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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길의 중간에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2.07.11 15:56
최근연재일 :
2012.07.11 15:56
연재수 :
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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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65
추천수 :
162
글자수 :
216,761

작성
12.05.1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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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9)

DUMMY

[사이린]


해가 다시 떠오를 때 배는 목적지에 닿았다. 이제까지 강 주변을 가득 메웠던 나무와 풀들이 부두 근처에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 편의를 위해서였다. 덕분에 사이린은 선상에 올라오자마자 저 멀리 보이는 산 위의 거대한 성을 볼 수 있었다.

“저 성은 아직도 있네?”

그녀가 중얼거리듯 한 말을 무거운 몸을 끌고 선상으로 올라오던 노인이 듣고 냅다 소리쳤다.

“당연하지! 인간의 피와 땀과 목숨을 빨아 먹는 것들이 언제나 인간들보다 오래 사는 법이니까!”

예상치 못한 발언에 사이린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노인은 괜히 머쓱해져 얼굴을 붉히며 짐을 챙겼다. 배는 곧장 부두에 닿았고 타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배에서 내렸다. 노인과 사이린은 곧장 시장으로 직행했다. 배에서 내리고 제일 먼저 노인이 필요한 재료부터 사기로 했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시장은 수많은 사람들로 분주했다. 사이린은 노인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가 음식 재료를 살 때마다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에 넣는 역할을 했다.

“어? 영감님. 전에 보냈던 거 벌써 다 떨어졌어요?”

대부분 올 때가 아닌데 모습을 보인 노인의 행동에 의아해 물었다. 그럴 때마다 노인은 두리뭉실한 말로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했다.

“그 여자애는 누굽니까?”

뒤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는 사이린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 물음에 대해서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 아는 친구 딸인데, 장사를 배우는 중이라서 데리고 다니는 중이야.”

생각해 보니 이 대답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도 됐기 때문에 다음 가게부터는 이 대답으로 밀고 나갔다.

해가 하늘 중간에 머무를 때 노인의 일이 모두 끝났다. 두 사람 모두 양손에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시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사람들 중 몇 명이 사이린의 낡은 옷을 보고 놀라 오랫동안 눈길을 주기도 했다. 이제 오늘 나가는 배를 탈 때까지 할 일이 없었다. 힘이 넘쳐 무거운 바구니를 앞뒤로 흔들며 걷는 사이린에게 노인이 물었다.

“그래, 다음에는 어디로 갈 거지?”

“글쎄요? 일단은 이 동네에서 좀 놀고 생각하려고요.”

“논다고? 여기는 별로 그럴 곳이 없는데…” 노인이 수염을 만지며 말했다.

그 때 사이린이 흔들던 바구니가 지나가던 여자를 살짝 쳤다. 깜짝 놀란 사이린이 재빨리 고개를 숙여 사과하자 여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넌 좀 조심해야겠다.” 노인이 걱정하는 얼굴을 했다.

“스스로도 가끔씩 반성하고 있습니다.” 사이린은 고개를 푹 숙이며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리 봐도 반성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다시 부두로 돌아왔다. 부두 한 켠에 있는 매표소에서 노인이 표를 사는 동안 사이린은 강가에 여유롭게 앉아있었다. 강물은 잠자듯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고 간간히 바람이 불어와 머리 위에 쌓인 열기를 날려줬다.

사이린이 앉아있는 곳에서는 부두 반대편에 있는 넓은 평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강가는 다른 곳보다 높은 편이어서 흡사 높은 산 위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풀이나 나무가 한 그루도 심어져 있지 않아 허전해 보이기도 했다. 평야가 보고 싶다면 언제든지 강을 건너가서 풀과 나무를 지나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이린은 그 편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노인이 표를 끊고 돌아올 때 마을 쪽에서는 사람을 태운 말들이 수십 마리나 이동하고 있었다. 말을 타고 있는 사람들은 중간쯤에 있는 두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몸을 모두 가리는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행렬의 끝에는 무언가를 엄청나게 싣고 그 위를 검은 천으로 덮은 마차가 보였다. 사이린은 그들을 보며 한 여름에 왜 저리 더운 옷을 입었는지 생각하다가 다시 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노인은 무슨 이유에선지 그들을 보며 욕과 저주를 보내고 있었다.

기나긴 말의 행렬이 지나간 후 노인은 사이린 옆에 앉아 강을 보며 기분을 달랬다. 그는사이린이 왜 그렇게 자신이 화를 내는지 물어봐 주길 바랬지만 사이린은 옆에 있던 돌을 강에 힘없이 던질 뿐이었다. 그녀가 여섯 번째 돌을 던질 때 노인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방금 지나간 그런걸 보고나니 왠지 힘이 빠지는 구나.”

