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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길의 중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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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2.07.11 15:56
최근연재일 :
2012.07.11 15:56
연재수 :
35 회
조회수 :
22,151
추천수 :
162
글자수 :
216,761

작성
12.06.18 10:48
조회
943
추천
4
글자
8쪽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9)

DUMMY

[리슈넬]



숲에 가을이 찾아오면서 바람이 차가워졌다. 있는 힘껏 숨을 들이 마셨다가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땅에 떨어진 나뭇잎 냄새는 생각이상으로 진해서 목이 막힐 것만 같았다. 다행히 시간이 조금 지나니 목 안을 가득 메웠던 나뭇잎 냄새가 사라졌다. 이번에는 천천히, 나뭇잎 냄새가 조금씩 들어오도록 숨 쉬었다.

하지만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바람을 막을 장소를 만들거나 찾는 게 급선무였다. 해가 있는 낮에는 따뜻해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지만 밤이 되면 겨울이 느껴질 만큼 추웠다. 큰 나무는 더위로부터 지켜줄 수는 있어도 추위에서는 지켜줄 수 없었다. 어제부터 지낼만한 곳을 찾아 다녔지만 도저히 알맞은 장소를 찾을 수 없어 초조해졌다.

숲 안에서는 가을, 그리고 겨울 동안 내가 머물 장소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숲으로 들어왔던 곳의 반대쪽이고 아찬씨가 말했던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방향으로, 더 깊은 숲 속으로 걸어갔다. 생각해보니 숲에 살면서 이제껏 몇 번 가본적이 없는 곳이다.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갈 필요가 없었다. 호수와 큰 나무 주변에서 사는데 필요한 모두 것들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 아마 세상의 날씨가 항상 따뜻했다면 이런 깊은 곳까지 들어올 일은 절대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는데, 항상 따뜻하다니 그럴 리가 있나. 더운 날도 있고 추운 날도 있는 게 이치지.

그런데 분명 깊은 숲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호수 근처보다 빛이 잘 들어왔다. 그 점을 알아차리고 주변을 다시 보니 항상 다니던 길보다 나무가 듬성듬성한 것처럼 보였다. 내키진 않았지만, 나무 위로 엉금엉금 올라가서 주변을 살펴봤다. 그리고 실제로 나무 수가 적어지는 걸 눈으로 확인했다. 바로 눈앞에 숲의 끝이 있었고 그 너머로 군데군데 갈색을 띄는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아찬씨가 말했던 숲의 깊은 곳은 큰 나무가 있는 곳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너머로 쭉 가면 숲이 끝나는 건 당연한 거였다.




숲이 끝나는 장소를 확인한 리슈넬은 머물 곳이 보이지 않는 것에 실망하며 나무에서 내려갈 준비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발 디딜 곳을 찾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 순간이었지만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였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테지만 아무것도 발견한 것이 없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리슈넬은 그 위화감을 놓치지 않았다. 시선이 움직인 길을 되돌아가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샅샅이 살펴봐도 방금 전 느낀 위화감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초조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같은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야 그 정체가 눈에 들어왔다.

주변의 다른 나무들과 색이 비슷하고 그늘까지 져서 얼핏 보면 그냥 지나쳤을 그것은 오래된 통나무 집이었다. 위치를 알고 나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봐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리슈넬은 그 곳을 몇 번이고 재확인한다음 나무에서 내려와 집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큰 나무를 찾을 때처럼 실수하지 않았다.

통나무를 베어 만든 작은 집은 많이 낡아있었고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보였다. 마찬가지로, 집 근처 땅에서도 사람이 걸어 다닌 흔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았다. 리슈넬은 나뭇잎 냄새 때문에 자기 코가 이미 막혔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레 문을 잡아 당기자 거칠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면서 그간 문틈에 끼어있던 흙먼지가 밑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리슈넬은 열린 문으로 들어간 햇빛으로 집안을 볼 수 있었다. 그 어떤 기교도 없는 투박한 사각형의 방이었다.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낡은 탁자보다 구석의 잘 보이지 않는 물체에 눈이 먼저 간 것은 그것이 어떤 사람의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걸레만도 못한 헝겊 쪼가리를 몸에 걸친 사람의 뼈는 보는 사람의 머리 속을 한 번에 날려버렸다. 리슈넬은 한참 동안 아무 생각 없이 해골을 응시하고 있다가 무겁게 발을 움직였다. 그녀는 해골 옆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입을 벌리고 천장을 응시하고 있는 해골에게 그녀는 물었다.

