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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길의 중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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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2.07.11 15:56
최근연재일 :
2012.07.11 15:56
연재수 :
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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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39
추천수 :
162
글자수 :
216,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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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27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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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3)

DUMMY

[사이린]


점심 때가 다되어서야 일어난 사이린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밑으로 내려왔다. 이미 일어난 남자가 탁자에 앉아 있었고 앞에 놓인 접시가 식사를 마쳤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사이린은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밝은 곳에서 보니 도저히 어제 밤에 뜬금없는 부탁을 하던 남자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멀쩡한 인상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수염이 좀 거슬렸어도 말이다.

“사람은 밤이 되면 이상하게 감상적이 되죠.”

사이린은 팔짱을 끼며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어제 했던 말.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나요?”

“아니. 전혀.”

태연한 대답이 돌아오자 사이린은 괜스레 볼에 바람이 넣었다가 뺐다.

“흙 피리는 있어요?”

“아니, 악기를 다뤄본 적이 없어.”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럼 하나 사야겠네요. 나가죠.”

“그 전에 뭐라고 먹어야 하지 않아?”

“별로 생각 없어요.”

사이린이 무심하게 여관을 나가버리자 남자는 허둥지둥 음식값을 계산하고 뒤쫓아 나갔다.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지만 따뜻한 해 덕분에 뭔가를 하기에 최적의 온도였다. 그래도 모래 바람이 아직도 불고 있어서 어제와 같이 밖에 나와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사이린은 남자가 따라 올 수 있게 일부러 느린 걸음으로 걷다가 그가 옆에 서자 보통 속도를 냈다. 남자는 사이린보다 머리가 하나가 많은 만큼 커서 두 사람 모두 시선을 맞추려면 고개를 움직여야 했다. 사이린이 혼잣말하듯 넌지시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 스스로 남에게 뭔가를 가르쳐줄 실력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쪽이 원하시니까 해보는 거예요. 제가 가르치는 거에 불만이 생겨도 전 몰라요. 기본적인 것만 가르칠 수 있으니까.”

남자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사이린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 지금 언니를 찾고 있거든요. 그래서 한 곳에 하루 이상 머물 계획이 없어요.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다면 말하세요.”

사이린이 남자를 올려다보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네가 왜 그렇게 날 포기시키려 하는지 모르겠는걸.”

“누굴 가르칠만한 형편이 아니니까 그렇죠. 그리고, 제가 가르치는 사람이니 그에 맞게 경어 사용 좀 부탁해요.”

“경어?”

남자의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불만이 섞여있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사이린의 대답은 침착했다.

“선생과 학생이잖아요? 그냥 말에 존경을 좀 담아보세요. 싫으면 저 그만둘 겁니다.”

남자는 복잡한 표정으로 시선을 땅에 고정시켰다. 대답이 쉽게 나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사이린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남자가 수락하면 그건 그대로 좋은 거고 거절해도 잃을 건 없었다.

여전히 대답은 듣지 못한 채로 시장에 도착했다. 작은 마을이라 따로 악기 가게가 존재하지 않아 여러 가지를 모아 파는 잡화점에 갈 수 밖에 없었다. 겉 모습이 부실한 잡화점은 안으로 들어가도 여전히 좁았고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게다가 주인의 모습까지 보이지 않았다. 사이린은 눈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계세요?”

그녀의 목소리에 가게 안에서 누군가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사이린은 그를 발견 하자마자 재빨리 다가갔고 남자가 마지못해 뒤따랐다. 가게 주인은 몹시 뚱뚱한 남자였는데 방금 잠이 깼는지 기분이 찜찜해 보였다. 그는 늘어진 하품으로 손님을 반기는 인사를 대신했다.

“혹시 흙 피리 있나요?”

주인은 질문에 대꾸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을 흘깃 쳐다보더니 가게 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쪽에 한두 개 있을 거 같지만… 그거 잘 깨지잖수? 살아남은 게 있으면 한번 가져와 보시구라.”

그러고 주인은 다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사이린은 어쩔 수 없이 주인이 가리킨 곳으로 가서 손짓으로 남자에게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두 사람은 겹겹이 쌓인 거대한 나무 상자의 산을 눈 앞에 맞았다. 사이린이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쩌죠? 여기서 찾을 까요. 아니면 다른 마을로 갈까요?”

남자는 일단 한숨부터 쉬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일단 찾아보…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이린은 씨익 웃었고, 남자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승리의 기쁨에 도취된 사이린은 나무 상자 사이에 발을 걸치고 맨 위에 있는 상자로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이것 좀 내려주세요.”

