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주간 이윤후

길의 중간에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2.07.11 15:56
최근연재일 :
2012.07.11 15:56
연재수 :
35 회
조회수 :
22,134
추천수 :
162
글자수 :
216,761

작성
12.06.20 12:41
조회
415
추천
3
글자
20쪽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10)

DUMMY

[리슈넬]


리슈넬은 큰 나무 아래 모아났던 짐들을 모두 새로 찾은 집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잠을 잤다. 해골과 함께 방을 써서 생기는 불안감보다 추운 날을 지낼 수 있는 집을 찾은 데서 온 안도감이 훨씬 커서 잠을 자는데 힘들진 않았다.

다음 날, 리슈넬은 아침 일찍 일어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해골을 품에 들고 숲의 양지바른 곳을 찾았다. 그리고 손과 주변에 있던 날카로운 돌을 이용해 땅을 팠다. 손끝이 아프고 손톱 사이에 흙이 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쌀쌀한 날씨에 오랫동안 땀을 흘린 리슈넬은 이 정도면 충분히 깊게 팠다고 생각될 때 뼈들을 땅속에 넣었다. 쌓여있던 흙을 뼈 위에 덮고 주변의 나뭇잎을 모아 올리니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덩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리슈넬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고 집안을 환기했다. 어젯밤은 집 주인인 해골에 대한 예의 때문에 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집이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앞으로 얼마가 되든 이곳에서 살아갈 셈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집 밖에서 벽에 편하게 기대고 앉은 리슈넬은 나뭇잎에 가려진 하늘을 멍하니 올려봤다. 이제 머물 곳이 해결되고 마음이 편안해지길 기대하던 순간 너덜너덜해진 얇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짜증이 한번에 몰려와 가슴을 파먹었다. 흙 위에 머물던 손이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편안한 숨을 내뿜던 입은 앞으로 툭 튀어 나왔고, 가만히 있던 머리가 쓸데없이 부산하게 움직여서 머리 속에 있는 벌레를 귓구멍으로 빼내려 애썼다.

리슈넬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제 하루 동안 이 집을 찾느라 열심히 돌아다녔으니까 오늘은 그냥 가만히 있고 싶었다. 하지만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귀찮아지고 최악의 경우 아무것도 못한 채 겨울을 대비해야 할 지도 몰랐다. 최소한이라도 조금은 움직여야 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디로 갈까.

마땅히 생각나는 곳이 없었다. 시선을 주면 그림자 밖에 보이지 않는 작은 동물들, 호수 근처에 가끔씩 있는 새들, 간간히 덫에 잡히는 작은 동물들. 그 동안 신기할 정도로 몸집이 큰 동물을 보지 못했다. 리슈넬은 애착이 가는 장소인 호수로 향했다.

큰 나무를 보지 않고 갈 수 있었지만 생색내듯 그 장소에 들렀다. 리슈넬은 여름에 봤었던 큰 나무를 생각하며 붉게 물든 잎이 가끔씩 떨어지는 지금의 큰 나무를 바라봤다. 주변의 야생초들은 어느덧 말라서 갈색을 띄었고 손끝으로 잡으면 바삭하는 소리와 함께 가루가 돼버리는 것도 있었다.

리슈넬은 큰 나무에 다가가 가볍게 어깨를 기대고 나무 뿌리에 앉았다. 그 상태로 따뜻한 햇빛을 받으니 왠지 나른해져 저절로 눈이 감겼다. 잠깐이었지만 정신을 잃듯이 깊은 잠에 빠졌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꿈도 꾸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머리가 살짝 띵했지만 기분이 한결 나아져있었고 몸도 무겁지 않았다. 양 팔을 부드럽게 움직여본 리슈넬은 큰 나무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호수에 거의 도착했을 때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부는 소리가 들려 리슈넬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생각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머리 속에서 방금 들은 바람 소리를 다시 한번 돌려봤다. 그 소리는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바람 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칠었다.

호수가 눈에 보이자 생각지도 않게 거친 바람의 정체가 드러났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새들이 호수 위에 모여 한가롭게 날개를 손질하고 있었다. 새들은 리슈넬이 모습을 드러내도 도망가지 않았다. 반대로 리슈넬이 그 엄청난 숫자에 압도되어 평소보다 행동이 굳어있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새들은 자신의 존재를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호수 한 켠에 나뭇잎을 모아 깔고 앉아 새들을 지켜봤다. 한가하게 물 위에 떠있는 새, 뭘 하는지 가끔씩 호수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빼는 새, 무리를 지어 마치 움직이는 섬처럼 보이는 새들. 갑자기 새들도 고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추위에 대한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새들은 털과 날개가 있으니까.