“그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일이 있나 봐요.”

“장사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놈들에게 좋은 감정이 있는 인간은 없을 걸.” 그러면서 노인은 강에 침을 뱉었다.

“아이참. 강이 더러워지잖아요.” 사이린이 목소리를 높였다.

노인은 생각지 못한 호통에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고 사과했다. 사이린은 강에 다시 한번 돌을 던졌다. 돌이 강에 빠지면서 퐁당하고 맑은 소리가 났다.






배는 금방 도착했다. 사이린은 노인이 배에 짐을 올리는 걸 도와주고 출발하기 전에 땅으로 돌아왔다. 배가 출발하자 노인이 선상에서 그녀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사이린도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줬다.

배가 저 멀리 가버려 작게 보이게 될 때까지 사이린은 부둣가에 우두커니 서서 강 너머 평야를 바라보며 오후 계획을 생각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하기에는 바로 앞에 큰 벽이 놓여져 있었으니 돈이 거의 없었다. 어젯밤은 운 좋게 공짜로 배를 채우고 잠까지 잘 수 있었지만 원래 배를 한번 탈 만큼의 돈만 가지고 있었던 지라 이제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끼니 한번 때울 수 없었다. 사이린은 노인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은걸 후회했지만 그 방법 또한 너무 많은 도움을 받는 것이라 생각되어 어차피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렇게나 마음에 들어 했던 말린 과일은 배에 탔을 때 노인에게도 나눠준 바람에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사이린은 다시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싼값에 달달한 먹거리를 살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아까 전에 노인과 같이 갔을 때 자기에게 필요한 물건은 하나도 사지 않은 것을 반성했다.

오후에 접어든 길은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오전보다 도 북적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난 좁은 길을 오가면서 사이린은 역시 아까 전에 물건을 샀어야 했다며 후회에 후회를 반복했다. 가뜩이나 길도 좁은데 덩치 큰 남자들은 웬만해서는 한번에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그들은 잠시 지나가겠다는 사이린의 목소리를 듣고도 일단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하고는 귀찮다는 표정과 함께 소리 없이 입을 움직인 다음에야 길을 비켜줬다. 그에 비하면 여자들은 일단 길을 비켜주고 고개를 슬쩍 돌려 그녀를 확인해보려는 시도를 했을 뿐이었다.

사이린의 눈길을 처음 잡아 끈 것은 시장 한 켠에 있는 과일 좌판이었다. 이전에 먹었던 말린 과일이 생각나 그녀는 조심스레 가격을 물어봤다. 불행히도, 사이린이 가진 돈으로는 많아야 서너 개 밖에 사지 못했다. 그녀는 좌판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돈을 얼마 안 되는 양의 과일을 사는데 써버리는 게 과연 좋은 선택인가하고 깊이 고민했다. 하지만 좌판 주인은 낡은 옷을 입은 그녀를 오래 참지 못하고 “사기 싫으면 저리가!” 하면서 화를 버럭 냈다. 과일이 주는 두근거림에 마음이 부풀었던 사이린 이었지만 그 한마디에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안 쪽에 들어가자 좀 더 싼 가격에 과일을 판매하는 좌판이 눈에 띄었다. 비록 번듯한 가게에서 파는 과일보다 상태는 나빴지만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을 살 수 있었다.

‘아마 오랜 시간 햇빛 아래 내놓았기 때문이겠지’

사이린은 결심을 굳히고 싼 가격의 과일들을 있는 돈을 모두 털어 구입했다. 어차피 구입한 과일들은 대부분 말려서 오래 보관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주 못 먹을 정도만 아니면 상관없었다. 과일을 꽤 많이 사자 좌판 주인 할머니가 보따리에 싸주는 친절함을 베풀었다.

사이린은 감사의 인사를 한 뒤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시장을 빠져 나왔다.

