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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길의 중간에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2.07.11 15:56
최근연재일 :
2012.07.11 15:56
연재수 :
35 회
조회수 :
22,130
추천수 :
162
글자수 :
216,761

작성
12.07.02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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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8쪽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5)

DUMMY

[사이린]


눈이 가득 쌓인 길을 마차로 가는 건 여러 가지로 곤욕이었다. 땅이 얼어 바퀴가 헛돌기 다반사였고, 눈이 구멍을 가리고 있어 미처 피하지 못해 마차가 크게 흔들리기도 했다. 가끔씩 바퀴가 구멍에 빠져 끌어올려야 할 때, 사이린은 차라리 걷는 것이 편하다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연신 입김을 뿜으며 있는 힘을 다하는 말들 앞에서는 사치였다.

남자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 생각은 특히 찬바람이 부는 밤에 묶을 곳이 없어 마차 뒤에서 모포 한 장으로 몸을 감싸고 잠을 청해야 할 때 간절해졌다. 몇 달 동안 사이린과 함께 여행하면서 처음에는 넉넉했던 돈도 이제는 걱정하지 않으면 안될 상태가 됐다.

실수가 많았지만 사이린은 최선을 다해 가르쳤기 때문에 이제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떠나고 싶었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 여행에 가담하겠다고 말한 것이 자신이었기 때문에 말 할 수 없었다.

사이린은 이미 남자의 고민을 눈치채고 있었다. 최근 그의 행동이 묘하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심증만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말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시작된 동행은 처음에는 즐거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해졌다. 그리고 무언가를 할 때마다 상대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불편했던 건 일단 스승과 제자 사이였어도 아무래도 남이었기 때문에 행동을 속 편히 하지 못한 점이다. 특히 배변에 관련된 일이 그랬다. 나이차가 있었어도 남과 여라는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사이린은 며칠만 더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도 남자가 얘기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먼저 헤어지자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소?”

남자가 고개를 들어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사이린도 눈을 감고 코에 모든 신경을 쏟았다. 분명히 어디선가 갓 만든 음식 냄새가 날아오고 있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된 곳에서 묶지도 못하고 마른 음식들로 끼니를 때운 두 사람은 급격히 허기지기 시작했다.

“이 근처에 마을이 있던가요?”

사이린이 남자를 보며 말했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한 번 냄새 따라 가보죠.”

남자가 고삐를 흔들며 말했다. 마차가 움직이며 거친 소리를 내는 동안에도 사이린은 음식 냄새에 취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냄새는 허기와 함께 잊고 있었던 기억도 떠오르게 했다.

어릴 적 그녀는 음식이 만들어지기 무섭게 먹어 치우곤 했다. 리슈넬은 일찍 먹는 건 뭐라 하지 않았지만 사이린의 손이 더럽거나, 손이 델 정도로 음식이 뜨거우면 항상 높은 곳에 놔두곤 했다.

하지만 그런 조치도 먹을 것에 눈이 먼 배고픈 새끼를 가로 막을 수 없었다. 사이린은 집 안에서 쌓을 수 있는 물건은 죄다 쌓고 올라가다가 중간에 끼어있던 접시가 어긋나면서 요란하게 땅으로 떨어졌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리슈넬은 사이린이 떨어진 것 외에는 크게 다친 것이 없는 것에 감사했고, 위험한 짓을 한 벌로 엉덩이를 때리고 그 날 밥을 굶겼다.

그 뒤로도 오래 동안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지만, 사이린은 더 이상 먹을 것 때문에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게 됐고 리슈넬은 높은 곳에 음식을 올려 놓지 않았다. 그래도 뜨거운 음식을 집으려다 손이 데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연관되지 않은 기억들까지 불규칙적으로 떠올랐다. 한번은 사이린은 리슈넬과 같이 밤늦게 선술집에 들른 적이 있다. 처음부터 선술집에 가려고 한 건 아니었고, 몇 달 전에 있었던 일과 같이 여관에서 묶을 돈이 없고 선술집 외에는 문을 연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때도 두 사람이 가게로 들어가자마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눈치를 보며 친절하지 않은 주인장에게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들렸던 대화 내용을 사이린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여자 두 명이 한 밤중에 술집에 오다니. 기가 막히는군.” 불만 가득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그래도 둘 다 젊으니까 좋잖아? 나 언제 한번 술 마시고 있는데 글쎄 엄마와 딸이 같이 온 거야. 그게 참 가관이었지. 딸이 뭘 하나 하면 엄마가 옆에서 자꾸 재잘거리는 데, 나중에는 서로 말싸움하느라고 주변에 그 소리만 들리더라.”

