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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길의 중간에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2.07.11 15:56
최근연재일 :
2012.07.11 15:56
연재수 :
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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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9
추천수 :
162
글자수 :
216,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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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18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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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12)

DUMMY

[리슈넬]


“이게 아찬씨가 잡고 있던 나무예요.”

리슈넬이 가리킨 나무는 어느 나무와 비교해도 특별한 곳이 전혀 없는 평범한 나무였다. 아찬 자신은 나무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도망치던 중에 기절하면서 나무를 잡았을 거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서 리슈넬에게 정말 이 나무가 자신이 쓰러져있던 나무가 맞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등의 상처가 심하게 아파오는 바람에 고통을 참는데 온 정신을 쏟아야만 했다.

“괜찮으세요?”

리슈넬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찬은 자신이 자처해 왔으면서 오히려 짐이 되고 있는 것에 창피함을 느꼈다. 그는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고통을 참으며 괜찮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슈넬은 아찬이 많이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때문에 그를 나무라지는 않기로 했다.

“혹시 가방을 어디쯤에서 잃어버렸는지 기억나세요?”

나무 근처를 요리조리 살펴보던 리슈넬이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도움을 구했다. 아찬은 그 역시 근처를 둘러보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도망치던 도중 어느 순간 가방이 없었어요. 그 뒤로도 꽤 오랫동안 달렸으니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을 겁니다.”

리슈넬의 실망한 얼굴을 상상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잘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방을 찾아 돌아다녔다. 아찬은 자신을 위해 고생해주는 리슈넬에게 감사하면서 자기 자신도 어딘가 있을 가방을 찾기 위해 이곳 저곳 살펴봤다.

아찬이 쓰러져 있던 나무에서부터 꽤 먼 곳까지 숲을 수색하고 다녔지만 두 사람은 가방은커녕 비슷한 모양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열매가 많이 열려있는 나무를 발견했다. 열매를 따서 먹어보니 맛도 좋아 두 사람은 기분이 좋아졌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빛에는 주황색이 한줄기씩 섞이고 있었다. 그림자의 길이가 정오 때보다 길어진 것 확인한 아찬은 곧 밤이 될 거란 생각에 리슈넬을 불렀다.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아직 가방을 못 찾았는데요.”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봤다. 나뭇잎 둘레가 붉게 빛나고 있었다.

“가방은 언제든지 찾을 수 있지만 밤이 되면 위험하잖아요. 어서 돌아갑시다.”

위험이란 것은 아찬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는 숲 속의 길을 하나도 알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어둠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 밤을 맞기가 겁이 났다. 그래서 리슈넬을 재촉한 것이다.

“예, 그러면 가방은 나중에 찾아봐요.”

다시 리슈넬이 앞장서고 아찬이 주변을 살피며 뒤 따랐다. 어둠이 오고 있다는 생각에 잠시 동안 잊고 있던 습격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할 수만 있다면 있는 힘껏 뛰어서 숲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제서야 아찬은 자신이 돌아가고 싶은 곳은 큰 나무가 있는 숲의 깊은 곳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으로 이어지는 숲의 밖인 것을 깨달았다. 그의 가슴이 리슈넬에게 자신의 소망을 말하고 숲 밖으로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동물의 긴 울음 소리가 숲을 채웠다.

리슈넬은 걸음을 멈추고 울음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봤다. 울음 소리는 가까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썰물이 빠져나가듯이 빠르게 멀어졌다. 가볍게 숨을 돌리고 아찬을 보았을 때 그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소리가 난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멀리 갔어요.”

리슈넬의 말에 눈동자만 겨우 굴릴 수 있던 몸이 서서히 풀렸다. 아찬은 단순히 동물의 소리에 겁먹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동물의 공격에 상처 입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스스로 위로해도 그 감정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리슈넬은 말없이 그의 손을 잡고 앞으로 이끌어 주었다. 마치 심통부리는 어린 아이처럼 아찬의 발은 그 자리에 단단히 박혀있었지만, 이내 마지못해 움직이는 것처럼 흙을 발끝으로 밀면서 앞으로 움직였다.

두 사람은 호수가 보이기 전에 발견한 시냇물에서 잠시 쉬며 목을 축였다.

“가방을 빨리 찾아야 할 텐데 큰일이네요.”

