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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길의 중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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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2.07.11 15:56
최근연재일 :
2012.07.11 15:56
연재수 :
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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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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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글자수 :
216,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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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04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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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3)

DUMMY

[사이린]


며칠을 강바닥 깊숙이 빠져있는 것 같이 차갑게 보냈던 하미는 이제 꽤 안정되어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마드니도 처음에는 하미에게 대답을 요구했을 정도로 초조했지만 이제는 그저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주변 사람이 보기에 초탈한 것처럼 보여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만들 정도였다. 그 사이에 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사이린은 평온한 바다를 순조롭게 항해하는 것 같은 이 평화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마드니가 현재 생활을 느긋하게 보내게 된 반면, 하미는 이상하게 마음이 들떠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사이린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질문의 내용은 대부분 사이린이 돌아다니면서 본 기억에 남는 장소에 대한 것이었다. 그 동안 하미가 저기압이라 풀지 못한 수다를 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이야기를 듣는 하미의 눈이 어린애처럼 반짝여서 도저히 입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편, 에단은 편지를 쓰거나 사랑하는 그녀에게서 신호가 온 거라 생각되면 어김없이 사이린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저 알리기만 했을 뿐 편지의 내용을 보여주는 일은 절대 없었다. 사이린은 그 부분에 대해 아쉬워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지만 이미 관심이 사라진 일을 가지고 에단이 찾아오는 것은 확실히 귀찮았다. 그 마음이 알게 모르게 태도에 드러나서 에단의 방문은 차츰 줄어들더니 이내 끊어져 버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 그 애가 안 오네요?”

사이린과 함께 여관 청소를 하고 있던 하미가 넌지시 물었다.

“누구요?”

“그 있잖아요. 장군님 딸을 사모하는 청년.”

하미가 에단의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저기압 상태에서도 그녀는 주변의 일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아, 뭐, 글쎄요. 오래갈 인연이 아니었나 보죠.”

“그래선 안돼요. 하나하나의 인연을 소중히 해야 해요.”

“맞는 말이긴 한데 어차피 오래갈 인연이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만나게 되어있어요. 현실이 동화처럼 딱 끝나지는 않잖아요.”

“동화요?”

“네. 왕자와 공주가 결혼할 때 이야기는 끝나지만 현실이라면 두 사람이 죽지 않는 한 그 뒤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요.”

“전 잘 이해가 안가는 것 같네요.”

“그래요? 그런 의미에서 전 지금 할 말이 있는데.”

“뭔데요?”

“저 내일 떠날게요.”

그 말에 창문을 닦고 있던 하미는 걸레질을 멈추고 사이린을 돌아봤다.

“예? 왜요?”

“특별히 이유는 없어요. 그냥 그러고 싶을 뿐이니까.”

하미는 사이린이 닦고 있던 탁자 옆으로 걸어가 말했다.

“하지만 떠돌이 생활을 하면 먹는 것도 부실하고 여러 가지로 불편하잖아요? 그리고 위험해요.” 마음에서 나온 충고였다.

“제가 하미씨랑 같은 생각을 한다면 떠날 생각을 하지는 않았겠죠? 저는 왜 하미씨가 떠나는걸 반대하는지 모르겠어요. 제 생각에는 하미씨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진 않은 것 같은데.”

그 말이 정확했기에 하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왜 그토록 사이린을 잡으려 했는지 자문하게 되었다. 대답은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 답은 스스로 보기에도 당혹스러울 정도여서 하미는 애써 외면하고 다른 대답을 찾으러 했다. 하지만 다른 대답들은 몸 속에서 토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불쾌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느꼈어요? 죄송해요.”

이 말이 하미가 자신을 보호하면서 사과까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아니에요. 뭘 사과까지 하시고 그러세요.”

사이린의 말은 하미에게 위로로 들려와 방금 전에 느꼈던 불쾌한 감정을 날려버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시게요?”

한결 마음이 진정된 하미의 물음은 대답하기 수월했다.

“언니나 찾으러 갈까 해요.”

“아, 예전에 말했던 그 언니?”

“네.” 언니 얘기를 하는 사이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들떠있었다.

“어디 있는 지는 알아요?”

“몰라요. 하지만 찾으면 찾을 수 있어요.”

“그런 게 가능해요?”

하미는 일부러 큰 목소리로 놀라듯 말했지만 사이린의 대답은 덤덤했다.

“네. 가능해요.”






사이린은 거창한 작별인사 같은 것은 귀찮아 했지만 하미는 그녀와 지내는 마지막 밤이라고 기합을 넣어 음식을 만들었다. 저녁 식사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미에게 미리 말을 들은 마드니도 평소와 같이 식사를 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사이린이 떠난다고 슬퍼하거나 기뻐하지 않았고 누구도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런 점이 수도원의 마지막 밤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한 사람이 떠나는 데서 오는 아쉬움이 짙게 깔려있었다. 사이린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바닥에 깔린 채로 묶여있는 공기가 싫었다. 그래서 식사를 마치자마자 “잠시만 기다리세요.” 라고 말하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거실로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흙 피리가 들려있었다.

“와, 흙 피리네요?”

마드니가 대번에 알아차렸다. 사이린은 결전을 앞둔 병사처럼 엄숙하게 피리 구멍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마지막 날 밤이니까 특별히 지나가던 새도 떨어뜨릴 만큼 형편없는 피리 솜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마드니가 박수를 치며 팔꿈치로 하미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그 때문에 하미도 어쩔 수 없이 힘없는 박수를 칠 수 밖에 없었다. 박수 소리가 사그라지자 사이린은 흙 피리를 입에 갖다 대고 숨을 불어넣었다.