간사한 목소리의 남자가 한 말은 유독 온전히 들려와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리슈넬이 식기와 잔을 정리해 나눠주고 있었던 때였다. 간사한 목소리의 말은 계속 됐다.

“난 그래서 어디서 밥 먹을 때는 그런 것들이 있나 없나 먼저 살펴본다? 바로 옆에 그런 게 앉으면 재수 없거든. 특히 딸보다 엄마가 심해. 딸은 주변 눈치라도 보는데 어미는 분수도 모르고 목소리를 키우거든.”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을 하던 목소리가 실제로 간사했었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흐르는 동안 좋지 않았던 기억의 원형이 변형되지 않았으리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그래도 말한 내용만큼은 확실하다고 스스로 자신했다. 그 말로 인해 그 녀석에게 다가가 손에 들고 있기도 뜨거운 차를 녀석의 머리에 쏟아버렸으니까.

간사한 녀석은 머리에 자기가 먹고 있던 뜨거운 차가 얼굴을 따라 흐르고 있는데도 좋다고 웃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그가 화상을 입고 있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요리를 만들고 있던 주방장은 재료가 타고 있는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이린을 제외한 가게의 모든 사람이 멈춰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한 명이 더 움직이고 있었다.

“뭘 한 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한 건 리슈넬이었다. 그녀는 사이린과 간사한 녀석을 번갈아 보다가 남자의 머리에 모자 대신 씌워져 있는 잔을 보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상황에 놀란 건 사이린도 마찬가지였다. 리슈넬이 움직이는 것은 물론 그녀가 이 일의 원인으로 정확히 자신을 지목한 것도 놀라웠다. 두 사람은 서로를 놀란 눈으로 계속 바라봤다.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시간만 지나던 중 리슈넬이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원래대로 돌릴 수도 있니?”

“응…”

“멀리서도?”

“응…”

“그럼 오늘 밤은 다른 곳으로 움직이고, 멀어졌을 때 원래대로 돌려놓자.”

사이린은 리슈넬의 말에 따랐다. 가게에서 나왔을 때, 다행히 주변에는 어둠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밖에 있어서 우연으로라도 선술집 안을 보았다면 일이 훨씬 복잡해졌을 것이다.

평소보다 걸음이 빨랐기 때문에 두 사람은 비교적 빨리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길에 들어섰다. 쌀쌀한 밤 바람이 두 사람을 맞이할 때 리슈넬이 걸음을 멈췄다.

“자. 돌려놔.”

“됐어.” 평소보다 힘이 없었지만 애써 덤덤한 목소리였다.

“원래대로 돌려 논거니?”

뭔가 특별한 행동이나 주문이 필요할 줄 알았던 리슈넬은 사이린이 그냥 돌아갔다고 말한 것에 의심을 품었다.

“응.”

리슈넬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다 말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 상태로 서 있었다. 사이린은 처음에 리슈넬의 행동이 자신이 잘못해 꾸짖으려는 건 줄 알았지만, 곧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필사적으로 답을 찾고 있는 것이란 걸 알아챘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신이 무언가 말해야 했다. 하지만 이럴 때 리슈넬은 평소의 언니가 아니라 어머니로 다가왔다. 사이린은 어머니에게 감히 충고 할 수 없었다.

“선생?”

남자의 부름에 사이린은 기억에서 빠져 나와 눈을 깜박였다. 머리가 살짝 띵한게 잠들기 직전에 느껴지는 기분과 비슷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세 번이나 불러야 반응을 하는 겁니까?”

“아하하, 잠시 옛날 생각 좀 하느라고요.”

“가끔씩 옛 생각에 잠기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하지만 너무 자주 그러는 건 좋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에 선생은 자주 옛 생각에 빠지는 것 같소. 특히 얘기 도중에 그러는 경우도 있던데 그러면 상대에게 실례가 되니 주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이린은 남자가 이제 경어가 입에 착하니 붙었다는 것에 기뻐하면서, 예전 생각에 빠진 적은 요 근래 이번 한번뿐이라고 속상해했다. 얘기 중에 생각에 잠긴다고 한 건 아마 그에게 가르칠 것에 대한 고민을 말한 거라 생각했다. 그것 외에는 짚이는 게 없었다. 가끔 리슈넬을 생각하긴 했지만 그 때는 대부분 혼자 있을 때였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적에는 당연히 그 사람들에게 집중했다. 이 사실을 말해서 남자에게 무안을 줄까 했지만 괜히 화만 키울 것 같아서 관뒀다. 그리고 애초에 그가 한 말도 나쁜 말은 아니었다.

“그보다 마을을 찾아낸 것 같군요.”

