데 제가 지금 돈이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사이린은 등에 매고 있던 가방을 벗어 주인에게 내밀었다.

“이 가방이랑 바꾸면 어떨까요? 물론 내용물은 빼고.”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치아이는 그녀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이린의 가방은 사용한 흔적이 조금 있긴 했지만 한눈에 봐도 새것에 가까운 튼튼한 물건이었다. 그에 비해 자판 주인이 내놓은 가방은 가죽이 다 헤어지고 여기저기 작은 구멍이 나있었다. 주인은 두 가방을 번갈아 보다가 손끝을 흔들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놀리는 거라면 그만하고 가 보시죠.”

“어... 놀리는 거 아닌데요.”

“상식적으로 이런 낡은 가방하고 그런 멀쩡한 가방하고 바꾸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진짜라는 걸 보여드릴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이린은 가방을 거꾸로 들어 내용물을 모두 바닥에 떨군 다음 주인이 뭐라 하기도 전에 자신의 가방과 진열되있던 가방을 바꿔버렸다. 사이린이 낡은 가방에 자신의 물건을 넣으면서 말했다.

“불만 없으시죠?”

주인은 눈 앞에서 일어난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말 대신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원했던 물건을 손에 넣은 사이린은 몸을 일으키고 치아이를 찾다가 그녀가 바로 뒤에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왜 멀쩡한 가방을 그거랑 바꾼 거예요?”

사이린은 치아이의 질문에도 아량 곳 않고 이제 자신의 것이 된 가방을 꼭 껴안은 채 실실 웃으면서 걸어갔다. 치아이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얼마 안 있어 앞서 걸어가던 사이린이 갑자기 몸을 뒤로 돌리며 말했다.

“왜 이걸로 바꿨냐고 물어봤죠?”

“아? 네. 그랬었어요.”

“이거, 저희 언니 거에요.”

“언니요?”

“예. 어쩌다가 이런 곳에 있는 건지는 몰라도 확실히 저희 언니 거에요. 안 그래도 요즘 언니 찾는 중인데 언니 물건을 찾다니, 정말 신기하죠?”

치아이는 바로 반론을 하고 싶었지만 사이린이 너무 기뻐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소리를 최대한 차분하게 하고 입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 가방이 사이린씨 언니 것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흔한 가방이잖아요.”

“전 알아요. 왜냐면 이건 언니가 직접 만든 거니까요. 아, 여긴 구멍이 좀 크게 나있네. 손 좀 봐야겠는데요. 혹시 바늘 남는 거 있어요?”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거 가죽인데 바늘이 잘 먹힐까요?”

“잘 될 거예요. 아마도.”

그렇게 말하는 사이린의 목소리에는 별로 자신이 들어있지 않았다.

어젯밤 잤던 자리로 돌아온 사이린은 치아이가 빌려준 실과 바늘로 가방을 수선하기 시작했다. 처음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바늘은 잘 들어가는 곳도 있었고 아무리 힘을 줘도 들어가지 않는 곳이 있었다. 잘 들어가지 않는 곳은 끝을 일단 고정시킨 다음 머리 부분을 돌로 살짝 쳐서 천천히 한땀 한땀 이어나갔다. 사용한 실의 색이 갈색 가방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흰색이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사이린씨 언니는 어디 있어요? 가방 찾은 거에 그렇게 기뻐하는 거 보면 사이가 좋은 것 같은데.”

치아이는 별 뜻 없이 궁금한 점을 물었다.

“저도 잘 몰라요. 마지막으로 본 게 3년전쯤이니까.”

“언니하고 싸우기라도 했나요?”

치아이의 목소리는 진지했지만 사이린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싸우기는요. 그냥 어쩌다 보니 떨어져서 지내게 된 것뿐이에요.”

“그래도 3년 동안이나… 가족이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는 건 흔치 않잖아요. 저는 오빠하고 몇 일 동안 못 보는 것도 불안해 죽겠는데.”

“뭐, 사람마다 각자 사는 방법은 다르니까요. 그러고 보면 치아이씨가 저희 언니를 만났을 수도 있겠네요. 이름은 리슈넬인데 혹시 만났었나요?”

“아니요. 전혀요. 그런데 언니 이름이 예쁘네요.”

“그렇죠? 저도 늘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이린은 가방 안에 손을 넣어 바느질이 제대로 됐는지 확인하고 짐들을 다시 안에 넣었다. 완성된 가방을 보고 있자니 하미로서가 생각했다.