더운 날에 알몸으로 호수에서 수영을 하던 때가 꿈만 같았다. 그 때는 밖이 너무 더워 하루 종일 호수 안에 있을 수 있었고, 밖에 나와 있으면 몸에 뭍은 물이 서서히 사라지는 감촉이 너무 좋았다.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고 있다가 호수 위에 있던 새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깃털이 한두 개씩 물위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즉시 일어나서 호숫가를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새들의 깃털이 이곳 저곳 널려있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수고를 들여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주웠다. 특히 가끔씩 날개에 붙어있는 솜털은 한 올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호수를 한 바퀴 돌면서 모은 날개와 털은 한 움큼이 겨우 될만한 양이었다.

솜털은 그대로 놔두고 깃털은 일부러 털만 따로 뽑아냈다. 그것들을 모아 옷이 헤져 가슴에 난 구멍으로 모두 집어넣고 몸을 흔들었다. 옷 사이로 들어간 깃털과 솜털은 점점 흘려내려 치마 끝자락까지 떨어졌다. 리슈넬은 한숨을 쉬며 치마 위를 손으로 만지면서 뭉쳐버린 털들을 풀어 흩트렸다. 그러다가 분주히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으로는 호수 위에서 놀고 있는 새들을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잡아야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그게 너무 억울해서 옆에서 돌을 하나 주워 새들에게 힘껏 던졌다. 돌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호수에 떨어졌지만 새들은 잠깐 놀라더니 이내 다시 한가하게 놀았다.

바로 저번 겨울은 어느 부잣집의 별장을 관리해주면서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다. 외딴 마을에 있던 적당한 크기의 집이었다. 부자가 가끔씩 일반인 기분을 내고 싶을 때 방문하는 곳이라 생각했지만, 집 주인 가족이 겨울 내내 그곳에서 소탈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리슈넬을 하녀나 고용인이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해주었다. 자질구레한 일들은 리슈넬에게 맡겼지만 자기가 할 일까지 맡기지는 않았다. 간혹 어린 딸이 게으름을 피우면 부모가 나서서 혼을 냈다. 그렇기 때문에 매달 돈을 받을 때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날씨가 풀려도 바로 떠나지 않고 가족이 원래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린 것도 왠지 은혜를 입은 것 같아서였다. 나중에 다시 생각할 때는 그것이 진짜 은혜였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그 당시에는 그랬다.

그전 겨울은 추웠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쉴 새 없이 몸을 떨어야 했다. 특히 손과 발끝은 어떤 방법을 써도 추위에서 벗어날 수 없어 가장 괴로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추운 겨울을 지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기억이 실제 그 겨울의 기억인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은 눈 쌓인 평원과 산과 바다와 마을을 오가다가 처음에는 생각도 안 했던 것들을 마구잡이로 보여줬다.

리슈넬은 새들이 호수를 날아오르는 요란한 소리에 기억 속에서 빠져 나왔다. 오랜 꿈을 꾼 것 마냥 손목으로 눈가를 쓰다듬고 길게 하품하니 막막한 현실이 눈 앞에 닥쳤다. 움직여야 하는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몸에 힘을 넣지 않았다. 방법이 없으니 움직여봐야 헛수고일 뿐이었다. 어차피 늙지도 않는 몸, 이대로 겨울을 기다렸다가 죽을 수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웃기고 있네.

스스로 한 생각에 스스로 냉소를 보내는 건 굉장히 우스운 일이었다. 자신도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에 모든 생각을 없애고 급격히 차가워진 리슈넬은 다그리엘을 부르기로 결심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다그리엘!”

