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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길의 중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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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2.07.11 15:56
최근연재일 :
2012.07.11 15:56
연재수 :
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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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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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글자수 :
216,761

작성
12.06.15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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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8)

DUMMY

[사이린]



안개가 꼈어도 시장은 새벽부터 밥을 먹는 사람들과 새로 도착한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비가 고여 생긴 웅덩이에 발이 들락날락하는 소리가 특히 요란했다. 배가 불러 느긋이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은 검은 옷의 보호 아래 길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빨리 자기 차례가 오길 바랬다.

사이린은 음식을 파는 천막에서 치아이에게 밥을 얻어먹었다. 애초에 밥을 사주겠다고 말한 것이 그녀였으니 얻어먹는 것에 미안한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염치는 있어서 너무 비싼 음식을 사준다는 제의는 정중히 거절했다. 두 여인이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이제 새로운 사람들이 진흙을 뭉개며 시장에 도착했다. 사이린은 음식을 입에 넣은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정말 여자라고는 그림자도 안 보이네요.”

“그래도 첫날에는 저 포함해서 일곱 명은 있었어요. 시간이 지나서 통과한 사람도 있고 돌아간 사람도 있다 보니 결국 저 하나 남았지만.”

치아이는 그릇에 물을 붓더고 한 번에 들이켰다.

두 여인은 식사를 마쳤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안개는 아직 걷히지 않았고 주변에 식사를 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다만 천막 주인은 자리에 눌러앉은 두 사람 때문에 그릇을 수거하지 못해 애가 탔다. 그 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한 마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시장으로 들어왔다. 마차는 천막 하나를 부숴버리기 직전에 간신히 멈췄다. 마차를 운전하던 땅딸막한 남자는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자 소리쳤다.

“여기에 치아이란 여자 있나?!”

남일처럼 구경하고 있던 치아이는 자기 이름이 들리자 화들짝 놀라 마차로 달려갔다. 사이린도 가방을 메고 뒤를 쫓아 달려갔고 천막 주인은 드디어 그릇을 회수할 수 있었다. 마차 주인은 여자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고 팔을 높이 들어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네 오빠 마차가 오다가 구멍에 빠져서 크게 다쳤어.”

“치아기 오빠가요?”

치아이의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네 이름밖에 못 들었어. 여기에 여동생이 있을 거라고 했지. 여기 네 오빠 편지다.”

단순히 종이를 여러 번 접은 편지를 치아이는 황급히 펼쳐보았다. 상황이 급했는지 휘갈겨 쓴 글씨는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고 군데군데 물과 진흙이 묻어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보다 다른 데 있었다. 치아이는 글을 몰랐다.

“자, 빨리 가자.”

남자가 치아이의 팔을 잡고 마차 위로 끌어올렸다. 치아이는 마차가 출발하려 하자 슬쩍 사이린을 돌아봤다. 사이린은 팔짱을 끼고 무언가를 굉장히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는 땅을 보며 고개를 젓다가 한숨을 푸욱 쉬고 마차 뒤에 올라탔다. 마차 주인이 화들짝 놀라자 치아이가 말했다.

“제가 아는 분이에요. 같이 가도 괜찮죠?”

마차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지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차는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시장으로 향하던 사람들은 다들 생각지도 못한 마차의 등장에 놀라며 길을 비켰다. 주인은 양해를 구하며 천천히 마차를 몰아야 했다. 안개가 걷히기 시작할 때 마차는 옆길로 빠졌고 그 길은 한산해서 마차는 드디어 제 속력을 낼 수 있었다. 저 멀리 빽빽한 나무 사이로 길 옆에 쓰러져 있는 마차가 보이자 치아이의 얼굴빛이 나빠졌다. 언덕 사이를 달리던 마차는 쓰러진 마차 앞에 멈춰 섰다. 치아이는 기다리지 않고 냉큼 뛰어내렸다. 치아이 오빠의 마차를 끌던 말들은 이미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오빠는 어디 있어요?!”

