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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김민지 씨의 도도한 자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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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4.10.01 16:52
최근연재일 :
2014.12.10 09:00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0,126
추천수 :
137
글자수 :
169,110

작성
14.12.08 09:00
조회
477
추천
3
글자
16쪽

회사 -9-

DUMMY

하늘이 노을로 새빨갛게 물들였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아빠가 입원한 병원에 도착했다. 그 병원은 도시에서 멀찍이 떨어진 외딴곳에 있었다. 좌우는 작은 산으로 둘러싸였고, 근처에 보이는 건 추수가 끝나 황량해진 논과 밭뿐이었다.


그런 것보다 내 눈길을 잡은 건 병원 바로 옆에 있는 장례식장이었다.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지 대번에 눈치챘다. 꼭 저렇게 드러내야 했을까? 최소한 보이지 않는 곳에 건물을 짓는 배려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병원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로비에는 모퉁이에 설치된 대형 TV가 개그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었다. 그 앞에 있는 수십 개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무리 외진 곳에 있는 병원이라지만 환자나 보호자의 모습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접수처를 바라보다 숨을 삼켰다. 당연히 있어야 할 간호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로비에 사람이라는 생물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도시에 들어온 기분에 등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휴대폰을 꺼내 주소를 다시 한 번 확인하려고 할 때였다. 계단 쪽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 그쪽으로 걸어갔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서류를 보며 내려오고 있는 녹색 가디건의 간호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간호사는 난간을 잡고 몸을 돌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순간이었지만 흠칫 놀랐다.


상대를 배려할 여유가 없었기에 나는 불쑥 말을 꺼냈다.


“이곳에 근무하세요?”

“네, 어떻게 오셨나요?”


나는 숨을 한 번 삼키고 말했다.


“혹시 김민원 씨가 입원한 병실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말을 듣자마자 간호사는 얼굴에 놀라움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떠올렸다.


“환자분과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딸이에요.”

“아, 어머님께 미리 얘기 들었습니다.” 간호사는 몸을 왔던 방향으로 다시 돌렸다. “따라오세요.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나는 간호사를 따라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3층으로 계단을 올랐다. 그중 어느 층에서도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뭔가가 이상했다. 택시를 타고 내려오면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들을 계속 생각했던 탓이 아니었다. 환자가 없는데 이 병원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 걸까? 또 엄마는 어떻게 이런 병원을 알고 아빠를 입원시킨 걸까?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악몽처럼 느껴졌다.


간호사가 걸음을 멈추더니 손가락으로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왼쪽에 있는 302호예요.”

“감사합니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302호를 향해 걷는데 등 뒤에서 간호사의 “힘내세요” 란 말이 들려왔다. 흘러 들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병실에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점점 짙어지는 약 냄새처럼 모든 것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병실 안에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중년 여자의 울음소리였다.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다르게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여 미끄러지듯 병실 입구에 섰다. 그곳에는 의사와 간호사,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엄마가 있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의 얼굴에는 흰색 천이 올려져 있었다.


“누구시죠?”


젊은 남자 의사가 목소리를 내자 엄마가 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민지야! 네 아버지가……, 네 아버지가……!”


내 기억보다 훨씬 늙어버린 엄마는 그 자리에서 오열했다. 하지만 난 그렇게 울 수 없었다. 이미 택시를 타고 내려오는 내내 울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고, 막상 흰 천을 얼굴에 덮고 아빠를 보자 어릴 적부터 쌓여왔던 원망이 피부로 느껴졌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나는, 내 예상과 다르게 담담한 표정과 목소리로 젊은 의사에게 물었다.


“이미 돌아가신 건가요?”

“네. 15분 전쯤에 돌아가셨습니다.”

“15분…….”