남자가 턱 끝으로 가리킨 곳에서 음식을 지을 때 볼 수 있는 맛있는 연기가 눈 사이로 피어 오르고 있었다. 사이린은 뜬금없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는 힘껏 넓게 입김을 내뿜어봤다. 입김은 존재를 알리기 무섭게 빠르게 사라졌다. 그녀가 입김의 생과 사에 대해 고뇌하고 있을 때 남자는 반대편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집은 왜 혼자 떨어져있지?”

마을에서 좀 떨어져있는 집은 흔한 모양새였기 때문에 큰 관심은 두지 않았지만 마당에 장작 패는 도끼가 널브러져 있는 것은 눈에 띄었다. 얼마 안가 꽤 널찍한 공터가 나왔고 집들이 그 곳를 빙 둘러싼 형태로 자리잡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냇물에 시선이 쏠렸다. 그곳에선 몇몇 아낙들이 꽁꽁 언 얼음을 깨고 붉게 변한 손으로 힘들게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녀들 사이에 왔다갔다하던 수다는 낯선 이의 등장에 어딘가로 부리나케 숨어버렸다.

“안녕하세요.”

사이린이 경쾌하게 인사하자 아낙들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 마을에 여관이나 술집이 있나?”

남자가 아낙들에게 물었다. 아낙 중 한 명이 뭔가 말하려 할 때 그녀들 뒤로 수염을 아무렇게나 기른, 이 추위에도 옷을 얇게 입은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말끝이 내려가는 약간 암울한 말투로 말했다.

“이 마을은 그런 건 없소.”

그는 두 사람을 살갑게 맞이하면서 마차로 다가와 능숙하게 말들을 쓰다듬었다.

“말 발굽 소리 들은 지가 참 얼마 만인지…”

“반갑게 맞아줘서 고맙습니다. 우린 지금 며칠 째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추위에 떨고 있는데 혹시 다른 묶을 곳은 없습니까?”

남자의 물음에 수염은 기분 좋은 얼굴로 대답했다.

“빈집이라면 한 곳 있소. 주의점이 하나 있는데, 요즘 마을의 대모께서 오늘 내일 하시니까 그 부분만 조심해주시오.”

“예, 알겠습니다. 알았지요. 선생?”

남자는 평소에도 쓸데없이 부산한 사이린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봤다. 추운 날에 손이 부르트도록 빨래를 하던 아낙들을 보고 있던 사이린은 그의 말에 도끼눈으로 응수했다. 아무리 평소 행동이 그래도 분위기 파악을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그 눈이 말해줬다.

그러는 사이 마을 사람 몇몇이 나와 오랜만에 보는 마차를 구경했다. 그 중 어린 애들이 멋모르고 말에게 달려들자 사이린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 때문에 아이들이 꿍해지자 나중에 만지게 해주겠다고 약속할 수 밖에 없었다. 사이린은 바로 옆에서도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이래서 애들은 싫어” 라고 말했다.

수염은 마을 한 켠에 오랫동안 방치된 것처럼 보이는 빈집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몇 년째 빈집인 곳입니다. 따님은 여기에 짐 정리하고 아버지는 마차를 끌고 나하고 같이 마구간으로 갑시다.”

수염의 말에 짐을 내리던 사이린이 그를 스쳐 지나가며 대꾸하듯 말했다.

“저 딸 아니에요.”

“음? 그럼 두 사람 무슨 관계요?”

“선생과 제자요.”

남자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하자 수염이 잽싸게 마차에 올라탔다.

“오? 역시 내 감은 죽지 않았군. 당신 행동이나 말투가 묘하게 수준이 높았단 말이오. 그래서 난 어디의 높으신 분인가 했는데 거의 맞았군요. 선생이시라니. 내 눈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게…”

남자가 해명의 말을 하려 하자 사이린이 급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신호를 받은 남자는 그대로 하려던 말을 바꿔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표가 나나 보네요.”

“그럼요. 못 배운 사람과는 틀리지! 게다가 옷차림도 고풍스럽지 않습니까!”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유쾌한 웃음 소리를 뿜어내며 멀어져 가는 걸 보고 있던 사이린은 발치에 놓여있는 가방과 짐 꾸러미들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평소 자신이 억세게 굴었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지만 한 사람이 옮기기에는 양이 너무 많았고 무거웠다. 그녀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은 신기한 구경거리를 보듯 보기만하고 도와주지는 않아 결국 혼자서 모든 짐을 옮겨야 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거의 모든 짐을 집 안으로 날랐을 때, 왜 짐을 모두 마차에서 내렸는지에 대해 의심이 들었다. 이 마을에 눌러 살 것도 아니고 길어야 며칠만 머무를 텐데 이건 비효율적이었다.