치아이가 얼굴이 붉어진 채로 소리쳤다.

“글쎄…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사이린도 쓰러진 마차에 다가가 유심히 상태를 살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을 부르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 주인과 치아이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봤다. 쓰러진 마차 반대쪽에 있는 경사 진 언덕 위에서 세 명의 남자가 바닥에 쓰러진 남자 한 명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차 주인이 그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 친구들. 같이 네 오빠를 발견했어.”

치아이는 한달음에 언덕을 뛰어올라갔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 동안 떨어져 지냈던 오빠가 몸을 다친 채로 쓰러져 있었다. 때마침 주변을 가다 도와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어떤 상황이 됐을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치아이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그녀의 오빠는 상처와 이미 말라버린 피, 진흙이 뒤엉켜 엉망이 되어있었다. 치아이는 차마 그대로 둘 수 없어 자신의 치마 끝자락으로 오빠의 얼굴을 닦아줬다. 주변에 서있던 세 명의 남자는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마차 주인이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차 주인은 친구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야! 그냥 가면 어떡해!”

그가 두 주먹을 쥐면서 소리쳤다. 세 명중 한 명이 걸음을 멈추더니 반문했다.

“우리더러 뭐 어쩌라고?”

마차 주인은 친구들과 치아이를 번갈아 보다가 얼굴을 있는 힘껏 찡그리면서 언덕을 내려갔다. 그들은 언덕을 내려가자마자 마차에 올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보고 있던 사이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는 가방 안에서 수통과 약초를 꺼내면서 언덕 위로 올라갔다. 치아이는 이미 언덕을 넘어가버린 마차를 보고 있다가 사이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쁜 사람들이네. 그쵸?”

사이린이 말하자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오빠를 구해주셨잖아요.”

“글쎄, 그게 과연 그런지…”

사이린은 몸을 낮춰 치아이 오빠의 입에 물을 넣어 입 안을 헹구고, 마른 약초를 잘게 부숴 물에 타먹였다.

“큰 상처는 아니네요. 조금 있으면 깨어날 거예요.”

“가, 감사합니다.”

치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제 가볼게요.”

“예? 조금만 더 있으시면 안돼요?” 목소리에 불안함이 섞여있었다. 사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원래 오빠를 만날 때까지만 같이 있기로 했잖아요?”

“하지만…”

“그리고 저도 빨리 언니를 찾아야 하니까.”

“아…네. 그랬었죠. 미안해요.”

“그런 걸로 사과할 필요 없다니까요.” 사이린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인연이 있으면 또 봐요.”

밑으로 내려와 언덕을 올려보니 아직도 치아이가 보고 있어서 손을 흔들어줬다. 차아이 역시 손을 흔들었지만 힘이 없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 오빠가 깨어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게 확실했다.





마차를 달리는 네 명의 남자들은 말이 없었다. 붐비는 길을 벗어나 아무도 없는 길에 들어서 마차가 제 속력을 내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마차 주인이 화를 내며 말했다.

“아니, 도대체 이해가 안되네. 왜 전부 그냥 내려 온 거야? 처음 계획 까먹었어?!”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짐칸에 앉은 두 명 중 몸집이 큰 남자였다.

“안 까먹었어. 난 계획대로 하려고 했다고.”

“하려고 한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안 했잖아! 대체 왜 그랬어?!”

이번 질문에는 마차 주인 옆에 앉은 마른 남자가 대답했다.

“그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난 당연히 그 여자를 잡으려고 했어. 그런데 잡을 수 있는 거리 안에 들어오자 갑자기 그럴 기분이 싹 사라졌어.”

“그래! 그거야. 갑자기 할 마음이 사라졌어.”

“맞아. 나도 그랬어.”

남자들은 각자 한마디씩하고 일제히 마차 주인을 바라봤다. 마차 주인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 순간 마차가 크게 흔들리더니 말들이 놀라서 울어 재꼈다.