“당신은 왜 여기 있었나요?”

해골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리슈넬은 그(혹은 그녀)가 말하는 시간만큼 기다렸다가 다시 말했다.

“이곳에 혼자 있어야 했을 만큼 사정이 있었겠죠? 죄를 지었나요? 사람이 싫었나요?”

대답은 없었고.

“아니면 그냥 혼자 있고 싶어서?”

앞으로도 나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리슈넬은 계속 말했다.

“이런 집을 지었을 정도면 마음 단단히 먹었겠네요.”

다시 해골의 대답을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저는 말이죠. 딸처럼 생각하는 동생이랑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살았어요. 어릴 때부터 제가 키웠거든요. 제 친구 딸인데 친구는 걔를 낳자마자 죽어버렸어요. 그런데 걔랑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니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건 지금도 몰라요. 분명히 다른 또래들이랑 틀릴게 없는데, 이상하게 열등감 같은 게 느껴지는 거 있죠. 겨울이 왔을 때 동생에게 따로 다니자고 얘기했어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대로 있으면 동생이 미워질 것만 같았어요. 좀 놀랐던 건 동생이 덤덤하게 ‘알았어.’라고 하더라고요. 이유도 묻지 않고 그냥.”

리슈넬은 한숨을 셨다.

“그 애를 길 한가운데 놔둔 채 등을 돌리고 계속 걷다가 뒤를 흘깃 봤는데 절 계속 보고 있었어요. 손짓으로 가라고 하니까 그제서야 걷기 시작했고… 먼저 말을 꺼냈지만 정말 잡고 싶었어요. 하지만 말 꺼낸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그 뒤로 린이를 보기는커녕 소식을 들은 적도 없네요.”

두 손을 입으로 가져간 리슈넬은 눈을 감았다.

“지금 생각하면… 전 린이 같이 되고 싶었던 거 같아요. 왜냐면… 걔는… 평범하지 않거든요. 걔 엄마하곤 비교도 안될 만큼… 그래서… 그래요... 뭐든지 잘하고 뭐든지 알고 있고, 솔직히 말하면 가끔씩 사람이 아닌 것 같았어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저는 운 좋게 좋은 부모님에게 태어나 남자보다도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요. 걔는 글만 가르쳐줬는데 나머지는 지 스스로 알아버리더라고요. 마치 전부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이요. 제가 낳지는 않았지만 부모로서는 기뻤어요. 하지만 사람으로서는… 무서웠어요.”

리슈넬은 무릎을 모아 그 위에 팔을 포개고 얼굴을 파묻었다. 눈 사이로 느껴지는 압박이 묘하게 기분 좋았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말이죠. 저, 늙지를 않아요. 그런데 죽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여태까지 죽을 만큼 크게 다친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요즘은 스스로 이런 질문도 해요. 나는 죽을 수 있을까?”

나뭇잎들을 흔들던 바람과 멀리서 들려오던 새소리가 사그라질 때 리슈넬은 눈치 보듯 고개를 들고 해골을 바라봤다.

“제가 말을 좀 많이 했네요.”

리슈넬은 머리를 등 뒤의 벽에 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긴 숨을 내쉬면서 눈을 떴다.

“산 사람한텐 이런 얘기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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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5) 12.07.02 582 3 18쪽
30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4) 12.06.29 584 3 11쪽
29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3) 12.06.27 581 4 9쪽
28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2) 12.06.25 860 5 13쪽
27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1) 12.06.22 619 5 7쪽
26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10) 12.06.20 416 3 20쪽
»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9) 12.06.18 944 4 8쪽
24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8) 12.06.15 483 3 12쪽
23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7) 12.06.13 702 3 17쪽
22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6) 12.06.11 765 4 14쪽
21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5) 12.06.08 744 4 20쪽
20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4) +2 12.06.05 760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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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2) 12.06.01 594 3 14쪽
17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1) +2 12.05.30 743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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