호수를 향해 쏘아진 외침에 남아있던 소수의 새들이 놀라 날갯짓 했다. 물이 튀는 소리, 날개가 움직이는 소리, 약한 바람 소리,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한번에 겹쳤다가 갑자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 대신 몸이 달아오르더니 참을 수 없는 민망함이 올라왔다. 리슈넬은 전속력으로 호수 안으로 달렸다. 차가운 물이 발목까지 올라오고 치마 끝이 물 위에 뜬 채로 젖어가는 와중에 물을 퍼 올려 얼굴을 씻었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팔을 움직인 까닭에 얼굴보다 옷으로 가는 물이 더 많았다. 호수물은 이미 여름의 시원한 물이 아니어서 물이 젖은 곳마다 소름이 돋았다. 얼굴과 손이 붉게 변하고 입김이 나올 때가 되어서야 리슈넬은 추위를 느꼈다. 물이 닿은 곳이 너무 아파서 입에서 우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물가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는 다그리엘이 호숫가에 가지런히 앉아 그녀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리슈넬은 반가운 얼굴을 하려 했지만 여전히 얼굴이 아파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물에서 나왔을 땐 등을 제외하면 마른 곳이 거의 없어 바람 한 점 없어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추위에 떠는 그녀에게 다그리엘이 자신의 몸을 밀착시켜 온기를 나눠줬다. 자신보다 더 클지도 모르는 검은 늑대의 털을 손으로 쓸면서 리슈넬은 나지막이 말했다.

“와줘서 고마워요.”

둘은 물가를 벗어나 햇빛이 잘 드는 마른 땅으로 갔다.

“얘기가 하고 싶었어요.”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지만 내심 원하는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상대가 말을 알아듣기는 해도 할 수는 없는 늑대였기 때문에 그 욕구도 제대로 풀 수 없었다. 그래도 일단 말을 하고 나니 답답한 기분이 어느 정도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신이 난 리슈넬은 커다란 다그리엘의 몸에 기대고 그 동안 있었던 사소한 일들을 얘기했다. 대부분이 숲에서 구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얘기였다. 한참을 말하던 도중 필요한 물건을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사오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적어도 이 근처에는 마을이 없었다. 숲에 들어오기 전에도 며칠을 걸었었고 그 이후에도 얼마나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찬도 숲에 들어오기 전에 상당히 많이 쉬지 못했던 걸로 보였었다. 하지만, 다그리엘이 도와준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다그리엘.”

부르는 말에 늑대가 고개를 들어 빤히 쳐다봤다. 곧바로 반응하는 모습에 리슈넬은 저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혹시 같이 마을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 리슈넬은 이제까지 다그리엘에게 무언가를 부탁한 적이 있는지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이 알고 있는 내에서는 한번도 없었다. 사이린이 다그리엘에게 좀 지나치다 싶은 명령을 할 때면 옆에서 그건 너무 심하지 않냐고 핀잔을 준 적은 많았다. 그리고 무슨 일을 사이린에게 말하면 사이린이 그것을 다그리엘에 부탁해 간접적으로 부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부탁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그리엘은 마치 사람같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맞다. 먼저 집에 가서 돈을 가져와야 해요.”

다그리엘은 조용히 자신의 등을 내밀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리슈넬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등에 올라타자 늑대는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다그리엘의 등에 올라타더라도 사이린을 붙잡고 탔던 리슈넬은 그 상태에서도 항상 손을 놓쳐 땅으로 떨어질까 봐 무서웠었는데, 혼자서 등에 올라탄 지금은 금방이라도 부딪힐 것 같이 빠르게 다가오는 나무들이 너무 무서워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중간에 다그리엘이 잠시 멈춰 서자 리슈넬은 숨을 골랐다. 가슴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다그리엘이 멈춰 설 때는 방향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니 집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여태까지 뛰어온 건 냄새로 추적한 것 같았다. 리슈넬은 집이 있는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시 늑대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 리슈넬은 주변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서 자신이 가리킨 쪽이 맞는지 불안해졌다. 다행히 집은 그 방향에 있었다.

집은 아침에 환기를 목적으로 문을 열어놓았던 때와 변함없었다. 리슈넬은 집 안에 들어가 가방 안에 있던 지갑을 꺼내가지고 나왔다. 집 안의 냄새가 모두 가시지는 않았지만 돌아왔을 때 집 안에 냉기가 있는 것이 싫어서 이번에는 문을 단단히 닫았다.

리슈넬이 다시 등에 올라타자마자 다그리엘은 발을 놀렸다. 이번에도 아찔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다그리엘의 목덜미를 있는 힘껏 쥐어 잡고 있던 리슈넬은 다그리엘의 털이 은은한 푸른빛을 띄기 시작한 것을 눈치챘다. 직후 주변이 빛으로 가득 차며 아무 냄새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면서 계절에 맞지 않는 따뜻함이 사방에 넘쳐났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고 느낄 때 리슈넬은 눈 앞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리도 냄새도 모습도 없었지만 분명히 그곳에 존재했다. 그것을 잡으러 손을 내미니 따뜻한 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바로 그 순간, 귀가 시끄러워지면서 빛과 따뜻함이 사라지고 머리보다 높이 자란 수풀이 가득한 장소가 나타났다. 이런 식의 이동에는 많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몰려오는 추위는 정말 당할 수 없었다.