“무슨 일이야?!” 마차 주인이 소리쳤다.

“나도 몰라!” 누군가가 소리쳤다.

“야! 옆을 봐!” “어디?!” “오른쪽!”

모두들 마차 오른쪽으로 급히 고개를 돌렸다. 거의 말만큼 커다란 검은 늑대가 마차 옆을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남자들은 처음보는 광경에 놀라 멍하니 늑대를 바라봤다. 그 순간 늑대가 옆으로 몸을 날렸다. 마차가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

“저게 뭐야!” 마른 남자가 공포에 질러 소리쳤다. “누가 저것 좀 어떻게 해봐!”

하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차가 다시 흔들리더니 옆으로 쓰러져버렸다. 마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은 모두 옆으로 튕겨나가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말들의 울음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제일 먼저 정신이 든 마차 주인이 온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얼굴을 들었다. 검은 늑대가 말들 근처에 서서 내려보고 있었다. 그는 늑대가 말을 잡아먹을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은 달랐다. 늑대는 말과 마차를 연결한 끈과 나무를 입으로 뜯고 부숴버렸다. 자유로워진 말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더니 금방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차 주인은 다시 늑대에게로 시선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늑대는 이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이린은 하미가 사준 짧은 치마 옷을 벗고 가방 깊숙이 넣어났던 긴 치마의 낡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잘 다듬어진 길도 조금만 벗어나면 무릎까지 올라오는 풀들이 무성했다. 지금 가려는 곳은 길이 전혀 나있지 않은 곳이었다. 긴 치마라고 해서 움직이기 불편한 점이 없지는 않았다. 치마가 풀들을 밀어내기 때문에 한발 한발 움직이는데 평소보다 힘이 더 들었고 안으로 풀이 들어와 다리를 건드리면 기분 나빴다. 그래도 맨 다리로 풀을 쓰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사이린은 전에 입고 다니던 바지의 행방이 어떻게 됐는지 생각했다. 기억이 맞는다면,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하미로서가 낡은 옷들을 불태우면서 그 바지도 함께 불태워버렸다.

‘하미로서씨, 왜 저에게는 당신에 대한 나쁜 기억 밖에 없는 겁니까.’

치아이가 밤에 화를 내면서 한 말이 이따금 머리 속에서 떠올랐고 그 때마다 사이린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자기 경험을 남에게 강요하면 어쩌란 건지. 나중에는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억지로 머리 속에서 지우고 비워버렸다. 빈 자리에는 리슈넬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졌다. 리슈넬을 만나면 제일 먼저 여태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고 들은 다음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 음식을 장만하거나 만들어 먹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리슈넬을 있을 만한 곳을 떠올려봤지만 도대체 감이 잡히는 곳이 없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떨어져 지낸 3년은 긴 시간이었다.

갑자기 모든 게 막막해지고 몸에 힘을 빠져 옆에 있는 나무에 아무렇게 기댔다. 지난 3년 동안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적도 없었고 누군가에게 소식을 건너들은 적도 없었다. 지금 매고 있는 가방이 헤어 진 다음 처음으로 만난 리슈넬의 흔적이었다. 새삼스레 기가 막혔다. 사이린은 가방을 벗어 손에 들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가방에 말을 걸었다.

“생각해보면 그 동안 언니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네. 언니 생각을 한 적도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아. 언니는 어땠어?”

사이린은 만약 리슈넬이 대답을 했다면 지났을 시간만큼 기다리고 말했다.

“나 언니가 보고 싶다.”

동시에 생각난 것은 다그리엘이었다. 다그리엘의 도움이 있으면 분명 일이 쉬워질 터였다. 그런데 마차 습격 같은 일은 쉽게 시킬 수 있어도 리슈넬을 찾는 일을 시키는 건 할 수 없었다. 다그리엘이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또 그런 일에 다그리엘을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오직 우리 둘 사이의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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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1) 12.06.22 619 5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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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9) 12.06.18 944 4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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