리슈넬이 아쉬운 듯이 말하자 아찬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는 가방이 온전히 남아있으리라는 기대는 이제 전혀 하지 않았다.

호수를 지나 큰 나무가 있는 장소로 돌아왔을 때는 하늘뿐만 아니라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야생초들도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손끝으로 야생초를 훑으며 걷던 아찬은 저 앞에 우뚝 자리한 큰 나무를 보다가 말했다.

“그러고 보면 숲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어요.”

앞서가던 리슈넬이 몸의 방향을 바꿔 아찬을 보며 뒷걸음질 했다. 태양은 숲의 언저리에 머리만 겨우 걸치고 있었다. 리슈넬도 주변의 모든 것들과 마찬 가지로 석양빛을 받아 검붉은색으로 보였다. 아찬은 야생초를 만지던 손을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숲을 자주 지나는 사람들도 아마 이 장소를 모를 겁니다. 숲을 지나는 이유는 좀 더 빨리 지나가기 위해서인데 이 방향은 좀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방향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아침에도 같은 말을 하셨죠.”

“예. 그랬죠.” 아찬은 말라 죽어버린 야생초 하나를 뜯어내 손으로 문질러 가루로 만들었다. 가루가 된 야생초는 때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숲 속으로 날아갔다.

“잠깐만, 그러면 아찬씨도 숲을 빨리 지나가야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건가요?”

“네. 좀 급한 일이 있었거든요.”

리슈넬의 얼굴에 난처함이 떠올랐다. 아찬은 리슈넬이 불안해 하는 이유를 눈치챘다. 이미 숲에서 동물에게 공격 당한 시점부터 숲을 지나 목적지에 빨리 도착한다는 계획은 실패했었다. 그런데 리슈넬은 그것을 자기 탓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지만 눈앞에서 안절부절 하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이대로 리슈넬에게 책임을 지게 해볼까 하는 생각이 조그맣게 생겨났다. 다행히 그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원래 그 계획이란 것이 자기를 도와준 사람을 해코지 할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란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리슈넬씨 때문이 아니니까 마음 쓰지 마세요.”

“예? 그래도 삼 일 동안이나 정신을 잃으셔서…”

“삼 일이요?” 아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좀 길었군요. 업보가 몰린 거라 생각하죠. 많이 늦었으니 내일 가방을 찾지 못하면 그대로 떠나야겠네요.”

“예. 그러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그 말에 아찬은 조그만 실망을 느꼈다. 무의식적으로 리슈넬이 자기를 잡아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는 머리는 그녀의 말을 이해했지만 가슴은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원인이었지만 아찬은 자기가 왜 실망을 느끼는지 알지 못했다.

리슈넬이 발끝을 큰 나무 쪽으로 돌리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고기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사이린]


햇빛이 눈가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자 사이린은 잠에서 깨어났다. 비몽사몽 하면서 무심코 몸을 일으키다가 천장에 머리를 박아버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강렬한 고통이 전해지면서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아픔을 참아야 했다. 시간이 지나 아픔이 충분히 가시자 그제서야 자고 있던 장소가 눈에 들어오면서 어젯밤 있었던 일이 기억났다.

손으로 머리를 문지르다가 머리맡 부분에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짧은 지붕이 덮어주지 못한 바닥으로 기어갔다. 이제 막 하늘로 떠오르는 태양이 그녀의 눈 앞에 있었다. 밤 동안 민병을 따라 올라왔던 산은 생각보다 높은 편이었다. 아래로 집이 빼곡히 들어선 마을의 모습과 아침 해를 받아 빛나고 있는 넓은 강, 강 너머에 있는 평야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넋 놓고 있던 사이린을 깨우려 애썼지만 그녀의 시선은 한동안 아침 해가 보여주는 마을과 강의 풍경에 매료되어 있었다.

“경치 괜찮죠?”

여인이 여관 앞마당을 빗자루로 쓸고 있었다. 사이린은 다락방 바닥의 끝부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네, 정말요. 그러고 보면 이쪽 집들은 전부 동향이네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에는 햇빛 만한 게 없죠.”

사이린은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기 이 지붕 원래 이런 건가요?”

여인이 마당을 쓰느라 보지는 못했지만 손가락으로 지붕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뇨. 예전에 떼어낸 거예요.”