처음부터 실수가 있었지만 두 사람이 처음 들어보는 연주라 넘어갈 수 있었다. 맑고 편안한 흙 피리 소리는 밤이라는 시간대와 겹쳐 듣는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여기저기 틀리고 가끔씩 손가락이 갈피를 못 잡는 서툰 연주였지만 도중에 중단해야 할 만큼의 실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연주가 끝났어도 여운이 한 동안 거실에 남아있었다.

하미와 마드니가 박수를 쳐주었다. 사이린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흙 피리를 입에서 떼며 소리쳤다.

“끝!”

“어머, 벌써 끝이에요?”

하미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네.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이거 밖에 없거든요. 그마저도 실수를 상당히 하긴 했지만.”

“그랬나? 내가 듣기에는 틀린 곳이 없던데.” 마드니가 자기에게 말하듯이 말했다. “그런데 내일 떠난다면서 챙길 건 다 챙겼어요?”

“챙길게 뭐 있나요? 가방에 웬만한 건 다 있으니까 괜찮아요.”

“아니, 그래도 먹을 거 정도는 든든히 가져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이런 날씨에 먹을 걸 많이 가지고 다니면 먹지도 못하고 상해버리는 게 대부분이거든요. 그리고 너무 무거우면 움직이는데 힘들기도 하니까 적당 적당히 가져가는 게 좋아요. 마드니씨는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망이네요.”

“쩝, 요즘 집에서 놀고만 있으니 그런 간단한 걸 까먹어 버리네요.” 마드니가 난처한 듯 이를 보이며 웃었다.

사이린이 흙 피리를 주머니에 넣고 자연스럽게 식기들을 모으자 하미가 깜짝 놀라며 말렸다.

“마지막 날인데 설거지는 안 해도 되요.”

“하지만 딱히 할 것도 없는데요.”

“그러면 푹 쉬어두세요. 걷는 건 의외로 힘들잖아요?”

하미의 태도가 워낙 완강했기에 사이린은 순순히 다락방으로 올라가 편하게 몸을 눕혔다. 다락방 끝에 난 구멍으로 차가운 밤바람이 사정없이 밀고 들어와 무심코 팔로 얼굴을 감쌌다. 시간이 지나자 밤바람이 팔 안까지 깊숙이 들어와 뼈가 시렸다. 사이린은 시린 팔을 안쪽으로 넣어 팔짱을 끼면서 몸을 일으켰다. 잠시 뒤 팔의 시림이 조금 가시자 재빨리 이불을 펼쳐 몸을 감쌌다. 포근한 따뜻함이 몸 전체에 퍼지자 불가항력적으로 쓰러지듯 바닥에 누워버리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해가 뜨기 전에 눈을 뜬 사이린은 입고 있는 옷을 포함해 모두 두벌뿐인 옷과 낡은 가방을 챙기고 잠자리를 정리했다. 다른 사람들 몰래 조용히 떠나기 위해 여관으로 내려가는 구멍이 아닌 다락방 끝에 뚫린 구멍으로 조심스레 뛰어내렸다. 땅에 발이 닿으면서 소리가 나긴 했으나 낡은 나무문이 내는 삐걱 소리에 비교하면 몇 배는 조용했다. 사이린은 조용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혹시라도 나타날지 모를 민병을 경계했다. 밤에 혼자 돌아다닌다고 잡아가는 녀석들인데 새벽이라고 다를 쏘냐. 들켰을 때는 이미 늦었을 때라 미리 경계할 수 밖에 없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에 익숙해 졌을 때는 이미 마을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사이린은 걸음을 멈추고 마을을 돌아봤다. 조금씩 되돌아오는 빛의 도움을 받아 마을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이린은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을 때까지 숨을 들이쉬었다. 배가 빵빵해 졌을 때 한 번에 숨을 뿜어내자 계절에 맞지 않는 새하얀 입김이 눈 앞에 흩뿌려졌다가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 모습에 사이린은 가볍게 웃으며 “뭐 이런 거지.” 라고 중얼거리며 가방을 벗어 속을 뒤졌다. 얼마 전에 만든 말린 과일을 넣어놓은 보따리를 찾다가 생소한 감촉이 손에 느껴져 가방 안을 들여다보니 기억에 없는 보따리가 하나 들어있었다. 보따리의 내용물은 마드니가 여관에 왔을 때 나눠줬던 양념된 말린 고기였다. 사이린은 머리를 도르르 굴려 마드니가 어느 틈에 보따리를 자기 가방에 이 보따리를 넣었을 지 추리했다. 가방은 어제 낮에도 한번 점검했었다. 생각은 어젯밤 자고 있는 사이에 넣어났다는 곳에서 끝났다. 그 이외에 다른 방법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이 아저씨가 다 큰 처녀가 자고 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사이린은 머릿속에서 자기가 깨지 않게 조심하며 가방 안에 보따리를 넣어줬을 마드니가 생각나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보따리를 열어보니 생각보다 많은 양의 고기가 들어있었다. 고기를 나눠 준 마드니에게 감사하면서 사이린은 한 점을 입에 물었다. 이른 아침에 먹기에는 너무 매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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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4) +2 12.06.05 760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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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1) +2 12.05.30 743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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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11) +2 12.05.16 849 2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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