정확한 시간을 듣자 살아있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는 후회가 가슴을 찔렀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을 때 비아냥거리지 말고 제대로 진지하게 들었으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지 않았을까? 편집장이 뭐라고 하던 그냥 나왔다면, 그 덕분에 내 앞에서 다른 사람이 낚아챘던 택시를 탈 수 있었다면 살아있는 아버지를 볼 수 있었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장례는 병원 옆에 있는 장례식장에서 신속하게 진행됐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그동안 연락도 없던 친척들이 찾아왔다. 이름은 물론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엄마가 전화한 게 아닐까 싶었다. 우리 집이 정말 어려울 때는 단 한 푼의 도움도 주지 않았던 사람들이, 죽었다니까 쏜살같이 달려와 애도를 표하니 기분이 복잡했다.


개중에는 부모님과 함께 온 내 또래의 친척도 있었다. 5, 6살 때는 자주 만났던 애들이었지만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만나지 못했더니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보다 더 서먹했다. 우리는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서로 할 일을 했다.


친척들은 아빠 얘기를 안주로 술을 마셨다. 고생만 하다가 안 좋게 갔다면서 세상에 남은 엄마와 나를 걱정해줬다. 하지만 진실로 걱정했다면 새벽까지 고스톱을 치고, 술에 취해 싸우는 짓 따윈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과정이 끝나고 아빠의 시신은 화장되어 산 중턱에 있는 납골당에 안치됐다. 빠르게 떠나는 친척들의 자동차를 보면서, 나는 내 몸속에 있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그게 내 몸의 색을 이루는 물질이었다면, 나는 지금 회색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민지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엄마가 나한테 걸어오고 있었다.


“왜?”

“이번에 부조금하고, 네 아버지 생명보험금까지 합하면 좀 되니까. 집에 내려와서 같이 가게 하지 않을래? 식당이나 편의점 같은 거.”


나는 기가 막혀서 입을 반쯤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떻게 아빠가 돌아간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저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돈이 중요한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란 게 있는 법인데…….


나는 엄마의 얼굴이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됐어.”

“됐다니 뭐가?”

“그 돈 어떻게 쓰든 상관 안 할 테니까 엄마가 써. 대신, 앞으로 나한테 돈 보내달라는 전화하지 마. 문자도 보내지 마.”

엄마의 대답은 늦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래. 고맙구나.”


대답을 들은 나는 인사도 하지 않고 납골당을 내려갔다. 사실 대답을 하건 안 하건 상관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이것이 엄마와의 마지막 만남이라고 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엄마가 가게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그런 마음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고맙다라니.” 도대체 뭐가 고맙단 말인가. 돈 때문에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면 조금은 화를 내야 정상적인 인간이 아닌가?


“그런데 고맙다라니.” 돈 때문에 연락하지 않아도, 그 보다 훨씬 많은 돈을 모두 가지게 되었으니 고맙다고 한 걸까?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냐고!”


큰소리를 질렀더니 목 안쪽이 아팠다. 나는 입안에 침을 모아 삼켜 목을 달랬다. 건조한 가을 공기 때문인지 숨을 쉴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다.


산을 모두 내려오고 나서야 택시를 부르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나는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빈도로를 보며 한숨과 함께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납골당에서 미리 불렀으면 산에서 내려옴과 동시에 탈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언젠가 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콜택시 광고지를 찾으며 장례식 동안 꺼놓았던 휴대폰에 전원을 넣었다. 통신사 로고 음이 먼저 들려 익숙한 메인 화면을 기다렸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메인 화면이 뜨자마자 수십 통의 부재중 통화 메시지가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모두 진아 선배에게서 온 전화였다.


“아, 그러고 보니…….”


당일 무단 조퇴에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무단결근이었으니 뭐라 한 소리 들어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일단 콜택시 회사에 전화해서 택시를 먼저 불렀다. 납골당이 외진 곳에 있어서 도착하기까지 20분 정도 걸린다는 대답을 들었다. 나는 알았다고 말한 다음 휴대폰 화면을 빤히 바라봤다. 남은 20분 동안 멀뚱히 서 있을 생각은 없었다.