남자는 순순히 요청에 따랐고, 그 때부터 두 사람은 몇 시간 동안이나 상자 속을 헤맸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먼지가 일어 목안이 바짝 말랐다. 하지만, 그 고생을 하고도 흙 피리는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흙 피리 것으로 보이는 파편도 찾을 수 없었다. 사이린은 가게 주인이 애초에 흙 피리란 물건을 몰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남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쩌죠?”

“마차를 빌려서 다른 마을로 가봅시다.”

있지도 않은 물건을 찾도록 고생시킨 게 화가 나서 두 사람은 자신들이 어지럽힌 상자를 그대로 방치하고 나갔다. 그 사이 깨어난 가게 주인은 아무것도 안 사는 손님들이 기껏 쌓아놓은 상자를 어지럽힌 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는 것 자체가 귀찮았기 때문이다.

가게 밖으로 나오자 남자가 말했다.

“마차는 내가 빌려올 테니 여관으로 돌아가 짐을 챙겨주시게.”

사이린은 그 말대로 하기로 하고 여관으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여관 주인에게 부탁해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의 가방과 남자의 가방을 양손에 든 사이린은 광택이 나는 남자의 가죽 가방 속을 열어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소하지만 여관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남자의 가방으로 얼굴을 가렸다. 비싸 보이는 가방이라 모래가 부딪히는 소리도 다르게 느껴졌다. 마차 소리가 들려올 때에는 재빨리 자신의 낡은 가방으로 얼굴을 가리고 시치미 뗐다.

남자가 가져온 마차는 두 마리의 말이 끌고 있었다. 혹시나 천장이 있는 마차를 상상했던 사이린은 평범한 수레같은 모습에 실망했지만 겉으로 불평하진 않았다. 그녀는 마차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말이 두 마리라니, 꽤 호화로운데요?”

“좀 사치를 부려봤지…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남은 게 이것 밖에 없더군. 그리고 빌려주지 않아서 그냥 사버렸소.”

남자는 여전히 존대가 입에 맞지 않아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사이린은 남자가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이 재미있었고, 자신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노력해주는 점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느꼈다.

마차 한 켠에 쌓여있는 장작을 피해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은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사이린은 가방에서 수통을 꺼내 물을 마셨다. 먼지와 모래로 바짝 말라있던 목 안에 시원한 물이 들어가자 기분 좋음을 넘어서 행복까지 느껴졌다.

마차가 움직이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사이린은 재빨리 한 모금 더 마시고 수통을 남자에게 건네줬다. 남자는 물을 한 모금 마시자마자 시원한 탄성을 쏟아냈다. 그도 마찬가지로 한번으로는 아쉬운지 한 모금 더 들이키고 수통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가르쳐줬네. 내 이름은…”

“앗! 말하지 마요!” 사이린은 남자의 말을 황급히 끊었다. “그 편이 서로에게 더 좋을 것 같지 않아요?”

“날 배려해주는 거요? 확실히 내 입장에서는 크게 봤을 때 그 편이 좋긴 하지. 하지만 그쪽 입장에서는 썩 좋은 제안이라 생각이 안드오. 이래 봬도 내 이름은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데…”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말하지 마세요. 안 그러면 그만 둘 거예요.”

사이린이 막무가내로 굴자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호칭 문제는 어떻게 합니까?”

“간단하게, 그냥 선생이라고 부르세요. 전 아저씨라고 부를게요.”

“아저씨?”

다른 이들이 그렇게 불리는 건 많이 봐왔지만 정작 남자 자신은 한번도 불려진 적 없는 단어였다. 때문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호칭에 남자는 거부감이 들었다.

“마음에 안 들어요?”

제멋대로에 나이 어린 선생이 재촉하자 남자는 필사적으로 다른 호칭을 떠올렸다. 하지만, 난감하게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침묵은 승낙의 뜻이죠? 그럼 아저씨는 이제부터 아저씨인 겁니다.”

남자는 일부러 들리도록 헛기침하며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사이린은 입 꼬리가 귀에 닿을 만큼 씩 웃으며 마차 소리에 지지 않을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이 근처 길 알고 있어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멀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네, 선생!”

“길 잃지 않게 조심하세요, 아저씨!”

마차가 달릴수록 그토록 거슬리던 모래바람이 옅어지더니 마침내 사라졌다. 지나온 길을 바라보던 사이린은 자신이 있었던 마을이 모래에 가려 뿌옇게 보이는 걸 보고 기가 막혔다. 어떻게 저런 곳에서 꼬마들은 숨이 찰 때까지 뛰어다닐 수 있는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작가의말

슬슬 끝이 보이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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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2) 12.06.25 859 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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