여전히 길을 비켜주지 않는 몇몇 남자들 때문에 보따리 한쪽이 짓눌려 끈적끈적한 과즙이 흘러나왔다. 사이린은 기분이 살짝 상했지만 앞으로 생길 달달한 먹거리를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마을을 빠져 나와 근처에 있는 양지바른 언덕에 적당히 자리잡아 보따리를 풀었다. 사이린는 항상 가지고 다니는 작은 칼을 가방에서 꺼내 과일 껍질을 벗겨내고 작게 잘라내는 작업을 했다. 과일의 물기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딱히 훔쳐낼만한 도구가 없어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그러면서 가끔가다 골아버린 과일을 솎아내고 단것에 대한 유혹을 참지 못해 잘라낸 것들 중 제일 작은 것을 입에 넣기도 했다. 단맛이 입에 퍼질 때마다 사이린은 그 누가 봐도 너무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구입해 온 과일을 모두 손질한 사이린은 그것을 햇빛 아래 펼쳐두고 마을 쪽을 바라봤다. 한 눈에 마을의 전체 모습이 들어오며 사람들이 오고 가는 모습이 대체적으로 파악됐다. 그녀의 시선은 아까 내렸던 부두에서 낮은 산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을 지나 그 옆에 있는 또 하나의 산 위에 세워진 성에 멈췄다. 큰 도시에 있는 거대한 성만큼 웅장하진 않았지만 하나의 긴 탑과 커다란 본체를 가진 그 성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시선은 이제 마을 주변으로 옮겨갔다. 경작된 논과 밭에서 몇몇 사람이 일을 하고 있었고 길에서는 마차가 짐을 싣고 오가고 있었다. 사이린은 마을과 성과 마을 밖을 계속 번갈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름철의 태양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날에 온몸으로 계속 받고 있기에는 너무 뜨거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쉴 수는 없었는데 잘라놓은 과일에 계속해서 날 파리가 꼬였기 때문이다. 사이린은 그늘에서 쉬다가 벌레가 과일에 접근할라치면 부리나케 달려가서 내쫓았다.

저녁 때가 되자 사이린은 제일 잘 마른 과일 조각을 집어 들어 유심히 바라봤다. 색이 보기 흉하게 진한 갈색으로 변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입안에 넣어봤다. 잘 말랐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나름 괜찮았고 맛도 달달한 게 마음에 들었다. 에이린이 싸준 것과는 맛도 모양도 한참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특별한 재료 없이 햇빛에서 말린 것만으로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단 음식이 생긴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 만족할 만큼 마르지 않은 조각도 있고 돈도 한 푼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언덕 위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사이린은 횃불을 든 민병 두 사람의 인도를 받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 밤하늘을 보면서 느긋하게 있던 사이린을 보고 다가온 두 사람은 젊은 여자가 밤중에 혼자 있는 것에 놀라며 그녀의 정체를 물었다. 두 사람의 얼굴은 들고 있던 횃불에 의해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붉은 빛으로 보였는데 그 때문에 악몽에 나올법한 무서운 얼굴처럼 보였다. 그들은 사이린의 대답에 어안이 막혔다.

“집도 없고, 가족은 어디 있는지 모르고, 그냥 떠돌아다닌다?”

“왜요. 불만 있어요?”

사이린이 쏘아붙이자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행색을 보아하니…”

“옷이 좀 나쁘다고 사람이 나쁜 건 아니잖아요.”

말이 중간에 끊긴 민병은 기분이 언짢았지만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아, 그래. 그건 맞는데 그래도 여자 혼자 밤에 나다니는 건 좋지 않아.”

“하지만 전 돈 없어요. 오늘 이거 사는데 다 써버려서.”

사이린은 바닥에 있던 보따리를 펼쳐 오늘 내내 말린 과일을 두 사람에게 보여줬다. 물기가 싹 빠진 마른 과일들은 시장에서 사올 때보다 부피가 대폭 줄어 보따리를 묶어도 여분이 꽤나 남았다.

“그러니까 전 여기서 잘 거예요. 그쪽에도 큰일 되는 건 없잖아요?”

“아니, 큰일이야. 오늘 밤 묶을 곳을 안내해줄 테니 따라와.”

“네?”

민병 중 한 명이 사이린의 팔을 단단히 잡아 언덕 아래로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사이린이 제자리에서 계속 용을 쓰며 버티자 다른 한 명이 들고 있던 보따리를 가로채 언덕을 내려갔다.

“저거 돌려받으려면 얌전히 따라오도록 해.”

사이린은 말린 과일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민병이 이끄는 데로 걸어야 했다.

민병들은 마을 입구에서 횃불을 껐다. 집집마다 나오는 불빛은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길을 걷기에 최소한의 빛은 존재했다. 그들은 마을 중앙에 있는 산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 도착했다.

“여길 올라가는 거예요?” 사이린이 물었다.

“왜? 힘들 것 같아서 그래? 언덕 두 번 정도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돼.”

사이린은 볼에 바람을 넣어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둠에 가려 민병들은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민병들은 계단 중간에서 왼쪽으로 나있는 길로 걸음을 옮겼다. 그 동안 사이린은 달빛이 비치는 강을 바라보며 걸었다. 올라온 높이가 상당해서 낮에는 그 많은 사람이 오고 다녔던 부둣가가 손가락 굵기만하게 보였다. 그게 갑자기 재미가 붙어 사이린은 엄지와 검지로 강에 비친 달을 잡는 시늉을 했다. 그 놀이는 앞에 멈춰선 민병에게 부딪힐 때 멈췄다.