-민지니?


분명 일하는 중일 텐데도 전화를 걸기가 무섭게 진아 선배의 목소리가 휴대폰 저편에서 튀어나왔다.


“네. 전화 많이 하셨던데요?”

-당연하지! 조퇴한 애가 다음날 출근도 안 하니까 얼마나 걱정한 지 알아? 전화기는 꺼져있고, 집에도 찾아갔는데 아무도 없고! 난 무슨 납치된 줄 알았다니까?

“헛걸음하셨네요. 저 일이 있어서 지방에 내려와 있거든요.”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성실하던 애가 무단결근이니?


복도로 나온 건지 진아 선배의 목소리가 조금 울렸다.


“아하하……. 성실하다고 평가해주시니 기분 좋네요.”


나는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말했다.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정말?

“네. 그래서 장례를 치르느라 계속 여기 있었어요. 휴대폰을 꺼둔 건, 그냥 이해 좀 해주세요.”

-아니. 이해해. 이해하고말고.


나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물었다.


“그러고 보니 편집장이 뭐라 안 했어요?”

-편집장? 네 행동에 좀 충격을 받은 것 같긴 한데 별로 아무 말도 없었어. 나한테 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본 거 빼면. 그런데 나도 아는 게 없었잖아.

“네. 그랬죠. 미안해요.”

-아니야. 미안하긴.- 진아 선배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주는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쉬어. 편집장한테는 내가 말해놓을 테니까.


그 친절함에는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진아 선배에게 전화를 한 건 단순히 사무실의 동태를 살피고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선배. 제가 부탁 좀 해도 될까요?”

-부탁? 괜찮아. 해.


나는 숨을 골랐다.


“죄송한데요. 편집장에게 저 퇴사하겠다고 좀 전해주세요.”

-뭐?- 진아 선배가 입을 크게 벌리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퇴사라니? 뭐야. 편집장 때문이야? 물론 그 날 네가 좀 세게 나가긴 했지만 사정을 들으면 편집장도 이해할 거야. 그래도 편집장이 뭐라고 하면 내가 막아줄게. 응?

“아니요. 선배. 정말로 고맙긴 한데, 편집장 때문이 아니에요.”

-그럼 뭔데?


진아 선배의 목소리는 상당히 올라간 상태라서 그대로 놔두면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다. 나는 진아 선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저희 아버지 살아있을 적에 엄청나게 고생했거든요. 그런데 돌아가시니까 장례식 때 친척들 한 번 모였다 파하고 끝이에요. 그런 걸 보고 나니까 그냥…… 모든 게 덧없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야!- 갑자기 귀를 찌른 큰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너 나쁜 맘 먹으면 절대 안 된다!


진아 선배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는 대번에 알아차렸다. 머릿속으로 내가 한 말을 되돌려보니 확실히 그쪽으로 생각할 수 있을 법했다.


“걱정 마세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


다그치듯 묻는 진아 선배의 말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있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건 왠지 부끄러웠다. 듣는 사람이 진아 선배가 아니었다면 아마 끝까지 말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하고 싶었던 일에 도전해보게요.”

-하고 싶었던 일?

“네. 저 사실 그림 그리고 싶었거든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더 늦기 전에 해보게요.”


진아 선배의 대답은 늦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어떤 말을 듣게 될지 상상했다. 현실을 파악하라는 충고? 네 도전을 지지한다는 응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진아 선배의 대답 아래에 깔린 감정을 나는 읽을 수 없었다. 얼핏 듣기에는 포기처럼 느껴졌지만, 포기라고 단정해버리면 말끝에 붙어있는 감정의 부스러기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입을 열었다.


“그걸로 납득하는 거예요? 잡거나, 다시 생각해보라는 말은 없어요?”

-뭐, 너 가끔 이면지에 그림 그리기도 했고, 그림 관련 기사는 항상 다른 기사보다 더 많이 신경 썼잖아. 그거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지.