리슈넬이 주변을 살피며 내려오자 다그리엘이 앞장서서 수풀 사이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이 다녀서 자연스레 생긴 길이 나타났고 오른편 멀리로 마을이 보였다. 리슈넬은 벌써 붉은 빛을 띄고 있는 하늘이 마음에 걸렸다. ‘해가 많이 짧아졌구나…’ 라고 생각하며 지갑 안을 한번 확인하고 다그리엘을 돌아보며 길 위로 올라갔다.

“금방 다녀올게요.”

다그리엘은 마을과 리슈넬을 번갈아 보다가 수풀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도 작게 심호흡을 한번하고 마을로 향했다. 넓은 평야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은 밖으로 네 개의 길이 뻗어 나와있었다. 집은 멀리서 보기에 열 채가 겨우 될 것 같았다. 그 중에서도 술집으로 보이는 이층 가옥이 특히 눈에 띄었다.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예상 외로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것이 놀라웠다. 리슈넬은 걸으면서 두 손으로 옷을 털었다. 흙과 거미줄 같은 자잘한 것들을 제거해도 원채 낡은 옷은 어쩔 수 없었다.

마을에 들어서기도 전에 몇몇 사람이 그녀를 보고 힐끗거렸다. 리슈넬은 얼굴이 달아올라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좌우로 집들이 늘어져있는 마을의 유일한 대로에 들어서 옷 가게부터 찾았지만 옷 그림이 그려진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도자기에 여러 물건들이 들어있는 그림이 그려진 가게로 재빨리 들어갔다. 큰 공간을 살려 다양한 물건들이 깔끔하게 정리된 가게의 주인은 인상이 고약해 보이는 비쩍 마른 노인이었다.

“뭐야?”

퉁명스러운 대답은 손님이 아니라 불청객에게 하는 말이었다. 리슈넬은 가게 입구에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겨울 옷을 좀 사고 싶은데요. 그리고…”

“잠깐, 옷? 너 돈은 있냐?”

말이 잘린 거에 기분이 언짢아진 리슈넬은 감정을 조금 싫어 말했다.

“있어요.”

“거짓말 같은데? 있으면 한번 보여봐.”

“자요.” 리슈넬이 조금도 망설임 없이 지갑을 꺼내 속을 보여주자 노인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꼴은 거지꼴인데 돈은 꽤 있구만. 기다려.”

노인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리슈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밖에 있던 남자들처럼 신기한 것을 보는 눈이 아니라 감시하는 눈이었다. 잠시 뒤 노인은 몇 벌의 두툼한 옷을 가지고 나와 계산대 위에 올려났다. 모두 모자가 달려있고 입으면 발목 끝까지 내려오는, 솜이 꽉 들어찬 두꺼운 외투들이었다.

“우리 집은 옷 가게가 아니니까 이런 것 밖에 없어.”

묘하게 아까 전보다 누그러진 말투였다. 리슈넬은 계산대로 걸어와 조심스럽게 옷을 만져보고 말했다.

“이 정도면 훌륭한데요.”

“그래? 더 필요한 건 없고?”

“식기랑 이것저것. 살 거 많아요.”

노인은 이제 경계를 완전히 푼 것처럼 보여 리슈넬은 가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건을 고를 수 있었다. 숲 속에서도 몸을 씻는 것을 빼먹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더러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사지 않을 물건은 절대 만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반드시 필요한 물건만 집게 되었고, 생각만큼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많이 산다더니…” 노인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막상 골라보니 적네요.”

“뭐 됐수. 그 쪽 사람이니 봐드리리다.”

갑자기 부드러워진 말투보다 그 쪽 사람이라는 단어가 리슈넬을 굳게 만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쪽 사람이라뇨?”

“보통 다들 그렇게 시치미를 떼곤 하죠.”

노인은 계산대 아래에서 종이 봉투를 꺼내 옷을 제외한 물건들을 담으며 말했다.

“아까 무례하게 대해서 미안하우. 사과의 뜻으로 귀한 봉투에 넣어드릴 테니 위에 잘 말해주쇼.”

노인이 다른 분류의 사람과 자기를 착각한 것을 알아챈 리슈넬은 속으로 안도하면서 왜 자신을 그 쪽 사람으로 본 건지 궁금해졌다.