민병들이 문을 두드리는 건물은 주변에 있는 다른 어느 집과 마찬 가지인 낡은 목제 건물이었다. 나무 벽에는 군데군데 단단한 사각형 돌이 박혀 있었는데 약해진 나무를 대신해 억지로 끼워놓은 것 같아 매우 불안해 보였다.

문을 열고 나온 집 주인은 긴 머리를 말아 올린 중년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문을 두드린 민병의 얼굴과 그 옆에 서있는 민병의 얼굴, 그리고 사이린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이번엔 어디서 데려왔어?”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

“마을 밖에 있는 언덕이요.”

여인은 그 말에 실소했다.

“그런 곳에서 뭐하고 있었대?”

“과일 말리고 있었는데요.”

사이린이 대꾸하듯 말하자 여인은 여전히 웃으면서 그녀를 찬찬히 흩어봤다.

“뭐, 그런 건 별로 상관없지. 너희들은 가봐. 아가씨는 들어오고.”

민병들은 사이린에게 보따리를 돌려주고 돌아갔다. 보따리를 건네 받은 사이린은 그냥 이대로 다른 곳에 도망갈까 하다가 여인이 생각보다 나쁜 사람 같지 않아 보여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수상한 낌새를 느낀다면 언제든지 집을 탈출한 준비는 되어있었다.

집 안은 생각보다 널찍했다. 가게에서 볼 수 있는 판매대가 정면에 보여 이 집도 장사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판매대 위에는 은색 접시 위에서 놓인 촛불이 빛을 내고 있었다. 뒤로는 주인이 서있을 공간과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침대가 있었고, 옆으로는 안쪽으로 들어가는 듯한 복도가 보였는데 길은 안에서 오른쪽으로 꺾여 있었다.

“저기… 여긴 뭐 하는 곳인가요?”

사이린의 질문에 여인이 판매대에 있던 촛불을 담은 접시를 들고 안쪽 복도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여관. 나쁜 곳은 아니니까 걱정 말고 따라와요.”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해 상당히 풀어진 말투였다.

긴장을 푼 것은 아니었지만 사이린은 여인의 뒤를 따라 복도로 들어갔다. 복도는 두 사람이 겨우 통과할 정도로 좁았고 그 때문에 왼쪽 벽에 있는 문 두 개가 또렷하게 보였다. 여인의 말대로 이곳이 여관이라면 하룻밤 혹은 장기로 대여해 놓는 방일 터였다. 문 두 개를 지나자 복도가 왼쪽으로 꺾였다. 이번에는 오른쪽 벽으로 두 개의 문이 보였다. 여인은 복도 끝에 있는 사다리 앞에서 멈춰 섰다. 사다리 끝에는 아마도 다락방으로 통하는 듯한 네모난 구멍이 보였다.

“이 위에서 자요. 오늘은 늦었으니까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하도록 하죠.”

“무슨 얘기요?”

“글쎄,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왜 다 큰 아가씨가 다 떨어진 옷을 입고 혼자서 언덕 위에 올라가있었나 하는 것 정도?”

장난기가 섞인 말투였지만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여인은 옆으로 비켜서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라고 손짓했다. 사이린이 머뭇거리자 그녀는 손에 들고 있는 보따리 때문인 줄 알고 대신 들어주는 친절함을 보였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위로 올라가자 여인이 보따리를 올려주며 말했다.

“잘 자요.”

“고맙습니다.”

여인이 시야에서 사라지면서 촛불의 빛도 점점 멀어졌다. 사이린은 다락방 안을 손으로 더듬어봤다. 한 켠에 놓여진 침구가 먼저 손에 잡혔다. 다른 곳도 확인하다 보니 생각보다 넓어서 누워서 뒹굴 거릴 수도 있을 정도였다. 천장의 높이는 낮았지만 앉을 수 있을 정도는 됐으며 무엇보다 예상외로 깨끗했다. 그리고 가장 큰 특징으로 원래 벽과 창이 있었어야 할 곳에는 아무것도 없이 그냥 뻥 뚫려 있었다. 재료가 부족했는지 아니면 돈이 부족했던지, 그것도 아니면 일부러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붕의 길이가 짧아서 바닥을 모두 덮지 못했다. 사이린은 지붕이 덮지 못한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곳은 여관의 출입문이 있는 방향이었다. 지붕이 덮지 않은 바닥은 이곳 저곳 얼룩이 져있었지만 천장이 없는 덕에 누워서 밤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늘 자체는 언덕에서 보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지만 집 안에서 보는 하늘은 어딘지 모르게 특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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