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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길의 중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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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2.07.11 15:56
최근연재일 :
2012.07.11 15:56
연재수 :
35 회
조회수 :
22,135
추천수 :
162
글자수 :
216,761

작성
12.06.22 12:40
조회
618
추천
5
글자
7쪽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1)

DUMMY

[사이린]




해가 거의 떨어져 슬슬 잘 자리를 찾으려 할 때 커다란 검은 늑대가 입에 토끼 5마리를 물고 나타났다. 다그리엘은 이게 문제다. 한 번 부르면 얼마 동안은 부르지 않아도 자기 쪽에서 멋대로 찾아온다. 저번에 탑에 올라가려고 부를 때도 이것 때문에 조금 망설였는데 어김없이 지 등장해주셨다. 아무래도 마차 습격을 시켰던 게 결정타였던 것 같다.

그래도 딱히 문제 될 건 없다. 눈치 없게 사람 많은 장소에서 뿅하고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이 놈 덩치가 커서 실제로 그러면 난리가 날 거다.), 올 때마다 먹을 거 정도는 가져온다. 그래도 역시 부르지 않은 이상 멋대로 찾아 오는 건 싫다. 귀찮으니까.

그래도 이왕 가져온 거니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애써 불쏘시개와 나무 가지들을 모아와서 모닥불을 피웠다. 생각 같아서는 다그리엘에게 불을 피우게 하고 싶다. 저 놈이 늑대가 아니라 좀 더 팔 다리를 쓸 수 있는 동물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토끼를 아무 준비도 안하고 그냥 불에 구워 먹으니 심심한 감도 없지 않았다. 토끼 다섯 마리 중에 세 마리는 다그리엘이 먹었다. 저 몸집에 토끼 세 마리로 배가 채워질까?

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모닥불 주변은 모조리 어둠이 깔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그리엘의 푹신한 배를 베개대신 베고 누워있으니 정말 일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편안하다. 하지만 귀찮은 걸 이겨내고 가방에서 담요를 꺼내 몸을 덮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이를 떨며 잔뜩 얼은 몸을 움직이고 싶진 않다. 다시 편안하게 자세를 잡고 하늘을 올려다보니까 별들이 하늘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었다.

어째 매일 밤 보는 건데 질리지가 않아. 리슈 언니와 함께 봤던 밤하늘이 그리워진다.

“다그리엘.”

내가 말하자 고개를 돌렸는지 다그리엘의 몸이 움직였다. 그 순간 바로 얼마 전에 했던 다짐이 생각났다.

“미안, 아무것도 아냐.”

이 놈의 늑대가 바로 옆에 있으니까 리슈 언니를 찾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진다. 말을 한번 집어넣긴 했는데 속 안이 부글부글 끓는 게 언제든지 다시 튀어나올 것 같아. 이 녀석은 왜 내가 뒤숭숭할 때 찾아와서 고민하게 만드는 거야.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동이 틀 때 잠에서 깼다. 머리가 닿은 곳이 부드럽지 않고 딱딱해 다그리엘이 또 말도 없이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워있는 채로 몸을 돌려 동이 트는 하늘을 보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제 색을 찾아가는 하늘은 보고 있으면 모든 생각을 잊을 정도다. 나는 하늘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되어 결국엔 숨 쉬는 것까지 잊어버리고 만다.

이런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해주는 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횟수가 많은 건 완전히 색을 갖춘 하늘과 배고픔이다. 이번에 나를 움직인 건 배고픔이었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얀 재속에서 어젯밤 먹고 버린 토끼 뼈들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먹을 수 있는 건 이미 다 먹은 뒤였다. 가방에서 말린 과일을 몇 개 꺼내 먹고 자리를 정리했다. 밤새 덮고 잤던 담요를 펑펑 소리가 나도록 힘차게 터는 것을 마지막으로 다시 길을 따라 걷는다.




“그런데 왜 언니하고 헤어졌지?”

노인은 마차 고삐를 흔들며 옆자리에 앉은 사이린에게 넌지시 물었다. 마차 바퀴가 돌에 걸리는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사이린은 표정을 살짝 찡그리며 자세를 고쳤다. 얼마 전과 비교해 쌀쌀해진 바람이 불어왔다.

“흠… 요 근래 그런 말만 열 번은 넘게 들은 것 같아요.”