“제가 그랬어요?”

-너 빼고 사무실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걸. 왜 그런 애가 영문학과를 나왔는지만 몰랐지.

“아, 영문학과……. 그렇죠. 저 영문학과 출신이었죠.”


당연한 사실을 얘기한 것뿐인데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힘없는 웃음이었다. 짧은 웃음 뒤에는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아빠의 죽음이 대화에 올라온 뒤라서 그런지, 아니면 가끔씩 들려오는 풀벌레와 바람 소리를 제외하면 소리라 할 만한 것이 없는 장소여서 그런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침묵이었다.


나는 해야 할 말을 모두 했기에 입을 열지 않았고, 진아 선배는 아마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에 입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통화를 끊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지금 이 순간을 길게 가져가려는 욕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결국 통화를 끝낼 때가 왔다. 그 신호는 갑자기 다가와 머리카락을 날린 가을바람이었다.


“선배, 이만 끊을게요.”

-그래. 나중에 시간되면 전화하고. 알았지?

“네. 그럴게요.”


통화를 끊었다. 마지막에 전화한다고는 했지만 실제로 전화를 할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친했던 송아와도 벌써 몇 달째 통화하지 않았다. 아빠가 돌아갔다는 소식도 전하지 않았다. 서로 보지 않게 되면 멀어진다는 얘기는 사실이었다.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하던 산길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동차 소리였다. 길가에 서서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은색 택시가 나무 뒤에서 나타났다. 택시는 만들어진 지 오래되어 울퉁불퉁한 도로를 아무렇지도 않게 달려와 내 앞에 섰다.


건강한 갈색 피부를 가진 택시 기사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면서 말했다.


“예약하신 분 맞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택시 뒷자리에 앉았다.


“서울로 가주세요.”

“서울이요?” 백미러 본 택시 기사의 두 눈은 장거리 운행 뒤에 따라올 요금으로 웃고 있었다.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택시가 출발할 때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납골당으로 올라가는 길을 바라봤다. 창문 끄트머리에 서둘러 내려오고 있는 중년의 여자가 보이길 기대했지만 보이는 건 바람에 흔들리는 풀밖에 없었다.


“혹시 더 타야 할 사람 있어요?”


택시 기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가주세요.”


걸어서 내려왔다면 20분은 훨씬 더 걸렸을 거리를 택시는 순식간에 벗어났다. 산과 논밖에 보이지 않던 풍경에 컨테이너 상점, 주유소, 식당이 차례대로 들어왔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택시가 고속도로를 타고 난 뒤에는 삭막한 콘크리트 난간과 방음벽이 내 시야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손님, 라디오 좀 틀어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택시 기사는 적당한 크기로 라디오를 틀었다. 두 명의 진행자가 독자 투고를 재미있게 읽으면서 웃는 방송이었다. 평소 기분이었다면 그걸 들으며 피식 웃음이라도 지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소음에 불과했다.


나는 눈을 감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먼저 책상 맨 아래 서랍 구석에 조그마한 유리병을 꺼내기로 했다. 취업이 너무 안 되던 시절에 끝내 합격하지 못하면 먹으려고 비싼 돈을 주고 산 물건으로, 안에 들어있는 설탕 같은 흰 가루는 다름 아닌 청산가리였다. 청산가리를 몸에 지니고 다니던 기간에는 바로 죽을 수 있다는 현실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인지 조금의 후회 없이 면접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다행히 지금 다니는, 아니, 다니던 회사에 합격돼서 사용할 일 없이 서랍 속에 넣어뒀던 것이다.


청산가리가 든 유리병을 눈에 보이는 곳에 놔두고 작업을 시작하자. 여태까지 모아둔 전 재산을 모두 쏟아 부어 도전하자. 만약 그렇게 했는데도 실패한다면 청산가리를 먹어 버리자.


이것이 내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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