‘으… 미안해요. 하미로서씨. 그러니까 수도원에 있을 때 좀 잘해주지 그랬어요. 그러면 리슈 언니 가방하고 바꿀때 잠깐 고민 정도는 했을 텐데.’

어느 새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치아이가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러면 그 동안 혼자서 어떻게 지내신 거예요?”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가끔씩 너무 힘들다 싶으면 빈집 같은데도 들어갔는데 대부분 노숙하곤 했네요.” 그러면서 사이린은 수선한 가방을 등에 맸다가 벗었다를 반복하면서 몸에 맞췄다.

“무섭거나… 두렵진 않았어요?”

“뭐가요?”

“혼자서 모르는 길을 가면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외진 길을 걷다 보면 강도를 만날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먹고 자는 것이 걱정되지 않나요?”

“아, 어릴 적에는 그런 적이 있어요. 하지만 커서는 그런 걱정 한 적이 없어요.”

하늘을 붉게 물들었던 빛은 짧은 시간 안에 대부분 사라지고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모닥불에 불이 붙고 흩어졌던 사람들이 주변에 자리 잡자 사이린은 가방에서 손을 뗐다. 좀 더 만지고 싶었지만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닥불이 타는 소리가 강해질 때 사이린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치아이가 말했다.

“제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사이린씨가 말한 내용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그 동안 정착지 같은 곳은 없이 낯선 곳을 돌아다니면서 밖에서만 생활하셨다는 것이 맞나요?”

“네. 정확해요. 왜요?”

“아니요. 좀 뭔가…” 치아이는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 가볍게 흔들고 말을 이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이 느껴져서요. 어떻게 낯선 곳을 돌아다니는데 두렵지 않을 수가 있죠? 저는 오빠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익숙하긴 하지만 항상 다니는 길이 아니면 무서워요. 길을 잃을 지도 모르고 강도를 만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밤이 무서워요. 둘이 다녀도 그런데 혼자라면 더 무섭지 않나요? 혹시 무서운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괜찮으니까 잠시 잊어버리신 건 아니에요?”

모닥불 덕분에 어둠 속에서 겨우 형태만 보였기 때문일까. 사이린은 치아이가 마치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곧 그녀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이해시키기 위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생각하기도 전에 치아이는 다음 말을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집에서 아주 먼 곳에서 생전 처음 보는 길을 밤중에 걸어야 할 때가 있었어요. 처음에는 아주 자신만만했죠. 조금만 걸으면 내가 아는 장소가 나올 테고 그러면 집까지 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에 생전 처음 걷는 길을 가는 것은 낮과는 완전히 딴판이더군요. 처음에는 달을 중심으로 걸었어요. 초행길이었지만 달이 하늘에 떠있었기에 아직까지는 괜찮았죠. 하지만 조금 지나니 길 위에는 모습이 조금밖에 보이지 않는 풀숲, 그리고 사방에 깔린 어둠과 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고, 갑자기 겁이 나면서 이 외딴 곳에서 내가 당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상상하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침을 목뒤로 넘기고 계속 말했다.

“나쁜 사람이 칼을 들고 나타나 내 배를 쑤시고, 호랑이 같은 짐승이 풀 숲에서 튀어나와 내 팔을 잡아뜯었고, 귀신이 나타나 무서운 나머지 울음을 왈칵 터트렸어요. 그건 모두 제 상상이었지만 실제만큼 생생했어요. 그래서 난 그 무서운 상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걸을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달이 제 머리 위에 올 때까지 걸었는데도 전혀 제가 아는 길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때마침 비까지 거세게 오면서 안 그래도 좁은 시야를 더더욱 가려버려 정말 울고 싶어져서… 그래도 계속 걸었어요. 집에 가려면 그 길 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길은 점점 미궁이 되어갔어요. 아니 이젠 길이라고 할 수도 없었어요. 눈 앞은 비로 가려져있고 사방은 생전 처음 보는 모습뿐이었으니까. 나는 속으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원망했어요. 몇 시간 전만해도 사람들과 웃으며 떠들고 있었는데… 단 몇 시간 만에 혹시라도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게다가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아팠고 숨은 가빠와서 한걸음 한걸음이 힘들었어요. 정말 포기하고 싶었는데, 정말 그랬는데 그 때 나무와 풀숲 사이로 빛이 보였어요. 나는 무작정 빛으로 뛰어갔죠. 작은 통나무 집이었는데 한 가족이 살고 있었어요. 창문으로 그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곧바로 문을 열어주고 몸을 닦을 수 있게 해줬어요. 정말 그 때 느낀 안도감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거예요. 저는 온몸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제가 겪은 일을 설명했고 그 가족의 두 아들이 친절하게도 날 마을까지 데려다 줬어요. 집으로 돌아온 순간 전 울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고 절 데려다 준 두 사람에게는 감사의 인사와 함께 사례를 했어요. 난 아직도 그 날 일을 잊지 못해요.”