과장이 섞여있긴 했지만 사이린은 그 만큼 많이 들은 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노인이 할 말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야 보통은 일어나지 않는 일이니까. 언니하고 싸운 것도 아니고, 잘 지내던 가족이 그냥 헤어져 지낸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지. 게다가 넌 돈도 없고 어디 의지할 데도 없잖니.”

“상식적으로라…”

대답을 원했던 노인은 사이린이 입을 다물자 할 말이 없어졌다. 사이린은 하늘을 올려봤다.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높아진 하늘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아름다운 파란색이었다. 마른 땅을 밟으며 평원을 지나는 마차소리도 듣기 좋았다.

“그냥 언니가 저에게 그랬어요. 잠시 떨어져 지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그래서 전 그렇게 하기로 한 거고, 그것뿐 이예요.”

노인은 사이린을 흘깃 쳐다보고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덤덤하게 말해서 네가 그러자고 한 줄 알았는데 언니가 제안한 거구나.”

“네.”

“그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니?”

“글쎄요? 별로 아무렇지도 않던데요.”

“허, 거 참…” 노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면 네 언니는 그 말을 할 때 기분이 어땠을까?”

“제가 언니가 아니니 모르죠. 하지만 언니는 항상 충분히 생각하고 행동에 옮기거든요. 그 때도 똑같았을 걸요.”

“그래, 아마 그랬을 거야. 그런 건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거든.”

마차를 끌던 늙은 말이 갑자기 머리를 움직이며 갈기를 흔들어댔다. 말이 다시 조용해졌을 때 노인이 말했다.

“우리 집사람이 살아있었을 때 나도 그런 말을 해보려고 했었지. 정말이지. 지금 있는 생활을 버리고 다른 생활을 하자고 하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하더라고. 생각하고 나서 1년 가까이 지났을 때 겨우 말할 수 있었는데 집사람이 화를 내며 싸대기를 날리더라니까.”

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애들도 다 나가고 집사람도 없을 때 마차 하나 겨우 끌고 나왔어. 설마 아내가 그렇게 화를 낼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런 면에서 네 언니가 너무 부럽구나.”

“언니도 할아버지처럼 말하기 힘들었을까요?”

노인은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헤어짐을 말하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법 아닐까?”

사이린은 말없이 주변 풍경을 바라봤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 끝에 산이 조그맣게 보였다. 엄지를 세워보니 산이 손가락에 가려지는 것이 재미있었다.

낮이 확실히 짧아졌다는 것을 느꼈을 때 사이린은 노인의 마차에서 내렸다. 노인이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인데 괜찮겠니?” 라고 묻자 사이린은 가방을 고쳐 매며 말했다.

“알고 그런 거예요. 걷는 걸 좋아해서.”

“그러냐. 어쨌든 마을에 도착하거든 목욕부터 해라.”

그 말에 사이린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냄새 많이 났어요?”

“그럼. 처음에는 태워준 걸 후회할 정도였어. 여자에 대한 환상을 완전히 없애버릴 정도로. 물론 그런 건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럼 난 간다.”

노인은 마차를 몰고 마을 방향으로 곧장 가버렸다. 사이린은 방금 전까지 마차가 있었던 길 위에서 노인이 가는 길을 배웅했다. 그리고 마차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소매를 코에 가져와 냄새를 맡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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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7) 12.07.06 573 4 11쪽
32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6) 12.07.04 743 4 13쪽
31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5) 12.07.02 581 3 18쪽
30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4) 12.06.29 584 3 11쪽
29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3) 12.06.27 580 4 9쪽
28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2) 12.06.25 859 5 13쪽
»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1) 12.06.22 619 5 7쪽
26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10) 12.06.20 416 3 20쪽
25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9) 12.06.18 943 4 8쪽
24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8) 12.06.15 483 3 12쪽
23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7) 12.06.13 702 3 17쪽
22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6) 12.06.11 765 4 14쪽
21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5) 12.06.08 744 4 20쪽
20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4) +2 12.06.05 760 4 11쪽
19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3) 12.06.04 740 3 10쪽
18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2) 12.06.01 594 3 14쪽
17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1) +2 12.05.30 743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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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15) +2 12.05.25 394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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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12) 12.05.18 621 3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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