“어떻게 아신 거죠?”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글쎄, 정확하게는 말 못 하겠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품위? 품격? 뭐, 그런 거 있잖소. 우리 같이 못 배운 놈들한테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거.”

“저한테서요?”

“그럼. 물건 고를 때의 절제된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서 단번에 알아챘지. 자, 옷까지 합해서 2장만 주시오.”

정상적이라면 옷 하나도 겨우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어, 정말 그래도 되요?”

리슈넬은 겉으로 말은 그렇게 해도 속으로는 돈을 아낄 수 있게 되어서 기뻤다. 옷은 따로 가져가기 불편해서 몸에 걸치고 종이 봉투를 품 안에 안고 가게를 나서는데 노인이 문 밖까지 배웅했다. 밖에서 리슈넬이 가게로 들어갔던 것을 봤던 남자들은 그녀가 성질 고약한 주인의 배웅을 받고 있는 것에 놀랐다. 그들을 발견한 노인은 한쪽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암호를 그렸다. 암호를 본 남자들은 보다 크게 놀라며 리슈넬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그녀는 이미 빠른 걸음으로 마을을 벗어나고 있는 중이어서 뒷모습 밖에 보이지 않았다.

숲 속의 집으로 돌아온 리슈넬은 문을 닫아놓고 나가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숲의 찬 바람이 집을 가득 메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낡은 탁자 위에 봉투를 올려놓고 사온 물건들을 늘어놓았다. 이것들만 잘 사용해도 앞으로 생활에 부족한 것은 없어 보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다그리엘에게 또 부탁할까?’

리슈넬은 생각하자마자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스스로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 전에 남의 도움부터 생각해낸 자신을 벌하는 뜻으로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다그리엘이 생각난 그녀는 물건을 대충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다그리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돌아갔나?’ 리슈넬은 도움만 받고 아무것도 대접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열매를 담아놓은 껍질을 어떻게 보관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밖에서 낯선 소리가 들렸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다그리엘이 작은 동물들을 몇 마리 잡아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호숫가에서 보였던 새들도 섞여있었다.

“이거 잡으러 갔다 온 거에요?”

다그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됐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호감을 보여준 적은 난생 처음이었기에 기뻤다. 그 동안은 사이린을 통해서 서로 만났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보다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리슈넬은 그것이 너무 기뻤다.

밤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다그리엘이 잡아 온 동물들은 털 손질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냥 모닥불에 구워먹었다. 그래서 새를 먹을 때는 고기에 깃털 심이 남아있어 징그러웠다. 그래도 리슈넬은 오랜만에 불에 익힌 고기를 먹는 게 마냥 즐거웠다. 그건 다그리엘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소금은 이 날 모두 쓰게 됐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길의 중간에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5 길의 중간에서 - 마지막화 +1 12.07.11 664 5 19쪽
34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8) 12.07.09 511 4 16쪽
33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7) 12.07.06 573 4 11쪽
32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6) 12.07.04 743 4 13쪽
31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5) 12.07.02 581 3 18쪽
30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4) 12.06.29 584 3 11쪽
29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3) 12.06.27 580 4 9쪽
28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2) 12.06.25 859 5 13쪽
27 길의 중간에서 - 3장, 겨울로(1) 12.06.22 618 5 7쪽
»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10) 12.06.20 416 3 20쪽
25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9) 12.06.18 943 4 8쪽
24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8) 12.06.15 483 3 12쪽
23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7) 12.06.13 702 3 17쪽
22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6) 12.06.11 765 4 14쪽
21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5) 12.06.08 744 4 20쪽
20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4) +2 12.06.05 760 4 11쪽
19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3) 12.06.04 740 3 10쪽
18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2) 12.06.01 594 3 14쪽
17 길의 중간에서 - 2장, 가을로(1) +2 12.05.30 743 4 12쪽
16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16) 12.05.28 585 3 13쪽
15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15) +2 12.05.25 394 3 14쪽
14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14) 12.05.23 715 3 19쪽
13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13) 12.05.21 575 3 13쪽
12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12) 12.05.18 621 3 17쪽
11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11) +2 12.05.16 848 23 14쪽
10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10) 12.05.15 747 4 13쪽
9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9) 12.05.14 613 5 17쪽
8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8) 12.05.10 521 4 13쪽
7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7) +2 12.05.09 578 5 10쪽
6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6) 12.05.08 557 4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