여인은 여관 앞에 있던 쓰레기통에 먼지를 모아 담은 뒤 빗자루를 그 옆에 세워뒀다. 사이린은 천장을 떼어낸 방 끝에서, 여인은 벽에 기댄 채로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얼마 안 있어 마을 사람들이 집에서 나와 간단히 몸을 풀거나 산책을 하는 것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여인이 여관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아침 먹어야죠?”

“아, 네.”

사이린은 서둘러 어질러진 침구를 제자리에 정돈하고 어제 말린 과일이 담긴 보따리를 챙겨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복도에 있는 네 개의 문에서 누군가 나올 것을 기대했지만 작은 미로를 통과하는 동안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그 어느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현관 겸 식당 겸 거실로 쓰고 있는 공간에 들어서니 여인이 판매대 옆에 나있는 문으로 간단한 먹거리를 가져 나오고 있었다. 수수한 옷차림이었지만 앞에 맨 커다란 앞치마가 옷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사이린은 그녀가 나온 곳을 보고 그제서야 그곳에 문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 방의 용도는 부엌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건 뭐예요?”

여인이 보따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제 과일 말렸다고 했죠? 그거예요.”

하지만 여인은 기억이 없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접시와 음식을 탁자 위에 올렸다. 사이린은 보따리에서 말린 과일을 한 움큼씩 꺼내 접시 위에 올렸다. 말린 과일은 색이 진한 갈색이라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꺼내자마자 단내를 풍겼다. 여인은 그것을 조심스레 한 조각 집어 들었다.

“이거 참 오랜만에 먹어보네요. 나쁘지 않군요.”

“그래요? 다행이네.”

사이린은 다른 사람이 맛있게 먹어준 것이 기뻤다. 그래서 자기도 한 조각을 입에 넣어봤다. 여전히 에이린이 준 것처럼 달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향과 함께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여인이 의자를 꺼내며 손으로 자리를 권했다. 사이린은 의자를 꺼내 앉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른 손님은 없나요?”

사이린의 물음에 여인이 손으로 턱을 괴고 말했다.

“뭐, 요즘은 손님이 그리 많을 때도 아니고 우리 집은 거의 산 중간에 있기도 하고… 이런 때가 꽤 많아요.”

“산 중턱… 하긴, 그럼 왜 이런 곳에 여관을 세웠어요?”

질문에 여인의 손놀림이 멈췄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사이린은 당황하며 말했다.

“아, 죄송해요. 다른 의미가 있던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아니요. 그냥 예전 생각이 나서 그랬어요. 제가 만든 게 아니라 원래 있던 걸 물러 받았기 때문에 왜 이런 곳에 여관을 세웠는지는 몰라요. 제가 이곳을 처음 왔을 때도 뭐 이런 곳에 여관이 있나 했었어요.”

“아, 그럼 다음 질문. 어제처럼 그 아저씨들이 오는 일이 많나요?”

“마을 밖을 단신으로 돌아다니는 여자가 많진 않겠죠.”

사이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인이 말을 이었다.

“걔들도 사람을 가려서 데려와요. 만약 우락부락한 남자가 마을 밖에서 노숙을 하거나 하면 감옥으로 데려가겠죠? 여자 혼자 장사하는 여관에 들이기에는 아무래도 버겁지 않겠어요?”

“그건 그렇겠네요.” 사이린은 손뼉을 쳤다.

“그리고 아가씨는 올 해 들어 세 번째로 온 다락방 손님이고요.”

“세 번째요?” 라고 물으며 접시 위에 놓인 산딸기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물에서 방금 꺼낸 것처럼 차가웠다.

“그래도 둘 다 아가씨처럼 걸인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걸인’이라는 단어에 사이린은 충격을 받아 잠시 사고가 중단됐다. 비록 옷 많이 낡았고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고 다녔지만 사람들에게 실례가 가지 않도록 나름대로 몸을 청결하게 하고 몸가짐도 조심했었는데.

“저, 걸인은 아니에요.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그래요? 사실 아가씨가 걸인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게 아니니까.”

여인은 웃음을 지었지만 사이린의 뿔난 마음을 달래기에는 부족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질문할 차례 같네요.”

여인은 자세를 고쳐 잡고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내가 먼저 물어보려고 했는데 어떻게 그쪽의 질문공세에 먼저 당해버렸네요.” 그녀는 얼굴 앞에서 알짱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제 질문은 많지 않아요. 일단, 가족은 있어요?”