사이린은 잠깐의 딴짓도 없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치아이의 얼굴은 거의 울상이 되어있었는데 다행히 어둠이 그 모습을 가려줬다. 하지만 목소리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저는 말하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지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괜찮다고 할 수 있는 거죠?”

사이린은 작게 심호흡 했다. 방금 들은 말이 마치 따지는 듯이 들렸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바로 새기기 위해서였다. 그 시간은 생각 외로 오래 걸려서 두 사람 모두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술을 먹은 남자들이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며 주먹다짐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거슬리는 소리가 이번에는 신기하게도 마음을 잡는데 도움이 됐다.

사이린은 시선을 모닥불에 두고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제가 어릴 때 살던 집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요. 마을에서도 누가 촛불 같은 걸 가지고 있지 않으면 코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잖아요? 저희 집 주변에는 저하고 리슈 언니 빼고는 아무도 없어서 밤만 되면 진짜 무서워서 나가지도 못했어요.”

“사이린씨하고 언니만요? 부모님은요?”

“없어요. 언니가 제 엄마라고 할 수 있어요.”

“아, 죄송해요!” 치아이가 놀라며 황급히 사과하자 사이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 사과하실 필요는 없는데… 아무튼 밖이 그렇게 어두우니까 밤에 오줌이 마렵거나 하면 정말 큰일이었다니까요. 집 밖을 오고 가는 도중에는 언니 다리에서 잠시도 떨어져본 적이 없었을 정도예요. 그러다가 한밤중에 갑자기 잠에서 깬 날이 있었는데 심하게 오줌이 마려운 거예요. 언니는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집 안에서 싸버렸죠.”

“다음 날에는 혼났겠네요?”

“말도 못할 만큼.”

둘의 대화가 끊기고 여전히 싸우고 있는 남자들의 고함소리와 모닥불 타는 소리가 바람 소리와 벌레 소리와 한데 뭉쳐 들려왔다. 떠날 차례가 다음 날로 다가온 사람들은 당장 출발할 수 있게 짐을 쌌다. 오늘 새로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은 잠잘 자리를 찾아 서성거렸고 검은 옷들은 이야기 거리가 생겼는지 저들끼리 웃고 있었다. 그리고 치아이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자신의 속내를 다시 한번 드러냈다.

“불쾌하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저에게 사이린씨 이야기는 현실성이 떨어지게 들려요. 누군가의 얘기만 듣고 상상했거나, 아니면 떠돌아다니는 방랑에 대한 너무나, 너무나 이상적인 얘기예요.”

치아이는 말이 끝을 끝내자마자 너무 심한 말을 한 것 같아 사이린의 표정을 살피려 했지만 얼굴 대부분이 어둠에 가려져 있어서 불가능했다. 짧은 시간 동안 치아이는 사이린의 여러 표정을 상상했다. 대부분은 심기가 불편하고 화가 난 표정들이었다. 그래서 치아이는 사이린이 격양된 반응을 보일 것 같아 두려웠다.

“맞아요. 그게 정상적이에요.”

예상과 달리 사이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녀는 치아이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현재의 치아이씨는 절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주세요. 이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그래도 치아이는 납득할 수 없었다. 가슴 안의 답답함이 전혀 사라지지 않아 납득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사이린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지붕이 있는 곳으로 잠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어요.”

“왜요?”

“비가 올 것 같거든요.”

말이 끝나자마자 사이린은 치아이의 손을 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은 검은 옷들의 시선이 닿는 범위 내에서 적당한 크기의 빈 나무를 발견해 그 밑에 자리 잡았다. 사이린은 담요를 덮고 몸을 따뜻하게 했지만 치아이는 모닥불 근처 자리가 못내 아쉬워 계속 그곳을 바라봤다. 나무에 사는 벌레들이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다시 모닥불 근처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무리 잠을 참고 기다려도 비는 올 것 같지 않았다.

치아이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기 전에 모닥불 옆으로 돌아가려 할 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내리는 비에 모닥불이 꺼지고 바닥이 진흙이 되자 사람들은 잠을 포기하고 비를 피하기에 바빴다. 다행히 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약해졌고 소란도 가라앉았다. 사이린은 추위를 느끼고 담요를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치아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비가 올 줄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냄새가 났어요.”

사이린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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