의심은 수염이 마차에서 짐을 성큼성큼 내리는데 왜 아무런 제제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만 있었는지에까지 번졌고, 이 마을에서 분명 자신과 남자를 등쳐먹을 무시무시한 음모를 꾸미고 있을 거라는 곳까지 생각이 닿았다. 그러니 휴식을 조금만 취하고 빨리 마을을 떠나야겠다는 다짐을 했을 때 갑자기 집 안이 눈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집은 처음에는 음산해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항상 이곳에 살았던 것처럼 집이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이린은 손끝으로 벽과 조그만 나무 탁자, 둥근 의자에서 그리고 차가운 마루 바닥까지 쓰다듬다가 무언가에 깜짝 놀라며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굳어짐은 오래가지 않았고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된 사이린은 의자에 앉아 멍하니 문 밖을 바라봤다. 차가운 바람이 연신 들어왔지만 그녀를 멍 때림의 바다에서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를 깨운 것은 역시 추위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작고 흰 솜털을 보자 사이린은 정신을 차리고 문 밖으로 나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흐리기만 했던 잿빛하늘에서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눈이 내려오고 있었다. 아까까진 몇 명 되지도 않던 아이들이 눈이 오자 좋다고 꺅꺅 소리치며 집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엄마들이 옷을 제대로 입지 않은 애들을 잡으며 두꺼운 옷을 입혔다. 사이린은 집 문턱에 걸터앉아 아이들이 뛰어 노는 것을 지켜봤다. 눈은 한동안 왕창 쏟아지더니 언 땅을 뒤덮고 나서 주춤해졌다.

‘언니가 여기 있었어.’

리슈넬의 흔적을 발견했지만 평소보다 조금 더 흥분됐을 뿐이고, 기대했던 것만큼 들뜨진 않았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사이린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기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런데 이 아저씨는 어디서 뭐하고 있담?’

마을 주민과 같이 간 남자가 돌아오지 않자 사이린은 자신의 생각이 실제로 일어난 건 아닌지 걱정됐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멀리 날려버린 일이 일어났다. 하늘이 잿빛에서 황토 빛으로 변하면서 잠시 주춤했던 눈이 다시 거세게 오기 시작했다. 하늘의 색이 변하자 주변의 모든 것들이 노란빛을 띄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늘이 푸른색 이외의 원색을 띌 때마다 동화 속에 나오는 기상천외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 기분이 몽롱해지면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고, 곧이어 생각까지 사라졌다. 사이린은 수동적으로 보고 듣는 것 밖에 하지 않았다.

황토 빛이었던 하늘이 원래의 색을 되찾은 것을 눈치채자마자 순백의 빛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눈은 어느 새 그쳐있었고, 잿빛이었던 하늘이 화창한 가을날 같은 깨끗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변화는 수많은 하늘을 안다고 자부했던 사이린에게도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선생, 눈 오는 동안 계속 여기 있었던 겁니까?”

어느 새 돌아온 남자가 문턱에 앉아있는 사이린을 보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가슴팍에 커다란 나무 그릇을 들고 있었는데 뚜껑 사이로 새하얀 김이 빠져 나오고 있었다. 내용물을 확인할 마음에 몸을 일으키자 몸에 쌓여있던 눈들이 요란하게 떨어졌다. 그 소리에 놀란 사이린은 급히 몸을 털었고 남자는 혀를 찼다.

“아니, 어떻게 눈사람이 될 정도로 가만히 있을 수가 있는 거요? 거, 춥지는 않습니까? 얼굴이 새빨간데.”

“그 말을 들으니까 추워지는데요.”

아닌 게 아니라 사이린은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남자는 나무 그릇을 사이린에게 건넸다. 따뜻하게 데워진 나무그릇이 떨림을 줄여줬다.

“아까 그 남자가 준 삶은 감자요. 감자 껍질 벗기기부터 시작해서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선생이 애도 아니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러면 내가 어디 맘놓고 가지도 못할 것 같잖소.”

사이린은 그 말을 들은 체도 안하고 그릇을 열어 안에 있던 감자를 꺼냈다. 얼마나 뜨거운지 생각도 않고 손으로 집어 들었다가 “앗 뜨뜨!”하고 소리치며 그릇을 떨어뜨릴뻔했다. 남자는 한심하단 얼굴로 사이린의 손에 들려있던 그릇을 낚아챘다. 사이린은 감자를 양 손으로 굴려 식힌 다음에 한입 베어 물더니 감탄하며 말했다.

“우와, 맛있네요.”

남자는 다시 한번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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