이틀 전, 노인에게 들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받은 사이린은 머리 속으로 여인이 말한 가족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가 질문에 사용한 단어는 분명 노인이 사용한 단어와 같았지만 그 순간 받은 느낌은 단어의 본래 의미에 좀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언니가 있어요.”

“언니? 그럼 왜 같이 있지 않죠?”

“특별히 이유는 없어요. 그냥 따로 떨어져있는 거니까.”

여인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언니는 집에 있는 거고 그 쪽은 혼자서 여행을 하고 있는 건가요?”

“글쎄… 확실하게는 답을 못하는 게 언니하고 헤어진 지 꽤 오래됐거든요. 제 생각에는 언니도 지금쯤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을 걸요. 만약 집이 필요하면 직접 짓거나 아니면 어디 버려진 빈집에서 살고 있을 수도 있어요.”

여인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기 편한 대로 살고 있는 어느 녀석이 생각났다. 그 녀석의 얼굴을 보자 짜증만 나서 재빨리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현실로 돌아와 다음 질문을 했다.

“그래도 언니와 같이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사이린은 크고 깨끗하지만 조금은 시들은 채소를 찢으며 말했다.

“만날 때가 되면 다시 만나겠죠.”

여인은 팔짱에 너무 힘이 들어가 팔꿈치가 아픈 것을 느껴 힘을 의식적으로 빼야 했다. 그녀의 눈에는 앞에 앉아 야채를 먹고 있는 이 어린 여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로만 보였다. 여인도 어릴 적에는 집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살았던 적이 잠시나마 있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의 생활은, 특히 여자에게는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여인은 자신이 알아낸 것을 눈 앞에 있는 몸만 큰 철부지에게도 가르쳐주고 싶었다. 스스로 경험하고 알아내지 않는 한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 여자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느 정도 그것을 몸으로 느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 생각이 맞는다면 그녀는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것 배우는 중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인은 입 밖으로 나오려는 충고의 한마디를 거두고 또 거뒀다. 대신 그녀로서는 최대한의 배려를 해주기로 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작은 열매를 먹다가 신 맛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사이린은 재빨리 입을 털어내며 대답했다.

“계획을 세우고 돌아다니는 건 아니라서요. 이 마을에 하루 이틀 정도 있다가 다른 곳에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럼 잠시 동안 이곳에서 지내는 건 어때요? 다락방은 좁지만 지낼만하지 않아요? 물론 그 동안에는 식사도 줄게요. 대신 가끔씩 일손을 도와주면 좋겠어요.”

예기치 못한 호의에 사이린은 눈을 깜박였다.

“저야 고맙지만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요?”

“물론이죠.”

사이린은 순수하게 기뻐했으나 이곳에서 머물 생각은 없었다. 수도원을 나온 지 이제 겨우 삼일 째였다. 이렇게 금방 한곳에 오랫동안 머물기에는 균형이 맞지 않았다. 수도원 이전에도 사이린이 한곳에 오래 머문 기간을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와 비교하면 열손가락 중 두 손가락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수도원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던 사이린은 항상 짜증만 내던 하미로서가 떠올라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다른 것을 생각하러 애썼다. 무언가를 생각할 때 그와 관련된 기억 중 괴로웠던 기억까지 되살아나는 것은 싫은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르네요. 전 하미라고 해요.”

여인의 말을 듣는 그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수도원 생각에서 벗어나려 할 때 수도원에서 자기를 가장 괴롭힌 사람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나다니, 이건 꼭 무슨 저주 같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웃음을 참느라 머리 속이 텅 비어버렸다. 어떻게든 상대에게 실례가 되지 않도록 이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좋아. 일단은 여기서 잠시만 머물도록 하자. 거절하는데 웃어버리면 그건 정말 상대에게 몹쓸 짓을 하는 거야.

여인이 먼저 자기소개를 한 게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도저히 적당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이린입니다. 잠시 신세 좀 지겠습니다.”

다행히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 만족하면서 물을 마시려고 할 때 갑자기 웃음이 터져버렸다. 사이린은 재빨리 기지를 발휘해 일부러 큰 소리로 기침했다. 물이 쏟아지면서 옷을 적셨다.

“이런 괜찮아요?”

여인이 걱정하며 마른 걸레를 갖다 줬다. 다행히 웃음이 터진 것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우… 죄송합니다.” 겉으로는 코를 훌쩍이면서,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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